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옛땅은 아시아 대륙
(증거들)
(사)배달민족 진흥회 발표자료
★ 이씨조선 초의 동아시아(티벳이 언제 티벳고원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明이 中土를 빠져나간 다음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개성의 위치
★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 지도 (오른쪽 지도는 현재의 지도로 비교한 것임)
★ "皇輿全覽圖(1719)" 부분[자료 제공: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고려의 동녕부, 쌍성총관부, 8첩의 위치
★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귀면와(鬼面瓦)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도깨비상 내지 蚩尤像으로 통함)
임금 행차도
배달민족 대륙역사 편저자 翼在 송부웅 선생 발표내용
<우리 한(桓-韓)민족의 역대 도읍지 변천 경로>
에 대한 설명문
지금 귀하가 보시는 지도와 역사도표는
<한인개국 7만년 한웅개천 5906년 배달민족 대륙역사>책에서 발췌한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본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여기서는 간단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공부한 세계사로는 인류문명의 시작이 수천 년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고고학의 발달로 인류문명의 시작은 수 만년전으로 소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양에서 발달했다가 바다에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대륙문명은 3~4만여년 전으로 추정되는 등, 인도나 중동, 유럽, 동아시아 및 남북아메리카 등지에서 수만 년 전의 유적이나 벽화가 발견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난날 일본이 우리의 상고역사를 말살하려고, 수십 년에 걸쳐 수집한 20만권이 넘는 역사서를 인멸하는 가운데 남아진 상고역사서인 한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에 의하면, 인류문명의 발원지로 볼 수 있는 한국(桓國)의 건국이 7만여년 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2개의 작은 나라들로 구성된 한국(桓國)의 중심도읍지가 우루국(虞寠國)으로, 현 중국의 서북부 및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 키르키스탄,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북부와 접하고 있는
파미르 고원을 중심한 지역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도를 봐주십시오.
파미르고원, 이곳이 한인천제(桓仁天帝)께서 천산(天山)에서 득도하여 제자들이 800여명의
동남동녀와 더불어 백성의 추대로 인류최초로 나라를 세우고, 천제(天帝)의 자리에 나아갔던 곳이며, 이분이 안파견(安巴堅) 한인천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살기가 좋으면 소문이 나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오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의 도읍지인 우루국(虞婁國)이 어진 한인천제(桓仁天帝)들의
다스림으로 살기가 좋다고 소문이 나자, 수많은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6천여 년 전 한국의 도읍지인 우루국(虞婁國)은 인구는 많아지고,
물 부족과 더불어 먹고사는 산업이 어려워지자, 7세대 지위리 한인천제는 오가(五加)의 책임자와
국인(國人)들과 의논 끝에 인구의 분산정책으로 분국(分國)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인천제께서 삼위(三危), 태백(太白), 금악(金岳)을 오가(五加)로부터 추천받았으나,
그 중에 태백(太白)이 가장 홍익인간(弘益人間)하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동쪽의 중원에 있는 태백산 쪽으로 분국하기로 하였으며, 분국의 책임자로는 현 국가의 총리실과
같은 서자부(庶子部)의 대인(大人)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한웅(桓雄)이 추대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인천제는 한웅(桓雄)에게 <군이 수고스럽지만 이 일을 맡아 달라.> 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대인 한웅은 새로운 땅으로 갈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 수가 3000무리로, 한 무리가 4~5명으로 계산할 때, 약 만 이천에서 일만 오천 명 정도가 태백산을 향하여 최초의 민족이동을 시작하였으며,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5906년 전인 것입니다.
