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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 산악회 己丑年 始山祭 後記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3. 12. 01:07

 

휴천 산악회 己丑年 始山祭 後記

                                                                                       南村 서 호원

 

 

3월8일은 휴천 산악회가 늘씬하게 解寃(해원)하는 역사적인 날인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휴천 산악회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아니 함양군을 통 털어도 기록이 아닌가 싶다. 그거 보태 주느라고 (농담)

필자도 유림산악회 소속인데 새벽잠 설치며 동대문으로 나갔다.

7시 정각에 버스에 오르니 휴천 산악회 임원진들이 버스3대를

번갈아 타면서 인원파악을 하 네!  무엇을 챙이었냐?  확인을 하 네 부산하다.

힘은 들어도 모두가 즐거운 비명이요 한껏 들떠 보였다.


07:30 - 버스가 동대문 앞에서 유턴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한남동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우리들의 이번 여행을 옥황상제님도 축하해 주시고 그 선물로 근래에 보기 드믄 화창한 날씨를

부조해 주신다.  고속도로에 올라선 버스도 막힘이 없이 룰 루 랄 라다.

김 종근 총무가 인사를 하고 회비를 걷고 아침이 배식 됐다.

아침은 호박죽 - 서울 촌놈들 먹어보기 어려운 별미다.

더욱이 어느 향우님이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한다, 설탕이나 조미료를 쓰지 않아 달지도 않고

담백하며 구수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휴천 향우회에 꼭 참여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어린 시절 휴천 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버스가 휴천 초등학교 앞 삼거리를 지날 때는 벌떡 일어나

대포에 있는 법화사 절을 올려다 보았다.. 옛 추억에 울컥  콧등이 시큰 해진다.

게비네로 해서 지리산 골짝을 들어갈 때는 차 안이 술렁인다.

모두가 어린 시절 추억이 울컥 울컥 되살아나서 일 것이다.

6,25사변이 터지고 나서 우리의 고향땅은 태극의 운수였다.

밤에는 붉은 공산당 천지이고 낮에는 푸른 국방군 천지였다.

공비들이 밤에 내려와 동서기/면장/경찰/지주들을 인민재판으로

죽이고 겁에 질린 우리들의 아버지 등에다  총 들이대고 군수물자를

지워서 지리산 골짜기로 끌고 갔다. 순박한 농사꾼 우리 아버지들

간이 콩알만 해져 가지고 죽을 고비 넘기고 밤새워 다녀오면

낮에는 국방군이 우리 아버지들을 빨갱이로 몰아 총을 들이대고

경찰서로 끌고 가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쇠가죽 채찍으로

없는 죄 불라하니 불면 빨갱이라고 총 맞아 죽고 안 불자니 매를 맞아 죽게 되어

죄 없는 우리아버지들 이래저래  많이도 죽었다.

천신만고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목숨 부지한 그 후손들이

오늘 선조들의 피맺힌 원한의 그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도 어찌 예외 일까? 전쟁이 끝났는데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자 경찰서 공비토벌실적 올리는데 미친 자들이 내 어머니를 잡아다가 남편 간곳을

대라하는 온갖 수모를 견디다 못해 어린 나를 데리고 이곳 대포 법화사 절에 공양주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법화사 스님들에게 염불로 말을 배웠고 불경으로 글을 배웠다. 

휴천 초등학교 입학하여 2학년 때 유림국민학교로 전학가고 4학년 때 서울로 갔다.

그때 함께 놀던 친구들이 그리워 찾아보고 싶어서 지금 휴천 산악회를 참석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어른들은 참혹했던 시절이겠지만 우리들은 마냥 철부지였다.

봄이면 삐삐를 뽑아 비단같이 보드라운 속살을 혀끝으로 더듬고

뒷산에서 칡뿌리 캐고 앞산 진달래 모두 다 내거다

여름 감꽃 따서 목걸이하고 쌔올 매미 울어대는 감나무에 오르고

누렇게 익은 가을 벼단 사이에 지천으로 튀는 메뚜기 잡고

추수한 논바닥에 구멍을 파면 시커먼 우렁이가 대굴대굴

겨울이면 초가집 처마 틈에 참새를 잡아다가 화롯불에 구워 먹었다

학교에서 우유가루 배급이라도 주는 날이면

끓여먹고 쪄서 먹고 온 동네  잔치 날이고

그 이튼 날은 온 동네 설사 하는 날이다

아! 옛날이여!

환갑나이 반백 되어 내 고향 찾아드니

어린 시절 배고파 울던 추억마저

아름답고 애달파서

입은 웃는데 눈은 촉촉하게 젖는구나.

불경기 어렵다 해도 오늘 하루는 錦衣還鄕(금의환향)이로다.

구구 절절 사연 많은 소나무산길을 지나고

팔뚝 굵은 대나무 숲이 호기 있게 늘어서고 변강쇠 장승이 고향 찾는 길손을

반기는 곳에 버스가 멈추어 섰다. 세동이다. 11:30 빨리 왔다.

창밖을 내다보니 길 아래 집 뒤 곁에 큰 솥단지 걸어 놓고 돼지를

삶는다. 새벽 5시부터 서둘러 온 탓에 시장기도 동하고 안주를 보니

술도 고프다. 그런데 아직 준비 중이니 등산을 하자한다.

