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나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의 카르낙 열석,
이스터 섬의 모아이, 말타의 신전 등 거석문화의 대표적 유적들이다.
우리나라에서 거석문화 유적으로 꼽히는 것은 고인돌이다. 우리의 고인돌은 2000년 12월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고인돌이 누구의 무덤이며, 계층사회가 형성됐는지 등에 대한 연구는 아직 그 미스터리를 완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화군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탁자식 고인돌. 덮개돌 길이가 약 6.4m, 폭 5.2m의 고인돌이다.
사적 제137호로 지정된 강화 고인돌 유적지.
마찬가지로 서유럽부터 일본까지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단지 거석이 선사시대의 인류에 있어 보편적 숭배대상이
되어왔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한국의 고인돌도 이같은 개념으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창 고인돌박물관 인근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 받았고,
교과서에 실린 그 고인돌이다.
청동기 유적은 대부분 ‘지석묘’로 불리는 고인돌에서 출토돼,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데 무리 없어 보인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무덤 속에는 주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었다. 따라서 고인돌 무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더구나 고인돌은 박물관의 전시실이 아닌 자연 현장에서 뚜렷하게 대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고창에 있는 가로 세로 5m 크기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
고인돌은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실로 ‘고인돌 왕국’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많은
수의 고인돌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남한에서 약 3만여 기, 북한에서 약 1만 기에서 1만 5천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세계 고인돌의 40퍼센트 이상에 해당하는 수이다.
고창 매산마을에 있는 고인돌 고분군.
고인돌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워낙 흔하다 보니 단순한 바위덩이와 구분하기도
힘들어서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또 농부들이 논밭을 갈다가 거추장스러워 들어내거나
부수어 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훼손된 것도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 고인돌 안내판.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주로 서해안 지역, 그 중에서도 호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호남지방에서 발견된 것만 해도 2만여 기에 이른다. 이 가운데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보존 상태가 좋고 밀집도 측면이나 형식의 다양성 면에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강화 고인돌 역사박물관 앞에 청동기 시대 움막을 그대로 재현해서 지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생김새는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대개의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얹어 만든다.
무덤방의 위치나 형식에 따라 고인돌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덮개돌의 형태에 따라
크게 ‘탁자식’과 ‘바둑판식’(기반식이라고도 함), ‘개석식’, ‘위석식’으로 나눈다.
고인돌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지정 안내판.
사적 제137호에 있는 강화 고인돌을 관람객이 살펴보고 있다. 탁자형인 북방식 고인돌이다.
대체로 탁자식 고인돌은 대부분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 고임돌이 작거나 없는 고인돌은
전라도나 경상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다. 탁자 모양의 고인돌을 북방식,
바둑판 모양이나 고임돌이 없는 방식의 고인돌을 남방식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고임돌이 없는 남방식 고인돌의 전형.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은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의 연구는 시베리아 카라스크의 영향을 받은 ‘북방설’, 가매장한 뒤 나중에 뼈만 추려 묻는 세골장(洗骨葬)과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남방설’, 한반도에서 독립적으로 발생되었다는 ‘자생설’ 등으로 그 기원이 나누어진다.
고인돌 유적지 바로 옆에 고구려 연개소문의 유적비도 있다.
북방설의 기원이 되는 시베리아 고인돌은 코카서스 일원에 있다. 알타이지역에 주민들이 등장하는 것을 기원전 3,000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고인돌의 연대도 기원전 3,000년까지 올라가므로 서로 연계가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둘째 고인돌이 동남아시아로부터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유목민족들이 살고 있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대초원, 중국의 내륙에서는 고인돌이 존재하지 않고 절강성․호남성․사천성․티베트․대만 같은 주변지역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도유호 같은 학자는 유럽의 고인돌이 동으로 이동되어 인도지나를 거쳐 황해를 가로질러 황해도와 평안남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생설은 주로 북한 측에서 주장한다. 한국의 고인돌이 어느 지역보다 밀집도가 높고, 고인돌의 축조연대도 어느 지역보다 앞선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고인돌의 자연적 발생은 생산력의 고른 발전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천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만주 지방 고인돌의 형식상 선후관계를 볼 때 한반도에서 전파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이 설명의 근거다.
우선 플레밍은 중국 동북부에서 지상형 고인돌이 발생하여 그것이 한반도와 일본 또는 중국남부 남태평양의 도서지대로 전파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주장에 한국의 고인돌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평가 조사원으로 방문했던 니시타니 타다시(西谷 正) 교수도 동조했다. 그는 고인돌 문화가 중국 동북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한반도에 전파된 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발전됐고, 이어서 일본 구주(九州) 서북부에까지 전파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고인돌을 볼 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의미를 되새겨 봄으로써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느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