대인 한웅께서 3000무리와 더불어 현 파미르 고원지역의 우루국을 떠나 목적지인 태백산에
가까워 졌을 때, 무리 중에 반고(盤古)라는 부장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같이 삼위산(三危山) 쪽으로 갈 것을 원하자, 한웅께서는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반고는 삼위산 납림이라는 곳으로 가서 현지의 주민들을 교화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으며, 이분이 오늘날 사마천 사기(史記)에 의하여 지나 한족(漢族)의 시조로
받드는 반고(盤古)인 것이다. 대인(大人) 한웅(桓雄)께서는 반고를 보내고,
나머지 무리들과 더불어 현 중국의 서안(西安)에 있는 태백산에 도착하자 태백산에 신단(神壇)을
수립(樹立)하여, 천제(天祭)를 먼저 올리고, 도읍지를 신시(神市)라 하고, 나라이름을 배달국(倍達國)이라고 하였으며, 동아시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나오는 한인(桓因)께서 한웅(桓雄)을 내려 보냈다는
이야기의 실제 내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한인(桓因)은 결코 하늘에 있었던 하느님이 아니며,
한웅(桓雄)도 한인(桓因)의 서자(庶子)가 아닌 서자부(庶子部)의 대인이었으며, 하늘에서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땅으로 오신 분도 아닌 것입니다. 또한 우리민족을 배달민족이라 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배달민족이란 밝은 민족 즉, 문명한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배달민족의 뿌리는 한국(桓國)에서 시작한 한민족(桓民族)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역사는
한국의 한인천제(桓仁天帝)로부터 시작하였으며, 7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언어가 알타이 계(系)에 속하는 이유도, 바로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인 것입니다.
한웅(桓雄)께서 나라를 세워 한웅천왕의 자리에 나갔으며, 현지 주민인 웅족(熊踿)과 호족(虎族)을 교화하였고, 그 후 배달국은 18대 1565년 간 계속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서안 부근과 사천성 쪽에는 한웅천왕의 유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시 배달국은 14대 자오지 한웅천왕(별명 치우천왕)때 도읍지를 신시(神市)에서 산동반도 쪽인
청구(靑邱)로 옮겼으며, 18대 거불단 한웅천왕께서는 제후국인 웅심국(熊心國)의
비왕(裨王=비왕)으로 갔던 아들(단군)이 나라를 잘 다스려 웅심국의 왕검으로 추대되자,
배달국 한웅천왕의 자리도 아들 단군왕검에게 넘겨주었다.
그 때 단군왕검의 나이38세였다. 단군왕검께서는 한웅천왕의 조서를 받들고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고, 현 하르빈인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고조선(古朝鮮)의 국조(國祖)이신 단군왕검(檀君王儉) 황제이신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4342년 전인 것입니다.
단군왕검 황제께서는 신시 배달국의 문화를 계승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하며, 재세이화(在世理化)하는 정치를 베풀어 동방 최고의 문명제국을 세우신 것이다.
단군왕검 황제께서는 삼신일체이신 하느님을 섬김으로 조선의 강역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현 만주지방을 중심하여 진한(辰韓)이라 하여,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고, 산동 반도와
서안(西安)에 이르는 중원대륙은 번한(番韓)이라 하여 번한 왕을 세워 다스렸으며,
한반도와 일본은 마한(馬韓)이라 하여 마한 왕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을 삼한조선이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그 후 44대 단군 구물황제 때 나라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고,
도읍지를 장당경 으로 옮기어, 47대 고열가 단군황제가 황제 직을 그만두고 산속으로 들어간 뒤,
6년 간 오가(五加)들의 공화(共和)정치 끝에, 해모수가 일으킨 북부여(北夫餘)에 흡수 통합될 때까지, 47대 209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후 우리조상들은 한국의 시조 한인천제와 배달국의 시조
한웅천왕과 조선국의 시조 단군왕검을 삼성(三聖), 또는 삼선(三仙)으로 모시고,
우리의 조상으로 제사를 지내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조상들은 중원대륙을 다스렸던 민족으로서, 세계에서 최초로 문화와 문명을 일으킨 민족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배달민족 대륙역사]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울에 도읍지를 두고, 강역(疆域)을 한반도로 한 것은 근세의 일로서,
왕건의 고려 성립이후에 기인된 것입니다. 고조선에서 중앙정부와 같은 진조선이 47대 2096년 만에 북부여에 흡수되자, 마한과 번한 및 제후국들이 저마다 조선의 회복을 꿈꾸며 독립적인 체제로
나가면서 다국시대(多國時代)를 열어가게 되었다. 그 가운데 오늘날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홍익인간 하는 정신과 재세이화의 뜻을 계승한 민족으로서 한인천제와 한웅천왕과 단군왕검 황제를 조상으로 모시는 그 족보와 역사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민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손민족 가운데 장손민족이라 하고, 우리민족의 미래가 우연이 아닌 필연적으로
옛 조상의 영광을 회복하여 세계적인 문명국을 이룩할 것이라고 [배달민족 대륙역사] 는 결론짓고 있습니다.
