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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深淵)이다.
물이 맑으면 깊어도 바닥이 보이지만, 너무 깊으면 물이 아무리 맑아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법이다.
호칭부터 정리하자.
사람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백 살 하고도 두 살. 범인이 생각하기 어려운 연세이시니 할아버지라 해도 증조부, 고조부 뻘이시다. 그러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졸자(拙者)의 느낌은 다르다.
가까이서 꽤 대화를 나누어본 감으로는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아니다. 강기(剛氣)와 포부를 아직도 간직하고 계시다. 사람을 호령할 기개가 여전히 살아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시고, 스스로 ‘기분파’라고 하실 정도로 감정도 상당히 분방하시다. 이런 분을 어떻게 할아버지라고 하겠는가! 당신의 생각도 그러실 것으로 짐작하지만, 졸자는 그 강기(剛氣) 앞에서 감히 할아버지라고 보호성 존칭을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저 ‘선생님’, 무릎 꿇고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고 무난할 것이다.
감사의 말씀을 먼저 올린다. 먼저 하늘에 감사드리고, 다음으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민중의술의 명의를 많이 찾아다녔지만, 정말로 그 표본 중의 표본, 대표자를 만났다. 우리 민중의술의 표상을 너무나도 그대로 지니신 분이다.
자생적인 것,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 속에서 저절로 터득된 것이 그 하나이다. 선생님은 서당을 몇 달 다닌 것 외에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않으시고도 독보적인 의술의 경지를 여셨으니 여기에 꼭 맞다. 지식으로 따지고 까부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통찰하여 단숨에 터득된 것이 그 둘이다. 그 지혜는 선천적인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면 반드시 정신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멀리 있지 않고, 생활 속에 있으며 간명한 것이 그 셋이다. 서양식 분석학으로 따지면야 복잡해질는지 몰라도 현상적으로 선생님이 펴시는 의술은 진단에서 처방까지 너무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탕약으로만 병을 고치시는데, 그 약 또한 먹기가 일반 한약과 달리 너무 자연스럽고 부담이 없다.
오로지 생명을 위한 것이고 돈을 위한 것이 아님이 그 넷이다. 약재가 들 어가고, 그것도 비교적 좋은 약재만 쓰시기 때문에(좋은 약재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신다) 기본적인 원가가 소요되고, 따라서 최소한의 돈을 받지 않을 수 없지만, 어려운 사람, 어린이, 노약자 등에게는 무료로 많이 해주시고, 치료의 효과가 확실한 데 비하면 그 약값은 전혀 비싼 것이 아니다.
백 두 살이 되도록 소수의 아는 사람만 알고 있던 선생님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정말로 하늘만 아는 인연의 기묘함이라고 해야 할 것 같 다. 병을 너무 잘고치다 보니 한의사협회에서 고발을 하게 되었고, 법정에 서게 된 것이 바로 그 인연의 출발이다. 졸자와의 인연도 그로 인함이고, 그 후에 전개된 선생님의 생명의술 살리기 운동과 단체의 결성, 그리하여 마침내 매스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도 그러하다.
한의사들은 선생님의 의술을 매장하려고 손을 댄 일인데, 그것이 오히려 천하의 신의(神醫)를 세상에 드러내고 그 의술을 살리면서 이 땅의 민중의술을 세계만방에 펼칠 기회로 전개되었으니, 인연의 기묘함을 하늘이 아니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 출발과 경위를 몇 가지 치료사례와 더불어 간략히 적는다.
**사에 계신 ** 스님. 20대부터 병을 앓았다. 17년간 여러 가지로 노력했으나 점점 안 좋아져갔다. 소화불량, 변비에다 피부는 습진 같은 것이있어 몇 년간 흰 장갑을 끼고 살았다. 황달, 흑달로 악화되면서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다. 맥도 없고 의욕도 없어 하루종일 누워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심신이 분리되는 느낌이 왔다. 대전에 있는 노인 한의사에게서 암으로 진단받았다. 어머니가 위암으로 48세 때에 전주 우석대학병원에서 돌아가신 터였다.
