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端宗의 王妃 定順王后 이야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3. 2. 18:52

 

단종과 정순왕후

 

 

 

 

 

 

◐端宗의 王妃 定順王后 이야기◑

 

女人의 恨이 서려있는 正業院과 雨花樓

꽃비가 휘날린다는 는 뜻을 가진 서울 승인동소재
청룡사 우화루 유배지로 떠나는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지냈다는 곳이다.

 

우리나라 역사속 여성들과 관련된 유적가운데
서울 종로구 숭인동 에 정업원이라는 터가 있다.
이곳은 자식이 없는 후궁이나 출가후 남편을 일찍잃은
왕의 후손들이 비구니가 돼 여생을 보낸 곳이다.

 

이 터는 1453년 수양대군이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내치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벌인 "계유정란' 으로
졸지에 남편과 이별을 해야했던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여생을 보낸곳이다.

 

그녀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간택되었다. 피비린내나는 정권다툼속에서
단종은 1455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고 정순왕후는
불과 16세의 나이에 의덕왕대비가 돼 수강궁에 머르르게 된다.

 

아듬해인 1456년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상왕이된 단종이
노산군으로강등된다. 대역죄인으로 몰린 송씨는
이때 청룡사로 유배됐고 단종과 헤어져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64년간 홀로 이곳에 머물렀다.

 

청룡사에는 귀양길에 나선 단종과 송씨가 마지막 밤을
보냈다는 우화루(雨花樓)가 있다. "꽃이 비처럼 흩날리듯
쏟아졌다"는 뜻의 우화루는 단종과 송씨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의미로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렸다.

 

이후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뜻의 "영미정(永美亭)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화루

청룡사는 정업원 구기(淨業院 舊基. .업원의 옛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왕가의 여러 여인이 비구니가 돼 머물렀기
때문이다. 1771년 영조왕이 송씨의 애달픈 사연에
가슴아파하며 "정업원 구기"라는 비문과 비각의
현판을 적었다고 한다.

 

또 송씨가 동쪽(강원도 영월)으로 떠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명복을 빌었다는 청룡사앞 봉우리에
'동망봉(東望峰)'이라고 쓰인 친필표적을 세우고
이곳을 정업원이라 불렀다.
 


 청룡사 비각과 정업원

원래 정업원은 궁에 있던 법당이였다.
애초에는 내불당이라 불렀으나 유생들의 반발에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깨끗히 한다는
의미로 정업원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훼손된 현재의 동망봉


동망봉은 일제 강점기 일 봉우리를 깎아 훼손됐고
 후에 채석장으로 이용해 지금은 과거 흔적을 찾을 수 없고
현재 동망봉의 남은 능선은 모두 근린공원인
승인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단지 문화재청에서 세운 작은 비문 하나가 "영조가
친히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썼으나 채석장으로
바뀔때 그 글씨가 떨어져 나갔다"는 설명이 있을 뿐.

 


정업원 비각 현판


조선시대 국왕의 혼례 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준수되었는데, 그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우선 왕의 혼인이 결정되면 '가례도감(家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린다.

 

가례도감은 왕의 혼례를 주관하는 관청이고, 금혼령은
왕의 배우자가 될 만한 연령에 있는 처녀들의 혼인을
이 보고서를 '처녀단자(處女單子)'라고 한다.

 

이 단자에는 처녀의 사주(四柱)와 거주지, 그리고
부·조·증조·외조의 이력을 기록하여 가문 내력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처녀단자를 접수한 왕실에서는 이를
기초로 3차에 걸쳐 선발했는데, 초간택(初揀擇)·
재간택(再揀擇)·삼간택(三揀擇)이 그것이다.

 

간택은 대체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주관했는데,
왕비 감을 미리 내정해 놓고 간택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온 땅과 만 백성을 주관한 국왕도 자신의 배우자
만큼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으니, 요즈음 젊은이들의
연애 풍속도에 비추어 보면 국왕도 부럽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하겠다.

 

보통은 왕의 자식을 낳은 후궁들이 내명부의 직첩을 받았다.
그렇지만 후궁이 예쁘고 마음에 들면 왕은 그 여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명부의 직첩을 내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이를 기화로 권세를 흔들던
후궁들도 적지 않았다. 연산군 시절의 장록수, 광해군 때의
김개시, 숙종대의 장희빈 등은 왕의 후궁으로서 일세를
풍미하던 여인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후궁들에게 부귀영화만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모시던 국왕이 죽고나면, 그녀는 개가를
할 수도,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수도 없었다.

