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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당 김남수 선생 침뜸의 대가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8. 14. 18:59

無極保養뜸을 通해 본

灸堂 金南洙의 醫學思想

뜸사랑 침뜸의학 교수

전 상 희

1. 열 기

灸堂 김남수(1915- )선생은 침뜸醫師로서 世上에 널리 알려져 있다. 66年을 넘긴 임상경험은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기도 하지만 선생의 진면목은 단순히 침뜸의 명인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스승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 글은 선생의 오랜 임상경험과 철학이 결집되어 만들어진 「무극보양뜸」이 지니는 의학적 사회적 국가적 의미를 정리하여 사상가로서의 구당 김남수 선생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선생의 의술이 훌륭한 임상적 결과를 얻고 있고 많은 환자들의 입을 통하여 그 결과가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일생을 밝힌 연대기나 기록이 아직도 정리되지 못하여 사상적 배경과 발전과정을 밝히지 못하고 있고, 선생께서 저술하신 책이나 논문에 대한 의학적 사상적 연구와 평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은 죄송스런 일이다. 또한 그동안 의료인으로서 선생께서 펼쳐 온 업적이 점차 세상에 알려 지면서 여러 가지의 칭송과 오해가 엇갈리는 점이 있고, 이익과 관점을 달리 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사는 요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생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데서 생기는 이유도 있어 후학으로서 이를 밝히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이 작은 논문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선생의 침뜸의술의 기초이자 핵심인 무극보양뜸을 중심으로 선생의 의학사상을 조명해보려는 시도이며 따라서 선생의 침뜸의학에 관한 전반적인 것을 포괄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선생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첫째는 의료인으로서의 평가이다. 의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의학사상, 의학적 내용, 임상결과, 의료제도에 관한 인식, 침뜸살리기 운동의 전개 등이 해당될 것이다.

둘째는 사상가로서의 평가이다. 선생의 국가관, 사회관, 교육관, 도덕관, 인간관을 비롯한 사상 전반에 대한 정립이 필요하고 이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 져야 의료인으로서의 선생의 참모습이 분명해 질 것이다. 셋째는 실천가로서의 평가이다. 일상생활에 대한 선생의 견해와 참모습, 실천하는 봉사철학,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고 실천하는 자세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 글로서 선생의 삶과 사상을 모두 담아 낸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이 작업이 기초가 되어 의학적인 면이나 임상적인 면에 대한 연구가 많은 분들에 의해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침뜸의학의 발전과 함께 선생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2. 배경과 생애

제1기-고향 그리고 가족

선생은 한일합방이 5년 정도 지난 1915년 5월 12일 전라남도 광산군 안청리에서 부친 김해김씨 문경공파(文敬公派) 7세손인 김서중(金瑞中)과 모친 최임곡(崔林谷)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태어나서 얼마 후 이웃 마을인 장성군 남면 평산리로 옮겨가 성장기를 보냈다. 문경공파의 족보에는 용남(鎔南)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고 남수(南洙)는 자(字)이다.

1942년 27세에 18세의 장수(長水) 황씨(黃氏) 가문의 수만(壽萬)과 결혼하여 1남3녀를 낳았다. 당시에는 만혼(晩婚)을 하신 선생의 부인에 대한 애틋한 정은 각별하셔서 지금까지도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선생의 형님이신 기수(己洙)공은 선생의 부친을 닮아서 체구가 비교적 크셨다고 하는데 유독 선생만이 작은 체구였다. 어릴 때 식성도 까다로와 고기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곤 하여 21세까지 고기라고는 오로지 마른 명태 한가지만 먹었다고 하며, 선생의 기억으로는 두드러기가 심해서 그것을 고치려고 두드러기에 용하다는 샘물에 목욕을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까다로운 식성에 대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훗날 무극보양뜸의 정립기준이 되어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는 잘먹고 숨을 잘 쉬는 것이 건강의 기준이라는 말은 그의 치료론의 기본이 된다.

성장기를 보낸 장성은 유학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으로 선생의 부친이신 서중공 역시 학문에 밝았고 경제관념 보다는 유학의 핵심사상인 「인(仁)」과 「교육(敎育)」을 통한 「올바른 사람」「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이 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늘 강조하셨다고 한다.

선생의 집에는 가족들 외에 늘 10여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함께 할 정도로 붐볐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한 것으로 짐작되며 선생과 기수공은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평생의 일이 되는 침뜸술도 함께 익혔다. 가형이신 기수공은 침뜸의술에 빠른 진전을 보여 광주에서 택시를 타고 치료받으러 갈 때 “「비아침집」가자”고 하면 누구나 “예” 할 정도로 일찍부터 인근에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돈 먼저 밝히면 올바른 사람이 못된다」는 이러한 가풍은 훗날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라는 봉사철학을 형성하는 배경이 된다.

유교의 기본적인 관념이 그러하듯이 선생도 가업을 잇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였고 따라서 선생에게 침뜸의 공부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계승은 침뜸의술을 “생업(生業)”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공생(共生)”이라는 가치를 중시하여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또는 함께 나누는 건강의술인 무극보양뜸을 창안하고 보급하는 배경이 된다. 공생에 대한 선생의 실천은 1984년 경북 성주군 대가면으로 봉사를 가면서부터 시작되며 이후 침뜸의료봉사는 생업과 봉사를 반반으로 생활화하는 것으로 정립된다.

선생의 고향 호남은 곡창지대로서 일제의 강점기를 통하여 유난히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수탈은 고향 장성의 지식인들을 항일투쟁으로 몰고 갔고 이들 가운데는 사회주의를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장성은 산이 많은 지역으로 항일운동가들이 체포를 피해 산으로 도피해서 생활을 하면서 인근의 젊은이들을 모아서 민족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었다.

선생은 이들이 읽는 책을 빌려 보기도 하고 안중근 의사가 여순의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고 부고가 고향에 도착하자 그의 어머니가 부고를 놓고 매질을 하면서 내가 너를 가르칠 때는 호랑이를 죽이라고 했지 토끼를 잡으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와, 양반 가문의 이순신이 평민인 송구봉을 스승이자 벗으로 삼고 친하게 지내자 이순신의 아우가 형을 비난을 하였는데 어느 날 이순신이 아우에게 송구봉을 만나게 하자 송구봉의 인품과 실력에 감복하여 오히려 스승으로 섬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송구봉이 이순신에게 병법을 지도하면서 책상에 9개의 구멍을 뚫고 구궁(九宮)의 운용과 변화를 가르쳤는데 7개는 가르쳐 주고 2개는 스스로 깨우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그들로부터 배웠다는 기억을 한다.

선생은 이들 고향의 선배들로부터 평등사상과 민족주의 그리고 자주정신을 배우고 교육의 중요성과 방법론을 깨우친다. 이들에게서 지식과 사상을 습득했던 선생은 가르침을 주고받는 데는 대가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침뜸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초기에 무료로 강의를 하는 대신 자신의 봉사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이 시기에 교육에 참여하였던 사람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뜸사랑 봉사단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선생은 자신의 지난 체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을 하지만 해방 이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언급은 좀처럼 없다. 그것은 자신이 일제시대에 공직을 맡아서 일했다는 수치심 때문이다. 선생은 징용을 피해 면사무소의 후생담당으로 일했다고 하는데 침쟁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약을 공부했고 가장 종류가 많았던 4,000여 가지나 되는 위장약을 모두 암기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공직을 맡았다는 것은 선생에게 평생의 콤플렉스로 작용하여 많은 동시대 사람들이나 해방 이 후 사람들이 일본의 장점을 공식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말할 때에도 선생은 최소한의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말에 능통한 선생이 절대로 일본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선생의 태도는 침뜸에 관한 경우에만은 예외이다. 일본인이 침술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호침(毫鍼)의 자침에 사용하는 「관(管)」을 개발하여 자침을 용이하게 하였다는 점과 침뜸의사를 민간에서 선발하여 지방자치단체에서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다행히도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서 자신에게 침뜸의사 면허를 얻게 하였다는 점이다. 선생은 자신을 비롯한 침뜸의사들이 일제 때 면허를 얻어서 침뜸의 맥을 잇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방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분명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것만큼은 자신도 기뻤으나 실제로는 많은 걱정을 하였고 그 걱정이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과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면서 현실화되자 선생의 실망은 커져 갔다.

