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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한민국 역사를 반드시 바꾸어야 할 입증자료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5. 6. 23:16

 

본 연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반드시 바꾸어야 할

매우 중요한 입증자료이기 때문에 다시 올립니다.

 

한국정신문화선양회

http://www.coreaspirit.com/news/news_01.cgi?mode=view&point=d73dysgeuf1k0aj15ssvm3n&page=1

 

pluskorea.net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6]

箕子(기자)는 조선 삼한의 변한왕이다.

일제는 고조선 삼한 역사를 말살 했다 고조선 단군왕검은 14세(BC 2357년)부터 무진(BC 2333년)까지 24년간 외조부 황제헌원의 비왕(裨王)으로 유웅국을 섭정했습니다. 그리고 BC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6]
箕子(기자)는 고조선 삼한의 변한왕이다.
 
박병역 칼럼니스트

 
             ◈ 일제는 고조선 삼한 역사를 말살 했다

고조선 단군왕검은 14세(BC 2357년)부터 무진(BC 2333년)까지 24년간 외조부 황제헌원의 비왕(裨王)으로 유웅국을 섭정했습니다. 그리고 BC 2333년 10월 3일 구이(九夷)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9이의 영토를 조선이라 칭하고 삼한으로 나누어 웅백다를 마한왕으로 치두남을 변한왕으로 봉하고 진한은 단군이 친히 다스렸습니다.

진한왕(辰韓王)은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삼한의 왕위를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과 삼한, 9이는 같은 나라이다. 단군왕검은 진한왕으로 93년을 제위하고 BC 2239년 3월 15일 130세로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셨다. 한편 변한은 제1세 치두남부터 74대 기준왕까지 2138년을 계승하고,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이 전라남도 해남으로 들어가 김제 금마에 도읍한 후 후3삼한 9대 계왕까지 202년과 도합 234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箕子(기자)는 조선 삼한의 변한왕이다.

진한의 21대 소태임금은 무신(BC 1333)년 소정(小丁)을 변한 29대 왕에 임명하였다. 은(殷)나라 무정(武丁)이 막 조선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자 고등(高登)이 이를 듣고 상장군 서여(西余:기자)와 함께 은나라를 격파하고 색도(索度:산동성 임치현)에 이르러 병사를 추격하여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기자)는 북박(北亳:하북성 상구현)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湯池山)에 주둔시키고 자객을 보내 변한의 소정(小丁)왕을 죽인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진한의 제 22대 색불루(索弗婁)왕은 처음 삼한을 통합하고, 국가제도를 개혁하였다. 은나라 무정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변한의 소정(小丁)왕을 죽인 기자(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더니 서우여(기자)는 몰래 좌원(坐原)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 명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자 개천령(蓋天齡)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개천령은 서우여(徐于餘:기자)의 병사와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다.

단제 색불루께서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기에 앞서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기자)를 비왕으로 봉해 줄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기자)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는 서우여를 [조선의 변한 왕]으로 삼았다. 삼한중의 진한왕은 제사장이며 또한 마한,변한의 왕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진한의 세가를 살펴보자.

[진한세가]의 제 21세 소태(蘇台)재위 47년 경인(BC 1291년)에 은주(殷主) 무정(武丁)이 이미 귀방(鬼方)을 점령하고 다시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영지(令支) 등을 침공하다가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공물을 보내왔다.

49년 임진(BC 1289년)에 개사원(蓋斯原)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은나라가 점령한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이를 멸하니 일군국(一群), 양운국(養雲)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드디어 고등(高登)이 많은 군사들과 손잡고 서북쪽 땅을 침략하여 그 세력이 강성하자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진한의 소태 임금이 이를 꺼려 허락하지 않았으나 거듭 청하므로 비로소 허락하여 이름을 두막루(豆莫婁)라고 하였다. 52년 을미(BC 1286년)에 우현왕 고등이 죽고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이 되자 마한왕은 군사를 이끌고 싸웠으나 패하여 海南(해남:전남)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소태 임금이 나라 안을 순수하다가 [마한]의 해남(海南:전라남도 남서부)에 이르러 부로(父老)를 모아놓고 하늘에 제사지내고 춤을 추며 노래하였다. 이어 곧 오가(五加)를 불러 이들과 함께 왕위를 물려주는 일을 의논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짐은 늙어서 부지런히 일할 수가 없다."하고 서우여(徐于餘:箕子(기자)에게 정사(政事)를 맡겼다. 이에 [기자]에게 살수(薩水:청천강) 100리 땅을 묶어 섭주(攝主:비왕)로 삼고 호를 내려 기수(奇首)라 하였다.  

우현왕(右賢王) 고등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진한 임금에게 중지하기를 권하였으나 진한의 소태 임금은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우현왕 고등은 좌우 신하와 사냥꾼 수천명을 거느리고 드디어 부여(夫餘)의 신궁에서 즉위하고 말았다. 소태임금은 할 수 없이 옥책국보(玉冊國寶)를 고등에게 전하고 서우여(徐于餘:기자)를 [진한 왕]에서 폐위시켜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진한의 제 22세 색불루(索弗婁) 임금 원년(BC 1285년)에 백악산에 도읍하려 하자 여러 제후들이 안 된다고 주청하고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등이 임금의 조서를 받들어 이들을 설득하자 모두 복종하기에 이르렀다. 이해 녹산(鹿山: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위에 올랐다. 색불루 임금은 명을 내려 녹산(鹿山:백악산:부여신궁)을 수축하고 관제를 고쳤다. BC 1285년 5월에 나라 제도를 크게 개혁하여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고치고 진한(辰韓)을 진조선(眞朝鮮)이라 하고 임금이 직접 진한을 다스리고 삼한 모두를 관할하였다.

➤ 마한(馬韓) 땅의 막조선(莫朝鮮)은 여원흥(黎元興)에게 맡기고, 변한의 땅은  서우여(徐于餘:기자)에게 주어 변한왕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즉 이미 庶人(서인)으로 폐한 서우여(기자)는 몰래 좌원(座原)으로 들어가 사냥하는 사람 수천 명과 군사를 일으켜 모략하였다. 이 소식을 개천령이 듣고 기자를 공격하다가 패하여 진중에서 죽었다. 이렇게 되자 [색불루] 단군 임금이 친히 삼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하고 [기자]를 비왕(裨王)으로 봉해 줄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진한왕에서 폐위된] 서유여(기자)가 이를 받아드려 병신(BC 1285년)부터 箕子(기자)는 조선 삼한의 변한(弁韓)의 제위에 올라 한반도를 다스렸던 것이다.


                    ➤ 기자는 조선 3한의 진한 왕이 되었다. 
 번한왕 기자는 9월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창도현 대영반석성(昌圖縣 大營盤石城)에 행차하여 고등왕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기자)는 BC 1285 11월에 친히 삼한의 군사를 이끌고 은(殷)나라 도읍을 쳐부수고 이어 화친했다가 또 다시 여러 번의 대전투에서 싸워 파멸시켰다. 이듬해 BC 1284년 2월에 추격병이 하상(河上:황하)에 이르러 이겼다는 하례를 받고 변한왕 箕子(기자)는 본래 진한의 영토이었던 회수(淮水)와 대산(垈山)사이)의 땅으로 변한의 백성을 옮겨서 다스렸다.

