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시청에 있어서 지난 3년간은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다.
기숙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TV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집에 있는 시간인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전까지밖에 없었다.
그래도 재미있는 드라마는 이래저래 몇화빼먹더라도 대충 볼 수 있었지만 다큐멘터리 같은건
구지 찾아보려 하지 않기때문에 흥미로운것들을 굉장히 많이 놓쳤다.
광복절 즈음의 어느 토요일날 수능에 대한 압박을 느끼면서도 TV앞에 앉아있었다.
당시 '소문난 칠공주'라는 인기리에 방영되는 주말 연속극이 하는 시간이었는데 점점 내용이 자극적이게 변하고
억지스러운면과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내용이 많아져서 보기 싫었던 난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이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처음엔 무작정 근대사 다큐멘터리기에 봤다. (구한말부터 해방기까지는 무조건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박열'이었다.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내가 딱히 근대사연구를 하고있지도 그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알았을까 기억을 되짚어보니
국가보훈처에서 매달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포스터가 학교 게시판에 항상 붙어 있는데,
8월달 독립운동가가 바로 '박열'이었고,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며 봤기 때문에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박열 (朴烈)1902 . 2 . 3 ~ 1974 . 1 . 17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했으며,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 한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검거되어 해방 때까지 징역을 살았다.
해방 후에는 일본으로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만들고 단장을 역임하면서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다.
KBS스페셜은 '박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아내이었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에 관한 다큐멘터리었다.
가네코 후미코 (金子文子)1902?1904 ~ 1926 . 7 . 23
무정부 주의자.
1923년 일본 왕자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려 한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검거. 사형 언도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옥중 자살.
그녀는 조선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일본 제국주의에 반하는 아나키스트였다.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인이 될 수 없었던 가네코 후미코.
일본인이었기에 조선민중을 대변할수 없었던 금자문자.
역사속에 잊혀져있던 인물을 그리고 역사속 이야기를 알 수 있게되 참 기쁘다.
작년 다큐멘터리 이지만 흥미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서 봐도 좋을것 같다.
사실과 허구를 적당이 섞어 사실이 왜곡되지도 다큐자체가 너무 딱딱하지도 않게 적당히 연출한 것 같다.
특히 중간중간 인물들이 화면을 보고 인터뷰하듯이 말하는게 나레이션이나 기자들이 말하는 것 보다 더 사실적이라고나 할까?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 팩션드라마를 방영한다면 딱딱한 역사도 조금은 일반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인이 아니었다.
아홉살이 될때까진 호적도 없는 사생아였고, 어렸을때부터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무관심속에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이후 어머니는 여러번 재혼을 했고 그때마다 가네코는 어머니와 새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그 후 조선에 있는 고모집에 의탁하고 있는 할머니를 따라 조선에 오게 된다.
(호적도 그때문에 1912년 외할아버지의 5번째 딸로 급조된 것이다.)
가네코는 학교에도 보내주고 장차 대학도 보내준다는 할머니의 말만 믿고 조선에 갔으나,
조선에서도 가네코는 편하게 살지 못했다.
할머니는 체면상 학교에 보내주기는 했으나 끊임없이 가네코를 학대하고 가정부처럼 부려먹었다.
그 후 가네코는 할머니에게 다시 버려져 일본으로 귀국한다.
그때가 3.1운동 직후였는데,
조선에서의 7년 그리고 3.1운동은 이후 가네코의 사상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가네코는 일본에서 사회주의를 만나게 되고 사회주의에 흠취하게 되고
사회주의 잡지를 통해 박열이 쓴 시와 만나게 된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는 박열에 대해 큰 흥미를 느꼈고 그를 소개해 달라고 한다.
그 후 둘은 연인이자 동료로서 많을 활동을 한다.
그들은 사회주의 단체인 '불령사'를 만들어 활동을 하지만
1923
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이유없이 체포된다.그리고 '불령사'의 회원의 배신으로 천왕암살계획이 드러나게된다.
