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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과 선농대제
선농단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단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선농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보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신농씨에 대한 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서는 입춘 뒤 선농제를, 입하 후 중농제를, 입추 후 후농제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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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역사문화관 고구려 벽화 속의 신농씨 |
이후 고려 성종 때 와서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향한 것으로 보이고, 이후부터는 선농제만 지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선농제를 지내는 대상인 ‘신농씨’가 바로 ‘선농신’으로 인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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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의 주인 신농씨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신농씨는 전설상의 제왕이고, 후직씨는 중국 주나라의 시조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삼황오제와 고대 하상주 왕조에 이르는 문화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들은 중국민족과 별 관련이 없는 우리 배달 조선족이 현 중국대륙을 경영할 때의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염제 신농씨는 배달국 8세 안부련 환웅천황의 신하인 소전씨(유웅국의 임금)의 아들이다. 수렵채취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을 시켜준 이가 바로 신농씨였다. 당시에는 경작지가 없었기 때문에 산이나 들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는 농사가 선행되었다. 즉 인류 첫 농사는 화전농사였다. 그래서 신농씨의 앞에 붙은 염제(炎帝) 또는 열산씨(烈山氏)는 바로 이 화전 농업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농사의 신(神農)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농업을 시작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조선에 와서는 경칩 뒤 길한 해일(亥日)을 골라 제를 올렸다. 이 때 제물로는 쌀과 기장, 고기는 소와 돼지를 통째로 날것으로(血食) 올렸고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후 근처 친경지에서 왕이 직접 밭가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례(親耕禮)를 지냈다 한다.
선농단 일대에는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천하지대본인 농업의 시작과 소중함을 알리는 의식을 행한 적전(籍田)이 있었다. 이 적전에서 행하던 의례[籍田禮]는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이어져 왔다.
이 선농단에서는 선농제 외에도 가을에 왕이 벼를 벼는 행사라든가, 기우제 등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 민족말살정책으로 중단되었고, 선농단 자리에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사범대 건물이 들어서면서 그 원형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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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단역사문화관 설명글 |
이후 선농제는 1979년 제기동의 뜻있는 주민들의 조직으로 치제(致祭)를 지내다 1992년 이후부터 동대문구가 중심이 된 국가행사가 되었다. 원래는 경칩 후 첫 해일(亥日: 길한 해일이라 해서 길해吉亥)에 지내던 것을 현재는 곡우에 지내고 있다.
현재 선농단에는 사방 4m의 석축단과 제를 지내는 장소와 천연기념물 240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