해방 이후 선생은 당분간 형제가 한 집에서 살았는데 가형인 기수공이 정미소 사업에 실패를 하고 재산을 탕진하자 처가로 가서 많은 신세를 졌다고 한다. 처가에 의탁하고 살던 선생은 한 때 4개 면에 담배농사를 짓도록 하여 농가소득을 높이는 일을 하였다.

제2기-침뜸의 수련기

사람들은 대부분 중년이 되면 새로운 삶을 사는 것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려한다. 그러나 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벌어진 남북전쟁은 40여세를 바라보는 선생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여 그때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 선생을 세상 밖으로 나가게 한다.

휴전협정을 앞두고 마지막 격전이 벌어지는 동부전선 양구에 주둔한 노무사단(KSC)에 자원입대하여 21연대 의무대에 배속된 선생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씻겨서 화장을 하는 일을 한다. 자원입대는 전쟁 막바지에 징집이 강화되자 어차피 전쟁터에 갈 바에야 의무병으로 참여하자는 결심에서였다고 한다. 전쟁물자를 지고 전투지역으로 갔다가 시신을 메고 돌아오는 일을 하면서 선생은 수많은 죽음을 확인하고 평화에 대한 열망을 하게 된다.

의무병으로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침뜸의사인 선생에게는 다른 침뜸의사들이 갖지 못한 소중한 경험이 된다. 휴전협정을 앞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사망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임상을 경험하고 무엇보다 해부학적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선생은 그 때 살아있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민망하다고 느끼시면서 그 미안한 감정을 평생을 두고 그들의 가족일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한다.

죽음을 보면서 선생은 인간의 업(業)을 생각하고 침뜸에 관한 책 외에 평생을 퉁하여 가장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수업(人間修業)」이라는 일본책에 나오는 삶을 그대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인간으로서의 업(業)을 닦는다”라는 의미의 이 책은 백만장자의 아들로서 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일본의 청년이 인간수업을 하기 위하여 밑바닥 삶을 모두 경험하면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선생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약국을 경영하다가 우연히 고향 광산군 비아면에서 파출소장을 하던 지인(知人)을 만나서 그의 소개로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판문점에서 창고를 짓는 일에 목수라고 속이고 참여를 하기도 한다. 기와지붕을 올리는 일을 끝내고 보니 구멍이 숭숭나서 창피를 당하기도 하셨다지만 그 무렵 선생은 인간수업의 내용을 충실히 실행하고자 하여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자고 결심하고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에 손을 댔다고 한다.

훗날 강연을 통하여 선생은 사람의 일 가운데 남자로서의 일은 지게지는 일이 가장 힘이 들고 여자의 일은 빨래를 하는 것이라고 술회한다. 선생의 이러한 경험은 마치 무술을 수련하는 검객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시합을 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작업을 통하여 사람들이 어떤 근육을 많이 사용하는지, 생활 속에서 질병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경로를 통해 발전되는 가를 알게 되는 이 시기는 중년의 선생에게는 침뜸이 민중의 삶과 절대로 유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새롭게 가지는 계기가 된다. 실로 선생의 생활침뜸 철학이 본격적으로 형태를 드러내는 이 시기에 선생이 경험한 침뜸공부의 방법론은 지금 뜸사랑의 회원들에게 봉사가 곧 공부라는 교육방법의 모태가 된다.

노동을 통하여 형성된 민중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특정인에게 침뜸의술이 독점되어서는 아니되며 누구나 배우고 익혀서 그 만큼 활용하고 베풀어야 한다는 의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실현되도록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신 듯하다.

제3기 침뜸 살리기 국민운동과 교육 그리고 봉사의 시기

5.16은 선생의 인생을 운동가로 몰고 가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선생의 증오는 그들이 민중들에게서 침뜸을 앗아갔다는 인식 때문인데 그들이 서양적 사고를 가지고 침뜸을 비과학적인 미신과 같이 취급하여 무시하고 꺾어 버렸다는 것이다.

침뜸이 국가의 공식적인 의료체계에서 밀려나고 우리 의학에서도 한약에 밀려나자 선생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침뜸 살리기를 위한 활동에 전념한다.

선생의 침뜸 살리기 운동은 입법운동과 시민운동의 두 가지 측면에서 펼쳐진다. 입법활동을 통한 침뜸 전문인 양성제도의 부활은 정책입안자들의 인식부족과 일부 서양의사 및 한의사에 의한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난관에 부딪치자 선생은 직접적인 공격과 우회전략을 동시에 전개한다.

입법활동을 위한 선생의 노력은 상당한 기간 동안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다른 침뜸의사들과 협력하여 펼쳐졌다. 이 기간 동안 선생의 설득 대상은 주로 정부와 입법기관 또는 유력인사들이었다. 선생의 노력은 국회에 침뜸무료봉사실을 개설하고 3차례의 교육을 실시하는 업적을 올렸다.

그러나 유일한 침구사들의 합법적 단체인 대한침구사협회의 집행부가 자격증에 목마른 재야침뜸인 또는 침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인증서에 현혹되도록 하는 것을 선생은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이를 개선해 보고자 2001년 2월 대한침구사협회 회장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들게 된다. 이 패배는 입법활동과 침뜸 살리기 운동에 대한 협력노선을 독자노선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패배 후 선생의 생각은 우리 침뜸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과 침뜸교육의 대중화라는 두 가지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침뜸의 정통성을 세우는 문제는 우리 침뜸의 역사를 규명하는 일과 침뜸의학 또는 침뜸의술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의 전술적 대안이 있다. 하나는 남북한 침뜸의 교류이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은 지난 2001년 6월 침뜸인으로서는 최초의 평양방문으로 시작되었다. 보다 구체적인 진전을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교육과 봉사의 교류를 시작으로 상호이익을 도모하는 선에서 가시적인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정책적 지원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북한의 침뜸의학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는 우리 침뜸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재단의 설립이다. 이미 상당부분 설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온 이 사업 역시 곧 그 실체가 가시화될 것으로 보이며 참여를 희망해 온 유력인사들이 많다.

침뜸교육의 대중화는 그 동안 노력해 온 우리침뜸 살리기 운동의 가장 적극적이고 효율적이며 가시적 결과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학력, 연령, 직업,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정규침뜸교육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서 2001년 6월 말 현재 600여명이 이미 교육을 수료하였거나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외에도 무극보양뜸 단기강좌를 전국에 확대실시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또 다른 형태의 침뜸교육은 의료의 사각지대인 농촌에서 시험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충청남도 금산군과 협력하여 시범사업으로 전개 중인 “뜸마을”조성사업은 농촌주민 스스로 뜸을 통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키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사업은 농촌의 특수성과 현행의료제도의 문제점을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에서 개선하고자하는 금산군과 보건소의 과감한 추진력과 선생을 비롯한 뜸사랑 회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미 상당한 가시적 결과를 얻고 있으며 결과가 정리되는 대로 정책적 대안으로 제시될 것이며 현재 우리나라 의료문제의 가장 효과적인 대안인 일차보건의료중심의 의료체제를 실현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제4기 꿈의 실현기-건강한 사회

선생이 꿈꾸는 궁극적인 목표는 인종과 이념을 초월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건강을 지키고 사랑을 나누는 세상이 실현되는 것이다. 90을 앞둔 선생은 이제 침뜸이 어느 특정인들에게 독점되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침뜸의술을 막침, 막뜸이라고 비아냥거리는 평가에도 절대 노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도 자신의 오랜 임상경험이 잘 낫는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건강한 사회에 대한 선생의 기본인식은 건강한 몸에서 시작된다.

