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사람 풍경]
일제가 망친 석주 할아버지 생가,
옛 모습 찾는 날 진정한 독립 :: 네이버 뉴스
http://m.news.naver.com/hotissue/read.nhn?sid1=103&cid=193776&iid=26430766&oid=025&aid=0002802005
고조부 이상룡 재산 팔아 만주로
신주도 없어 광복절에 합동 제사
99칸 기와집, 50여 칸만 남아
일제가 마당 가운데로 중앙선 놓아
2020년 철로 걷어내고 복원 시작
글·재물·아들 안 빌리는 전통 깨져
500년 가문에 내가 첫 양자 종손
현충원 임정요인 묘역 관심 가져야
“여기를 보세요, 상자, 동자 할아버지의 이름이 있네요.” 이창수(53)씨가 광장 바닥에 박힌 동판을 가리켰다. ‘안동장터 3·1운동지’라고 쓰여있다. 서울로 치면 안동의 명동쯤 된다. 그 아래 설명을 읽었다. ‘이곳은 안동에서 처음으로 3·1운동이 일어난 안동장터이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단독 시위를 시작으로 18일 2500여 명, 23일 3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으며…’가 들어온다.
‘안동 독립운동 사적지 안내도’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이 맨 위에 표기됐다.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은 이상동(1865~1951)의 형이다. 당시 국무령은 국가수반이었다. 1919년 발족한 임시정부는 1925년 개헌을
하면서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다. 석주는 짧게나마 첫 국무령을 맡았다.
이창수씨는 석주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이다. 석주가 그의 고조부다. 이씨와 함께 장터에서 자동차로 5분여 떨어진 임청각(보물 182호)을 찾았다. 영남산을 뒤로, 낙동강을 앞에 둔 고성 이씨 종택이다. 500년 세월을 끌어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다.
원래 99칸짜리 기와집이었으나 일제가 마당에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50여 칸만 남게 됐다. 20세기 한국사의 상처다.
임청각은 한국 독립운동의 명소다. 석주는 1911년 대대로 내려온 임청각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건너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물론 형제·자손 9명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다. 그들의 독립투쟁 기간을 다 더하면 300년이 넘는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힌다. 3·1절을 맞는 이씨의 감회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Q : 임청각 복원이 추진되고 있죠.
A : “중앙선 복선 전절화가 마무리되는 2020년 시작된다고 들었어요. 지금 있는 철로가 걷히고 옛 모습을 찾게 되는 날에
Q : 조상의 후광이 부담스럽겠어요.
A : “아무래도 언행이 조심스럽죠. 어릴 때는 종손이 뭔지도 몰랐어요. ‘너는 종손이 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컸습니다.
Q : 양자로 종손이 됐다고 합니다.
A : “아버님 형제가 6남 1녀입니다. 생부는 네 째 아들이죠. 맏형이 아들 없이 타계해서 제가 초등 6학년 때 양자로 갔습니다.
Q : 3불차라니, 무슨 뜻입니까.
A : “첫째 글을, 둘째 재물을, 셋째 아들을, 즉 3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모두 다 무너졌어요.
Q : 그래도 자부심은 살아 있겠죠.
A : “생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해요. 생활은 궁색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친일파에게 져서는 안 된다. 공부해서 이겨내라’
Q : 예를 든다면요.
A : “도둑질과 개가(改嫁), 두 가지를 빼고 다한다고 하셨어요. 아버님 술에 물리셨는지 제겐 술을 금하셨습니다.
이씨는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고 있다. 조상 묘소를 지키려 안동에서 보험영업을 했지만, 살림이 어려워 1994년 서울로 올라왔다.
Q : 내년이면 3·1절 100주년입니다.
A : “지금으로 치면 촛불혁명과 태극기 집회를 합쳐 놓은 셈입니다. 좌우대립, 남녀노소 없이 온 나라가 하나로 뭉쳤죠.
Q : 사람들 관심이 부족하다는 거죠.
A : “3·1절이나 광복절에 정치인들이 동작동 현충원에 있는 전직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면서도 왜 임시정부 요인 묘역은 빠뜨리는지 안타까워요. 석주 할아버지가 그곳에 계셔서가 아니에요. 헌법에도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Q : 100년 전 집안이 대단했겠죠.
A : “당시 분재기(分財記)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임청각 고문서를 보면 18세기 초 노비 수가 371명이나 됐어요.
Q :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A : “능력은 부족하지만, 또 장담은 할 순 없지만 저도 만주로 갔을 것 같습니다. 고향에 계속 남았다면 후손들이 편안했겠지만
Q : 임청각은 끝까지 지킬 건가요.
A : “은퇴 후 안동으로 내려가야죠. 지금까진 다섯 째 삼촌께서 애를 쓰셨습니다. 집안 문집도 정리하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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