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도시에서 은거하라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1. 1. 22:17

- 삼백세 번째 이야기
2013년 12월 30일 (월)
도시에서 은거하라
  또 한 해가 저물었다. 이맘때면 흔히 듣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한 해였다. 끝없는 경쟁과 어두운 경제 상황, 지겹도록 반복되는 정치 싸움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너도나도 정신적 안식처를 찾고자 하다 보니,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힐링(healing) 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도시의 삭막함과 번잡함이 자신의 정신을 더욱 황폐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만 도시를 벗어나려고 한다. 잠깐씩 벗어났다 오면 활력이 새로 솟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아예 현대적인 삶을 버리고 그 옛날 사람들이 했던 은거(隱居)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곳만이 영원한 안식을 제공해줄 것인가? 도시에서 은거할 수는 없는 것인가?

  만력 병자년(1576, 선조9) 여름 4월에 이은암(吏隱菴)이 완성되었다. 모두 3칸인데, 창벽(窓壁)은 모두 원 바탕을 보존했고 지붕은 이엉을 이었다. 한두 학생들과 때때로 그 속에서 노닐었는데, 병자년부터 지금까지 어언 3년이 되었다. 객중에 내가 암자의 이름을 붙인 뜻에 대해 따지는 이가 있어서 말했다.
  “그대가 관원인 것은 맞지만, 은거는 아직 하지 않았지 않은가.”
  내가 대답했다.
  “이른바 ‘은(隱)’이라는 것은 반드시 새벽 문지기나 삼태기를 멘 자*처럼 멀리 속세를 떠나 돌아오지 않는 무리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리 중에 은거하는 이가 있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내가 벼슬했던 선배들을 보건대, 또한 더러 ‘은’으로 자호(自號)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깊이 근심하던 나머지 사물에 감회가 이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담아 이름을 붙였던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지, 진짜 은거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를테면 전대의 포은(圃隱), 목은(牧隱) 같은 분들이 그들이다.
  나는 비록 이곳에서 관리 노릇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지만, 내가 이 암자를 지었을 때 ‘은’의 지취에 부합되는 면이 많았다. 암자는 관사와의 거리가 몇 리 되지 않지만, 형세는 속세와 아주 많이 다르다. 위로는 천 척(千尺)이나 되는 깎아지른 벼랑이 있는데, 길이 없이 불쑥 솟아 있어 구름을 뚫고 날아가지 않는 한 발을 디딜 수가 없다. 아래는 바로 10리나 되는 긴 강이어서 얼핏 보기에도 검푸르니, 깊은 곳은 옷을 벗고 건널 수 없고, 얕은 곳도 옷을 걷고 건널 수가 없을 정도이다. 거기에 구불구불한 소나무와 괴이한 바위, 기이한 화초 등, 말쑥한 경내가 씻은 듯하여 하나도 먼지가 덮인 것이 없었다.
  나는 공무를 마친 여가에 대지팡이를 짚은 채 구름을 뚫고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늘 평상복을 입고 샛길로 가면서 고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고요히 앉아 향을 피우고 온 방 안을 고요히 한 다음, 혹은 도서에 마음을 쏟기도 하고, 혹은 음풍농월하면서 강산(江山)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어조(魚鳥)의 짝이 되기도 한다. 백성들은 태수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태수는 자신이 관리인 것을 알지 못한다. 이를 보면 내가 이은(吏隱)이라고 한 것이 어찌 다만 뜻을 담아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겠는가?”
  객이 “예, 예.” 하면서 물러갔다.

* 신문(晨門)과 하궤(荷蕢) : 신문(晨門)은 새벽에 성문을 여는 일을 맡은 관원이고, 하궤(荷蕢)는 삼태기를 메고 다니는 사람을 가리킨다. 모두 옛날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은사(隱士)들로서,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보인다.