이 부분에 대한 선생의 목표는 학교교육과 산업현장에 침뜸이 참여하는 것이다. 아직 구상단계에 있는 이 계획은 학생들의 건강을 바탕으로 한 학업성취도제고는 물론 교우관계의 개선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자신한다. 산업현장은 특히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산업화, 정보화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산업인력은 생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건강한 산업인력은 국부(國富)를 향상하는 필수조건이다.

선생이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 생전에 실현되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업적이 남긴 자취는 면면히 이어지면서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3. 원시의학(原始醫學)-무극보양뜸의 원리와 세계관

앙이관어천문(仰以觀於天文) 부이찰어지리(俯以察於地理) 시고(是故) 지유명지고(知幽明之故) 원시반종(原始反終) 고(故) 지사생지설(知死生之設) 정기위물(精氣爲物) 유혼위변(游魂爲變) 시고(是故) 지귀신지정상(知鬼神之情狀)

우러러 보아 하늘의 무늬를 살펴보고 굽어보아 대지의 이치를 알아본다. 그렇게 하여 어둡고 밝은 연고를 알게 되며 시작한 것을 근원으로 하여 마지막을 돌이켜 본다. 그러므로 죽음과 삶의 이론을 알게되니 정과 기가 만물이 되고 혼이 움직여 변화를 일으킨다. 그렇게 하여 귀신의 형체와 움직임도 알 수가 있었다.

이상은 동양의 고전 중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주역(周易)의 계사상전(繫辭上傳) 제4장의 한 부분으로 동양철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학적인 통찰도 포함되어 있다.

우주와 자연의 모습과 이치를 살펴보니 시간적 공간적 변화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거기에 인간의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복잡하지만 근본은 처음에 시작한 곳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 대목은 주역의 이치를 궁구(窮究)한 공자의 해설이다.

선생이 주역의 이치를 공부하였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유학의 전통이 강한 곳으로 유명한 고향에서 40여년을 살았고 음양오행을 비롯한 전통학문에 깊은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학문적 견지를 넘어서 자기화(自己化)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원시반종(原始反終)」은 동양사상의 핵심적 관념으로 만물은 “생장수장(生長收藏)”의 단계를 거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이다. 선생의 침뜸의술은 바로 이러한 주역사상을 연원으로 하였다. 선생의 침뜸의술은 오랜 임상경험을 거쳐서 가장 쉽고 단순한 것으로 재탄생 되었다. 그것은 경락, 경혈, 장부론, 음양오행 등의 이론들이 체계화되기 전에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치료하던 원시의학으로 돌아가고자 함이다. 학문과 기술은 서로 교차되어 발전한다.

침뜸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의학이 아니라 의술이다. 의학은 원리를 탐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술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의학은 지적인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의술은 훈련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의학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나 가능하지만 의술은 누구나 익힐 수 있다. 의학이 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받아들여 분석하고 조합하는 것이라면 의술은 부분만을 익혀도 그 만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침뜸이 생활의술로서 가능한 이유이다.

선생은 그 이치를 녹여 자신의 침뜸을 원시의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원시시대에 인간은 가려우면 긁고 아프면 그 부위를 주물러 준다. 그 단순한 행위가 치료의 시작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 행위가 발달하여 침뜸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인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장부와 경락 그리고 우주의 운행원리와 결합이 되어 오늘날의 침뜸의학으로 발전이 된 것으로 인식한다.

선생의 학설은 침뜸의학 발전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치료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현대의 복잡하고 어려운 학설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침뜸은 장부학, 경락학, 음양오행론 등의 이론이 정립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반드시 복잡한 이론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치료론은 「아시혈(阿是穴)」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아시혈은 특별한 의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알 수 있으며 경락이나 경혈과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는다. 학문의 발달은 많은 것을 밝혀주지만 오히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쉬운 것을 복잡하게 만든다. 침뜸의학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최근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선생의 비판이 본격화 된 것은 화상치료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락학이론에 따라 치료를 시도한 화상치료가 성과를 얻지 못하자 상처부위에 자침을 하여 획기적인 치료효과를 얻었던 임상체험은 선생의 이러한 견해를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아시혈에 대한 확신은 아직 완벽한 것이 아니다. 임상에서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인지 확신이 부족해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선생은 침뜸치료에 있어서 기존의 경락학과 융합을 시도하고 있다.

선생의 치료공식은 세 가지의 요인이 결합된다. 제1단계 기본치료로서 무극보양뜸을 필수적으로 사용 할 것. 제2단계 아시혈을 찾을 것 제3단계 학문적으로 체계화된 경락학을 이용한 경혈을 활용할 것 등이다. 이 공식은 침뜸치료를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실질적으로 치료효과가 높은 것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선생의 투쟁목적이 침뜸을 민중의 손으로 돌려주는 것이라면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복잡하고 어려운 침뜸의 이론과 기술을 단순하고 쉽게 만드는 것이다. 특정인에게 독점되는 길을 차단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치료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 쉽게 기억하는 수의 한계는 7-8개라고 한다. 전화번호가 7-8개의 자리 수로 되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무극보양뜸에서 사용하는 경혈의 숫자는 8개이며 총 시술자리는 12개이다. 이 정도는 누구나 쉽게 외우고 익히는 것이 가능하다.

구성에 대한 아이디어는 선생의 자연관에서 유래한다. 인체는 하나의 작은 우주이며 대우주와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우주의 변화와 운행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조화를 용이하도록 하는 것은 소우주인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대우주의 구조와 기능에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의학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우주는 음양이라는 구분체계와 오행이라는 운용체계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한다. 소우주인 인체에도 음양과 오행의 원리가 적용이 된다.

내부적인 갈등과 외부적인 병사의 침투는 인체의 음양과 오행의 균형과 조화를 무너뜨려 인간은 질병에 걸리게 된다. 구조가 무너지면 기능에 이상이 오고 무너진 구조와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치료이다.

무극보양뜸의 구조는 태극기의 모양과 유사하다. 태극기의 가운데는 음양의 역동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태극과 우주의 기본 요인인 하늘(乾:☰), 땅(坤:☷), 물(坎:☵), 불(離:☲)이 4개의 괘(卦)로서 형상화되어 있다. 태극기는 우주의 구조와 운행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는 우리 민족의 우주관과 인간관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음양에는 각각 몸의 앞쪽에 있는 중완(中脘), 기해(氣海), 관원(關元)혈이 음의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고 몸의 뒤쪽에 폐유(肺兪), 고황(膏肓), 백회(百會)가 양의 구조와 기능을 수행한다. 팔다리에 있는 족삼리(足三里)와 곡지(曲池)혈은 4개의 혈자리로 구성되어 춘하추동(春夏秋冬), 동서남북(東西南北), 생장수장(生長收藏) 등의 자연현상 또는 삶의 모습이 지니는 활동성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실제의 교육과 임상에서 무극보양뜸은 놀라운 결과를 확인한다.

무극보양뜸이 가지는 기본치료로서의 효과는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탁월한 효과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고 또 이 글이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교수가 연령과 성별, 그리고 학력이 서로 다르고 사전경험이 거의 없는 약 30여명 정도를 하나의 교육단위로 하여 무극보양뜸의 혈자리를 잡을 수 있고 뜸뜨는 요령을 익히도록 하는데는 불과 6시간의 교육으로 가능하다. 이것은 무극보양뜸이 가지는 놀라운 질병예방 또는 치료효과와 견주어 보면 대단히 효율적인 의술교육이 된다.

또한 기본적인 학습능력만 있다면 VTR을 통해서도 무극보양뜸자리를 거의 정확하게 잡을뿐더러 어떤 사람들은 홍보용 소책자에 설명된 내용으로도 훌륭하게 익힌다.

무극보양뜸의 이러한 간편성과 치료효과는 선생의 생활침뜸전략을 실행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 핵심이 되는 인식은 원시상태 즉 쉽고 간단하게 라는 선생의 원시의학 사상에 있다.