약을 지어 인천 **사에 갔더니 어느 스님이 ‘서울에 용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하였다. 한의사가 지어준 약은 팽개치고 그 길로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뵙고 할아버지가 지어주는 약을 먹었다. 지금부터 15년여 전의 일이다. 3개월을 먹고 나니 할아버지가 “됐어” 하였다. 차츰차츰 몸이 좋아졌다. 그 뒤로는 계절이 바뀌거나 할 때만 할아버지에게 몸을 점검받고 약을 지어 먹었다. 할아버지는 **스님의 집안 내력으로 위가 특수구조로 되어 있어 병이 온 것인데, 다른 사람은 못 고친다고 하신다.
군산남중 한문교사 문선생은 갑상선암(임파선암)을 15년 정도 앓았다. 마침내 병원에서는 한 달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오빠인 **스님을 통하여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완치되었다.
문선생 주변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문선생도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보면 할아버지를 찾아가보라고 알려주었다. 환자들이 서울로 몰려가기 시작하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환자들의 불편을 걱정한 할아버지께서 한 달에 한 번씩 군산으로 내려와서 치료를 해주게 되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오시기로 한 전날 저녁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기다렸다. 군산뿐만 아니라 전주, 익산, 광주, 순천, 여수, 목포, 대구, 서울 환자까지 해서 5백 명 내지 6백 명이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그 많은 환자들을 5박6일 동안에 다 봐주셨다. 하루에 100여명을 보신 셈이다. 100살 넘은 나이에,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맥활법으로 1인당 2~3분이면 진단과 처방이 다 끝나므로 가능한 이야기다.
사람으로 하여금 병고에서 벗어나도록 치료의 인연을 맺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좋은 일도 그 일에 너무 부대끼면 피곤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선생과 그 가족들은 그 인연을 오로지 ‘복을 짓는다’는 애틋한 정성으로 키워내었다.
군산과 전북의 한의사협회에서 고발을 했다. 2006년 6월의 일이다. 무면허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이다. 많은 돈을 받았다고 하여 부정의료업자로 몰려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죄가 되었다. 문선생과 동생도 함께 입건되었다. 경찰의 조사를 거쳐 9월에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문선생과 남동생은 구속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고령이라 구속을 면했다.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의 치료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인연은 기이하여 그 깊이를 헤아리기가 심히 어려운 법. 이 일이 앞으로 어떤 일을 연쇄적으로 몰고 올 것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치료받은 사람들과 치료를 받던 환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미 경찰에서 조사하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는 환자들의 아우성 때문에 여관에서 진료를 해 줄 수밖에 없었던 터였다. 환자들의 말에 의하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여관으로 돌아오시면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한탄하셨다고 한다.
“이 죽어가는 환자들은 어떻게 하라고 ...”
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해도 고치지 못하고 고생하던 병을 할아버지가 지어 준 약을 먹고 고쳤거나 고치고 있는데, 이런 명의를 왜 처벌하느냐, 선처해 달라는 등의 탄원서가 법원에 쇄도했다. 약이 중단된 환자들은 더 아우성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1심 재판이 끝나고 문선생은 항소를 포기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당한 수모의 고통과 그로 인해서 재발한 후두암이 그녀의 싸울 용기를 접어버린 것이다. 집행유예가 확정되면서 교직에서도 파면되었다. 나중에 재판을 받고 역시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병과 받은 할아버지는 항소를 하였다.
분노한 환자들이 마침내 단체를 구성했다. 「
신문도 관심을 표하며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방송도 나섰다.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민중의술을 애써 외면하며,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 백성의 생명을 옥죄는 의료제도에 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던 언론 이 움직이는 역사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병들이 나았길래 이러는 것일까?
