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명문가의 자녀교육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6. 11. 6. 10:22
500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서애 류성룡 종가=임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1542~1607)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독서를 강조했다. “퇴계 선생이 손자들에게 주신 이 시를 너희들도 본받기를 바란다. ‘나이 어린 때는 산속 절에서의 즐거움을 가장 사랑하였기에 벽사를 드리운 창 깊은 곳에 등 하나 밝혀놓았구나. 평생동안 이뤄낸 많은 사업들은 모두가 이 한등 아래서 나온 것이었네.’” 그는 또 “학문은 정밀히 사색하고 자세히 질문하는 것을 중요시 하는데, 너희들은 언제나 사색을 깊이하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지 않으며 궁금한 점이 없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라면서 배움의 본질을 말했다.

석주 이상룡 종가=상해 임정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1858~1932) 집안은 교육자 집안. 망명중 아들은 며느리에게 논맹을 가르쳤고 며느리는 아들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안동정착 500여년동안 석주 가문에서 과거로 벼슬한 사람은 1명이지만 석주 이후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 받은이가 9명이다. 그 비결은 ①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자녀교육만은 결코 소홀하지 말라 ②명가로서의 자긍심을 지켜라. “우리 집안은 독립운동하느라 요즘에도 넉넉하지 않다. 그렇지만 잘 사는 친일파들에게 조금도 꿀릴 게 없다.” 후손의 말이다.

운악 이함 종가=‘밑지고 살라’는 게 가훈.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오면 칭찬을 해주셨고 때리고 들어오면 크게 혼을 내셨다. ‘지고 밑지라’는 신념으로 산 덕에 인재들이 모여 1980년대 초 삼보컴퓨터를 창업할 수 있었다.” 이함(1554~1632)의 17대손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의 말. 조부모-손주 사이의 격대교육이 강조된다.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면 욕심이 앞서 아이를 주눅이 들게 하기 십상이라는 것.

소치 허련 가문=소치(1808~1893)는 아들이 그림에 재능이 있어도 학문에 소홀히하면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척박한 섬에서도 5대에 걸쳐 화가를 배출하는 명문집안이 된 배경에는 ①붓 하나로는 성가할 생각을 말라 ②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라 ③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④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가훈이 있었다.

 

▲ 전남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다산초당. 다산은 10년동안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과 더불어 아들들에게 서신교육을 했다. 그는 편지에서 독서, 근검을 당부하고 특히 가문의 보전을 위해 서울을 떠나지 말라고 주문했다.

퇴계 이황 종가=퇴계(1501~1570)는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 다른 제자들에게 소개해 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다. 그는 손님이 찾아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술과 밥을 내었으며 나이어린 사람이라도 뜰 아래로 내려가 맞았다. 아들뻘인 기대승과 편지를 통해 논쟁을 벌이면서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이렇듯 인맥을 중시하여 당대 310명, 오늘날까지 715명이 퇴계학파를 형성했다. 육사도 그 후손.

고산 윤선도 종가=18년간 유배지에서 보낸 윤선도(1587~1671)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말라, 혹 벼슬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시서화뿐 아니라 유학과 경제 지리 의학 음악 천문 점성학에 능했다. 서재인 녹우당은 잡학도서관과 흡사해 조선 후기 호남의 르네상스를 이룬 산실이 됐다. 대대로 수집한 수많은 서적들은 후손들이 지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는 향기로 작용했다.

다산 정약용 종가=다산(1762~1836)은 유배지에서 편지로써 자녀들을 독려했다. 그는 자신의 유배와 형들의 불행한 일로 인해 집안이 위기에 놓이자 자녀들에게 문명세계(서울)를 떠나지 말 것, 독서에 힘쓸 것, 재물을 나눠줄 것, 근검 두 글자를 유산으로 삼을 것 등을 주문했다.

호은 조전 종가=경북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50~70호지만 마을단위로 가장 많은 박사를 배출했다. 개화기 선각자 조병희가 청년 5명으로 행동대원 삼아 서울로 보내 개화시킴으로써 보수적인 마을을 바꿔 신교육을 받게 했다. 이들은 밥을 먹을 형편이 되면 죽을 먹고 그 돈으로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해 서울로 혹은 동경으로 유학을 보냈다. 조헌영과 그의 아들 조지훈, 조동걸, 조동원, 조동일 등이 이곳 출신이다.

명재 윤증 종가=파평 윤씨 가문의 조선 대과 합격자 412명 가운데 노성 윤씨가 47명이다. 시호를 받은 사람이 9명이다. 이런 융성은 가문의 기획자가 있었던 탓. 명재의 백부 윤순거(1596~1668)가 종학당 세워 연령과 학문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일종의 사립학교로 윤씨 집안 400년 장기발전계획이었다. 종가 사랑채는 담장이 없다. 남들 앞에 부끄러울 게 없고 감출 것이 없다는 표시다.

 

경주 최부잣집=최진립(1568~1636)에서 최준(1884~1970)까지 12대 300년동안 존경받는 부자였다. 일제치하에서는 백산상회를 설립해 상해임정 등 독립운동단체에 자금 지원했던 최준은 300년된 대저택과 논밭 24만평, 860만원 등 전재산을 대구대학 계림대학(현 영남대) 설립기금으로 내놨다. ①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②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③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 ④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⑤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⑥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이 집안의 여섯 가지 가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