모두 차에서 내려 등산을 했다 아니 등산이 아니라 콘크리트 신작로를

산책했다. 이 길이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필경 쏘악한 산골길이었다.

지금은 쏘악한 그 길을 걷고 싶은 아쉬움으로 불평을 하는 것이

꼰지가 나서 하는 행복한 지랄일까?

마적송이 있는 곳에 오니 저 아래로 모전마을이 내려다보이고

용이담이 유원지가 되어 있다. 저 모전에 내 고모님이 사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아버지 손잡고 이 산골짝을 다닌 기억이 난다.

 그 어린 추억을 따라 군대 첫 휴가 때 모전 고모 집을 왔을 때가

생각난다. 납작한 병에 든 양주 한 병을 사와서 고모님의 시아버지께

드렸더니 그 늙으신 사돈 어르신께서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 하시며 결국 그 독한 술 한 병을 그 자리에서

다 비우시고 마적 도사의 전설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실감나게

설명해 주셨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마적 송 아래 이 큰 바위에서

마적 도사가 신선과 바둑을 두는데 도사님의 말(馬)이

지금의 우동 화개장터에서 마적도사에게 필요한 생필품 장을 보아

가지고 수십 킬로 아래 가물가물하게 내려다보이는 저 용이담에 

말이 도착해 울면 마적 도사가 마술쇠자로 무지개다리를 놓아주면

이 높은데 까지 순식간에 말이 올라오는데

그날은 용이담에 사는 9마리의 용들이 서로 먼저 승천 하려고 싸우는 바람에 마적 도사가

 말이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여 말이 울다가

그냥 뛰어 올랐는데 이곳까지 오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 한다.

 

마적 도사가 화가 나서 돌 바둑판을 용을 향해 던졌는데 그 바둑판

무늬의 큰 바위들이 용이담 주위에 실제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마적도사가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꼽아 놓았는데 그곳에서 움이 나서

자랐다는 나무가 있는데 정말 가지가 거꾸로 나있으며 마적 도사가

무지개다리 마술을 부렸던 그 마술 자는 법화사에 보물로 간직 되어

있으며 필자는 법화사에 있을 때 귀한 손님이 오시면 내어 보이곤

했으므로 어릴 때부터 구경을 했고  만져도 보았다.

이렇게 증거물이 즐비하게 많은 것을 보면 마적도사가 정말 살기는

살았던가 보다.

등산에서 돌아와 엄숙한 시산제를 지냈다.

지리산 산신님 지방을 모시고 콧등이 시커멓게 그을린 돼지머리가

빙긋하게 웃는데 집전 관과 좌. 우집사가 입은 힌 두루마기와 망건이 인상적이었다.

예로부터 지리산 산신은 마고 할매라 하고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에 반대 했다고

귀양까지 간 산신이 아니던가?.

그래서 경상도에 있는 지리산을 전라도 지리산이라 한다.

초헌 아헌 종헌이 있은 후에 임원진과 휴천면의 유지와 이장님들과

응원 나온 타 지역 향우회 임원들이 정성껏 제를 올리고 맛 좋은

동동주와 그 자리에서 잡은 돼지고기와 산나물 동네서 만든 두부가

더욱 술맛을 당기게 하였다.


그 음복 자리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에 해박한 박 순욱 선배를 만났다.

그렇다 우리민족은 본래 9000년 역사를 갖고 있는 老 大國이요

세계 인류의 宗主國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신라의 망국통일 이후로

1000년 동안 중국의 속국이 되면서 역사가 왜곡이 되었고 일제 36년 동안 더욱 참혹하게 왜곡되었다

초대 문교부 장관 이 병도는 그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교과서를 만들었으니

아시아대륙을 웅위했던

환인천제 시절 2301년과

배달 환웅시대 1565년과

고조선 시대 2096년 역사가 통째로 사라지고

이 위대한 민족을 오직 곰 새끼로 만들고

960번 침략 받은 치욕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일제시대에 단제 신채호 선생과

근대에 와서는 임승국 교수/송호수 교수 같은 분들이 桓檀古記를 해석하여 

이 나라 역사를 바로 잡으려 했으나

아직도 바로잡히지 못한 통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음복의 자리가 파하고

모두 버스에 올라 아쉬운 마음으로 정든 고향을 떠났다.

휴천 면 사무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달리는 버스 안에서

술과 노래로 고향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어야 했다.


타향살이 하는 우리들은 언제나 진한 향수를 먹고 산다.

고향에 가면 길가에 핀 풀 꽃 한 송이도 서울의 화원에 있는

화려한 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치 우리들을 들뜨게 한다.

어디 그뿐이랴 산과 들 허물어져 가는 돌담까지도 애뜯 하고

주름 잡힌 고향의 부모님 모습들이 우리 가슴을 설래이게 하는 것은

어린 시절 코 묻은 추억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제 고향 떠난 사람들의 그 향수를 모아서 고향을 발전시키고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를 해야 할 것이라고 보며 그런 의미에서

오늘과 같은 행사는 더욱 활발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신 휴천 향우회 임원진과

객지에서 돌아온 저희들을 반갑게 맞아주시고 분에 넘치게 대접해주신

고향의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드리면서 후기 글을 마칩니다.

                              -- 南村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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