탄원서에 적혀 있는 치료사례들 중 몇 가지를 그 요지만 옮겨본다(선생님이 평생 치료해온 사례는 너무 방대하여 별도로 책으로 편찬되어야 할 일이고, 여기에서는 그 편린이나마 보여주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① 본인은 2003년 여름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3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 퇴원하였으나 의사 선생님 처방이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은 혈전용해제, 혈관확장제 등, 정확한 이름을 모르나 매일 3번씩 복용을 해야 한다고 하여 약 2개월간 복용을 했었으나 너무 많은 약으로 인해 위까지 아프고 식욕이 떨어져 삶의 의욕을 잃어갈 때
② 본인은 고등학교 국어교사입니다. 아토피 피부병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피부과를 다니기 시작하여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다 다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약을 4개월가량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제 아들도 그 약을 먹고 아토피가 없어졌습니다. 제 아들은 지난겨울 감기에 걸린 후 비염이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무료로 석 달 동안 한약을 지어주시어 완치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어머니의 병(오줌소태, 소화불량, 중풍)까지도 다 낫게 해 주셔서 저희 집안에서는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아토피만 나은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제 몸에서 좋지 않았던 간, 장염, 위염 등 모든 잡다한 것들이 다 나을 수 있었습니다. 한약을 먹으면 위가 안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실제 다른 한의사의 한약을 먹을 때에는 위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달랐습니다. 몸 전체를 건강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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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저는 약사입니다. 1990년대에 충청북도 여약사회장을 맡은 바 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선방에서 3년간 입선하였는데, 남편의 간병생활과 사별의 충격으로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위염과 불면증으로 3년간 체중이 10kg 감소하여 40kg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주대병원에서 종합 진단해보 니 위염이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하였고 특별한 처방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할아버지를 알게 되어 진맥을 받고 약을 썼습니다. 할아버님은 마치 신선과 같은 비범한 모습이셨으며, 특이한 진맥법으로 맥진하셨고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좋다 하시며 명년 4월쯤 46kg이 될거다 하시며 명년4월에 다시 오라 하셨습니다. 처음엔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으나 어느새 체중이 늘어 이듬해 4월에는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할아버님과의 약속도 잊은 채 지났습니다. 2005년 5월 자고 일어나니 양쪽 안구가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2,3일 기다려 보아도 낫지 않아 청주에 있는 안과에 가서 치료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고, 또한 위․소장․대장이 운동을 안하는 것처럼 소화도 안되고 먹먹하며 온 몸이 뻣뻣해지고, 표현하기 어렵게 몸의 상태가 몹시 불쾌하였습니다.
할아버님 생각이 떠올라 수소문 한 끝에 군산에 가끔 내려오심을 알게 되어 간청한 끝에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할아버님은 맥진하시고 중풍 초기 증세라 하시며 약을 지어 주셨는데 그 약을 먹자마자 혈액순환이 됨을 느꼈고 몸의 컨디션이 좋아졌습니다. 그제서야 생각해보니 가끔 씩 양쪽 손,팔에 쥐가 나고 마비감이 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실 MRI 촬영이나 컴퓨터 촬영으로도 초기에 중풍을 발견하기란 어렵거든요. 그리고 눈에는 웅담으로 특수제조하신 안약을 주셨는데 그 약을 넣은 후 완전히 충혈이 가시고 나았습니다.
**사에 다니는 신도중에 6년 전 자궁암으로 하혈을 많이 하며 실의에 빠져있었는데 할아버님 약을 먹고 완전히 나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④ 본인의 어머니(87세)는 신태인읍에서 생활하시다가
⑤ 태어난 지 10개월 된 아이가 홍역을 앓다 병원에 실려 간 건 2000년 12월. 심한 폐렴으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가까운 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시작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어 다른 지방병원을 전전하다가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긴 건 2001년 5월이었습니다. 그때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인공 호흡기를 달고 있었는데, 어렵게 병실생활을 하다가도 다시 나빠져 중환자실에 가기를 수차례 하였습니다. 2002년도에는 좀 좋아져서 집에 와 지내기도 했지만 감기만 걸려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폐 때문에 다시 중환자실로 가곤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으로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붉은 물결을 만들 때 우리는 중환자실에 연락 후 엠블런스를 타고 가며 차량 통제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의식이 없는 아이 목의 캐뉼라에 숨이 멈추지 않도록 끝없이 앰브를 주물렀다 폈다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다 2003년 말에 전주로 이사하여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인 대신 집에서 가정용 인공호흡기를 하고 지냈습니다. 2000년 이후로 산소발생기는 아이의 생명줄로 언제나 인공산소를 대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9월 언니 친구로부터
아이의 주된 증상은 끝없는 덩어리 큰 노란 가래였습니다. ‘일곱 살 15kg 아이의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가래가 끝도 없이 나올까?’ 싶을 만큼 아이는 가래가 많아 숨쉬기를 힘들어하며 자주 파래지고 산책을 나갈 때도 몇 발짝 걷고 나면 안아줘야 할 만큼 체력이 약했습니다.