처음 箕子(기자)는 평양에 도읍하여 조선(한반도 땅)을 통치 하다가, 변한의 백성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겨와 진한왕(제사장)이 되었다. 조선의 진한왕이 된 기자는 天王(천왕:제사장)으로 등극하여 4년 기해년에 칙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너희 삼한은 위로 삼신 하느님을 받들고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이로부터 백성들에게 누에치기, 베짜기, 활쏘기, 글, 예의(禮義) 등을 가르치니 진조선 나라의 위엄을 크게 떨쳤다. 백성들을 위하여 팔조 금지법을 만들었다.  

첫째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하고, 남의 것을 도적질 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 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였다.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감옥에 가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대에 복무시키고, 부지런히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淫亂)한 자는 笞刑(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여러 사람들이 알도록 공표하여 훈계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면 사면해주었으나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이로서 조선의 백성들은 끝내 서로 도적이 없고, 대문을 닫지도 않았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치고 제사를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조선 전국에 가득하였다.  주석(註釋): 箕子(기자)의 諱(휘)는 須臾(수유) 또한 胥餘(서여),서여(西余)이다. 그의 후손 기준(箕準)이 변한의 마지막 왕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조선의 箕子(기자) 성군(聖君)의 역사를 철저히 삭제하고 연나라 도적 위만(衛滿)을 우리 조상으로 둔갑시켰던 것입니다.


                   ◈ 한반도를 다스린 조선왕 箕子(기자) 성군(聖君) 
     ➤ 箕子(기자)는 周武王(주무왕)에게 “홍범구주”를 설법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일제가 말살한 기자성군(箕子聖君)의 세계 복원

    1. 朝鮮太祖 箕子聖人世系(조선태조 기자성인세계)
1世 太祖文聖大王 箕子姓子氏 諱須臾又諱胥餘 商帝武乙次子 諱理子也 誕降于帝乙十七祀丙戌五十四祀 周武王己卯(B.C 1122년)痛深革殷志堅岡僕 遂東出朝鮮 都平壤國號 後朝鮮 敎民八條 變夷爲夏周成王 戊午薨在位四十祀 壽九十三 墓平壤城北王荇山負子原俗稱兎山 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제 1세 太祖文聖大王(태조문성대왕) 箕子(기자)의 姓(성)은 子氏(자씨)이고 諱(휘)는 須臾(수유) 또한 諱(휘)는 胥餘(서여)이다. 商(상)나라의 황제 武乙(무을)의 둘째 아들이며, 또한 諱(휘)는 理子(리자)이다. 殷(은)나라 17세 帝乙(제을) 54년 丙戌(병술(B.C 1176년)에 태어나 周武王(주무왕) 재위 己卯(기묘:(B.C 1122년)에 제위에 올라 도읍을 平壤(평양)에 세우고 국호를 朝鮮(조선)이라 하였다.

기자는 八條禁止法(팔조금지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이 없었다. 周成王(주성왕) 무오(B.C 1023년) 재위 40년에 돌아가시니 수명은 93세이었다. 기자 천왕의 묘지는 平壤城(평양성) 북쪽 王荇山負子原(왕행성부자원) 속칭 兎山(토산)에 묘지가 있다. 제 36세 嘉德王(가덕왕)이 태조 기자를 文聖大王(문성대왕)으로 追尊(추존)하였다.  

[고조선 3한의 변한왕 1세 箕子(기자)부터 [제 37세 가색(可索)왕(BC 375~341년)까지는 조선 삼한은 태평했다. [제 38세 해인(解仁)]왕은 일명 산한(山韓)이며, BC 341년에 즉위하여 1년 간 재위 중에 자객에게 시해 당해 돌아가셨다. 아들 수한(水韓)이 BC 340년 제 39세 변한 왕위에 즉위하여 17년 간 재위했다.

2년(BC 339) 연(燕)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왕험성)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기자)의 사람 기후(箕詡)가 자제들과 병사 5000명을 거느리고 전투하자 군세가 떨치기 시작했다. 곧 계성의 남쪽을 공격하자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대신을 사신으로 보내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BC 323)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변한의 궁에 들어가서 스스로 조선의 변한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진한에 보내어 윤허(允許)를 청하자 진한의 보을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연나라 침략에 대비하여 굳게 지켜라 하였다. 

[제 40세 기후(箕詡)]왕은 무술(BC 323)년에 즉위했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기후왕 즉위를 축하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제 41세 기욱(箕煜)왕]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했다. 변한 제 42세 기석왕은 신미(BC 290)년에 즉위하고 39년 간 재위하였다.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였더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명이었다.  

기석왕 재위 10년(BC 281)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공격해 들어오니, 막아 싸웠으나 대패하여 상곡군(上谷郡),어양군(漁陽郡),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遼西), 요동군의 5군을 설치하여, 연과 고조선의 변한은 서비(西鄙:돌궐)까지 천리의 땅을 잃고 하북성이 국계가 되었다.   

즉 BC 4세기경 중국은 소위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제(齊), 초(楚), 진(秦), 연(燕), 중앙 위(魏)·한(韓)·조(趙) 나라 등이 활거하여 소도시 국가가 100여 개나 산재하고 있었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 3한의 변한 영역의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의 변한 땅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고조선 3한 중 진한이 멸망하였다
고조선 3한의 진한 47세 고열가 단제 재위 58년(BC 238) 3월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옛날 우리나라는 개국초부터 여러 聖人(성인) 선조님이 대통을 계승하고 임금은 솔선수범하며 백성을 잘 다스려 그 덕이 멀리까지 미치었으나 지금 세상은 법과 王道(왕도)는 다 없어지고, 여러 제후들은 힘으로 다투는 전투장이 되었다. 짐은 덕이 없어 제후들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민심이 떠나 백성들이 흩어지니 나라를 편안히 통치할 방책이 없도다. 너희 5가(五加)들은 어진 임금을 천거하라 하고 옥문을 활짝 열고 사형수이하 모든 포로들을 다 석방하고 이튿날 왕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수도(修道)하여 신선이 되었다. 이에 조선 3한 중 진한(辰韓)은 5가들이 함께 6년 동안 공화정치로 국사를 다스렸다.  

 [1]. 북부여 시조 해모수[45년(BC 239-195년) 등장]
진한의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해모수가 백악산 아사달(녹산)에 도읍을 정하고 蘭邊(난변:길림성 서란)에 궁전을 건축하였다. 진한의 법통을 계승하여 제후의 왕권을 갖게 된다. 원년 임술(BC 239년)에 천제 해모수(BC 239-195년)의 자태는 영웅적 기질로서 용맹한 神人(신인)이며 사람이 바라보면 몸에서 빛이 발사되어 사람들은 天王郞(천왕낭)이라 불렀다. 그의 나이 23세 때 왕위에 올라 항상 까마귀 깃털을 의관에 꽂고 허리에 용을 새긴 빛나는 칼을 차고 오룡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시종 500명이 뒤를 따랐다.  

 BC 238년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烟戶法(연호법:선조묘를 지키는 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5가의 병사를 나누어 주둔하고 밭을 만들어 자급하게 하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셨다. B.C.232년 해모수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진한의 옛 도읍으로 가시어 5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5가(五加)들은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해모수를 진한의 단군(壇君)으로 추대하였다. 