4. 봉사(奉仕)-의도(醫道)의 실행을 위하여

무극보양뜸은 원래 「건강뜸」또는 「보양뜸」이라고 불렀다. 본격적인 임상이 시작되면서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서 발전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치료학적 측면에서 선생의 기본개념은 중국의 의학자 이고(李杲)를 연상시킬 정도로 비장과 위장의 역할을 중시한다. 그것은 성장기에 음식을 마음대로 먹지 못했던 자신의 체험과 미래사회에 대한 선생의 놀라운 통찰력을 무극보양뜸에 담았다.

과거에는 주요 질병이 호흡기 질환이었으나 현대에는 점차 소화기질환을 근본 원인으로 하는 질병이 많아지고 있다. 선생은 모든 병자들이 병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영양(榮養)의 부족으로 죽는다는 자신의 경험을 믿고 있다. 영양은 식생활을 잘 하여 건강한 상태를 이룬 것이다. 그것은 음식을 골고루 먹고 소화를 잘 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몸의 중심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은 중앙토(中央土)에 해당하는 비장과 위장이고 비장과 위장이 튼튼하면 음식을 먹고 소화하여 기혈을 만드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따라서 무극보양뜸을 구성할 때 중완(中脘), 곡지(曲池), 족삼리(足三里) 등 소화의 기능을 강화하는 세 개의 경혈을 배치하였다.

생명(生命)과 생식(生殖)의 근원인 신장의 기능을 강화하는 아랫배의 기해(氣海)와 관원(關元), 호흡기의 기능을 강화하는 등의 폐유(肺兪), 심장의 기능과 깊은 병을 치유하는 고황(膏肓), 오경의 교회처(交會處)로 경락을 총지휘하는 정수리의 백회(百會)는 중앙토(中央土)의 원활한 기능을 바탕으로 가동되는 2차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

「보양(保養)」은 선생의 이러한 비위중심(脾胃中心)의 의학사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양(養)은 “기른다”라는 의미를 같이 지닌 육(育)과는 달리 음식물을 주어서 기른다라는 측면의 표현이고 육(育)은 가르침을 통해서 기른다라는 표현이다. 보양은 음식물을 잘 섭취하고 소화시켜서 자양분을 기르는 것이 건강의 기본이자 으뜸이라는 개념이다.

무극(無極)」이라는 의미는 우주의 생성과 운행의 원리를 의미하는 「태극(太極)」 이전의 보다 근원적이고 광대한 상태를 나타내는 사유개념(思惟槪念)이다. 이것은 놀라운 임상효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무극보양뜸이 가지는 간편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진정한 인술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의 독점된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간단히 시술할 수 있다는 것은 봉사에서의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의료봉사는 질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수량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극보양(無極保養)의 구체적인 실현수단은 「뜸(灸)」이다.

뜸의 의료적 특성은

첫째 누구나 쉽게 시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뜸시술을 한번 하면 자리가 생겨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반복적인 시술을 쉽게 한다. 처음에 자리를 잡을 때만 전문가의 도움을 얻고 그 다음은 아무나 시술이 가능하다는 점은 침을 포함한 다른 의료수단이 가지지 못하는 탁월한 장점이 된다.

둘째 뜸은 뜸자리가 남는다는 단점을 제외하고는 치료 후의 부작용이 전혀 없다. 이것은 의료수단 중에서 가장 안전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모든 치료수단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치료행위에 따르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침을 치료의 수단으로 선택할 경우는 인체의 해부학적 생리적 이해에서부터 자침의 깊이, 자극의 정도, 보관, 소독 등에 따르는 난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뜸에는 뜸봉의 크기만 유의하면 치료 과정이나 치료 후의 위험성이 거의 없다.

셋째 뜸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으며 간편하다. 약간의 뜸쑥과 선향(線香)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시술을 할 수 있다. 뜸이 대중적인 의료수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경제성이 가장 직접적 원인이 된다.

넷째 만성질환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의료수단이 된다. 다른 의료수단으로 쉽게 치유되지 못하는 만성질환들이 뜸으로 쉽게 치료되는 임상사례가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극보양뜸의 질병예방적, 치료적 효과가 검증이 되면서 선생의 봉사활동은 대규모의 봉사가 가능해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것은 봉사단 조직이 보다 용이해졌다는 점이다.

상당한 교육과 훈련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침뜸봉사가 무극보양뜸이라는 단순한 치료방법을 이용하여 훌륭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생의 자신감은 금산인삼축제에 아직 교육을 수료하지 못한 봉사자들과 경험이 많은 봉사자를 혼성하여 편성한 80여명의 대규모 봉사단을 조직하여 참가한 이후 분명해 졌다. 1500여명을 치료한 후 주민들의 대대적인 찬사를 받았고 이 것은 앞에서 말한 뜸마을로 이어졌다.

이 경험은 참여한 봉사자에게도 치료에 대한 확신을 주었고 그 감동은 봉사자에게 적극적인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침뜸봉사에 대한 선생의 기본적인 생각은 스스로 뜸을 뜰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고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모든 질병의 원인은 환자의 책임이고 그것을 치료하는 것도 환자의 의지이므로 봉사자는 무극보양뜸을 통하여 환자가 스스로 보양(保養)을 하도록 돕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시술자가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건강관리(self-care)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현대 의학의 궁극적 목표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뜸을 뜰 수 있는 환경과 간단한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주제는 건강이다. 그래서 선생께서는 침뜸만 할 줄 알면 어느 누구라도 대상자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들이 간단한 방법으로 서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무극보양뜸으로 용이해진다는 것이 선생의 봉사에 대한 기본 사상이다.

침뜸봉사는 봉사자와 수혜자 사이에 공동의 이익을 준다. 선생의 봉사관은 늘 상호이익이다. 그것은 단순히 봉사자에게 보람을 주고 수혜자에게 건강을 준다는 도식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이익이다. 봉사의 수혜자는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는 방법을 알게 되고 봉사자는 중요한 임상의 기회를 가진다는 현실적인 이득이 있다. 따라서 선생이 지휘하는 봉사현장은 교육이라는 커다란 의미가 함께 있다. 수혜자는 다른 수혜자가 더 나은 효과를 얻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5. 교육-모두에게 침뜸을

침뜸교육에 대한 선생의 철학은 보편성이다.

사람은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침뜸은 교육을 받을 권리조차 오랜 시간 동안 박탈되었다. 그것은 의료에 대한 환자의 권리가 기본적으로 박탈되고 있다는 것이다.

황종국은 한국민간의학정보센타에서 발표한 논문 “의료제도의 근본문제와 의료개혁의 바른 길”에서 이런 현실을 「의료파시즘」이라고 매도하였다. 그의 인식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하여도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의료정보에 대해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자유로워야 하며, 어떤 의료수단이 효과적이고 적합한 것인지는 의료소비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됨으로써 의료정보에의 접근이 차단되고 특정한 교육기관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교육의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은 제도화된 교육기관이 아닌 곳에서도 가르침을 주고받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던 선생에게는 엄연히 부당한 것이었다.

침뜸에 관한 선생의 기본인식은 “쉽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친에게서 어린 시절 침뜸을 배워서 훌륭한 침뜸의사로 성장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선생은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이 침뜸을 공부하던 시기의 지적 수준과 현대인의 지적 수준은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교육자료와 기자재가 발달한 지금은 당시보다 훨씬 향상된 교육이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종합적인 침뜸교육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은 가능한 만큼 배워서 활용하면 된다. 이러한 인식에서 무극보양뜸은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되어있다.