할아버님이 조제해 주신 약은 작은 한 봉지를 하루 세 번 나누어 먹었는데 이틀 6번을 먹고 나자 “그 많던 가래가 다 어디로 갔을까?” 의구심이 생길 만큼 급격히 줄었습니다. 그러던 두 달을 복용한 어느 날, 산책을 가던 아이가 오빠와 함께 잰 걸음으로 앞서 가더니 껑충껑충 뛰는 것이 아닙니까?
“재미있다”하며 오빠와 달리기 경주를 하듯 달리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던지..... 그 후로 언제나 백짓장처럼 하얗기만 하던 얼굴에 분홍빛 혈색이 돌고 1km 떨어진 오빠학교에 천천히 걸어갔다 올만큼 회복이 되어 24시간 하고 있던 산소도 거의 하지 않을 만큼 건강해졌습니다. 얼마 전 외래 진료로 서울대학병원을 갔을 때 전에 중환자실에서 아이를 돌봐 주셨던 간호사님이 “애가 정말 그 아이 맞아요?”하시며 이리 저리 자꾸 만져보고 몇 번이나 확인하시던 모습에서 또 한번 아이의 회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할아버님이 진맥을 하시며 “애는 폐가 문제가 아니라 장에 있는 뭔가가 자꾸 폐를 건드리며 치는 거야, 심장과 위도 좋지 않고” 하셨을 때는 폐가 좋지 않을 뿐인데 왜 다른 장기가 문제라 하실까 의아 했지만 지어주신 약이 신기할 정도로 들어맞는 걸 보며 인체의 모든 면을 꿰뚫어 보시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⑥ 본인(고등학교 교감)의 장남(1982년생)은 2003년 4월경 조울증으로 인하여 전북대학병원, 김제 미래병원 등에서 6차례나 입원치료를 받고 투병 중 이었던바, 우연히 주위에서
⑦ 저(금강대학교 불교복지학부 교수)는 1991년 1월 척추인대 파열의 부상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사지마비 등 여러 증세가 악화되어 1992년 1월~2월 영동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에 입원치료를 받는 등 여러 병원과 의원등에서 갖가지 치료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점점 증세가 악화되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95년 우연히
최근에는 2005년 7월 종합건강진단을 받아본 결과 갑상선결절이 발견되어 2005년 9월 을지병원 내분비과에서 정밀진단을 받고 갑상선질환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바로
⑧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2003년 첫아이를 출산하고 두 달 무렵이 지났을 때 말초성 안면신경마비가 좌측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왼쪽의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소리가 마치 귀 옆에 확성기를 켜둔 것처럼 여과 없이 들리고, 입이 점점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보기에도 흉측할 정도로 틀어졌습니다. 2003년 12월 초쯤 아이와 친정이 있는 전주로 내려가서 원광한방병원에 다니고 침과, 한약 물리치료 등 치료를 꾸준히 받았으나 증세는 그리 나아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찬바람을 쐬거나 몸이 안좋을 때면 다시 안면마비의 증후군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개학이 임박하여 인천의 학익동에 위치 하고 있는 한의원에서 침치료를 받던 중 둘째아이가 2004년 4월에 생겨서 그나마 받던 치료마저 중단한 상태여서 심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입이 틀어져 주변의 친척분들이나 직장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시고 걱정하실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비관적인 생각만 하고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아이를 출산하고도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드러눕거나 특히 좌측 머리 부분이 심하게 아프고 조금만 감기증세가 있어도 안면신경이 점점 굳어지는 듯한 증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럴 때면 집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임시방편으로 그 순간만 모면하면 또 며칠은 별다른 증세 없이 생활하고 하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아픈 것을 남편이나 시댁에서도 걱정해 주셨지만 이유없이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아프다고 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점차 남편도 시댁어른도 꾀병이라고 생각하시기에 이를 정도로 원인 모르게 아픈 나날이 계속되었다.
