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사진·그림

[스크랩] 안견의 몽유도원도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2. 3. 17. 00:11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작. 비단에 수묵 담채.

                                                 (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 소장 )

 

 이 그림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 서른 살 되던 해(1447)

어느 여름날 밤에, ‘꿈속에서 노닐었던 도원을 그린 그림’ 이다. ‘도원’이란 옛적 중국에서

길을 잃은 한 어부가 이상한 복숭아나무 숲에 이르러 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맞닥뜨렸던, 꿈결 같은 이상향을 말한다. 이 세상이 아닌 아름다운 별천지, 무릉도원은

원래 중국의 자연시인 도잠(365?-427, 자 연명을 따서 흔히 도연명이라 한다) 의

글 [도화원기]에서 비롯한 말이다.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서,화,악에 모두 능통하였다. 특히 당대에 제일가는 서예가였으므로 나라 활자인

경오자의 원본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한편의 장대한 교향시이다. 작품의 기본축은 오른편 위쪽에서

왼편 아래쪽으로 가로지르는 호쾌한 대각선이다. 그리고 보조축으로

오른현 아래에서 왼편 위쪽을 향해 점차 상승하는 대각선이 교차된다.

마치 교향곡에서 서로 다른 두 주제가 겹쳐져 화려장엄하고 내밀한 음상을

짜 보이듯이, 두 대각선은 서로 얼키고설켜 복잡다단한 산수의 경관을 내비침으로써

무릉도원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림 한 폭에 신선 경계를 드러냈으니, 온 우주의 원기를 퍼올렸도다!”

이현로의 부시에 보이는 이 구절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봉우리의 윤곽선들은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 굵었다가는 가늘어지며 이따금씩 바르르 떨리면서 꺾여 나간다.

또 나중에 천고의 충신이 되었던 성삼문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 천상의 진인이

그 맑고 깨끗함을 사랑하여, 알뜰히 숨겨 (인간 세상에) 새나가지 못하게 한 것일세.

그러기에 (도연명의 글 있은 이후) 지금껏 천백 년이 되도록, 꼭 한 번 고상한 분이

잠결 속에서만 보도록 허락한 걸세!”

 이 그림에는 사람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의하면 도원은

분명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다른 중국 그림에는 어부와 주민이 만난는 장면이

그려진 예도 있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시골사람 하나만 보았다고 했지만 자신이

박팽년과 동행하였고 신숙주와 최항도 함께 있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꿈 속에서 무릉도원을 발견한 꿈의 앞 부분을 그린 것이다. 그의 ‘제기’ 속에 등장했던

세 사람이 1453년 계유정난 때에 보여준 태도는 아주 흥미롭다. 계유정난은 안평대군보다

한 살 위인 수양대군(세조)이 정권을 장악할 욕심으로 단종원년(1453.10.10)에 일으켰던 정변이다.

애초부터 수양대군은 병약한 형 문종이 급사하고 조카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

이 틈을 타서 왕이 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문인, 무인, 모사등 필요한

인물을 고루 포섭하고 있었는데, 안평대군이 문학, 예술을 비롯한 다방면의 인재들과

폭 넓게 사귀면서 특히 당시 수양대군의 야욕에 최대의 걸림돌로서 그를 견제하던

원로대신 김종서와 가깝게 지내게 되자 그야말로 눈엣가시처럼 여기었다.

다급해진 수양대군은 결국 한밤중에 간사한 술수와 끔찍한 폭력을 써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모든 죄를 안평대군의 모반 탓으로 돌렸다. 36살 젊은 나이로 당대의

명망을 한 몸에 모으던 풍류왕자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끝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박팽년은 세조가 즉위할 때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만류하여 나중에 단종복위운동을 하다 일이 탄로나 왕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세조를 그저 ‘나으리’라고 부를 뿐 결코 ‘상감’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세조가 제 분에 못이겨 너는 내가 내려준 벼슬을 하면서 이미 신하를 청하지

않았더냐고 공박하자, 박팽년은 일체 문서에 ‘신(臣)’이라는 글자를 쓴 적이 없다고

대꾸했는데, 과연 그의 공문에는 ‘거(巨)’ 자가 있을 뿐이었다한다. 그는 세조의 끈질긴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보장된 영화의 길을 거부하고 감연히 죽음과 멸문의 길을 걸었다. 

 신숙주, 최항은 정난공신에까지 올랐다.

안평대군은 이 그림의 제기에 ‘천 년을 넘어 전해지기’ 를 소원하였는데, 놀랍게도

당시의 모습 거의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되어 국외 반출이

통제되고 있는 형편이다.

*안평대군과 안견

 안견의 <몽유도원도> 는 북송산수의 전통이 한국에서 계승되고 부흥되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당시 제일가는 수장가이자 예술 후원자(특히 안견)였던 안평대군의 중국서화 수집품은

북송산수를 이상으로 여긴 수집가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는 당대 북송산수 부흥 현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는다.

안평대군은 대개 1435년부터 그가 55세의 나이로 죽은 해인 1453년까지 약 20 여년 동안

그의 주요한 중국서화 소장품을 모았다. 신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에는 그 때까지의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이 기재되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고개지로부터 왕면에 이르는

화가 총 35명, 222축의 작품이 실려있다. 한국의 화가 안견과 일본 승려화가 태칸,

이 두 명을 제외하면 소장품 목록에 기재된 화가는 모두 중국인이다.

안견은 안평대군에게 선택된 당대 최고의 화가로 매우 특별한 지위를 누렸다.

그는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에 올라 있는 유일한 한국의 화가일 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수집품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특권을 지녔던 유일한 화가였다.

안견은 그 자신의 재능과 안평대군의 후원 덕택으로 자연스럽게 당대 회화 양식의 창시자가 되었다.

실제로 안견과 안평대군은 15세기 이후의 한국적 예술 취향과 회화 양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데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백호 윤휴(1617-1680)는 ‘백호전서’에서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했던 계유정난 와중에

안평대군 사람으로 알려졌던 안견이 어떻게 화를 벗어나고 목숨을 부지하였는가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 날 대군이 중국 북경의 시장에서 상품의 용매먹 한 덩어리를

구해와 바로 안견을 불러 그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게 하는데 때마침 일이 있어 안채에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근데 그 먹이 오간 데가 없어 남녀 종들을 심하게 다그쳤으나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며 부인하면서 안견에게 혐의를 두었는데, 이에 안견이

벌떡 일어나 소매를 떨치며 스스로를 변명하고자 하는데, 그 순간 용매먹이 떨어졌다.

이에 대군이 노하여 그를 꾸짖어 내쫓으면서 다시는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안견은 묵묵히 말없이 서 있다가 잠시 후에 걸어서 물러나갔다한다. 그러고 얼마 안 되어

정난이 일어나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로 연루되어 죽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오직 안견만이

이를 모면하자 사람들이 그제서야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잔꾀로 화를 모면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나아가고 물러섬에 남의 본이 되었던 일이라 하겠다.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중에서

[중국 한국 미술사 - 김홍남 논문집] 중에서   학고재 출판

출처 : 오리진
글쓴이 : 오리진 원글보기
메모 :

                       

수정

악성위장병 고치기 클릭http://cafe.daum.net/skachstj  

문의 010 5775 5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