침뜸교육에 대한 선생의 인식은 공개적이고 자유롭다. 누구라도 배워서 우리나라 침뜸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기회 있으실 때마다 「자기만 알지 말고 후세에 물려주자」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침뜸법을 남김없이 공개하신다. 이런 생각은 “배워서 남주자” 라는 뜸사랑의 정신으로도 나타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전문의료인이 침뜸을 배워야 한다. 서양의사, 한의사, 간호사를 막론하고 의료현장에 있는 사람은 모두 배워서 자신의 의료행위에 활용해야 한다. 모든 의료행위와 침뜸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서로 상승효과를 얻어 환자는 물론 의료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가정의학이며 구급의학이다. 이미 지나치게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현대사회를 볼 때 미래 사회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을 갖춘 자립형 인간이 요구된다. 사소한 건강문제까지도 타인이나 의료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한다면 시간이나 경제적인 손실은 물론 자신의 생명을 남에게 맡겨놓고 사는 의존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침뜸은 놀랄만한 효과에 비해 도구가 단순하고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가정에 준비해 두거나 휴대하기가 용이하다. 신속한 수술이 요구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건강을 유지․증진시키며 구급상황까지 조절이 가능한 침뜸이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는 선생의 말은 이러한 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셋째는 생산력의 기초라는 인식이다. 건강한 국민이 건강한 나라를 만든다. 어릴 때부터 튼튼하게 키워지는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우수한 노동력을 제공하며 나이가 들어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학생, 근로자들과 연계된 침뜸교육은 이 나라의 생산력의 기반을 다지는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들이 가져오는 파급효과는 상당할 것이라 여겨진다.

넷째는 사회적 안정 수단이다. 우리나라 의료의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로 의료비 상승을 들 수 있는데 노인인구의 증가에 따르는 만성질환자의 증가가 큰 요인이다. 만성질환은 뚜렷한 치료법이 없이 지속되므로 악화를 방지하는 데만도 엄청난 의료비가 지출된다. 그런데 고혈압, 당뇨, 요통등에 침뜸이 뚜렷한 치료효과를 나타내므로 선생은 보험재정문제를 침뜸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 또한 건강상에 별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극보양뜸을 계속하게 되면 질병을 미리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 의료비용을 감소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 안정된 보건의료체계가 유지되고 전통의학의 치미병(治未病)의 개념을 실현하는 결과가 된다.

6. 닫음

이 글은 구당 김남수 선생과의 토론을 기초로 하여 만들었다. 따라서 많은 학술자료를 통한 객관적 검증이 없이 선생이 구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였고 기억에 의존하여 사실여부를 모두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선생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비판도 참고로 하지 못했다. 이러한 부족한 점은 장차 많은 연구와 조사를 통하여 보완되어야 한다.

특히 선생의 생전에 회고록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록이 만들어져서 후대의 연구에 도움이 되어야 하며 선생의 생애에 대한 자료와 유형적인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선생의 침뜸의술과 봉사정신에 편중된 관심을 보여 왔고 개인적인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을 도외시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선생은 한 사람의 자연인을 넘어서 우리 침뜸의학사에서 소중한 인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민족적으로도 소중한 분인데 이 글은 그런 선생의 진면목을 모두 밝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그러나 선생의 모습을 제대로 밝히고 높이는 첫 번째 작업이라는데 의의가 있을 것으로 여기며 많은 분들의 연구가 이어지기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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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뜸의 대가 김남수

침뜸의 대가 김남수
“일자무식도 침쟁이가 될 수 있소, 다들 배워서 남 주자고요!”
사람의 몸 안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으며, 아픈 자리에 믿음의 나무를 심는 사람. 6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 치료해준 역사의 증인.
그는 수천년에 걸쳐 내려온 민간요법인 침과 뜸을 통해 나눔과 희생의 정신을 실천해왔다. 오직 낮은 데로 임하며 ‘침뜸 전파’에 앞장서온 아흔의 침쟁이는, 아이 같은 환한 미소로 삶을 긍정한다.
뜸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내가 사로잡혀 있는 생각이 있으니 우선 구당 선생의 환자 이야기에서 출발하겠다. 1915년생이니 선생은 살아온 세월만으로도 역사의 증인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초야에 묻힌 촌로가 아니었고 60년 이상, 역사 현장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을 안방에 눕혀둔 채 만났으니 할말이 숱할 수밖에 없다.
나는 구당(灸堂) 김남수(金南洙·90)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그가 쓴 책 세 권을 단숨에 읽은 후 자연스럽게 뜸 예찬론자가 됐다. 나는 실제로 매일 스스로 뜸을 뜨고 있다. 난생 처음 해봤지만 어렵지 않았다. 책에서 본대로, 선생이 일러준 대로, 잘 말린 쑥을 쌀알 반톨만하게 비벼 뜸자리에 얹어놓고 선향으로 불을 붙여주기만 하면 끝이다. 순식간에 타버리니 뜨거울 새도 없다.
그러나 들인 노력에 비해 효과는 탁월해서, 묵직하던 몸이 순간에 거뜬해지는 것을 매번 경험하는 중이다. 시간이래야 한 10분이면 족하고, 5000원을 주고 쑥 한 봉지를 사면 석 달을 쓸 수 있고, 잠깐 뜨거운 것말고는 부작용이 생길 일도 없다. 이러니 예찬론자가 되지 않고 배기겠는가. 더구나 뜸은 김남수란 특출한 인간이 새로 개발한 비방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수천년 동안 이어온 전래 민간요법인 것이다.
 
“장준하는 혼자 산에 갈 수 없었다”
 
내가 먼저 꺼내고 싶어 안달하는 이야기는 북한산에서 실족사했다고 알려진 장준하 선생에 관한 내용이다. 그해 구당 선생은 장준하 선생에게 왕진을 갔더랬다.
“저기 제기동 청파초등학교 앞에 집이 있습디다. 지붕 바로 위로 고압선이 지나가는데, 어지간히 어렵게 사신다 싶데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집마저 사글세였다고 합디다. 허리 디스크로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거동은 물론이고 앉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기침도 못할 만큼 디스크가 극심합디다. 나한테 침뜸 치료를 받은 후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다섯 번쯤 치료를 받은 후 통증도 많이 사라졌고 지팡이를 짚긴 해도 방 안을 왔다갔다할 정도는 된다고 기뻐했거든요. 그 얼마 후에 산에서 실족사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봤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기가 막혔지요.”
기사를 읽고 또 읽어도 그건 거짓말이었다. 지팡이 없이는 집 안에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낮은 계단조차 올라서지 못하던 사람이 등산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준하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치료한 사람이 나였을 겁니다. 나는 의술자로서 거짓 없이 증언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그후 오늘까지 아무도 날 찾아와 그걸 물어본 사람이 없어요. 장 선생은 절대로 혼자서 산에 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또 한 사람, 구당 선생을 역사현장에 증인으로 서게 한 인물은 김재규다. 1979년 10월25일 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구당 선생에게 침을 맞았다. 장충동 중앙정보부장 공관에서였다. 그해 봄부터 김재규 부장은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구당에게 침을 맞고 있었다. 침 맞으려고 누워서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옷을 벗고 긴장을 풀고 누웠으니 절로 편안하게 이야기가 오갔다.
“김재규에게 갈 때는 거의 자정 넘은 시각에 정보부 차가 날 데리러 와요. 비상등을 켜고 신호를 무시한 채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자기들은 그저 지시를 따를 뿐이라고 해요. 처음 공관에 간 날, 혼자 널따란 방에 앉아 있던 김 부장이 대뜸 ‘나 잠 좀 자게 해주시오’ 합디다.
 
불면증은 원인이 여러 가지지만 대부분 마음의 병입니다. 심장에 화가 몰리거나 간 경락인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 흥분해서 일어납니다. 팔뚝과 등을 보니 간질환을 가진 사람에게서 보이는 간반(肝斑)이 아주 심하더군요. 먼저 심장의 화를 다스려놓고 머리의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백회혈을 수습하고, 간장에 기(氣)가 흘러드는 간유혈을 잡아 침을 놓았지요. 침 놓고 뜸 뜨는 사이 그 사람은 조용하게 잠이 들더군요.”
침뜸으로 효과를 보자 김재규 부장은 밤마다 정보부장 공관으로 구당을 부른다. 거의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사이 둘은 상당히 가까워진다. 침을 맞고 뜸을 뜨면서 불면증은 치료됐고 간반도 거의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제도가 잘못되어 침구술의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구당의 울분에 김 부장은 몹시 안타까워하며 박 대통령과 직접 만날 약속을 잡아준다. 1962년 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침구사 제도의 부활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수천년 내려온 침과 뜸이 우리 시대에 와서 명맥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초조감에 나 또한 깊이 공감한다. 누구나 간단한 뜸자리쯤은 알아둬야 한다고, 중·고등학교 체육이나 가정 교과서에 침과 뜸에 관한 언급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명구조의 한 방법으로 구급침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공호흡이나 부목(副木)을 대는 법은 가르치면서 그보다 훨씬 쉬운 구급침과 뜸을 가르치지 않는 처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렇다. 그건 몇천년 닦아온 조상의 지혜를 낭비하는 일이다.
 