11년 임신(B.C.229)년 北漠(북막)의 추장 山只喀隆(산지객융)이 寧州(영주)를 습격하여 巡察使(순찰사) 穆遠登(목원등)을 죽이고 큰 약탈을 하고 달아났다. 19년 경진(B.C.221년)에 변한의 箕丕(기비)가 죽으니 아들 箕準(기준)이 父王(부왕)의 후계를 세습하고 조선의 변한왕으로 봉하고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 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당부하였다.

20년 신사(B.C 220년)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7월에 336간의 궁궐을 지어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해모수 재위 B.C.219년 한(韓)나라 張良(장량)은 한이 진시왕에게 망하자 그 원수를 갚는 다고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있었다. 이때 자객으로 선발된 창해(滄海)역사 黎洪星(여홍성)은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하남성 동남쪽의 박랑사를 유람 중인 진시왕정을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만 박살냈다. 장량은 거사가 미수에 그치자 그 뒤 수배자 몸이 되어 숨어오다가 한나라 시조 유방과 함께 진시왕정을 타도하고 한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북부여 해모수 재위 31년 임진(B.C.209년), 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연, 제,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기준왕이 다스리는 조선의 변한 땅으로 수 만명이 귀순해 왔다. 이들을 雲障(운장) 지방에 상하로 나누어 살도록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38년 기해(B.C.202년), 연 나라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 浿水(패수 지금의 대동강)를 경계로 삼았다.

45년 병오(B.C.195년), 연 나라 노관이 漢(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B.C.194년 조선 삼한 중 변한의 기준왕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雲障(운장) 땅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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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태조 기자성인세계(朝鮮太祖 箕子聖人世系)

 1世 太祖文聖大王 箕子姓子氏 諱須臾又諱胥餘 己卯(B.C 1122년) 在位 40년 
 2世莊惠王諱松 周成王34年己未立 在位25年 諱仲封於于其子孫在鮮在于者食其二國因姓鮮于 
 3世 敬孝王 諱詢     康王 22年 甲申(B.C 1057)立    在位 27年 
 4世 恭貞王 諱伯     昭王 23年 辛亥(B.C 1030)立    在位 30年 
 5世 文武王 諱椿     穆王  2年 辛巳(B.C 1000)立    在位 28年
 6世 太原王 諱禮     穆王 30年 己酉(B.C  972)立    在位  4年 
 7世 景昌王 諱莊     穆王 35年 癸丑(B.C  968)立    在位 11年 
 8世 興平王 諱捉     穆王 45年 甲子(B.C  957)立    在位 14年 
 9世 哲威王 諱調     共王  4年 戊寅(B.C  943)立     在位 18年
10世 宣惠王 諱索     懿王 14年 丙申(B.C  925)立    在位 29年
11世 誼襄王 諱師     孝王 14年 乙丑(B.C  896)立    在位 53年
12世 文惠王 諱炎     려王 36年 戊午(B.C  843)立    在位 50年
13世 盛德王 諱越     宣王 35年 戊申(B.C  793)立    在位 15年
14世 悼懷王 諱職     幽王  4年 癸亥(B.C  778)立    在位   2年
15世 文烈王 諱優     幽王  6年 乙丑(B.C  776)立    在位 15年
16世 昌國王 諱睦     平王 10年 庚辰(B.C  761)立    在位 13年
17世 武成王 諱平     平王 23年 癸巳(B.C 748)立     在位 26年
18世 貞敬王 諱闕     平王 49年 己未(B.C 722)立     在位 19年
19世 樂成王 諱懷     桓王 17年 戊寅(B.C 703)立     在位 28年
20世 孝宗王 諱存     惠王 2年 丙午(B.C 675)立      在位 17年
21世 天老王 諱孝     惠王 19年 癸亥(B.C 658)立     在位 24年
22世 修道王 諱立襄   惠王 58年 丁亥(B.C 634)立     在位 19年
23世 徽襄王 諱通     頃王 4年 丙午(B.C 615)立      在位 21年
24世 奉日王 諱參     定王 13年 丁卯(B.C 594)立     在位 16年
25世 德昌王 諱僅     簡王 8年 癸未(B.C 578)立      在位 18年
26世 壽聖王 諱翔     靈王 12年 辛丑(B.C 560)立     在位 41年
27世 英傑王 諱黎     敬王 1年 壬午(B.C 519)立      在位 16年
28世 逸民王 諱岡     敬王 17年 戊戌(B.C 503)立     在位 17年
29世 濟世王 諱混     敬王 34年 乙卯(B.C 486)立     在位 21年
30世 淸國王 諱璧     貞定王 5年 丙子(B.C 465)立    在位 33年
31世 導國王 諱澄     考王 10年 己酉(B.C 432)立     在位 19年
32世 赫聖王 諱준     威烈王 13年 戊辰(B.C 413)立   在位 28年
33世 和羅王 諱謂     安王 17年 丙申(B.C 385)立     在位 16年
34世 說文王 諱賀     烈王  7年 壬子(B.C 369)立     在位  8年
35世 慶順王 諱華     顯王 8年 庚申(B.C 361)立      在位 19年
36世 嘉德王 諱       顯王 27年 己卯(B.C 342)立     在位 27年
37世 三老王 諱       愼王 6年 丙午(B.C 315)立      在位 25年
38世 顯文王 諱釋     赫王 25年 辛未(B.C 290)立     在位 39年
39世 章平王 諱潤     東周君 5年 庚戌(B.C 251)立    在位 19年
40世 宗統王 諱丕初諱恤 秦王政 15年 己巳(B.C 232)立 在位 12年
41世 哀王  諱準(기준)  秦王政 27年 辛巳(B.C 220년) 在位 27年  

➤ 41世 哀王諱準 輿地勝覽云 武康王 始皇二十七年 辛巳立 漢惠帝元年丁未燕人衛滿來侵 率佐右宮人浮海南出立國 金馬郡今益山 改國號曰馬韓 ➤ 在平壤爲王 二十七年自 箕聖東渡後 凡四十一世 歷年爲九百二十九年.                       

 41세 애왕 휘(諱)는 준(準)이다. 輿地勝覽(여지승람)에 이르기를 武康王(무강왕:애왕)은 秦始皇(진시황) 27년 신사(B.C 220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漢惠帝(한혜제) 원년 정미(:(B.C 194년)에 燕(연)나라 사람 衛滿(위만)이 침략해 오자 佐右宮人(좌우궁인)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海南(해남:전라남도)에 들어가 金馬郡(금마군)의  지금 益山(익산)에서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쳐 馬韓(마한:3한)이라 했다. 

  ➤ 41세 기준왕은 平壤(평양)에서 27년을 재위하고 바다를 건너 海南(해남:전라 남도)에 들어가 마한을 건국한 후 그해 돌아가셨다. 箕子(기자) 성군(聖君)이 해동(변한)의 역년은 무릇 41세까지 929년이 된다.

◆ 기준왕이 건국한 한국(후3한)의 세계(世系)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
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 四十一世 則馬韓王位八世.
2世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
3世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9世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 己丑(B.C 32年)立 在位 一十五年(B.C 17年)


                        ◈ 고조선 후 3한시대

 [1]. 기준(箕準)의 후 삼한(三韓) 건국
현행 국사는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해남(海南)으로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그러나 후3한은 기준 왕부터 제 9세 계왕까지 무려 211년을 존속한 한국(韓國 世系)가 뚜렷이 전하며, 한반도 전체를 통치했습니다.  

