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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치료할 화두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8. 10. 6. 21:47

고전칼럼 006                        (2008. 9. 24. 수)

시대를 치료할 화두

1.

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닮았다. 겉으로는 서로 다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밑바닥에 흐르는 사상적인 기저를 보면 같은 면이 너무 많다. 그래서 역사가는 그것을 기준으로 시대를 나누어 파악한다.

예컨대 위진(魏晉) 시대에는, 오랜 세월 동안 왕조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해온 유가(儒家)사상의 형해화(形骸化)를 비판하고 고고한 인간 본성의 자유를 일깨운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있는가 하면, 지나친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나머지 남편 하나만 데리고 살기에는 황제인 동생과 비교할 때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면수(面首) 30명을 데리고 산 산음(山陰)공주도 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달라 보이는 이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상당히 공통된 사상적 맥락을 찾을 수 있다.

2.

그래서 역사가들은 끊임없이 시대적 정신을 찾기에 노력하며, 더 나아가서 그 시대적 정신으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마련하려고 한다. 북송시대의 대역사가 사마광(司馬光)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쪽에 있는 거란족인 요(遼)와 계속 싸워야 하니 재정적 부담이 늘어난 것은 차치하고라도, 북송의 앞날을 위하여 시대를 진단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가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통사(通史)를 쓰는 것이었다. 통사를 통하여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그는 먼저 어디서부터 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하여 《자치통감》은 주(周)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시작되었다. 왜 주기(周紀)를 쓰려면 무왕(武王)부터 써야지 주말(周末)의 위열왕부터 썼는가? 또 위열왕부터 쓰기 시작한다 하여도 왜 원년부터가 아니고 23년부터인가? 《자치통감》을 읽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그 해답은 《자치통감》의 첫 구절에 있다. 첫 구절은 모두 다 아는 것처럼, ‘처음으로 진(晉)의 대부(大夫)인 위사(魏斯)·조적(趙籍)·한건(韓虔)을 제후로 삼았다.’로 시작된다. 진의 대부인 위(魏)·조(趙)·한(韓)씨들이 연합하여 지(智)씨를 없애고, 진(晉)의 제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셋으로 분할하여 나누어갖고서, 주(周) 위열왕에게 압력을 가하여 자기들을 제후로 올려 달라고 하자, 위열왕이 이들을 제후로 올려 준 사건이다. 그리하여 보통은 이 한·위·조 세 대부를 하극상(下剋上)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나무라고 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을 기준으로 사마광은 역사를 쓰기 시작하였으니, 그렇다면 하극상이 일어난 것을 하나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으로 본 것인가? 그러나 그 이전에도 하극상은 있었으니, 춘추시대 이후로 철기문명이 본격화하면서 하극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사마광이 특히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마광의 논평을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세 진의 대부[삼진(三晋)]들이 그의 임금에게 포악하고 임금을 멸시하였으니, 주의 질서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분명히 위열왕은 하극상을 엄격하게 대하고 가능하면 토벌하여야 옳았으나, 위열왕은 실제로 이를 실행할 힘이 없었으니, 별 수 없이 해 달라고 하는 대로 해 준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마광의 생각은 달랐다. 그 책임의 대부분은 위열왕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삼진(三晋)이 주왕을 완전히 무시하고자 했다면 제후를 시켜 달라고 신청하지도 않고 스스로 제후라고 했을 터인데, 그러나 주왕이 비록 힘은 없지만 질서의 측면에서는 아직도 최고의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였기에 제후를 시켜달라고 요구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요구를 주왕은 들어 주었다. 비록 압력을 가해서 얻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삼진이 제후로 승격한 것은 주왕의 승인에 의해 합법적으로 얻은 것이 되었다.

둘째로, 삼진이 하극상을 하였는데 주왕은 힘이 없어서 토벌을 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다른 제후국들이 의병이라도 일으켜서 이 하극상을 일으킨 삼진을 공격할 수도 있었는데, 이미 주왕이 합법적으로 인정해 주었으므로 의병을 일으킬 명분을 송두리째 없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도 예(禮)의 질서를 못 잡고, 다른 사람이 예(禮)의 질서를 잡을 길도 막아 버렸다는 것이다. 즉 주나라 왕실이 미약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원칙의 질서[예(禮)]를 스스로 지키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까지도 지키지 못하게 만든 주 위열왕의 행동에 허물이 더 많다고 한 것이다.

3.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주장의 근거는 학생에게 학습권이 있고, 믿을 수 없는 선생이 많이 늘었으므로 과거처럼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관념은 낡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를 내세우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생을 못 믿고서야 그 선생이 가르치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못 믿을 선생에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 기산풍속도 중
서당그림


믿을 수 없는 선생이 옛날이라고 없었겠는가? 당연히 못 믿을 선생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전에는 그 상급자가 이를 조정하였지 학생에게 평가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교육의 권한은 여전히 선생에게 있었고, 그리하여 선생의 권위는 지켜졌으며, 따라서 그 교육은 살아 있는 교육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이 선생을 평가하고 채용하는 것이 공식화 되었으니 선생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따라서 교육이 살아날 방법이 없다. 아무리 선생이 많은 지식을 가르쳐주어도 역시 학생의 평가 대상이고 피고용자이다. 그러니 그가 무슨 철학을 가지고 교육을 하겠는가?

이 시대에 문제는 참으로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다. 오늘날은 경쟁의 시대여서 내가 친구보다 한 글자라도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친구가 시험을 못 보아야 내 석차가 올라가므로 친구와 사귄다고 하여도 마치 정보원의 정보 캐기와 같아졌다. 이러한 시대에는 선생도 없고, 학생도 없고, 끝없는 장사꾼들의 시장논리만 남아있으니, 배우는 것은 시장논리이고, 학교 선생은 설 자리가 없다.

사마광은 역사를 서술하면서 예(禮)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 한탄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이 세태와 그 미래를 보면서 교육의 붕괴를 한탄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학생은 없는가? 동시에 진정한 스승은 없는가? 미래를 보면서 사뭇 걱정스러울 뿐이다.


글쓴이 / 권중달
* 중앙대 사학과 졸업. 현 중앙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박사학위 논문 : 『자치통감』이 한국과 중국의 학술에 끼친 영향
* 권중달 교수는 1997년부터 『자치통감』 번역을 본격 시작하여 2005년 말에 200자 원고지 8만 여장 분량으로 완역하였고, 수정 및 교정 작업을 거친 원고를 직접 설립한 ‘도서출판 삼화’를 통하여 출판하고 있다. 현재 19권까지 나왔으며, 2009년 12월까지 전 32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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