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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삶에서 눈물을 느끼는 이유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8. 12. 26. 21:39

고전칼럼 009                 (2008. 12. 24. 수)

공자의 삶에서 눈물을 느끼는 이유

《논어(論語)》의 기사들 중 가슴에 울려퍼지는 감격을 주는 장면들이 있다. 공자가 조롱을 당하면서도 세상을 향하고 세상을 위하는 자신의 신조를 꿋꿋이 지켜가는 장면들이다. 거기서 드러나는 공자의 모습은 근엄하고 권위에 찬 어른이라기보다는 여러 번의 좌절을 견디면서 버텨가는 사랑의 일꾼이다.

《논어》 권18 〈미자(微子)〉, 권14 〈헌문(憲問)〉 편에는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농군, 낭인, 하급관리로 숨어 사는 현자들이 여럿 등장한다. 접여(接輿), 장저(張沮), 걸닉(桀溺), 하조장인(荷조丈人), 하궤자(荷궤者), 석문(石門)의 관문지기 등이 그들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공자에게 은자들은 우정 어린 충고를 보낸다.

“봉황아 봉황아, 어찌 덕을 쇠하게 하는가! 지나간 일은 나무랄 바 아니지만 다가올 일은 고쳐나갈 수 있는 것을! 그만두게 그만두어, 오늘날 정치에 나아가는 것은 위태할 뿐이니.”

“음악 소리에 마음이 너무 강하게 실렸어.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만두면 될 것을. 물이 깊으면 옷을 추어올리고 건널 것이고, 물이 얕으면 걷어올리고 건널 일이지.”

논어에 나오는 은자들은 대체로 공자와 비슷하거나 공자보다 높은 연배에 해당하는 인사들로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가 허망한 것임을 나름대로 깨달은 사람들이다. 원칙을 어기고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권모와 술수의 풍조가 천하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판에,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자의 태도에 갑갑함을 느끼는 모습들이다. 타협 없이 꼿꼿하게 요ㆍ순ㆍ우ㆍ탕의 도(道), 인정(仁政)과 덕치(德治)로써 세상을 바꾸어내겠다는 공자의 의지가 가상하면서도 그 노력이 좌절될 것에 대해 연민의 정을 품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공자의 제자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농끼 어린 어투로 비판하면서 공자를 떠나 자신들과 함께하기를 권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권유는 물론 공자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당장의 일에 연연하여 성공하기를 기약하기보다 초야에 묻혀 도를 지키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다.

“팔다리로 노동하지도 않고 오곡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선생은 무슨 선생이여?”

“그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인 줄 알면서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가?”

“콸콸 흘러내리는 저 물살이 세상 어디서나 똑같은데, 누구와 더불어 그걸 바꿀 수 있으랴. 저렇게 사람을 피해다니는 선비를 따르기보다는 우리처럼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게 나을 걸세.”

이들의 충고와 권유에 대해 공자는 자신의 진정이 통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한 적이 없다. 한 마디씩 툭 던지고 사라지는 은둔자들의 조소나 권유에 대해 공자가 언급한 것으로 논어에 실린 말은 두 가지가 있다.

“과감하기도 하지. 어려울 게 없겠군.”

세상에 관해 싹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고 속 편한 태도라는 것이다.

“길짐승, 날짐승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들의 무리와 더불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와 더불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도가 있었다면 나는 바꾸고자 하는 일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만나면 눈물이 핑그르 돈다. 공자는 이렇게 생각하였으리라. 권력관계에서 떠나 초야에 묻힌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피할 수는 없다. 인간사회를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오히려, 그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 돌아다니며 도를 살려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도가 원활하게 펴질 전망이 있는 세상이라면 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두하여 옛날 도를 즐기며 살 것이다.


◁◀ 공자상


천자가 천자 노릇을 하는 통일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공자의 꿈은 13년간의 주유천하를 거치면서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기대했던 위나라에서 군사계책에 대해 묻자 마침내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새가 나무를 택할 수 있는 법, 나무가 어찌 새를 택할 수 있을 것이냐.”(史記 孔子世家)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공자는 떠돌아다니는 삶을 접었다. 고국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육예(詩ㆍ書ㆍ易ㆍ禮ㆍ樂ㆍ春秋)를 정비하는 일과 군자를 양성하는 교육에 시간을 바쳤다.

공자가 주유천하를 끝낸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은자들의 충고를 수용한 결과일 수 있다. 적어도, 세상사에 진력하다가 산으로 숲으로 들어간 선배들의 행적을 얼마쯤은 뒤따른 셈이다. 그러나 공자의 행로가 그들과 다른 점은 끝까지 세상사에 관한 관심과 개입정신을 놓지 않은 데 있다. 3천에 이르는 제자들의 육성을 통해 군자학(君子學)을 확산하고 그를 통해 미래를 기약하고자 한 것이다. 여러 주석들이 제시하는 해석들을 두루 고려할 때, 공자가 은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면 그 때 할 말은 이런 정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대들처럼 이 인간세상을 버리거나 잊을 수 없다네. 그대들은 내가 아등바등 세상 일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겠지. 하지만 그것은 성공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닐세. 내게 지워진 이 시대의 짐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지.”

자기 시대의 학문과 이상적 정치의 포괄적 임무(德과 文)를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확신한 그는 결과적 성공 여부와는 무관히, 하늘이 맡긴 그 짐[천명(天命)]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은자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원했던 공자는 그들을 내 편으로 끌어오지도 못하고 내가 그들의 편에 끌려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적어도 서로가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을 이해하고 양해받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공자가, 보기에 따라 골몰스럽고 구차스럽게 재상의 자리를 구하러 다닌 데에는 두 가지 수준의 중요한 근거 내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세상 사람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인(仁)의 덕이다. 모든 사람을 나와 똑같은 주체로 느끼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서(恕)의 자세이다. 이 철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공자는 천하에 덕치를 펼치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둘째, 공자는 치열한 권력다툼과 비열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도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깃든 가능성을 믿었다.

“내가 남들에 대해 누구를 헐뜯어 낮추고 누구를 기리어 높이랴. 다만 기릴 만한 데가 있다면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에 걸쳐 도(道)가 왜곡되지 않고 시행된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인을 실현할 자질을 지녔다는 철학적 신념, 그리고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진다면 백성들은 그것을 수용해 낼 소양을 지녔다는 현실적 낙관, 이 두 가지가 공자의 고난 어린 생애를 위대한 것으로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글쓴이 / 유초하
*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 저술(공저)
『한국인의 생사관』, 2008, 태학사.
『우리 대학 절망에서 희망으로』, 2006, 전국교수노동조합.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2001, 예문서원.
『한국사상사의 인식』, 1994,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