➤ 기준(箕準)왕은 平壤(평양)에서 27년 재위하고 B.C 194년 위만(衛滿)에게 왕험성(관미성)을 빼앗긴 후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전라남도 海南(해남)에 들어가 금마(金馬)에 도읍을 세우고 삼한(三韓)을 건국한 후 그해 돌아가셨다. 후삼한의 제 8세 元王(원왕)의 諱(휘)는 勳(훈)이고 계해(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마한(후3한)의 8세 원왕(元王)과 9세 계왕(稽王)은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으나 후손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鮮于氏(선우씨)는 黃龍國(황룡국)에서 들어왔고 또 한 사람은 韓氏(한씨)라 칭하고 한 사람은 奇氏(기씨)라 칭했다. 수유족(須臾族)은 원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후3한의 후손 중 일부는 수유족(須臾族:기자족)을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하여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하였다. 고조선의 변한왕 기준(箕準)이 전라북도 금마(金馬:전북 익산)에 도읍을 정하고 한왕(韓王:마한왕)이라 칭하여 성을 한씨(韓氏)라고 불렀다. 기자족(箕子族)은 원래 수유족(須臾族)이라 칭하며 箕子(기자)의 성은 기씨(奇氏)이며 箕(기)와 奇(기)는 같이 쓰인다. 9세 稽王(계왕)의 휘는 貞(정)이다. 기준왕이 3한(한국 땅)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적 왕이다.

➤  한편 북부여 천제 해모수 왕은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사소(娑蘇)이며, 동신성모(東神聖母), 혹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추모왕)을 낳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은 고조선의 삼한 유민(遊民)들의 추대로 甲子(BC 57년:기준왕이 건국한 마한 원왕 22년)에 전라북도 변산반도의 서라벌(徐羅伐:서울)에 도읍지로 정하고, 금성(金城)에 왕궁을 창설했다. 그리고 B.C 37년 고주몽(추모왕)은 갑신(B.C 37년)년에 졸본천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또한 고구려 시조 고주몽(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B.C 17년에 왕위에 올라 기준왕의 마한 땅 錦峴城(금현성:부여 금성)이 백제 온조왕에게 공격을 받아 마한의 9세 稽王(계왕)이 항복하므로서 결국 목지국(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 78개국은 후3한이며, 삼국의 모태가 된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후한서-東夷列傳], 진서사이전(晉書四夷傳)과 한전(漢傳)에 등재된 삼한을 처음 건국된 삼한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고조선 3한 중 진한의 고열가 임금이 물러난 이후의 후 3한시대에 해당한다. 즉 북부여 해모수 천제에 의해 변한의 왕위를 계승한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한반도 남쪽 전북 익산 금마(金馬)에 왕도를 세우고 건국한 나라가 곧 후3한 78국이며, 9대 211년을 계승했습니다.  

즉 고조선 3한 중 변한 제41대 기준왕(箕準王)이 위만(衛滿)의 난(亂)을 피하여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金馬)에 천도(遷都)하여 ‘금마저(金馬渚)’라 칭하였다. 최근에 발굴된 성안에서는 왕궁평성 토성내에서 금마저성(金馬猪城)명의 기와 쪽이 출토되어 미륵산성, 왕궁평성, 그리고 우금산성과 같은 때의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 박병역 칼럼니스트
          
               ➤ 후 삼한 78국은 기준왕이 다스린 韓國이다.

[후한서-東夷列傳][1],韓種有三: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在帶方南,東西以海爲限.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2],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3],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후략] [4],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淸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후한서-동이열전(東夷列傳)]. [고조선이 멸망한 후] [1],한(韓)은 3종류가 있다. 첫째 마한, 두째 변한, 셋째 진한이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었다. 처음 조선 준(準)왕이 위만(衛滿)에게 [왕험성]이 격파되자, 이내 장군과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 파괴하고 [금마저金馬渚]에 왕도를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馬韓)이 되었다.

준(準)왕이 건국한 후삼한은 9대 211년을 계승하고 마한(韓한:3한) 9대 계왕(稽王)의 왕위가 단절되자 마한의 사람들과 유민들이 진한(辰韓:신라)에 귀속했다. 진한왕은 [3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3한의 왕권과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의 군장(君長:거서간(居西干)이라 칭했던 것이다. [2], 마한(馬韓)은 54개국을 통치하여 3한 중에 최대로 강성 했다.] 다시 나라를 세운 진한왕(혁거세왕)은 마한의 도읍지인 목지국과 3한 지역을 관리했다.

[3], [혁거세왕이 다스린] 진한(辰韓:신라)의 기노(耆老:70세 이상된 노인들)이 말하기를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수천명을 거느리고 조선 준왕에게 망명해 오자  마한의 동쪽 경계의 雲障(운장) 지방 땅을 활당해 주었다고 한다. 진한(신라)의 사람들은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적을 구(寇)라 하고, 주연회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했다. 진(秦)나라 말과 비슷하여 혹 진한(秦韓)이라 칭했으나 국명은 진한(辰韓)이다.

[4],변진(弁辰)은 곧 가야국(伽倻國)이다. 진한(신라)과 섞여 거처하며, 성곽(城郭)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차이가 있었다.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국]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다 키와 몸집이 크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의복은 희고 정결하며 깨끗하다. 죄인을 다스리는 형법은 준엄하였다. 가야국은 왜(倭)와 가까이 지냈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이 아유타국 허황옥이며 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키도 크고, 아름다웠으며, 혹 문신을 한 자가 제법 많았다. 고 한다. [후략]

현행 국사의 위만은 고조선 침략사로 다루어야 하고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을 당연히 우리나라의 정통적 역사로 기술해야 바른 역사입니다. 또한 북부여 이후는 곧 후 3한시대(三韓時代]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제사장(祭司長)의 진한 12국은 ⇒ 신라의 박혁거세 거서간(왕)이 다스리고, 변진(弁辰) 12국은 ⇒ 가야6국에서 다스리고, 마한의 54국은 ⇒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된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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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되었다

1945년 8.15 해방이후 경상북도 경주를 신라의 도읍지로 지정된 국사교육에 세뇌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경주(慶州)를 신라 천년의 왕도(王都)로 인식하고 “아...! 서라벌 황성 옛터 신라의 달밤 ” 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라 천년의 도읍지 서라벌은 경주가 아니라, 전라북도 변산반도 부안으로 밝혀졌습니다.

현행 국사는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오늘날의 [국사교과서]를 편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국이 일찍 멸망해야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무려 2천여년의 고조선 역사는 삭제하고, 평양에 도읍지로 정하고 중조선을 건국한 기자성군(箕子聖君)의 무려 929년 동안 한반도를 다스린 정통 역사를 말살하고, 기자(箕子)의 후손 준왕(準王)의 왕위를 찬탈했던 배은망덕한 날강도 위만(衛滿)을 고조선을 계승한 우리나라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국토가 육체라면 국사는 민족정신입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육체는 해방되었으나 일제가 말살, 왜곡된 현행 국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제가 만들어 준 식민지국사를 해방 64주년을 맞은 2009년까지 그대로 배우고 있다면, 대한민국이 어찌 온전한 자주 독립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일제 압박 35년간 우리 선조님들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대한민국이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것도 우리 선조님들의 흘린 피의 값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순국선열의 애국 애족정신을 계승하여 온전한 자주독립국을 완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방 64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온전한 독립국을 이루지 못했다. 이 어찌 순국선열님들이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 연재는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 침략자가 말살한 역사는 복원하고, 왜곡, 변조한 역사는 바로잡아서 유구한 전통의 찬란한 문화를 계승한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역사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현세의 우리 앞에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오욕의 역사를 깨끗이 청산하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국사를 개편할 수 있는 고증서로서 대한민국 새 역사를 창조하여 백년대계를 위한 대한민국 정통역사(正統歷史)입니다.