一灸二鍼三藥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는 전통의술의 기본은 흔히 ‘일구이침삼약(一灸二鍼三藥)’이라고 일컬어졌다. 뜸이 첫째고, 침이 둘째고, 그래도 다스려지지 않을 때만 약을 썼다는 의미다. 그런데 상식으로 통용되던 ‘일구’와 ‘이침’이 광복 후 ‘삼약’에 밀려 핍박과 박해만 받아왔다는 사실을 나는 구당 선생을 만나면서 새롭게 인식했다. 그뿐 아니라 종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얽혀 전통의술과 현대의학 사이에 서로 넘어가지 못할 철조망이 높다랗게 쳐져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됐다.
‘구당’이라는 호는 짐작하듯 ‘뜸 구(灸)’자, ‘집 당(堂)’자를 쓴다. 호가 그렇듯 김남수 선생은 아무 겉치레가 없다. 말도 아주 유쾌하고 쉽게 한다. 단순하고 짧은 말이 사태의 본질과 핵심을 탁탁 짚어낼 때 듣는 사람의 속은 후련하고 통쾌하다. 노인이니 말의 어미가 느슨해도 좋을 텐데, 정확한 ‘-습니다’체를 단정하고 간결하게 구사한다.
“침구는 박사가 하는 게 아닙니다. 글을 한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도 침을 놓을 수 있고 뜸을 뜰 수 있습니다. 그냥 쟁이지요. 침쟁이! 뜸쟁이! 어려서는 쟁이라는 말이 그렇게 싫더니만 이제는 참 좋습니다. 침과 뜸은 학(學)보다 술(術)이 앞선다는 의미잖습니까.”
 
의사는 ‘병원 폐문 방지자’
 
“의사가 왜 있습니까. 환자가 없으면 의사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의료인의 목적이 뭐냐고 제가 늘 묻습니다. 환자를 낫게 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게 의사의 존재이유 아닙니까. 내 것은 옳고 네 것을 틀리다고 말해서는 진정한 의사라고 할 수 없지요. 뜸을 뜨든 침을 놓든 약을 쓰든 환자를 고통 없이 빨리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진정한 의사의 태도 아닙니까?
병 치료는 육체와 정신이 같이 움직여 이뤄내는 겁니다. 의사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병을 못 고쳐요. 나는 의사들을 ‘병원 폐문 방지자’라고 부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려고 있는 게 아니라 병원문 안 닫으려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입니다.
아주대 이종찬 교수라고, 거기에 맞서 환자권리 찾기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사는 돈을 몰라야 해요. 국가가 월급을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국가가 주되, 대통령보다 더 많이 줘야 합니다. 그러면 아마 돈 생각 안하고 건강한 정신으로 쓸데없는 약 많이 안 쓰면서 병을 고치려고 할 겁니다.”
저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을 만큼 직설적인 말을 유연하게 하는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하나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흔 넘은 사람과 얘기해본 게 구당 선생이 처음이다. 구당의 아흔은 내게 코페르니쿠스적 발상 전환을 하게 만들었다. 나이 들면 늙고 쇠하는 게 자연의 이치인 줄 알았더니 그 속도는 얼마든지 완만하게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다. 자기 몸을 어떻게 다스리냐에 따라 전혀 다른 연령대를 살 수 있다면?
구당은 노쇠는커녕 발랄하달 정도로 기운찼다. 피부가 아이같이 맑고 곱다. 체력과 몸놀림과 사고방식과 일하는 분량이 아흔 아니라 일흔, 아니 마흔이라 해도 믿겠다. 시력도 청력도 순발력도 전혀 감퇴하지 않았다. 웃으면서 이런 말도 했다.
“우리 집사람과 같이 누워 ‘삼십대가 우리만 할까?’라는 얘기도 자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지 모르겠네. 하하.”
그는 60여 년간의 임상 경험을 모아 자신만의 쑥뜸요법을 체계화했다. 이름하여 ‘무극보양뜸.’ 무극이란 태극 이전의 우주를 나타내는 개념이지만 쉽게 말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뜻이다. 무극보양뜸은 누구나 어떤 질병에나 쓸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술로 구당 침뜸의 핵심이다.
매일 그 자리에 뜸을 뜨면 몸의 원기가 북돋고 저항력이 길러져 병이 저절로 치료되고 예방된다는 걸 임상에서 수십 년째 확인하고 있다. 8개 경혈 12자리(여성은 13자리)에 뜸뜨기를 생활화하면 국민 누구나 병 모르고 살 수 있다는 복음. 그런데 사람들이 도무지 믿으려고 들지 않으니 허탈하다. 너무 쉽고 비용이 들지 않아 외려 신뢰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있던 것을 뜸자리를 줄여가며 간편하게 정리한 것이지, 내가 새로 발명해낸 건 아닙니다. 나는 120세까지 침뜸 봉사를 하면서 살 작정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저 노인이 무슨 힘으로 저렇게 건강하게 오래 사나’ 하고 관심을 가질 거 아닙니까? 그럴 때 내가 만들어놓은 무극보양뜸을 자랑할 겁니다. 그러면 뜸의 효과를 믿어줄 것 아니겠어요? 하하.”
그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다. 평정을 잃는 일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필요해서 일부러 큰소리를 칠지언정 진정으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다니 사람이란 한 분야에 달통하면 도인이 되나보다.
 
무극보양뜸과 화상침법
 
무극보양뜸
서울 종로구 권농동 ‘시민의 신문’ 건물 침뜸 봉사실 안에서 자그만 체구의 구당 선생이 흰 가운을 입고 환자 앞에 섰을 때 주변이 따사로운 기운으로 데워지는 것을 나는 신기하게 지켜봤다. 온화한 기운은 구당에게서 흘러나와 고요하게 환자에게로 스며들었다. ‘의술이란 인술이라더니 그게 바로 저것이로구나’란 탄복이 절로 일었다. 그건 정성스러운 몰두와 애정이었다. 무극보양뜸도 그 애정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뜸법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약값은 있어도 침값은 없다’는 말이 있어요. 나이들수록, 곱씹을수록 진리라고 여겨집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침이 무한의 가치라는 겁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구해주고 깊은 병에서 헤어나게 해주는 침이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하다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원가가 들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내게 그 말은 침쟁이로서 병 고치는 목적을 잊지 않게 해주고 물질이 정신을 몰아내지 않게 도와주는 경구입니다.”
구당 선생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견은 화상침법이다.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면 통증이 가시면서 진물이 나지 않는다. 진물은 현대의학으로 말하자면 백혈구다. 상처가 났을 때 인체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백혈구를 증식한다. 통증이 없어지면서 진물이 걷히면 이미 그 자리가 나아간다는 뜻이다. 침으로 치료하면 조직이 상하지 않는다. 흉터는 조직 파괴의 흔적이니 침으로 하는 화상치료는 흉터가 남지 않는다.
 
