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세 옥
1929년 대구 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개인전
서울, 동경, 뉴욕 캘리포니아 등에서 개인전 다수
서세옥은 1929년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1950년 서울대 미술대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이었던 49년 1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으며
60년 묵림회전 창립에 참가하여 이후 묵림회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동양화의 혁신운동에 앞장섰다.
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를 위시해서 한국현대미술 프랑스 순회전,
칸느 국제회화제, 한국현대미술유럽 순회전, 한·중 미술교류전 등
각종 국제전과 순회전에 출품하는 한편, 갤러리 현대, 일본 우에다 화랑,
파사데나 퍼시픽 아시아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국전에 비구상부를 설정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전통회화에 있어서 비구상적 경향을 주도했고 오랫동안
서울대 미대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正午(정오) / 1959 / 180x80cm
瑞日(서일) / 1970 / 72x130cm
고목 / 1970년대 / 65x73cm / 종이에 수묵담채
無心(무심) / 1972 / 72x130cm
猫(묘) / 1974 / 72x80cm
雄(웅) / 1975 / 72x80cm
候鳥(후조) / 1975 / 63x50cm
사람들 / 1985 / 164x260cm
사람들 / 1986 / 164x260cm / 종이에 수묵
사람들 / 1986 / 260x164cm
사람 / 1987 / 90.5x87.5cm / 종이에 수묵
사람들 / 1987 / 132x163cm
군무 / 1987 / 164x260cm
춤추는 사람들 / 1989 / 80.5x87 / 종이에 수묵
사람 / 1989 / 81.5x66cm / 종이에 수묵
산 / 1989 / 100x81cm / 종이에 수묵
두 마리 새 / 1989 / 132x163cm / 종이에 수묵담채
사람 / 1989 / 101x87
정오의 원무 / 1989 / 80x87cm
춤추는 사람들 / 1995 / 163x129cm / 종이에 수묵
사람들 / 1996 / 104.5x128cm / 종이에 수묵
춤추는 사람들 / 1996 / 137x173cm / 종이에 수묵“내가 원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고 하는 것이 가장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유를 향한 몸부림일 뿐이지 그것을 대단한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참된 자유에의 해방과 영원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술이 이러쿵저러쿵 하며 테두리를 만드는 것은 본질을 흐려놓는 일일 것입니다. 예를들어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니까 이것을 그려야하고 저것이 예술이니까 저렇게 그려야 하고 미학이 이러니 이렇게 해야한다는 따위는 예술과 예술가들을 묶어 놓는 속박에 불과하지요. ”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있는 모든 만물의 중심이고 문화나 예술이 인간에게 비롯되기 때문에 나는 즐겨 인간을 그립니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상징적으로 걸러서 표현하고 승화시키려는 까닭은 헛된 겉모습을 벗겨낸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싶었습니다.”- 서 세옥 -
산정선생은 한국화니 동양화니 추상이니 구상이니 하는 말들을 싫어한다. 선생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자유를 희구하는 몸짓일 따름이다. 형태와 색채 그리고 구성에서 자유로운 그림. 삶과 아름다움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선생이 추구하는 그림의 세계이다. 1959년에 제작된 「점의 변주」라는 작품을 보면 무념으로 그은 점들만 있을 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같은 해에 그려진 「선의 변주」역시 수직으로 힘차게 내려그은 선들이 반복될 뿐이다. 마치 작품을 시작하기전의 습작과도 같은 작품에 선생은 완성을 의미하는 낙관을 찍었다. “50년대 중반부터 한동안 화면에 점을 찍고 선을 긋고, 먹물을 뿌렸어요. 재미있더군요. 점을 연역시키면 선이 되고 그 실 꾸러미를 풀면 우주에 꽉 차게 되지요. 점은 미분도 할 수 없고 아무리 쪼개더라도 하나가 남게 되지요. 이 점은 ‘위치는 있지만 면적이 없다’는 식의 서구적인 개념과는 다른 것이지요. 그 속에는 우주의 본질이나 인생의 참모습이 들어있습니다.” 산정선생의 작품에는 별다른 언어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그 정신적 깊이를 엿 볼 수가 있다. 선생의 그림에서 그것이 선이든 점이든 사람이든 새든 그 형상이 중요하지 않다. 선생이 지향하는 세상은 정신적 충만으로 가득 찬 절대적인 경지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실재일까요. 실재라는 것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개념이 다릅니다. 그림에서 먹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대상에서 일시적인 색이나 형태에 대해 자유롭고 싶고 모든 사물에서 오직 본래의 본질적인 모습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질과 정신적인 경지를 추구할 때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70년대 중반 선생은 <산정 스타일>이라 이름 붙여진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 낸다. 단순화된 선으로 사람의 형상을 화면의 전면에 나열하는 「사람」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동양회화의 주요한 기법인 부감시(俯瞰視)를 원융하여 운필의 변화와 먹의 농담 그리고 여백의 미가 결합된 작품이다. 일획으로 그려진 사람의 형상은 때로는 화면에서 춤을 추는 듯 하고 손을 잡고 어디론가 나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있는 모든 만물의 중심이고 문화나 예술이 인간에게 비롯되기 때문에 나는 즐겨 인간을 그립니다. 인간의 희노애락을 상징적으로 걸러서 표현하고 승화시키려는 까닭은 헛된 겉모습을 벗겨낸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 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선생은 석도의 일획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작가중의 한사람인 듯하다. 선 하나로 표현된 형상은 인간의 만가지 동작이 들어있고 먹의 농담만으로 여백이라는 시적인 공간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화가 가능했던 것은 ‘상념’과 ‘욕망’을 버리고 마음의 여백을 둘수 있었던 선생의 강인한 성품 때문이었다. 산정 선생은 추상과 구상, 서양화와 동양화와 같은 갈래명칭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실천한 의지의 작가이다. 역사의 풍파에도 일히일비 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았기에 가 닿을 수 있는 높은 정신세계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고암의 인물군상이 격정과 시대의 아픔으로 읽혀진다면 산정의 인간은 높은 조형성을 수반한 회화로 완성되고 있다. 산정 선생은 고답적인 한국화의 세계를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확장시킴으로써 한국화의 현대화라는 명제에 분명한 획을 그은 작가이다. 산정선생은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하던 선친의 영향으로 책읽기를 좋아했던 선생은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출처;수묵화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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