본 [배달민족 대륙역사] 책을 보시면, 중국의 동북공정 극복과 우리민족의 진로를 알 수 있습니다.
개천 5906(단기 4342)년. 서기 2009년 5월 8일 편저자 익재 송부웅 드림
<한인개국 7만년. 한웅개천 5906년 배달민족 대륙역사>와 다른 상고역사 책과의 차이점
선입견이란 대단히 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일본(日本)의 침략과 강점기간을 벗어난 후,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이 우리를 영원히 지배하기 위하여, 우리상고사를 말살하거나 왜곡하여 만든
소위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의 역사를 우리의 바른 민족역사라고 가르치고 배워 왔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역사가 그토록 일본이 왜곡하고 조작한
반도식민사관의 역사인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반도식민사관(半島植民史觀)에 의하여, 우리민족의 역사는 2000여 년에 불과한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시작되었고, 고조선(古朝鮮)을 비롯한 그 이전의 역사는 신화적(神話的)으로 각인되어, 중원대륙에서 시작한 한인천제(桓仁天帝)의 한국(桓國), 한웅천왕(桓雄天王)의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조선국 (朝鮮國), 해모수(解慕漱)의
북부여국(北夫餘國)의 역사는 존재여부도 모르고,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한웅과 곰이 변한 웅녀(熊女)사이에 태어난 단군의 자손으로,
백두산을 근거로한 천손(天孫)이라는 선입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일본은 소위 그들이 조작한 반도식민사관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의 목적에 걸 맞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만 남겨놓고, 다른 역사서는 일본의 앞잡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1922년부터 수십 년 수집하여, 20만 권이 넘는 상고사 자료(資料)를
모두 인멸하여 버렸다.
상고역사 사료(史料)면에서 우리조상들이 역사서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두 권만 써놓았겠는가를 생각하면, 이 문제의 사실여부는 자명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도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의 제자들로 구성된 강단사학자들은 우리민족의 상고사(上古史) 자료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밖에 없으며, 일본의 우리민족 상고사 인멸공작에서 숨겨졌다가 나타난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하여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 여러 고기(古記)는 모두 실증이나
고증이 안 된 것이라고 하면서 인정을 하지 않고, 나아가 위서(僞書)라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드디어 강단사학자들은 오늘에 이르러 국사과목을 선택으로 바꾸게 하고, 국가고시나 대학입시에서 국사과목을 없애는데 공을 세웠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우리가 우리를 비하하고,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찾지 못하여 버리고 있는데,
이웃 일본이 저들의 침략역사를 미화하고, 중국이 우리의 대륙역사를 도둑질하려는
동북공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본인은 이러한 잘못되었거나 숨겨진 사실을 널리 알리고, 그동안 자신들의 입지(立地)만을
생각하고, 재야민족사학자들의 주장을 묵살한 그간의 강단사학자들의 문제도 폭로하고,
우리민족의 상고역사를 바르게 밝히고, 유구한 역사 민족의 국가공용연호를 개천(開天)이나
단기(檀紀)로 복원하기 원하여, 제호를 [한인개국 7만년. 한웅개천 5906년 배달민족 대륙역사] 하여 본서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한단고기(桓檀古記)가 세상에 빛을 본 후에 우리상고사에 대하여 많은 저서가 출간되었다.
그러나 본문해석에 견해의 차이가 많았음을 감안할 때, 본 저자는 민속고고학(民俗考古學)까지를
참고하여 고증하였으며, 가장 합리적이고, 실증적으로 해석하고 정리하였음을 자부한다.