죽을 때까지 수절해야만 했다. 왕을 모시던 여성들은
나라에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들만이 국왕의 아이를 잉태할 수 있고,
국왕의 아들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후궁들이 국왕 이외의 다른 남자와 동침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국왕과 혈통이 다른 사람이
왕위를 계승한 꼴이 되므로, 그 왕조는 생명력과 정통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써, 고려 말 이성계세력이
공민왕의 아들 우왕과 창왕에 대해 왕씨(王氏)가 아니라
신씨(辛氏)라는 이유를 내세워, 그들을 폐위시켜 사실상
고려왕조를 종식시킨 사실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왕이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 대궐에서 살았다.
자식을 낳은 후궁들의 경우에는 장성한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식도 없이 갑자기 과부가 된 후궁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여승이 되었는데, 수절을 하면서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다.

조선초기 과부 후궁들이 머리를 깍고 모여 있던 절이 바로
정업원(定業院)
이라는 곳이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재미있다.
"업(業)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라는 뜻이다.
그 업이란 바로, '국왕을 모실 수 있는 기쁨'과 '국왕만을
모셔야 한다는 족쇄'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정업원 옛터 비각

 

이곳을 찾으려면 서울지하철 6호선 타고 창신역
3번출구로 나가면 낙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똑바로난 큰길을 돌아 5분 오르면
청룡사가 나온다.

길따라 난 청룡사 안쪽으로 정업원 구기라는
비각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망봉이 보인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단종이 청령포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자규루 시' 다

 

비운의 정순왕후 송씨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가례를 올리고 동거한 기간이
1년도 안된다. 정순왕후는 18세에 단종과 헤어져 홀로 되어
소생 없이 82세 까지 살았다.

해마다 3월이면 전주이씨 문중, 친정인 여산송씨 문중,
시누이 경혜공주(단종 누이) 시가 해주 정씨 세 문중이 모여
사릉에서 매년 정순왕후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린다.

 

6대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은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1(사적제209호)에 있다.

작년 이날도 제를 마치자 3월 날씨 답지 않게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 지더니 이내 우박으로 바뀌어 제관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한다.


-왕후님의 원한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모양 이군-.

80평생의 모진 목숨에 그 원한은 오죽했으랴, 여인의 恨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잖는가


정순왕후는 1440년 (세종22년)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나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보존할 인물이라 하여

1453년(단종 1년)에 간택되어, 이듬해 15세로 왕비로 책봉 된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의덕 왕대비에
봉해 진다. 단종이 사사된 후 세조 3년(1457년) 노산부인으로
강봉 되고 송씨의 운명은 예견된 길로 가고 있다.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18세 소녀 왕비 송씨는 영월로 떠나는
17세 소년왕 단종을 눈물로 영원히 이별한다. 영영 이별한 다리,
영도교는 영원히 건너간 다리라고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지아비를 잃어 버리고 그 후 궁궐에서 쫓겨난 송씨는
지금의 동대문 밖 연미정(숭인동) 동망봉 기슭에 초가삼간을 짓고
한 많은 여생를 이어 간다.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에서 함께 쫓겨난 세명의
시녀와 살았다. 시녀들이 해온 동냥으로 끼니를 잇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근처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향해 조석으로 단종이
무사하기를 빌었지만 비원과 통곡은 허사였다.

왕비의 오열과 궁핍을 인지한 마을 여인네들이 줄을 서서
쌀과 나물을 사립문 위로 던져 놓고 갔다.

서슬이 녹지 않은 세조는 이 보고를 받고 부녀자들이
정업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을 금지했다.

민초들은 다시 지혜를 짜냈다.

 

정업원 인근에 금남禁男시장인 채소전을 열었다.
禁男이니 감시하는 관리가 접근을 할 수 없다.

이를 틈타 여인네들은 곡식과 채소를 정업원 담 너머로 던졌다.
후 송씨는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 부른다.
세월이 흘러 세조는 자신과 가족에게 액운이 겹치자
퍼런 서슬이 녹아 참회한다.  송씨의 비참한 생활을
전해 들은 세조는 정업원 근처에 영빈전이란
아담한 집을 짓고 궁핍을 면할 넉넉한 식량을 내렸으나
그것을 넙죽 받을 송씨가 아니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가 바스러지도록 원한을 짓 씹으며 80 평생을 보냈다.

 

무서운 에너지다.
차라리 요절이라도 했으면 한의 깊이가 덜했으련만,
공식 통계는 없지만 우리나라 무속인이 모시는 신이 송씨 부인이
가장 많다고 한다.
 송씨 부인이 바로 정순왕후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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