화상 당한 부위를 ‘아시혈’이라 부른다. ‘바로 그곳’이란 뜻이다. 아픈 그곳에 침을 놓으면 통증과 가려움증이 사라진다. 이런 탁월한 화상치료법을 찾아내 학술지에 발표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화상전문 병원에서는 침 치료를 여전히 외면한다. 아니다.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려는 트인 의사들도 있다. 그러나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다가 고발을 당해 인천과 부산의 어떤 병원은 45일간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듣고 있자니 참 코미디도 이런 희한한 코미디가 있나 싶다.
구당의 일주일은 온통 봉사활동 계획으로 꽉 차 있다. 홍릉 근처에 남수침술원을 개업했지만 돈 받고 환자를 받는 날은 목요일 단 하루뿐이다. 덕분에 목요일이 되면 뜸집 근처가 새벽부터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700∼800명이 몰려오지만 선착순으로 하루 50명만 치료한다.
“1인당 5만원을 받아요. 그러니 하루 250만원을 버는 꼴 아닙니까? 일주일에 그것만 벌어도 충분하지요. 젊어서부터 나는 돈을 잘 몰랐어요. 돈을 벌기로 작정했으면 하늘 꼭대기까지 쌓았을 겁니다. 요새는 좀 후회가 되기도 해요. 침구사를 합법화하려고 그렇게 발로 뛰어다닐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차라리 돈을 벌어 로비를 했더라면 지금쯤 성사됐을지도 모르겠다 싶거든요. 우리 집에 사람이 몰리는 건 내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침과 뜸의 효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겁니다.”
원래는 화·목요일 이틀간 환자를 받았는데, 올봄부터는 화요일 하루를 더 빼서 근골계 질환을 앓고 있는 현대자동차 근로자들의 치료를 위해 울산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했다.
“5만여 명의 직원 중에서 근골계 질환을 앓는 산재보험 대상자가 1만명을 넘는답니다. 병이라기보다는 과로인데 그런 질환에 침과 뜸이 특히 효과가 있거든요.”
 
‘뜸사랑’의 봉사활동
 
침뜸을 이용한 응급처치비법
월요일은 감사원에, 화요일은 울산 공장에, 수요일은 창덕궁 앞 시민의 신문사에, 금요일은 국회에, 토요일은 그가 만든 봉사단체인 ‘뜸사랑’ 가족들에게 돌아다니며 침을 놓아주고 뜸을 떠준다. 일주일에 하루도 몸 뺄 날이 없지만 그는 지치지 않는다. 침은 직접 놓지만 뜸은 그에게 침뜸을 배운 뜸사랑 회원들이 맡는다.
구당이 침뜸 봉사를 다니기 시작한 지 올해로 20년이다. 침구사가 제도화되기를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나서서 전파하기로 작정하고 침뜸을 교육한 것도 10년째다. 그간 1500명에 가까운 이들이 그에게 침을 배웠다. 그 제자들이 모인 봉사단체가 바로 뜸사랑이고 작년 한 해 뜸사랑 회원들이 시술한 사람 수가 무려 8만명이라니 한 사람이 뿌려놓은 씨앗이 펴져가는 속도는 이토록 놀랍다.
 
침뜸 교과서를 쓰다
 
뜸사랑의 모토는 ‘배워서 남 주자’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덜어내면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 구당 선생의 일관된 가르침인 ‘참된 인술은 나눔과 희생’이란 선언을 실천하고 있다. 뜸사랑은 지금 창신동 봉사실을 상설 운영하고 있다. 65세 이상 생활보호대상자들과 외국인 근로자를 위해 열린 공간이다. 국회의사당에도, 과천 정부종합청사에도, 재정경제부 청사에도 침뜸 상설봉사실이 개설돼 있다. 누구든 그곳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구당 선생은 증세에 따라 아예 뜸자리를 펜으로 표시해준다. 제자(구당은 제자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냥 똑같이 하니까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편을 좋아한다)들도 물론 똑같이 한다. 한번만 다녀가면 집에서 가족이 서로 떠줄 수 있다. 누가 뜨던 뜸의 효과는 다르지 않다니 이런 편리한 의술이 다 있나. 이런 의술을 만들어 보급하는 ‘민중의료인’의 위대성을 알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수입한 슈바이처만 성자이고 영웅인 줄 알다니, 우리 눈이 너무 어둡고 몽매하다.
“동양 삼국을 다 다니며 침뜸을 비교해봤습니다. 침에 대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했거든요. 북한에도 2001년 이후 해마다 갔습니다. 북한은 침을 모르면 아예 의사로 인정을 안하더군요. 허익근 세계침구협회 북한회장을 만나 침뜸 교과서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을 받았어요. 이제 8권이 출간됐습니다. 이제는 내가 죽어도 걱정 없습니다. 아, 공부할 교과서가 있지 않습니까. 여태껏 사람으로 태어나 뭔가 해놓고 죽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 허무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어딜 가든 침뜸 교과서를 만들고 간다고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중국 침은 아프고, 일본 침은 너무 약해요. 우리 것이 효과가 가장 좋습니다. 젊은 사람이 침뜸을 배워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21세기 의료 경쟁에서 침뜸이 단연 최고입니다. 나이든 사람은 배워서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앞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나 의료비도 점점 더 늘 텐데 무극보양뜸 하나만 익혀놓으면 온 가족이 걱정 없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선생 슬하의 1남3녀 중 둘이 침뜸을 공부한다. 딸은 미국 침구대학원에 유학중이고 아들은 남수침술원에서 함께 일하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1951년 우리나라 국민의료법이 공포될 때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는 의료업자로, 접골 침술 구술 안마술사는 의료유사업자로 나누어졌다. 질질 끌다 의료유사업자 자격시험 규정이 1960년에 생기기는 했으나 한번도 시행되지 못하고 다시 5·16을 맞는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료법을 개정하면서 의료유사업자 규정을 완전 삭제해버린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해방 후 정식 침구사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구당은 물론 광복 이전에 침구사 자격증을 딴 사람이다. 현재 살아 있는 침구사가 100명 정도지만 거의가 연로해서 직접 시술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침구사법이 없어진 후로 그걸 새로 만들기 위해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장군들치고 저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군부대마다 찾아다니며 다친 장병들에게 침 놓고 뜸 떠주고 했거든요. 장군들이 힘이 셀 때 아닙니까. 멍석 깔고 지랄하는 것 빼고는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5공화국 때도 침구사 제도 통과가 문턱까지 갈 뻔한 적이 있었다. 1980년 당시 천명기 보건사회부 장관이 “침구사 제도를 부활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 너무 기뻐도 쇼크가 되는 법이다. 너무 좋아 가슴이 터질 것 같더니 심장의 화기운이 균형을 잃어 그는 그만 쓰러져버린다. 병원으로 옮겨져 40일을 산소 마스크를 쓰고 지냈다.
“정신을 잃었으면서도 ‘저혈압에 진통제를 놓으면 안 되는데 지금 진통제를 놓는구나’ 하는 식의 분별은 있었어요.”
6개월간 병원에서 심근경색 치료를 받았다. 심장의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죽든지 살든지 집으로 가겠다고 우겼다. 자신의 몸을 임상대상으로 놓고 침뜸을 하기로 결심하고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말한다.
“내게 뜸을 떠다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응급실에 가기 전에 뜸을 떴기 때문이다. 설령 내 명이 다한다 해도 고통 없이 갈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큰 효과이고 축복이니 걱정마라.”
 
건강의 본질은 ‘인체 치유능력’
 
예상대로 그는 살아났다. 뜸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건강의 본질은 병이 없는 게 아니라 인체의 치유능력입니다. 살면서 전혀 아프지 않을 수야 없겠지요. 아파도 가볍게 앓고 얼른 회복하면 그게 건강입니다. 뜸은 바로 인체의 치유능력을 높여주는 의술이에요. 혈행을 촉진하고 세포 움직임을 활발하게 하고 신경 및 내장 기능을 조절하고 호르몬의 분비에 변화를 줍니다. 경혈에 자극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피부에 작은 화상을 입혀 일종의 가열 단백체가 생체 각 조직에 화학적 자극을 전달하도록 하거든요.”
우스꽝스럽게도 기껏 발표되어 그를 기쁨으로 쓰러뜨린 침구사 부활건은 나중에 까닭 없이 유보되고 말았다.
“왜 갑자기 유보됐는지 그 이유가 늘 수수께끼였는데 천명기 장관 사후에 밝혀졌지 않았습니까. 의사협회로부터 5억원인가를 뇌물로 받았다지요.”
구당 선생이 돈을 많이 벌 걸 하고 후회한다는 대목이 바로 이런 지점이다.
그는 열한 살에 처음 침을 잡았다. 선친도 침을 놓았고 하나뿐인 형님도 침구사였다.
“우리 형님은 중풍을 특히 잘 고치는 명의셨어요.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노릇 한다고 내가 그 짝이지요.”
의원이신 부친은 화제(약방문)만 낼 뿐 환자에게 약을 지어주지 않았다. 침과 뜸만으로 병이 잘 나으니 굳이 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약 짓는 약방은 따로 있었다. 의원은 침을 놓고 화제를 써주면 그만이었다.
“당시는 그야말로 의약분업이 아주 잘 돼 있었던 겁니다.”
선친이 따로 치료비를 받는 건 본 적이 없다. 가을이 되면 동장이 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모곡을 걷어줬다. 있는 사람은 넉넉히 내고 없는 사람은 내지 않아도 좋았다.
“그게 바로 그 시절의 의료보험이었지요.”
따로 배울 필요도 없이 부친과 형님에게서 보고 들은 대로 그는 28세에 남수침술원을 개업한다. 그후 60년 넘게 한번도 침통을 놓지 않고 살았다.
 
