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 잔이 그리운 계절이다. 모처럼 친구들과 삼겹살을 놓고 기울이는 술 한잔은 세상 사는 즐거움을 조금은 더해 주긴 한다. 하지만 우리들의 ‘간'은 이때처럼 괴로운 때도 없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자리와 지방 많은 안주들 때문에, 쉬지 않고 풀가동을 해도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방간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다. 문제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도 지방간이 될 수 있다는 것.
지방간은 방치하면 간암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지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 식생활습관 개선, 그것이 시작이다.
술을 마셔도, 술을 안 마셔도 지방간 될 수 있다
회사원 김창호(43세·남) 씨는 작년 직장건강검진에서 지방간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초음파검사에서 김 씨의 간은 정상보다 훨씬 하얗고 부어 있었다. 당시 김 씨는 ‘살을 빼고 식습관을 바꾸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한 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최근 그는 유난히 피곤함을 많이 느끼고 이유 없이 살이 빠지는 것 같았다. 회사 점심시간에 틈을 내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지방간을 오래 방치해 간에 염증까지 심하게 진행된 상태”라며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지방간 환자가 늘고 있다. 과거 5%대였던 지방간 유병률(어떤 시점에 일정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그 지역 인구에 대한 병자 수의 비율)은 최근 30%까지 올라갔다. 그중에서도 의사들조차 병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비알코올성 지방간의 증가가 심각하다. 강북삼성병원 소화기내과 조용균 교수가 대한간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2007년 강북삼성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73만 명 중 비알코올성 지방간 환자는 검진자의 16%로 알코올성 지방간 환자(12.3%)보다 많았다.
지방간이란 전체 간 무게 중 5% 이상을 지방이 차지하고 있는 상태로 알코올성과 비알코올성으로 나뉜다. 알코올성 지방간은 과다한 음주로 생기며, 비알코올성 지방간은 술을 마시지 않거나 술을 조금(남성은 소주 1.6~1.7잔/일 이하, 여성은 소주 0.7~0.8잔/일 이하) 마시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최근 몇 년 사이 지방간 환자 수가 급격히 증가한 이유로 전문의들은 비만·당뇨병·고혈압 환자의 증가를 꼽는다. 특히 비알코올성 지방간은 당뇨병 환자의 33%, 고혈압 환자의 20.7%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용균 교수는 “비만이나 당뇨병, 고지혈증이 생기면 혈당을 낮추는 인슐린에 대한 체내의 저항성이 증가해 당이나 지방대사가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에너지 대사를 총괄하는 간에 지방이 쌓이게 된다.”고 말한다.
방치하다 간염·간경화, 그땐 이미 늦는다
지방간은 노력만 하면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지만 대부분 방치한다. 11월 대한간학회가 1,77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실제 지방간 질환자의 52%는 지방간으로 진단을 받고도 병원을 방문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김 씨처럼 간염으로 진행되지 않고서는 오른쪽 배가 뻐근하거나 식욕이 떨어지는 등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간을 방치하면 간경화 또는 간암으로 진행될 수 있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알코올성 지방간의 10~35%는 알코올성 간염으로 진행되며, 알코올성 간염의 8~20%는 간경화로 진행되고, 이 중 15%는 간암으로까지 악화된다. 비알코올성 지방간도 안심할 수 없다. 비알코올성 지방간 환자의 10%는 비알코올성 지방간염으로 진행되며, 이 중 30~40%는 간경화로 악화된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김도영 교수는 “지방간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일단 지방간이 간경화로 진행되면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정상 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재 지방간 치료에는 인슐린 저항성을 개선시키는 약제나 비타민 E·C와 같은 항산화제 등이 사용되고 있지만, 지방간 치료의 제1원칙은 생활습관 개선이다.
지방간, 생활습관만 개선해도 스스로 없앨 수 있다
지방간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방법을 영동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 김자경 교수와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양팀 김선정 과장의 도움말로 알아본다.
▣ 뭘 어떻게 먹나?
전체 식사량은 평소의 3분의 2로 줄여야 한다. 지방과 당질 섭취를 줄이고 단백질과 식이섬유의 섭취를 늘린다. 고기의 단백질은 간세포의 재생을 돕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갈비나 삼겹살처럼 지방이 많은 것보다는 살코기 등 지방이 적은 것을 고른다. 또 인스턴트 음식을 피하고 조리 방법으로는 튀김이나 전보다는 구이·조림·찜 등이 좋다.
▣ 살은 얼마나 빼야 하나
과체중이나 비만이면 체중 감량을 시작해야 한다. 키에서 100을 뺀 뒤 0.9를 곱한 값으로 표준체중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의 몸무게가 표준체중의 110~120%이면 과체중, 120% 이상이면 비만이다. 단 급격한 체중 감량은 지방간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꼭 알아야 한다. 짧은 시간에 살을 급히 빼면 체내 지방 분포가 바뀌면서 간에 지방이 더 많이 몰리기 때문이다. 체중 감량의 목표는 현재 체중의 10%를 3~6개월 동안 빼는 데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운동은 빠르게 걷기·자전거 타기·수영·등산 등 유산소운동이 좋지만 종목이나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 간장 보호제, 먹어야 하나
지방간으로 진단받아도 이른바 ‘간장 보호제'를 챙겨 먹을 필요는 없다. 간장 보호제를 먹는다고 해서 간에 낀 지방이 없어지지 않는다. 병원에서도 지방간이면서 간염이 의심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약을 처방해 주지 않는다. 특히 성분을 잘 모르는 건강기능식품은 간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의사와 상담한 뒤에 복용해야 한다. 간이 좋지 않다고 건강기능식품이나 생약제제 등을 과복용하면 약물을 대사하는 간에 부담이 커져 오히려 병이 악화될 수 있다.
▣ 술은 마셔도 괜찮나
알코올성 지방간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3~6개월간 완전 금주해야 한다. 비알코올성 지방간도 술의 높은 열량 때문에 악화될 수 있으므로 지방간이 없어질 때까지 금주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업무상 술을 아예 마시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마시는 양을 하루 반 병 정도로 제한해야 한다. 술 마신 뒤 3일 이상 쉬는 ‘휴간일(休肝日)'을 잘 지켜야 지방간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