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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1. 15. 21:53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윌렘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만트 지방의 작은 마을 그루트 준데르트에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칼뱅파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온화한 성품의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삼촌 세 사람이 모두 화랑인 덕분에 1869년 7월 유명한 미술품 매매점 구필 화랑의 수습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872년 8월, 같은 일을 하게 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평생에 걸친 두 사람의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668통이나 되었는데 편지 왕래는 세 차례 일시적으로 끊기기도 했다.
    1873년 6월, 그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겼다. 이 무렵 19살의 하숙집 딸 유제니 로이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고 충격을 받았다. 1875년 5월 파리 본점으로 옮긴 고흐는 성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종교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미술품 거래를 혐오하게 되었고 고객이나 동료직원들과도 사이가 나빠져서 1876년 3월 말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에텐에 있는 부모 곁으로 돌아간 고흐는, 자연이나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고 기숙학교의 무보수 견습교사, 서점 점원을 전전했다. 1877년 5월에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갈망 사이에서 방황했다. 1878년 7월 신학 공부를 그만 둔 그는 전도사가 되어 가난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의 탄광지역인 보리나주로 갔다.
    그러나 그의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와 광적인 신앙심, 가난한 사람에 대한 봉사정신으로 인해 다른 종교인들과 마찰을 빚게 되고 여러 모로 힘든 생활을 했다. 1879년 여름, 고흐는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어 테오에게 데생기법에 대한 책과 물감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마침내 전업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테오는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고흐는 생전에 한 점의 그림만 팔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유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다.
    그는 화상이던 센트 삼촌의 주문을 받고 헤이그 풍경을 담은 열두 점의 스케치를 그려서 20길더를 받았다. 다른 화가들과 관계를 끊고 고독하게 작업하던 고흐는 1882년 7월, 처음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유화도 그렸다. 이 새로운 장르에 매료된 고흐는 일주일 동안 일곱 점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 주로 평범한 남녀들 중에서 모델을 찾으며 100여 점에 이르는 인물습작을 했다.
    1882년 11월에는 처음으로 석판화를 제작해서 테오에게 시험쇄를 보냈고, 석판화 <슬픔>을 본 화상이 특별 주문을 의뢰해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1883년 9월,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고흐는 시엔과 헤어지고 드렌테로 갔다.
    그러나 그는 시엔과 그녀의 아이를 버렸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드렌테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또, 황무지와 석탄구덩이의 작은 집, 마을과 일하는 농부 등을 그렸다. 드렌테의 풍경은 마음에 들었지만 작업조건은 너무 열악했다.
    날씨가 나빴고 작업실도 없었으며 유화나 데생 재료도 부족했다. 게다가 테오의 경제적인 형편도 불투명했다. 고독을 견디지 못한 그는 석 달 후 누에넨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그가 병든 어머니를 돌보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도 했다.
    목사판 창고에 아틀리에를 마련한 그는 독서를 열심히 하는 한편 그림에 열중했다. 1884년 1월, 2월에는 직조공과 풍경을 소재로 유화와 수채화를 많이 그렸다. 그해 여름, 열 살 연상의 마르고트와 사귀면서 결혼을 생각했으나 그녀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갔다.
    1885년 3월 26일,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 목사가 목사관 경문에서 쓰러진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여러 번 겪었던 그였지만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말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다.


    The Potato-Eaters

    <감자먹는 사람들>



    이것은 그가 처음 시도해보는 대규모 구성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었는데, 그후로 밝은 색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885년 11월 고흐는 도시 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려는 희망을 품고 엔트워프로 떠났다. 떠들썩한 항구의 풍경이 그에게 강렬한 이상을 주었다.

    처음으로 일본 판화를 감상하기도 한 그는 자화상에 몰두했다. 1886년 1월에 엔트워프에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신경과민 증세가 심해져 2월이 끝나기 전에 그곳을 떠났다. 파리에 온 고흐는 탕기 영감이 운영하던 클로겔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로트렉, 앙케텡, 베르날, 러셀 등을 만났다.

    이들은 1870년 <니벨룽겐의 혼인>이라는 작품으로 살룽전에서 상을 받은 바 있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4월에 이들과 합류하면서 그는 인상주의 회화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화실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없어서 넉 달만에 떠나고 말았다. 여름에는 색 다루는 연습을 위해 꽃을 다룬 정물화 연작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그는 건강이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을 받아 화풍에 변화가 생겼고 한때 점묘화의 기법에 심취하기도 했다. 베르나르와 가깝게 지냈던 고흐는 클리시 거리에 있는 포세라는 대중식당에서 그와 렸다. 1880년대 말, 모네가 여러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을 그렸던 것처럼 고흐도 꽃나무 그림을 각각 분리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연작으로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 3월 말에는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다른 인상파 화가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아를에 와서도 테오를 통해 파리에 있는 젊은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고흐는 노란집을 아틀리에로 꾸며서 화가 공동체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그는 고갱을 초대했다. 9월 16일 고흐는 고갱이 와주기를 기대하며 1월 예상 밖으로 빨리 회복한 그는 노란집으로 돌아왔고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양파가 있는 정물>, <자장가>등을 그렸다.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그러나 여전히 환각증상이 있었고, 그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의 고발로 3월말까지 병원에 감금되었다. 4월 17일, 동생 테오가 조안나 봉제르와 암스테르담에서 결혼했다. 아를 시절 고흐는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20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끝모를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고흐는 1889년 5월,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닥터 레가 그를 맞아주었다.

    9월에 <별이 빛나는 밤>과 <불꽃>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룽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즈음 고흐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다. 그러나 고흐는 12월 말, 일주일이나 계속된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르 메리퀴르 드 프랑스>에 실렸다.

    한편 브뤼셀의 20인전에 전시되었던 <붉은 포도밭>이 팔렸다. 안나 보흐라는 사람이 400프랑에 이 작품을 샀다. 이것은 그의 평생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작품이다.
    1890년 1월 31일 테오와 그의 아내 조안나 사이에 아들어 태어났다. 테오는 형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는 이름을 지었다.

    간질성 발작이 점점 잦아지는 가운데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다시 일으킨 발작이 4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생레미 요양원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고흐는 테오의 권유로 파리의 피갈 8번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그해 5월 17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머물지 않으로 했다. 또 떠나기로 했다. 이번의 행선지는 오베르 쉬르 오아즈였다. 그곳에는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페르디낭 가세가 있었다.

    오베르 쉬르 오아즈로 옮긴 그는 라부 부부의 여인숙에 방을 얻어 살면서 닥터 가세의 치료를 받았다. 6월 말 테오가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불안한 마음으로 파리를 방문했던 고흐는 테오와 돈 문제로 다투고 오베르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등을 그렸다.

    Wheatfield with Crows

    The Church at Auvers

    1890년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그를 라부의 가족이 발견했다. 그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쏜 것이다. 오베르의 성 뒤쪽에 있는 밀밭에서, 닥터 가세와 닥터 마제리가 라부의 집으로 급히 달려왔다. 이튼날, 파리에 있던 테오는 가세의 편지를 받고 오베르로 왔다. 두 형제는 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밤 고흐는 의식을 잃었고,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동생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란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7월 30일, 고흐는 테오, 베르날, 탕기 영감, 가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베르의 묘지에 묻혔다. 8월에 테오가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몽마르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고흐의 추모전을 열었다.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 형의 죽음 이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테오가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에서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914년에 테오의 화장된 유해는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출처 : 하얀미소가 머무는 곳
글쓴이 : 하얀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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