萬曆丙子夏四月。吏隱菴成。凡三間。窓壁皆存素質。而覆以茅。余携一二學徒。時時遊息其中。自丙子至于今三年矣。客有難余名菴之義者曰。子吏則吏矣。隱則未也。曰所謂隱。非必如晨門荷蕢長往不返之流。吏之中自不妨有隱矣。余觀前輩做宦者。亦或有以隱自號。然不過幽憂煩惱之餘。觸感興懷。寓意託名而已。非眞隱也。如前世圃隱牧隱。是也。余雖不免作吏於此。然余構是菴也。其有會於隱之趣深矣。菴距官舍不滿數里。而勢甚夐絶。上有危崖千尺。斗斷無路。自非凌雲飛步。着脚不得。下乃長江十里。一望蒼然。深不可厲。淺不可揭。樛松怪石。奇花異草。淸境灑然。一物無塵。余於公退之暇。竹杖穿雲。䦨舟泝流。皆便服徑造。不使邑人知。靜坐焚香。一室岑寂。或玩心圖書。或吟弄風月。江山之主。魚鳥之侶。民不知太守之所在。太守不知其身之爲吏。是則余之吏隱。豈特寓意託名而已哉。客唯而退。


- 홍가신(洪可臣, 1541~1615), 「이은암기(吏隱菴記)」, 『만전선생문집(晩全先生文集)』 권2, 기(記)

  
  조선 중기의 문신 만전당(晩全堂) 홍가신이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있을 때, 낙화암(落花巖) 서쪽에 ‘이은암(吏隱菴)’이라는 암자를 지었다. 이 글은 그 경위와 의미를 객이라는 가상의 상대와 대화하는 형식으로 적은 것이다.

   이은(吏隱)은 관리 생활을 하면서 은거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은거라고 하면 흔히 번잡한 속세를 떠나 외딴곳에 숨어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땔감을 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만전당 자신은 그런 통념을 깨고 벼슬살이하는 와중에도 얼마든지 고을 백성들 모르게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은자처럼 지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은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속세를 아예 벗어나 은거하는 것을 소은(小隱)이라고 한다. 작은 의미의 은거라는 것이다. 소은은 다시 종사하는 일이나 은거하는 곳에 따라 어은(漁隱), 임은(林隱), 야은(冶隱)이라고도 한다. 시끄러운 도시나 분쟁이 많은 조정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은자의 여유를 누리는 은거는 대은(大隱)이라고 한다. 대은은 이은(吏隱), 시은(市隱)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중은(中隱)」이라는 시에서, 한가로운 벼슬을 맡아 여유롭게 지내는 은거를 중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대은을 소은보다 더 높이 쳤다. 그만큼 실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은, 대은, 시은으로 유명한 이로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동방삭(東方朔)과 진(晉)나라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이 있다.

   낭관(郞官)으로 있던 동방삭이 전혀 속박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자 사람들이 모두 미치광이라 하였는데, 술이 거나하게 오른 그는 말했다.


“나는 조정안에서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다. 어찌 옛사람처럼 깊은 산 속에서만 속세를 피하겠는가.”

  그에 비해 도연명은 도시에서 은거한 경우이다. 「음주(飮酒)」라는 시에서 그는 시끄러운 속세에서도 여유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들 사는 곳에 집을 지었지만                       結廬在人境
거마의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네                    而無車馬喧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問君何能爾
마음이 멀어지면 지역은 절로 외지는 것이라오     心遠地自偏

  속세의 이해에 초연하게 되면 수레 소리 시끄러운 번화가에 살더라도 산골짜기에 숨어 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채근담(菜根譚)』의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는 기풍을 지녔더라도 굳이 바위 동굴 같은 데서 거처할 필요는 없다.[有浮雲富貴之風 而不必巖棲穴處]

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곧 안식처가 펼쳐질 것처럼 여기겠지만, 마음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그곳도 도시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낚시를 하러 갔지만, 막상 낚시를 하다 보면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자리다툼을 하고, 조바심을 내게 되더라는 한 출판인의 개탄에서 실감할 수 있다.

   송(宋)나라 때의 시인인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의 시가 언제나 와 닿는 이유다.

중이 되기 전에는 일 많은 속세가 싫더니            袈裟未著愁多事
막상 승려가 되고 보니 일이 더욱 많구나            著了袈裟事更多

  새해에는 도시에서 은거하는 노력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권경열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 주요역서
      - 국역 갈암집공역,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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