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명작이 모여있는 세계 최고의 바티칸 박물관(Museo Gallere del Vaticano)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르네상스 작품을 비롯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걸작들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서양 미술품들의 보고다.
바티칸궁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 싸여 마치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다.
바티칸궁은 교황이 살기는 하지만 1,400여 개의 방들과 예배당 중 교황이 사용하는 곳은 몇 안된다고 한다.
대부분이 박물관,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지만 박물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는 여러개의 방 중에 한국관도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황사영 백서사건'의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데 보지는 못했다.
바티칸의 어원은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이주해 왔던 에트루스크 인들이 현재의 이 바티칸 지역을 바티쿠스 언덕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예언자란 의미의 바티(vat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바티칸 박물관 안 정원
이곳에서 본격적인 박물관내 관람을 위해서 설명을 듣는 곳이다.
바티칸 박물관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벽아래 인도에서 줄을 서서 평균 2시간이상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는데
우리가 방문했을때는 어쩐일인지 줄도서지 않고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안내하는 가이드도 예상 못했다면서 이런 경우는 1년에 한 두번 있을까말까 하는 행운이란다.
박물관내에는 너무 방대하고 엄청난 볼거리로 가득했는데 밀려오는 관람객들로 인해 보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보이는 모든게 다 유물이고 무엇이 얼마나 소중한건지 자세히 관람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무조건 카메라를 드리대고 셔터만 눌렀다.
영락없는 솔방울 모양인데 무얼 의미하는지????
라오콘과 아들들
이 조각상은 제사장이었던 라오콘과 두 아들의 모습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의하면 라오콘은 사제로 트로이 목마의 계략을 국민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팔라아테나의 저주를 받아
라오콘 자신과 두 아들이 독사에 칭칭감겨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조각 작품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1506년 1월 14일 티투스 황제의 왕궁터에서 발견되어
6월 1일 바티칸으로 옮겨졌는데 옮겨질 당시 로마 시내의 모든 종이 울려 이 사실을 축하했다고 한다.
이 조각작품은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초기 작품으로 당시 조각가들이 만든 작품이며 이미 로마 시대에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유명했으며
이 작품은 발굴 당시부터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수 많은 작가들이 이같은 작품을 만들기 원했다고 한다.
처음 이 작품이 발견될 당시 아들들의 팔다리는 손상되었고 라오콘의 절단된 오른팔은 발굴되지 못했다고 한다.
자존심이 강했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이 작품을 복원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 이 작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수 있다.
이 작품이 처음 발굴되고 400년이 더 지난 1960년에 라오콘의 오르팔이 추가로 발굴되어 원래 라오콘은 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티그리스강
최근에 8각형 정원에 배치된 것으로 하드리아 시대의 조각을 모방한 것으로 바오로 3세가 전망대에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처음 발견될 당시에는 머리와 오른쪽 팔, 왼쪽 손 등 여러 부분이 없었으나 미켈란젤로의 감독 아래 모두 추가로 조각되었다고...
비너스 펠릭스
기원전 4세기경에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비너스상을 모방하여 만든 작품이다.
이 조각의 얼굴은 2세기경의 한 여왕후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부인인 파우스티나이거나 혹은 코모두스의 부인이며,
파우스티나의 며느리인 크리스피나의 모습으로 추정 된다고...
카노바 페르세우스
네로의 욕조라고 하는데 재질은 붉은 대리석으로 규모가 엄청나다
천정에 그려진 그림이다.
처음에는 조각인줄 알았는데 원근법을 적용해서 그린그림으로 입체감이 살아 있다.
교황이 거주했던 궁전답게 천정과 벽면 등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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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
바티칸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가장 오랜시간 머무는 곳이 바로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교황이 예배드리는 곳이며 '콘클라베'라는 교황 선거도 여기서 치러진다.
특히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벽화는 '천지창조', 정면 제단 뒷편 벽화는 '최후의 심판'으로 둘 다 미켈란젤로의 대작들로
천지창조는 그의 나이 33세 때인 1508년에 시작하여 4년 뒤에 완성했고 최후의 심판은 그 보다 한참 뒤인 그의 나이 61세였던
1536년에 시작하여 6년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우리가 감상할 수 있느건 미켈란젤로가 벽화를 그릴때
천정과 벽에 석고를 바르고 마르지 않은 석고위에 색을 넣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그려놓은 천정화를 보기위해 잠시 고개를 들고 감상하는데도 목이 아플 정도인데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4년동안 매일 고개를 들고 불안한 자세에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몸이 기형이 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면서 완성한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그 후유증으로 인해
평생을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이 작품 앞에서는 경외감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일체의 사진촬영을 못하도록 되어 있고 이를 제지하는 직원들도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레쉬 불빛이 번쩍였다.
나도 후레쉬를 사용하지 않고 부감 촬영한 유일한 사진(위,아래)인데 역시 앵글을 보지않고 촬영하는 것이 쉬운건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교황과 사제들인 추기경들과의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모두가 완전 나체였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이 천으로 몸을 가리자고 하자 "교황님은 사람의 영혼이나 걱정하시고 몸뚱이는 제게 맡기시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체세나 라는 추기경이 "이따위 그림은 신성한 교황의 예배처소가 아니라 공중목욕탕이나 술집 벽에나 어울린다"고
하자 그는 체세나 추기경을 그림속에서 지옥의 수문장으로 그려넣고 뱀이 그의 몸을 감고 성기를 무는 모욕적 그림으로 복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제자에 의해나체의 아랫도리 부분은 천으로 약간씩 가리는 덧칠이 시작되었고
그 수정작업은 18세기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원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인간이 처음 만들어지는 '천지창조와'
인간의 모든 가식을 버리고 심판대에 서는 '최후의 심판'에
왜 옷이 필요해야 했는지 미켈란젤로는 그것을 말했는지 모른다.
바로 위와 아래의 사진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설명하기 위해 박물관 정원에 세워놓은
안내판의 사진을 촬영한 것인데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서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을 수 없어서 사전에 설명을 듣고 입장을 했다.
위에 그림은 이 그림이 미켈란젤로가 4년간을 천정을 보면서 그린 '천지창조'를 펼쳐 놓은 것이고
아래그림은 '최후의 심판'이다.
< 2008. 7. 17.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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