그러나 본서를 처음 읽는 분들은 한단고기를 중심하고 번역 출간된 다른 역사책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모를 것 같아, 본서의 내용 중에서 기존의 역사해석과 다른 몇 가지 중요한 점만을
밝혀드림으로 본서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하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간에 많은 학자들이 번역 출간한 내용 중에,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삼성기전(三聖記傳) 상(上)의 기록에 나오는 사백력지천(斯白力之天)을 시베리아의 하늘로 잘못 번역한 것을 비롯하여,
한인천제(桓仁天帝)를 하느님으로, 동남동녀 800명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신화적으로 풀이하고,
한국(桓國)의 존속연대를 총 63182년이 아닌 3301년으로 보고,
그리하여 우리역사를 만 년 정도로 만 본 점이 다르며, 한웅천왕(桓雄天王)이 태백산에 도착한 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풀이하고, [신단(神壇)을 수립하고 그 아래에]를, [신단수(神檀樹)나무
아래]라고 해석한 점, 한웅천왕(桓雄天王)이 웅족 과 호족을 교화하는 100일 기간과
기(忌) 3.7일 중, 기(忌) 3.7일의 해석을 21일로 풀이하여 앞의 100일과 상치되는 해석을 하여 왔으나, 기삼(忌三)은 세 가지의 금기사항을 뜻한 것이며, 7일은 7회 제신력(諸神曆)에 의하여
7일 주기로 제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나타낸 것을 뜻한다는 해석의 차이점이다.
웅족(熊族)의 여인들이 한웅천왕께 아이를 낳게 해 달라는 뜻과 한웅천왕이 변화하여 웅녀와
결혼했다는 내용의 해석이 다르고, 우리민족의 전통 혼례식이 시작된 연유와 유래를 밝힌 점이다.
한웅을 따라 나선 3,000무리에 대한 해석, 천부인(天符印) 세 개에 대한 해석, 한웅천왕이 개천(開天)하고 도읍한 태백산(太白山)의 위치, 한웅이 3,000무리를 거느리고 출발한 지점을 들 수 있다.
중국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여 반고(瀊固) 개천(開天)을 주장하는데, 그 반고와 한웅천왕과의 관계, 배달국의 18대 거불단 한웅천왕과 단군왕검과의 관계, 단군이 14세 때 웅씨국(熊氏國-檀國)의 비왕(裨王)이 된 이유, 단군왕검의 이름이 본명인가, 직함인가의 문제점, 단군왕검이 도읍한 아사달과
현 하르빈과의 관계, 고조선의 삼한과 그 강역(疆域), 고조선이 진(秦)나라 황제 영정(瀛政)에게
망했다고 한 잘못된 풀이의 재해석, 북부여를 일으킨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왔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풀이한 점, 고구려의 시조로 알고 있는 고주몽과 해모수의 관계,
고구려의 존속기간이 700년인가? 900년인가? 를 정리하고 있다.
삼성(三聖)과 삼신(三神)에 대한 구별과 해석의 문제점으로 상고사를 신화적(神話的)으로 해석하여 하느님관 과 역사관을 수립하지 못하는 점, 개천(開天)과 홍익인간(弘益人間)하는 뜻과 유래,
소도의 뜻과 유래 등, 중요한 쟁점들을 풀어놓았다.
이러한 것들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오늘날 우리문화의 중심에 한웅천왕의 신시(神市) 배달국의
문화가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것이며, 우리가 왜 천손(天孫)이며, 또 천손 가운데 왜 장손(長孫)인가? 우리가 왜 배달민족 한웅천왕의 자손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우리민족의 역사인 고구려의 역사를 도둑질하려고, 동북공정이라는 정치적 책략을
쓰고 있으나, 졸부의 객기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미래를 개척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미국은 주 7시간의 역사시간을 가지고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를 돌아보고 교훈을 찾고, 반성도 해야 한다.
모쪼록 보다 잘 살고, 꿈을 이루는 민족이 되려면 과거를 교훈 삼아야 하겠기에,
우리에게 역사는 내일의 비전이라고 본다. 왕대밭에서 왕대가 난다고 하였다.
그러한 차원에서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우리민족 상고사에 관심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한웅개천 5906(단기 4342년. 서기 2009년 5월7일
개천 5906(단기 4342)년. 서기 2009년 5월 8일
배달민족 대륙역사 편저자 翼在 송부웅 드림
악성 위장병 고치기 클릭->http://cafe.daum.net/skachstj 010-5775 5091 |
'놀라운 공부 > 우리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민족이라면 꼭 알아야 할 '홍산문화,요하문명' (0) | 2009.11.10 |
---|---|
한민족 국통맥을 바로 잡는 『단군세기』, 『북부여기』 출간! (0) | 2009.09.18 |
환국으로부터 뻗어나간 인류4대문명의 자취 (0) | 2009.08.19 |
[스크랩] 국통맥 (0) | 2009.08.10 |
한국고대사 최고비밀 - 47대 단군 조선시대 (0) | 2009.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