2005년 8월 말경 시댁 식구들과 제주도에 여행을 가기 위해 둘째 아이를 맡겨놓은 상태여서 아이를 찾기 위해 친정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몸이 좋지 않아 친정어머니께서 잘 아시는 한의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진맥을 해보신 그때의 한의사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몸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며 한심하면서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일단 약을 한제 짓고 오기는 했으나 내 마음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셋째 언니로부터 군산할아버지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뵌 할아버지의 모습은 100세에 가까운 연세임에도 아이처럼 순수하고 해 맑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같이 갔던 남편과 친정어머니까지 아무 말 없이 할아버지의 진단을 바라보고 누구 하나 병의 증세를 말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순간 정말 기가 막히게도 허허 하고 호탕하게 웃으시며 “누가 봐도 꾀병이지” 하고 그러시는 거였습니다. 그 순간 나와 남편은 눈이 동시에 마주치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병은 정말 누가 봐도 꾀병이라고 할 정도로 멀쩡하다가 아프고 했으니 항상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남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둘째 아이를 낳고 더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그 자리에 데리고 가지 않은 아들아이의 증세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은 생후 한 달부터 아주 심하게 배앓이를 해서 병원을 자주 출입했었습니다. 그 때 병원에서는 아토피 때문이라고 했었습니다. 몸이 많이 흐트러지고 산후풍도 있다고 하시며 약을 지어 주셨습니다. 배가 아픈 아들아이에게는 따로 약을 지어 주시지 않고 내 약을 하루에 아주 작은 티스푼으로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달 동안 약을 먹는 동안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약을 먹는데도 침을 맞는 것처럼 안면신경마비가 왔던 왼쪽 얼굴이 찌릿찌릿하고 머리며 심지어 전에 삔 다리까지 아픈 부위가 다 나타나는 명현반응이 나타났습니다. 1년 1개월 동안 그 후로 6번 정도 더 약을 먹고 나니 이제 더 이상 약은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조금만 몸이 안 좋아도 나타났던 머리 아픈 증세며 안면이 경직되는 증세, 뒷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바위 돌을 짊어지고 있었던 듯한 뭉특한 증세까지 모두 사라졌습니다. 또 전혀 미동도 않던 왼쪽 눈썹이 거의 85% 정도까지 움직인다는 사실이.... 지금은 표정을 지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어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정말 많이 좋아지고 건강해진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또 더불어 병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셨던 문선생님에 대한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얼굴의 표정을 과잉되게 지으면 약간 표가 나긴하지만 차차로 더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 지금은 아이를 하나 더 낳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을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몇 년 동안 다닌 병원과 한의원까지 병을 낫기 위한 나의 노력과 시간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문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노력은 계속 될 것이고 그때마다 나의 실망감도 더 커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의 시이모부님은 중한 병을 앓고 계시는데, 할아버지의 약을 두 번째 드시고 다리에 힘도 생기고 드시는 것도 나아지셨을 정도로 속이 편안해 지셨다고 합니다. 매번 나에게 질부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십니다.
⑨ 저(중학교 교사)는
그러다가
지금도 100% 정상적이진 않지만 많이 호전되어서 쾌활하게 교단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특효약이 없다고 하는 고관절 치료에 할아버지의 약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생활하고 있어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 잊지 않고 있습니다.
⑩ 저는 1992년경 입안과 부인과 쪽이 헐어서 염증이 심하고 다리에는 붉은 반점이 나고 근육이 심한 염증이 나오며 걷기조차 불편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질병을 지방병원에서 병명도 모르고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어서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희망을 갖고 찾아가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결과 베체트병이란 희귀한 병명을 받았습니다. 더 무서운 경과도 올 수 있다 하셨어요. 심하면 관절로 들어갈 수 있고 눈으로 들어가면 실명도 할 수 있다 했어요. 실명한 환자도 보았어요. 무서웠어요.