본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1~6편]은 우리나라 유일한 정통사서의 [삼국사기 본문]으로 입증하여,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죄행각과 현행 국사의 말살, 왜곡된 실상을 누구나 두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과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죄 행각을 확인하고도 “정부당국자가 왜곡된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 ”를 개편하지 않는다면 7천만 대한민족에게 큰 죄악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범행을 올바로 깨닫고, 왜곡된 국사는 철폐하고, 본 지침서를 근간으로 말살된 역사는 복원하고, 반드시 바른 국사를 정립하여 대한민국의 새 역사를 창조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정신문화선양회
인류시조성전건립회

琇巖 朴炳譯(박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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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5]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4]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3]
[전격]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2]
[전격]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1]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기사입력: 2009/06/24 [19:49]  최종편집: ⓒ plu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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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규명이란 과장.축소.왜곡.조작도 안 되며 최대한 객관성을 지향해야 한다 역사학 09/06/25 [21:54]
1.단군왕검의 단군3한=만주.몽골(진한)+요서.산동-양자강(번한)+한반도.일본열도(마한)
(22대 색불루 단군때 3한에서 3조선으로 변경/구물단군 때 부여로 변경...47대 고열가 단군이후 해모수.고두막.고추모의 북부여-골본부여.고구려가 단군조선 계승)

2.한반도3한=마한(서남부지역 54개국)+번한(경상도 남부지역)+진한(경상도 북부지역)
(* 요서지역에서 위만에게 기자조선을 강탈당한 기준세력은 한반도 평양지역로 들어와 마한을 개국하였고 토착마한세력에게 밀려나 남부지역으로 이주해 온 기준세력은 다시 마한을 개국하여 진시황의 노역을 피하여 한국-한반도-로 들어온 진번조선 유민들에게 땅을 분양하고 조공을 바치게 했다=후한서.동이열전...한반도3한 당시 마한토착세력은 주로 서남해 지역의 해상세력으로 왜로 기록되었으며,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에서 백제를 지원하다 광개토태왕에게 서남해지역이 초토화되면서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왜왕국을 건설했다..왜는 해양활동을 하던 토착마한세력을 의미한다...기준세력이 한반도에 들어와 나라를 개국하고 국호를 마한이라고 한 것은 단군한검의 3한 중에 마한은 북한 평양에 왕검성을 둔 한반도.일본열도였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은 은나라 신하 기자가 개국한 나라가 아닙니다. 은나라 기자는 기자조선 솔귀 단군때 요서지역으로 망명한 사람입니다. 기자조선은 은나라에서 망명해 온 기자하고는 무관한 기우여(기후=기자)가 진조선 단군승계쟁탈전에서 색불루 단군에게 패배한 후 번조선 단군에 직위함으로써 번조선이 그 때부터 기자조선으로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수정 삭제
박선생님은 정말 구제불능이십니다. 성훈 09/06/26 [01:20]
예전엔 삼국을 너무 해외로 빼시더만, 이젠 우리 역사를 이병도처럼 한반도 가두리 양식장에 구겨넣고 계십니다.
박선생님이 주장하는 내용이 바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내용입니다. 기자조선이 평양에 있어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하는 것이나 박선생님 글이나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삼한(마한.진한.변한)이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이 바로 이병도의 이론입니다.

박선생님은 이병도가 전라도에 있는 신라를 경상도로 옮기는라고 20만권이 너믄 사서를 불태우고 일왕이 특명까지 내려 중국 대륙까지 뒤졌다고 보십니까?

정말 구제불능이십니다.
더 이상 나이 드신 분에게 불손한 말 안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수정 삭제
3국 대륙설 논쟁을 끝내자 박병역 09/06/26 [11:12]

식민사학자 이병도와 필자 박병역의
3한 역사관은 하늘과 땅사이 만큼 큰 차이요

하늘에는 삼신(하느님)이 있고
땅에는 삼한(진한, 마한, 변한)이 있었다.

고조선 삼한 중의 진한(辰韓)왕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 영토를 관리하고 삼한의 왕권을 갖고 있었다.
비록 고조선 3한 국명은 달라도 3국1체로 통치했다.

조국을 배신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의 나라
고조선 3한의 무려 2천여년의 역사를 삭제하고,

마치 고조선과 ⇒ 3한이 다른 시대처럼 변조하고,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 기원역사를 말살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고대사에 큰 혼돈을 일으키고,
신라, 백제, 가야의 3국 대륙설이 난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때 필자 박병역이도 3국 대륙설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말살, 삭제한 고조선 3한 중 변한왕 치두남부터
30대 기자(箕子)와 74대 기준왕까지 무려 2137년의 역년을 복원했소

그리고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이 전라남도 금마에 도읍하고,
후3한 1세 기준왕부터 9세 계왕까지 212년의 역년을 복원하고,

근세에 발굴되는 각지 유적물이
삼국사기의 본문과 서로 일치하고,
필자의 3국대륙설 주장이 큰 잘못을 뒤늦게 깨닫고
깊이 탐구한 결과로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를 발표하게 되었소

성훈씨를 비릇하여 여러 애독자님은 무려 64년간
왜곡된 국사교육에 세뇌 중독되어 처음은 반신반의 하겠으나,
진실을 밝히는 풀코넷에 연재된 [제1~6편]을 깊이 탐독하시면
필자의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의 학설을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 박병역은 성훈씨를 아우처럼 사랑합니다.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철폐시키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성훈씨를 아우처럼 사랑하고 있소

성훈씨도 처음은 믿지 못하고 부정하고 있으나
더 깊이 탐구하면 필자의 학설에 공감하게 될 것이요

본 연재에 댓글을 중지하지 말고, 다른 관점이 있다면 반론을 제기해 주세요
서로 주고 받는 댓글로 말미암아 본인도 깨닫고 독자들도 깨닫게 될 것이오.

3국 대륙설의 진위(眞僞) 판별의 핵심은
➤ 기준왕이 건국했던 후3한의 78개국 중
진한은 신라(제사장)이고, 마한은 고구려, 백제이고,
변한은 가야 6국이 형성된다. [본문 중 78국 참조바람]

[1], 기준왕의 78개국 중 진한의 영토 중에 사로국이 있고,
또한 진한의 6부촌장 소벌도리가 B.C 57년 혁거세를 신라왕으로 추대했다.
따라서 78개국 중 진한의 12국이 신라가 된다.

[2], 기준왕의 78개국 중 마한 영토에 백제가 있었다.
B.C 17년 온조왕에게 백제(천안 지역) 땅을 주어 정착하고
곧이어 원산성과 금현성(부여 금성)이 백제 온조왕의 공격을 받아
마한 9세 계왕이 항복하므로서 결국 목지국(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백제시조 온조는 한반도 속 기준왕의 마한땅에 정착하게 된다.

[3], 기준왕의 78개국 중 변한 영토에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가락국을 건국하여 6가야국을 다스리게 된다.

기준왕이 건국한 후삼한의 78개국은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생성의 모태국이 된다.