일본 경찰은 계획치도 않게 '암살범'을 잡게 된 셈이었다.
이 후 박열은 '불령사'회원들은 물론이고 '가네코 후미코'와도 연관이 없는 혼자만의 계획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도 공범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박열은 가네코가 공범이라 시인한다.
다큐멘터리에서는 가네코가 공범이 아닐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둔 듯 싶다.
가네코가 왜 자신이 공범이라 주장했는지는 알 지 못하지만 어렴풋이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될 것같기도 하다.
박열과 가네코는 결코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천왕암살계획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재판장을 하나의 투쟁장으로 보았고, 재판장에서도 투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려거든 죽이라,
그러나 나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
"모든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 위에 세워달라!"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김익상의사의 조선 총독부 폭탄투척등
조선 독립 운동사에 여러 암살계획, 활동이 있었지만
천황암살을 계획한 것은 박열이 유일하다고 다큐멘터리에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론 이봉창의사도 천황암살계획을 했던것으로 안다.
( 엄밀히 말해 한인애국단에서 )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이봉창의사가 저격하려 했던 사람은
바로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었고, 그때가 1932년 1월이니
박열이 계획한 후 십여년뒤에 다시한번 암살계획이 나온것이다.
그런데 왜 다큐멘터리에서 박열이 유일하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의미로 그렇게 말했거나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나 다큐멘터리 제작자측의 실수인듯 싶다.
어쨌든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것 자체만으로도 당시 일본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천황을 신격화 시키고 숭배하는 문화를 만드려 했던 일본으로서는
그가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일본백성들에게 알려질수록 백성들의 불신이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사진의 유출로 박열과 가네코의 사건은 일본인들 사이 흥미를 끌게 된다.
위의 사진이 원본이고 아래사진이 다큐멘터리에서의 재연이다.
당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예심담당 판사였던 다테마츠 카이세이는
박열의 어머니께 가네코를 소개할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둘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그 사진은 아주 묘했다.
남자의 무릎에 앉아있는 책읽는 여자와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고있는 남자.
흉측하고도 민망한 이 사진을 다테마츠 카이세이가 왜 찍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진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은 다테마츠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다테마츠의 의도를 벗어난 결과였는지 아니면 의도되로 된 결과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로인해 박열과 가네코의 재판이 유명해 진 것은 사실이다.
후에 일본인들은 이 사진을 두고 문란한 독립운동가들이라 폄하하며 조선인의 사기저하에 사용했다고도 한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천황암살사건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 다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것을 알 수 있다.
재판결과 사형선고가 내려진 둘은 각자 다른 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런데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형을 면제해 줌으로써 일본왕실의 관대함을 선전하려 한 것이다.
그에대해 가네코 후미코는 은사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것으로
박열은 단식투쟁을 하는 것으로 맞선다.
그 해 여름 가네코 후미코는 형무소 안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일본에는 출간되었으나 한국은 번역서가 나오지 않은 듯 싶다.
(대신에 그녀의 일대기소설이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직도 그녀가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분명치 않다.
형무소에서는 그녀의 사망을 은폐하는데 급급했고
그녀의 유골은 경찰서에 압수당해 우여곡절끝에 박열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선산에 묻혔어도 반역자의 무덤은 봉분을 올릴 수 없음은 물론이고 비석조차 세울 수 없었다고 하니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이 후 박열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1945년 10월 27일 이키타 형무소에서 출옥된다. 23년 만이었다.
1946년 박열은 23살 연하의 장의숙여사와 재혼을 했지만,
죽을 때까지 가네코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천황암살계획을 세웠다 해서 그녀가 조선을 사랑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조선 민중의 처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계급과 일본의 천황제를 부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네코 후미코의 일대기 소설의 부제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주의 아나키스트-는 썩 마음에 드는 부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박열을 사랑한 여인이었고,
사회주의에 심취한 아나키스트였으며,
용감한 혁명가였음에는 틀림없다.
자료출처 - KBS스페셜 8.15기획 팩션 드라마 '가네코 후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