별 차도는 없고 희망도 없이 여러 해를 치료하니 몸은 더욱 기력이 약해져서 주기적으로 영양제 주사제를 투약하면서 종교단체에 봉사를 하던 중 어느 스님을 만나 알게 된
지금은 8시간의 긴 설악산 등산과 철야기도를 하고서도 다음날 정상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⑪ 저(전북대학교 교수)는 2001년 7월 서울 현대중앙병원(현 현대아산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이후 6개월에 걸친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위암 수술이후 암 치료에 좋다고 하는 수많은 약과 보조식품 등을 복용하며 많은 돈도 엄청나게 들어 많이 들 때는 한 달에 1,500만원 정도의 지출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가까이 된 2004년 5월부터 이상 징후를 느껴 동년 5월 13일 검사결과 소장과 대장 연결부위의 장암과 복막암이 발견 되었습니다. 5월 15일 친구 *** 원장이 운영하는 전주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현대의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진통제를 주는 것 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고, 또 다른 친구 당시 전북의대학장 *** 교수는 인간이 할 일은 다 했으니 기도를 하자고 했었다는 말을 친구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당시 장폐색으로 엄청난 통증으로 고통을하였고 음식을 조금도 섭취할 수 없어서 아마도 며칠 이내에 세상을 떠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저 자신도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예감했습니다.
그런데 약초즙과
선생님은 1906년 병오년 생이다. 그러니 올해 102살 되신다.전북 임실군 지산면 안하리(雁下里)골뜸마을에서 태어나, 25세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생후 두 달째에 등창이 났다. 창자가 보일 정도로 구멍이 뚫렸다. 등 근육이 사방으로 뻗치니 전신이 아팠다. 백약이 무효였다. 심지어는 옛날 처방에나오는 인생(人生) 생골, 즉 살아있는 사람의 골을 등창에 넣으면 낫는다고 하여 구해보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갓 죽은 아이의 골을 돈 주고 사서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악화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 내일 죽겠다고 했다. 등창 때문에 누울 수가 없으니 어머니가 업고 키웠다. 그렇게 하기를 십 년을 했다. 십 년을 어머니의 등에서 자란 것이다. 십 년이 지나자 외조부가 연구를 해서 고쳐 주었다. 그때서야 어른들이 출생신고를 했다. 그래서 호적에는 1916년생으로,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이나 적에 올라있다.
외조부는 왕실의 전의(典醫)였다. 성함이 진(陳)응양이었는데, 대명의 이셨다고 한다.
이렇게 등창으로 인생을 시작하여 십 년을 고생한 덕택에 등창의 명의가 되었다고 스스로 말씀하신다. 10년, 20년 된 등창도 1주일이면 치료하신단다. 열아홉인가 스무 살 때, 30년간 등창을 앓아 온 여자를 고치는데, 평생 잠을 못 잔 여자가 약을 붙여주고 세 시간이 지나니 쿨쿨 잠을 잤다. “그런데 막상 등창의 명의가 되고 보니 등창 환자가 없어. 병원에서 다 죽여 버리니까.”
이것을 보면 의술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명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타고난 분이다. 하늘이 날 때부터 이분에게 의술을 가르친 것이다.
의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열아홉 살부터였다. 먹고살기 위해서 의술을 배웠노라’고 하신다. 열일곱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는 외할아버지의 의술을 외양만 보고 배웠다. 혹시 외조부께 전수받은 비방이 있지 않았느냐고 여쭈니,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스스로 연구해서 의술을 터득해가면서 동네 병을 다 고쳤다.