따라서
한서(漢書)의 78국이 중국대륙에 존재했다면
신라, 백제, 가야의 ⇒ 3국 중국 대륙설이 성립된다.

한편 78국이 한반도 속에 존재했다면
신라, 백제, 가야의 3국 대륙설은 허구가 된다.

한서(漢書)의 78국은
중국대륙에 존재했는가? 한반도 속인가?

독자님들의 현명한 판별로
3국 대륙설의 논쟁을 끝내도록 합시다,
성훈씨와 현명한 독자님들의 판별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수정 삭제
전라도 포함한 서남부 지역은 마한영역 마한과 백제 09/06/27 [09:33]
마한(중국 요서지역에서 위만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기자세력이 서해바다를 건너 개국한 나라)은 54개국에 이르는 서남해 지역의 주인이였고, 마한지역은 이후 백제 근초고왕때 완전히 통합되었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

 백제 근초고왕은 369년경 남으로
마한(馬韓)과 대방(帶方)을 복속시켜 이전까지 백제의 지배권 밖에 있던 마한영역의 전라도지역을 복속시켰다. 남방지역의 정복이 일단락된 후 북방으로 진출을 도모하자,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두 나라의 싸움은 369년 치양성(雉壤城: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시작되었다. 이어 371년 9월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침입하자 패하(浿河:예성강)에서 크게 무찌르고, 겨울에 태자와 더불어 정예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로써 백제는 지금의 경기·충청·전라도의 전부와 강원도·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하는 강력한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중국이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분열된 틈을 타서  선조들의 근거지(구태백제세력)인 요서(遼西)지역으로 진출하여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했다.  이후 아들 근구수왕때부터 중국지역정복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백제의 요서지역 진출은 요동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요서와 한반도, 일본지역에 자리잡은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하여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국제적 조건들을 이용하여 중국의 남조(南朝)문화를 들여와 문화의 질을 높이는 한편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주기도 했다. 지배영역이 확대되고 통치가 안정되자, 왕실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박사(博士) 고흥(高興)에게 국사 〈서기 書記〉를 편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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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여...어서 깨어나라.../ 박병역 09/06/27 [14:16]

필명 마한과 백제는 먹통박사인가?
[백제는 지금의 경기·충청·전라도의 전부와
강원도·황해도의 일부를 차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기의 주장과 지도는
현행 국사교과서의 내용과 똑 같으며,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 상식이다.

필명 마한과 백제는
연재된 본문 중에 다른 관점을 지적하고,
고대문헌을 인용해서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고,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고착된 일반상식(국사교과서)으로
본 연재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의 역사적 진실을
또 똥 걸레(퍼온 글)로 호도(풀칠,먹칠)하며 부정한다면

스스로 무식을 드러낸 먹통박사(맹충이)를 벗어날 수 없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풀코넷의 숭고한 정신에 위배하며,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개편을 방해하는 독충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미 신라 6촌은 전라도지역에 산재돼 있고.
전라도의 명산은 모두 다 신라 산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신라 영토인 전라도 땅을 백제가 자주 침략한 기록은 있어도
전라도가 백제영토가 된 본문기록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백제부흥 운동 때
백제와 왜(일본) 연합군과 나당(羅唐)연합군이 합세하여
변산반도 백강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백제는 영원히 사라진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백제는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주기도 했다]는 일반적 상식은
백제와 일본에 대한 역사무지며, 똑 바로 인식하지 못한 얼간이 들이다.

즉 백제 왕자들이 왜왕을 계승하여 백제는 일본의 부모국이 된다.

백제가 멸망 할 당시
왜(일본)왕 제명여제(齊明女帝)는 백제 의자왕의 왕비이며,
백제왕자가 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백제와 왜는 같은 나라이다.

그리고 왜(倭)의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 사람이
바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장이며,
일본역사는 백제역사이며, 일본고대사는 없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왜곡된 국사교육의 왜독(倭毒)이
무려 64년간 뇌리에 골수깊이 파고들어 의사도 고칠 수 없는
암적 존재들은 해독제 6첩(1~6편 연재)을 먹고도 깨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헛소리로 횡설수설 하니 이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동방의 빛이 점점 밝아 온다, 한겨레여 어서 깨어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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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세칭 나제통문이란 것을 신라와 백제간의 통로라 함과 그 무엇이 다를꼬? 김 성겸 09/06/28 [19:16]
아득한 옛날의 조상 할아비들께서 옆에 누우신 할미를 깨우시어
훌륭한 자손을 둔 내가 손수 닭국물로 끓인 미역국 마시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노인분과 젊으신 분들의 의기는 가상들하시나 글들을 내리시는 것이
겨레얼을 욕되게 아니하시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수정 삭제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이병도가 만든 가짜.. 소호리 09/06/28 [23:04]

김성겸님은
혹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배우가 아니신가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일제가 만든 가짜입니다.

무주구천동 33경중
제일먼저 통과하는 곳이 "나제통문"입니다

무주군청 관광안내도에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이"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이다.

석모산의 기암절벽을 뚫고 동서를 통하는길을 내었는데
지금도 양쪽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다르다" 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가짜다.

즉 신라는 본래 전라도에서 건국되었으나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신라 천년의 도읍지를 경주로 얽어 맞춰 놓고

모든 한국인들이
전라도는 본래부터 백제 영토로 확고히 믿을 수 있도록 만든 가짜이다.


이 굴의 본래 이름은 "기니미굴"로서
일제시대(1910년경) 일본놈들이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옮겨가기 위하여 뚫은
굴로서 "기니미굴"이라고 했다.

굴을 중심으로 한 도로를 기준으로
위쪽마을은 "기니미 마을" 아래쪽은 "이미리 마을"이다.

도로개설 기록은 무주군청지인 "적성지"에도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굴이 언제 "나제통문"으로 바뀌었는가 ?
바로 무주구천동 33경을 만들면서
식민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1963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기니미굴이 "나제통문"으로 둔갑을 하여
교과서에 버젓이 등장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국사교과서 때문에 학생들의 수학여행 단골 메뉴가 되어버렸다.

이 나제통문이 진실을 아는 어느 뜻있는 한분에 의해서
강력하게 항의를 받아 어느날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 글쓴이: 世元(소호리)의 글을 옮김
수정 삭제
소호리님 글에 동감 통감 09/06/29 [06:29]
아직도 역사를 모르고 날뛰는 성훈과 같은 이
자기가 논하는 역사가 진실인 양 떠들고 잇으니 수정 삭제
나제통문은 물자착취를 위해 일제가 만든 가짜 김 성 겸 09/06/29 [12:02]
소호리님,
제가 언제 누구한테 나제통문이 신라와 백제의 통문이라고 한 적이 있었나요?
내가 태어나서 자란 충남 덕산도
예산군에 대흥군과 함께 일정 때 사라져버렸고
그 이하의 행정단위는 아예 이름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지명이 대한민국 땅에 산재하여 있음을
아는 이들이 별로 많지 않으며,
근세의 이씨 왕조시절엔 얼마나 많은 역사지리명이 옮겨졌는지를
아는 이들은 정말로 드물다고 봅니다.
수백년간에 걸쳐 하물며 사찰의 이름과 연원들까지도 그러하였을 것인즉,
외로운 주장을 하시는 분들에게 간언한 것을
소호리님께서 오해하셨음으로 봅니다... 수정 삭제
일제가 신라는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옮김으로 해서 얻는 이익이 뭘까요? 남원윤 09/06/29 [13:01]
아고라를 보면서 저는 이런명제를 이제 어떤 사건이 생기던 생각하게 됩니다.
일제가 신라를 전라도에 건국했다는 사실을 숨겼다면, 그에 합당한 이익이 있어야 될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짧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그 이익이라는게 안보입니다.
박정희 시대때 옮겼다고 한다면 이해는 갑니다...
수정 삭제
인생의 황혼기를 멋있게 장식해 주세요 한얼원 09/06/29 [13:34]

존경하는 김성겸님 안녕하세요

평소 존경하는 대배우 김성겸 님을 비릇하여,
우리 인간들은 모두 다 지금 우주 공간의 지구별에서
하느님의 각본(인과응보)에 따라 연출하는 연극배우입니다.