침의(鍼醫) 허임의 재발견
 
“화타나 편작이 명의라고 하지만 나보다 오래 의원 노릇을 했을까요. 조선에는 허임이라는 걸출한 어의가 있었어요. 허임도 72세 이후로는 종적을 감췄다고 나와 있으니 아마 역사상 침을 가장 오래 놓은 사람이 내가 아닐까 싶어 요.”
사극에 나오는 허준이 약을 짓고 침뜸 시술을 동시에 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는 완전히 어긋난다. 그는 약의(藥醫)였고 허임이라는 침의(鍼醫)가 따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는 약의 허준과 침의 허임이 선조의 편두통을 함께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임금이 “짐에게 침을 놓는 게 어떠한가” 묻자 노의(老醫) 허준은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릅니다”라고 물러나고 대신 허임이 병풍 뒤에서 침을 놓는다는 기록이다.
허임은 자신이 일생 축적한 임상 경험을 모아 조선 최초의 본격 침구서인 ‘침구경험방’을 펴낸 걸출한 침의였다. 허준에 견주어 하도 묻혀 있는 인물이라 앞으로 구당 선생과 뜸사랑 회원들은 ‘허임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 예정이다. 세부사항도 착착 만들어지고 있다. 그 일을 통해 침과 뜸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높여나가는 게 목적이다.
침뜸에 관한 잘못된 속설이 있다. 침뜸을 동시에 하면 기운이 빠져 못쓴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구당 선생은 속 시원히 해명한다. 예전에는 침 만드는 사람이 귀했다. 침을 만들면 재수없다는 소문이 떠돌아 손 없는 날을 골라 금세공업자가 섣달 그믐날 하루만 침을 만들었다. 그러니 가는 침을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고 할 수 없이 대침을 썼다. 대침은 위험하다. 잘못 찌르면 신경을 손상할 수도 있고 복막염이 될 수도 있었다. 침에 녹이 슬 수도 있었다. 뜸도 크게 떴다. 커야 좋은 줄 잘못 알고 몸살을 앓을 만큼 크게만 떠댔다.
지금은 다르다. 현대는 제철기술의 발달로 값싸고 질 좋은 스테인리스 호침이 머리카락 굵기만큼 가늘게 생산된다. 쑥도 쌀알 반톨만하다. 힘들 게 전혀 없다. 경혈을 동시에 자극하면 더욱 효과적일 뿐이다.
 
경혈이란 인체의 오장육부와 경락의 기가 모이고 출입하는 곳이다. 우리 몸의 초인종인 셈이다. 침뜸은 몸의 급소인 경혈을 자극해 불균형과 이상을 바로 잡아준다는 원리다. 몸이 알아서 저절로 제 균형을 잡아가라고 죽비를 내리치는 것이다.
우리 몸 안에 에너지가 다니는 통로를 경락이라 부른다. 동양의학은 병이란 그 선로의 흐름이 고르지 못한 상태라고 본다. 그럴 때 가까운 역(경혈)을 찾아가 자극한다. 그러면 멈춰 있는 기운이 잘 돌아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락 이름은 다 뜻이 깊어요. 머리 가운데 있는 백회(百會)는 100가지 경락이 모여 있다는 의미지요. 이곳에 뜸을 뜨면 머리가 맑아져 집중력이 좋아집니다. 머리칼이 새로 돋기도 합니다. 예전에 백회에 뜸뜨고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해서 흔히 서울대 뜸자리라고도 불러요. 어깨 아래 고황(膏?)이란 아주 깊은 곳이란 뜻입니다. 병이 깊이 들었을 때 여기다 침을 놓습니다. 천종(天縱)이란 심장과 뇌라는 뜻이에요. 뇌나 심장에 병이 있을 때 사용하라는 자리입니다.”
구당 선생은 침뜸을 ‘종합의료기’라고 부른다. ‘이동병원’이라고도 말한다. 부러지고 잘라진 외과적 상처말고 내인성 질병은 어느 병이든 침뜸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걸 임상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특히 디스크와 당뇨와 중풍에 탁월한 효능을 나타내는 게 침과 뜸이다. 남수침술원은 환자들 사이에 흔히 ‘침 한번 집’으로 불린다. 침 한 번 맞으면 말짱해진다는 건데 물론 다 그렇진 않다. 오래된 병은 오래 다스려야 하지만 침 한번에 거뜬해지는 경우도 많다.
 
’YS도 감탄한 ‘침 한번 집
 
한번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상도동 자택으로 구당을 불렀다. 선거운동 하느라 수도 없이 악수를 하다보니 어깨 통증으로 팔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어깨 바깥쪽 견우혈에 침을 한 번 찔렀다. YS는 “듣던 대로 ‘침 한번 집’이 맞네” 하며 금방 악수를 청했다. 나중 YS가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도 몇 번 가서 침을 놓아줬다. 침구사는 청와대를 뒷문으로 몰래 출입해야 했다. 효능을 눈앞에서 확인해도 침구술은 여전히 불법이었다. 노쇠한 몇 명만 빼면 지금 침구술을 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엄밀히 말해 무자격자라는 거다.
“의사가 침구를 활용할 수 없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남한뿐입니다. 의료 서비스가 개방되면 전통의학과 현대의학 사이에 쳐놓은 철조망은 얼마 못 가 무너져요. 그럴 때를 대비해 늦기 전에 의사, 한의사를 대상으로 제대로 된 침구교육을 해야 하는데….”
 
아픈 곳에 믿음의 나무 심는 사람
 
그는 젊어서 일본 소설 ‘인간수업’을 읽었다. 거기 사람이 하는 짓은 온갖 것을 다 해보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름도 잊지 않았다. 린겐노 슈교.
“내가 그걸 동경했어요.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이젠 거의 해봤어요. 하다 못해 바느질하는 것과 상여 메는 것까지 다 해봤지요. 그랬더니 어느 날부터 내 삶에 불만이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金瑞鈴
●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 경북대 국문과 졸업
●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구당 선생은 아기같이 고운 볼로 활짝 웃고 허허 웃고 정답게 또 웃는다. 그리고 내 팔의 곡지혈에 쌀알 반톨만한 뜸을 올리고 선향에 불을 붙였다.
“자, 뜸맛을 한번 느껴봐요. 맛을 봐야 글을 쓰지.”
박노해 시인이 선생을 위해 쓴 시가 있어 여기 두 연만 옮겨 적는다.
 
"물은 세 걸음만 걸어도 스스로를 맑게 하듯
그대 몸 안에 숨은 치유의 힘이 있다고
아픈 그 자리에 믿음의 나무를 심는 사람
그는 첨단 장비를 들지 않았다네
가늘고 순하고 오래된 침 하나라네
그는 비밀스런 영약을 들지 않았다네
이 땅의 가장 흔한 마른 쑥 한 톨이라네
그는 값비싼 면허증을 들지 않았다네
그대 자신이 의사고 병원이라고 임명해준다네"

출처 : 글로리아 합창단
글쓴이 : 아가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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