그 연구의 방법을 물었다. 책을 본 것은 전혀 없고, 우선 강남풍월로 듣기만 해도 공부가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여섯 살 때 ‘치질이 있었는데 집 없는 달팽이를 구워서 먹으니 낫더라’는 말을 누구에게서 듣고는 잊어버리지 않고 그 방법을 사용해보니 낫더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번만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공부를 했는데, 기억력이 특이하셨다고 한다. 개, 토끼, 쥐 등을 수백 마리 잡아가며 약을 연구했다. 대구, 대전 등의 약전 골목을 부자(附子)를 씹으면서 돌아다녔다.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신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어떻게 탁월한 의술을 터득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스승도 없이 독학으로 수승한 의술을 터득한 비결을 묻는 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물리를 터득하면 되는 거야. 물리는 사물을 잘 관찰하면 터득할 수 있지. 나는 말이야, 어릴 때부터 관찰을 잘했던 것 같아. 내가 여섯 살 때 일이지. 어느 날 똥 싼 옷을 어머니가 빨래하는 동안 담장 밑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고양이가 감나무 위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것이 보여. 가만히 보니 쥐구멍 입구를 노려보면서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런데 쥐란 놈이 머리를 구멍에서 살짝 내밀어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쏙 들어갔다가 조금 있으니 또 살짝 머리를 내밀고 살피는데, 부엌에서 문밖으로 부어버린 개숫물에 섞여 나온 밥알을 주워 먹으려고 눈치를 살피는 거야. 결국 쥐가 나오지않으니까 고양이란 놈이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쥐구멍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땅이 약간 솟은 곳을 앞발로 탁탁 치는 거야. 그쪽을 치면 쥐가 이쪽으로 도망오리라고 예상하고 유도하는 거지. 그때 고양이의 생태를 터득했지. 관찰을 해보니 그런 게 보이더라니까.”
이런 식으로 물리를 터득했다는 말씀이다.
“예를 들어 콩씨 있잖아. 그게 쌍을 짓지 않는가. 그 쌍으로 된 것에서 싹이 나고 대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지. 모든 ‘씨’는 다 똑같아. 두쪽이지. 정자와 난자도 마찬가지고. 쌍으로 되어 있지. 그 중 하나가 없으면 안돼. 이것이 바로 상대성 원리를 표현한 게야. 음양이 짝을 이루는 이치지.단순해.” 그래서 간에 독이 오면 그 상대독을 써야한단다.
“의사는 본래 이렇게 해서 형성된 거야. 면허는 무슨!”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터득한 선생님의 지혜는 끝이 없다.
“바다에도 의사가 있어. 이거 모르지? 바다의 의사가 뭐냐 하면 바로 거북이란 놈이야. 거북이가 왜 의사냐. 고래가 무엇에 부딪쳐서 어깻죽지를 다쳤어. 그런데 아무리 해도 낫질 않는 거야. 그것을 거북이가 고쳐주거든. 어떻게 고치느냐. 바다를 떠다니는 오래된 소나무 판자들이 있어. 뗏목 조각 같은 것이지. 거기에 붙어있는 송진을 거북이가 이빨로 뜯어서 고래 다친 곳에 발라주는 거야. 그러면 낫는 거야. 그래서 고래란 몸이 거북이는 잡아먹지 않아.”
“소가 말이야, 삼(대마)을 절대 먹지 않거든. 삼밭에 갔다 놔도 삼 잎은 한 잎도 뜯어먹지 않아. 그런데 소가 간이 안 좋아져서 병이 들면 쓸개에 단단한 것이 뭉쳐지는데, 이것이 우황이야. 이 우황이 생기면 소가 삼 잎부터 뜯어먹어. 그래서 스스로 고치는 거야. 그런데 요즈음 소보다 못한 것들이 의사라고 하고 있어. 참 내!”
지금 선생님의 의술은 필자가 보기에 거의 신의(神醫)의 수준이다.
암은 항암제 쓰고 수술한 사람도 고친다(물론 생사의 경계선을 이미 넘어버린 사람은 제외하고). 다만, 항암제의 독이 온 몸에 퍼진 사람은 약을 먹여봤자 항암독이 약을 잡아먹어 버려 치료가 안 될 수 있다고 한다.
중풍환자는 송장이 된 사람도 24시간 이내면 살릴 수 있다고 한다. 발병 6개월 이내면 침 한방 쓰지 않고 약만으로 완치할 수 있단다. 선생님의 집 인근에 있는 병원에서 중증의 중풍환자 10여명을 선생님에게 보냈는데, 모두 고쳐주었단다.
통풍은 3일만 약 먹어도 차도가 난다고 한다. 당뇨, 백내장, 실명방지, 치통 등은 쉽다. 당뇨는 합병증이 눈과 발끝으로 먼저 오는데, 한쪽 눈이 썩고 다른 한쪽마저 썩기 시작하는 것도 고쳤다. 일제 때부터 고쳤는데, 하도 잘 고치니 왜놈들이 “너 아편 쓰지” 하면서 추궁했다고 한다. 백내장과 치통은 바로 고쳐버린단다.