우리나라는 인류의 부모국이며,
인류 4대문명과 종교의 원천국으로서
고조선 3한 시대부터 일제식민지 시대까지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으로 밝혀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다
자기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구별의 무지몽매한 인간들은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인류의 부모를 깨닫지 못하니
어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작금의 세상이 어찌 금수세계와 다르다 하겠나이까?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신 존경하옵는 김성겸님.../
하루 해가 저물어 갈 때 저녁 노을이 더욱 아름답고,

만물은 가을철에 영글듯이
대한민국 최고의 김성겸 대 배우님께서
인류 아버지(시조)의 주역을 담당하시어
인생의 황혼기를 멋있게 장식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人類始祖聖殿建立會/한얼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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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겸씨는 배우가 아니다. 성훈 09/06/30 [10:04]
김성겸씨는 배우가 아니라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려사초.략을 번역한 민족사학자이다.
박병역씨는 전라도에 있는 천관사와 신라 관계 지명 몇개를 보고 신라가 전라도에서 건국되었다는 괴상한 이론을 전개하고 잇다. 천관사와 신라 관련 지명은 중국에도 있다.
김성겸씨가 배우도 있고, 민족사학자도 있듯이.....(김성겸씨는 대한민국에 많다) 수정 삭제
BC24년의 고구리 기록에 박혁거세라는 남자 임금은 보이지 않는다. 김성겸 09/06/30 [12:41]
성훈 선생님이 저의 일부를 밝혀주셨습니다.

아래에 옮겨놓은 글은
제가 지난 해 가을부터 번역에 착수하고,
남당선생의 지리비정이 아닌 역자의 강역설명을 약간씩 곁들인 것의 극히 일부인
<남당>유고 <추모경> 동명14년{BC24년} 기록의 일부입니다.
<박혁거세>가 이 한반도 남쪽 어디에 속칭 <신라> 또는 <사로>라는 나라를 열었다는
글자 부스러기 하나 없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지난 해에 제가 번역하여 세상에 내보낸 고구리사초사략 중에 미흡한 곳들을
이미 교정하는 작업도 시작되었으나, 얼마나 시일이 걸릴지는 아직 장담하긴 이릅니다만,
이번에 나가는 <추모경>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서 상당부분을 바로잡는 일을 이미 착수하였습니다.

우리겨레 고대사의 북방 역사 시작을 조금이라도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남당>유고 <추모경>을
모자라는 번역능력에 약간의 초보적인 해설을 더하여서,
금주 중에 "일본왕실서고에서 탈출한 대연방천제국 고구리 창세기"라는 번역서로 하여 세상에 내보오니 일별하신 후에
이 한반도에 기자조선이니 번조선이니 진조선이니 마한이니 진한이니 변한이니 등을
논하여도 가할 것이라고 봅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또 한 명의 박혁거세 후손이었을 남당 박창화 선생은 비록 자신의 지리비정은
근세 이씨 왕조에 의해 편집된 조선사를 재편집한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등이
남겨둔 자료들에 근거하여 엉뚱한 역사강역 비정을 하여놓아서 그의 위대한 수고에 흠을 남겼지만,
그분이 역사기록을 통째로 아귀를 맞추어서 소설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시지는
않으셨다고 보며, 그러실 시간적인 여유도 없으셨다고 확신합니다.
다만, 본인께서도 어안이 벙벙하신 내용을 접하셨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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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月,<涉羅>女主<奕居知>遣使入貢.<涉羅>,在於<桓那>之東南,依山傍海,世襲女主.山多野少,民以魚獵為生,冡冢居岩伏,好歌舞鬼神.囯之俊秀者為女主之嬖臣,生女為巫,其最少者継之.其俗淳,實不䓁,能為其主而盡忠.上,賜<奕居知>綾緞,命親自入朝.

9월, <섭라국涉羅國>여왕 <혁거지奕居知>가 사신을 보내서 입공하였다. <섭라>는, <환나桓那>의 동남쪽으로, 산을 의지하면서 큰 물{黃河下流? 작금渤海西岸?} 곁에 있었으며{작금河北省東南部內陸에 있었던 古代의 斯盧國 또는 斯羅國?}, 여왕女王을 세습하고 있었다{赫居世는 奕居知의 아들이거나 嬖臣?}. 산이 많고 들판이 적어서{현금 滄州市・衡水市・德州市周邊地境!!}, 백성들은 어렵漁獵을 생업으로 삼고 언덕{산}에 거주하거나 가파른 곳에 숨어살며, 노래하길 좋아하고 귀신에게 춤을 올렸다. 나라 안에서 지혜智慧와 풍채風采가 빼어난 이가 여왕女王의 폐신嬖臣{情을 나누는 男色臣下・情夫, 非公式的男便}이 되었으며, 딸을 낳으면 무녀巫女로 삼고{加葉原의 巫風?}, 그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이가 뒤를 이었다. 그곳 습속은 순박하여 곡식이 잘 여물지 않으면 능히 그 임금을 위해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상께서 <혁거지奕居知>에게 능라綾羅를 하사하셨으며 친히 스스로 입조하라고 명하셨다{涉羅가 北夫余侯國·服屬 與否는 未詳이나 和親常況이 됨}. 수정 삭제
김상겸씨의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소. 박병역 09/06/30 [14:08]

김성겸님은
혹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배우가 아니신가요?
하고 물었으면 다음 글에서
반드시 본인의 신상을 밝히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야지...좀 무례하군요


김상겸씨의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소.

九月,<涉羅>女主<奕居知>遣使入貢.
<涉羅>,在於<桓那>之東南,依山傍海,世襲女主.
山多野少,民以魚獵為生,冡冢居岩伏,好歌舞鬼神..........

9월, <섭라국涉羅國>여왕 <혁거지奕居知>가 사신을 보내서 입공하였다.
<섭라>는, <환나桓那>의 동남쪽으로, 산을 의지하면서
큰 물{黃河下流? 작금渤海西岸?} 곁에 있었으며

➤ {작금河北省東南部內陸에 있었던
古代의 斯盧國 또는 斯羅國?}, 여왕女王을 세습하고 있었다
{赫居世는 奕居知의 아들이거나 嬖臣?}.

산이 많고 들판이 적어서{현금 ➤ 滄州市・衡水市・德州市周邊地境!!},
백성들은 어렵漁獵을 생업으로 삼고
언덕{산}에 거주하거나 가파른 곳에 숨어살며,
노래하길 좋아하고 귀신에게 춤을 올렸다.