살찌게 하고 살 빠지게 하는 것도 마음대로 한다.
불임도 잘 고친다. 18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던 어느 대갓집 며느리에게, “아, 한꺼번에 아들 둘 낳으면 되지 뭘 그래. 나이도 들었는데 한꺼번에 나아서 길러버리고 말지, 뭘 하나 낳고 또 낳고 하며 고생해? 걱정 마!” 하고는 약을 지어 주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덜컥 쌍둥이 아들을 낳아버렸다. 그 며느리가 이번 어버이날에 한복을 한 벌 지어왔다.
수술 시간을 받아 놓은 담석환자의 수술을 늦추고 약을 먹여 5,6시간만에 돌이 빠져나오게 해 버린다.
오래전에 이병도 서울대학교 총장의 외손자가 백혈병에 걸린 것을 서울대 학교병원 의사들이 보는 앞에서 고쳐 주었더니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환자들을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야단이었다. 결국 서울대 병원 의사들이 “이것 그대로 두면 서울대학교병원이 망한다”면서 반대하여 포기한 적이 있다고 하신다.
15,6년 전에 **병원에 재직하던 어느 목사가 그 병원에서 간암으로 죽는다고 판정받았는데 선생님이 살려 냈다.
업보로 온 병, 영적(靈的)인 병도 약으로 치료하신다. 영적인 병은 신경이 죽어 있는데, 그 신경을 고치면 된단다. 하늘이 내려준 병이라 하여 천질(天疾)이라고 불리는 일명 지랄병도 다 고쳐내셨다. 타고난 수명을 연장하는 것도 가능하단다. 약을 써서 체질을 두 번 세 번 바꾸어 주면 된단다.
선생님은 환자가 오면 문진을 전혀 하지 않는다. 물어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문진을 해? 못하게 되어 있어. 문진할 필요가 없어.”찰진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독특한 진단법을 쓰신다. 환자를 쳐다보고, 돌려 앉혀 놓고 손으로 등을 짚어 보신다. 심장과 위장을 만져보면 아신단다. 병이 왜 왔고,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그대로 두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다 알아버린다. 마음이 어떻고, 무슨 짓을 하다 왔는지도 안다. 도둑질했는지 강도질 했는지 다 안다. 병이 감기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까지도 안다. 심보, 성격, 버릇까지도 다 읽어 버린다.
그에 따라 약을 지어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아무 환자나 약을 지어주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직심(直心)으로 환자를 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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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년도 : 1906년
◎ 출생지 : 전북 임실군 지사면
◎ 생후 2개월째부터 등 뒤에 심한 등창을 앓음(그 당시에는 남자는 등 뒤의 등창, 여자는 뒷머리 목 부위의 종기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고 함)
◎ 이름난 한의사였던 외조부님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아 오던 중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외조부님이 비법(秘法)을 고안하여 마침내 등창을 완치하였음(지금도
◎ 그 때까지 생존을 확신할 수가 없어서 호적에 올리지도 못하고 있다가, 열살이 되어서 비로소 호적에 입적함(따라서 호적에는 실제 나이보다 십년이 늦어져서 출생연도가 1916년으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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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세에 부친께서 돌아가시고 그 해에 집에 화재가 나서 전소 하였다고 함
◎ 12세부터 17세까지 모친께서 일 나가시면 동생들(
◎ 18세부터 본격적인 도학(道學) 수련에 들어가 철저한 수행 끝에 21세에 도학의 이치를 밝게 터득함(지금도
◎ 일제 치하에서 해방 전까지는 전북 김제에서 광산업을 함
◎ 해방 후 2년부터 의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시술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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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혼자서 옳지 못한 생각을 하거나 둘이서 비밀스러운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향의 오방신중(五方神衆 : 다섯 방향에 있는 여러 신)들이 보고 알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항상 바른 생활을 해야함을 강조하심
* <장병두할아버님 약력>은 금강대학교 권탄준교수님께서 할아버님과 인터뷰 및 면담 형식을 거쳐 작성 해 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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