김상겸씨와 성훈씨는
고대사 탐구의 기본적 상식도 없이
삼국사기를 부정하고, 기막힌 작태를 연출하고 있소

상기 본문 중에 사로국(斯盧國:신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라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기사(記事)를 억지로 추정하고,
古代의 斯盧國 또는 斯羅國?}, 여왕女王을 세습하고 있었다.

마치 신라의 시조가 난잡한 무녀 여왕으로 추정하고 있군요


일제에 의해 오류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대문헌을 인용해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어찌하여 자신이 독단적으로 추정한 지명으로 반론한단 말이요


김상겸씨의 제목에서
BC24년의 고구리 기록에
박혁거세라는 남자 임금은 보이지 않는다. 라고 했소

필자 박병역은 김상겸씨가 올린 본문 중에
斯盧國 또는 斯羅國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허 참 기가 막힌다.

김상겸씨와 성훈씨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지 논리로서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소

대한민국 정통사서의 오직 삼국사기의 본문을 증빙하여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밝혀진
필자 박병역의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의 논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수용하지 않고,

진실을 진실로 믿지 못하는 부정적 관념이
가장 고치기 어려운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입니다.

김상겸씨와 성훈씨는
진실로 각성하고 깨어나길 바랍니다.

수정 삭제
박병역 선생님... 김성겸 09/06/30 [14:28]
박병역 선생님...
고대의 문헌으로 대응하여 드려도 난삽하게 얽어댄 주장을 재고하실 의향이 없으실 것으로 봅니다.
위에 인용한 기록은
BC100년~BC19년 기록중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오나,
같은 씨족이신 남당 선생이 필사하여 오신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그 전후좌우의 내용에 맞게 제가 정리한 것이오니,
험한 말씀은 거두어들이시고, 천추에 후회하실 일을 거두시라 감히 충고드립니다. 삼국사기라는 것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그마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편집 재편집되고 우그러져서 남겨진 기록을 참조는 하되 모든 것을
그에 맞추어서 일부라도 동아시아 땅덩어리 위에 재현해보셨다면,
나제통문이란 것을 신라와 백제의 통로였다라는 식의 역사를 해설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며칠만 기다리시면, 그 진상들이 상세히 기록된 책을 보실 수 있을 것이오며,
서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추정하여 우기면, 가 본 사람은 웃으면서 기다릴 뿐입니다... 수정 삭제
김성겸님은 헛수고 일 뿐이요 박병역 09/06/30 [14:56]

BC100년~BC19년 기록중의 극히 일부이고
남당 선생이 필사한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그 전후좌우의 내용에 맞게 제가 정리한 것이다. 라고 주장했소

남당선생이 필사한 기록이 설혹 전하고 있다 하더라도

상기 본문내용을 살펴 볼때
정사(正史)로 수용 할 수 없는
허구적 소설의 야사(野史)에 불과하며
참고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수고 일 뿐이오
수정 삭제
먼저 읽어보시는 것이 연구하는 이의 도리일 것입니다. 김성겸 09/06/30 [19:25]
먼저 읽어보시는 것이 연구하는 이의 도리일 것입니다.
소생도 번역하고 통독하기 전에는 반신반의 하였으나,
편집 재편집되어서 남겨진 삼국사기에서는 부드럽게 설명이 되기 어려웠던 것들이,
즉 시도 때도없이 그리 아끼시는 신라와 백제 땅에 출몰하는 락랑과 말갈이
아무런 심적인 거리낌이 없이 이해가 되는 등
최소한 왜곡 해설되어온 하많은 역사의 기록을 보완하여 줄 것으로 장담하오니,
조건반사식으로 손사래치지 마시고 읽으신 연후에
충고하신다면 일면 수긍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시는 것이 연로하신 학자의 도리가 아니실른지요?
지나치게 서쪽으로 가겼다가 지나치게 동쪽으로 몰리신 것으로 이해하옵니다...
이제 어르신과는 말을 섞지 않을 것이오니, 꾸준하시길 빕니다...
수정 삭제
합당한 주장이면 왜 수용하지 않겠소 박병역 09/06/30 [21:39]

김선생님도 주지의 사실과 같이
현행 고대사는 우리 국민의 손으로 만든 역사가 아니고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와 일본왕의 忠犬 식민사학자 이병가
대한제국을 영원히 망치게 할 목적으로 편찬된 망국적 식민지국사입니다.

이병도가 만든 망국적 국사를 고수하고 있는
이병도의 제자들 소위 강단사학자(똥강아지)와
얼빠진 정부당국기관(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의 세력들은
망국적 식민지국사를 정통역사로 믿고 철통같이 고수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망국적 식민지국사를 철폐하지 않는다면
장차 대한민국이 반드시 망하는 것이 필연입니다.

필자 박병역과 풀코넷 이복재 대표가 진실을 밝히는 역사연재 목적은
대한민국의 장래를 염려하며, 정부당국자들을 각성시켜서,
반드시 망국적 식민지국사를 철폐시키고,
일제와 이병도가 말살한 역사는 복원하고, 유린된 역사는 바로 잡아서
우리나라 정통적 국사 정립의 지침서 제시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송구하오나 김성겸님이 주장하고 있는
BC100년~BC19년 기록중의 남당 선생이 필사한
<남당>유고 <추모경>등의 황당한 야사(野史)는

필자의 정통역사 정립 지침에 참고할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김성겸님과 성훈씨는
BC100년~BC19년 기록중의 남당 선생이 필사한
<남당>유고 <추모경> 동명14년{BC24년} 기록과.
지난 해 세상에 내보낸 고구리사초사략 등에서

<박혁거세>가 이 한반도 남쪽 어디에
속칭 <신라> 또는 <사로>라는 나라를 열었다는 글자 부스러기 하나 없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라고 주장하며,

특히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을 부정하고 있소,

필자가 본 연재에서 주장하고 있는
➤ 기준왕이 건국했던 후3한의 78개국이 기록된
[1], 정통사서의 [後漢書-東夷列傳]등도 부정하고

[2], 삼국사기 본문으로 입증한 신라 건국지도 부정하고,
[3], 전라도지역에 산재돼 있는 신라 6촌도 부정하고.
[4], 신라 산으로 밝혀진 전라도의 각 명산(名山)도 부정하고

[5], 근세에 발굴된 무령왕능을 비릇
기준왕시대의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저(金馬渚) 유적물 등
삼국사기 본문과 일치하는 수많은 유물, 유적도 부정하고

김선생은 황당한 야사(野史)를 제시하고
신라, 백제, 가야의 3국 대륙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김성겸님이 황당한 야사(野史)로 제시 하지 않고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합당한 사료(史料)를 제시한다면
필자 박병역이도 왜 수용하지 않겠으며, 왜 참고하지 않겠소

김상겸님은 필독을 권하고 있으나
필자의 정통국사정립에 황당한 야사(野史)는
수용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김성겸님의 황당한 야사(野史)는
왜곡된 우리 국사정립의 지침서가 될 수도 없고,
대한민국 역사를 뒤집어서 조상을 모욕하는 野史 입니다.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이 역사관이 잘못되면
일생동안 허황된 헛소리만 주장하다가 끝내 허망 할 뿐이다.



수정 삭제
인사 말씀 chj9857 09/07/04 [03:37]
선생님 잘보고 갑니다
항상건강 하시고 행복하시길
축원합니다 수정 삭제
감사할 따름 홍익인간 09/07/16 [06:11]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시려는 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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