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콜로키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 교수
교육문화회관 제1교육장
목 차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사회-김철수 연구원 1
인사말-문계석 연구실장 1
왜곡된 고조선의 역사 3
동북공정의 목적 6
단일민족주의 사상과 순수혈통주의의 출원 7
홍산문화 8
삼조당-치우의 중국 역사 편입 작업 9
고조선의 유물-고인돌과 청동 비파형 동검 13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사 17
해방되지 못한 역사관-한사군 18
한사군의 중심 - 낙랑군의 위치 20
준왕의 도주로 24
대륙의 지배자 기마민족 고조선 27
기마민족성과 성공한 한국 자본주의 29
동이족대연합도-중국의 패권주의 경계 30
21세기 한민족이 나아가야 할 미래 33
질의 응답
홍산문화와 배달시대의 관계/북삼한과 남삼한에 관련한 우리영토의 위치
- 환단고기 연구의 필요성 36
- 지속적인 후속연구가 필요한 홍산문화와 우리문화와의 관계 37
- 미완으로 끝난 단재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 37
- 학문적인 설득력으로 공감대를 넓혀가야 할 고대사 연구 38
고조선과 부여와의 고리는 무엇인가?
-‘고조선의 왕통을 계승했다’는 인식을 가졌던 부여의 지배층 40
토기로 신시배달 연구의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지?
- 그 시대에 배달국이라고 스스로 불렀다 등등 기타의 1차 사료가 필요하다 41
개벽 실제상황은 보셨는지요?
- 정리된 소감을 얘기할 정도로 깊이 보지는 못했다. 43
고조선의 내세관에 대해서
- 영성이 깊은 한민족, 상생을 추구한 건국이념 44
우리 역사가 왜곡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인가? / 우리민족의 사상과 비전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 장수왕의 ‘평양 천도 사건’ 47
- 고대사의 강대했던 영역을 제사함으로서 조국 정신을 되살리자 49
단군 조선사 복원에 대한 강단 사학자들의 반응 / 역사 교과서 개정은 얼마나 기대해 볼 수 있는가? / 배달국과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 의향은? 50
- 이길 수 있을 때만 책을 쓴다 50
- 드라마에서 잘못된 역사로 대중화 할 경우 50
- 역사 전문가들이 모여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써야 한다 51
- 낙랑문화의 미스테리 52
식민사학자들과 부딪히는 어려움과 극복의 과제 / 후배들에게 전할 수 있는 비전과 철학
-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 정신으로 산다 53
- 개방된 마음으로 한 길을 간다 53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예, 안녕하십니까? 연구소의 김철수입니다. 저희들이 콜로키움을 가진지 한 이십여차례가 됐는데 오늘처럼 많은 청중이 모이기는 아마 처음인거 같습니다.
저도 오늘 지금 와서 깜짝 놀랬습니다. 연구소의 오붓한 자리가 될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참 많은 분들이 오셔가지고 먼저 일단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저희들이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의 이덕일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뭐 우리 일반 학원가에서 상당히 유명한 강좌가 보통 저자 직강입니다.
사실 오늘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부분이 해주실 강의가 바로 저자 직강입니다. 그 내용이 다 여러 책들을 통해서 보셨겠지만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에대한 오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다 아시겠습니다만은 모 방송사에서 이렇게 선생님을 말씀을 해주고 계십디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사를 종횡무진하고 한국사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기존 관념을 해체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역사평론가이시다 이렇게 말씀을 해주십디다.
참 여러분 들어도 와 닿는 이야기인거 같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연구소의 공식적인 행사이니 만큼 연구실장의 인사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선생님 말씀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인사말-문계석 연구실장
안녕하십니까, 증산도 사상연구소 연구실장 문계석입니다. 증산도 사상연구소가 개소된 이후 우리나라 저명한 석학들을 분야별로 초빙해서 개최하는 강연 및 콜로키움 벌써 18번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보고 증산도 도전에 이르기를 한민족은 환국, 배달, 조선의 삼성조 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 한족과 일본에 의한 상고역사의 왜곡으로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깊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제의 식민사관 심지어 동북아 뿌리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탐원공정의 실상을 파헤쳐본다면 누구나 다 동감하는 사실이죠.
중화사상의 기치하에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상고사 왜곡과 일본의 식민사관을 통쾌하게 날려보낼 문제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덕일 박사님이 저술한 고조선은 대륙이 지배자였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이덕일 박사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 땅을 직접 밟으며 생생한 현장 기록과 사진, 풍부한 사료와 유물을 통해서 옛조선의 실체를 파헤쳐 상고사의 진실을 밝혔습니다.
뿌리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역사가 없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옛조선이 없으면 우리의 역사도 없겠지요. 오늘 우리의 고대국가 고조선의 덧칠해진 왜곡되고 뒤틀린 오류들을 하나씩 하나씩 바로 잡으신 이덕일 박사님을 모시고 우리 민족의 뿌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소중한 이 시간을 마련해주신 이덕일 박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촌음을 아껴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상고사의 진실을 깨우쳐 뿌리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네, 연구실장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콜로키움을 할 때마다 매일 지적받는 이야기가 앞부분이 들어가는데 너무 딱딱하다. 콜로키움이 재미나게 서로가 의사가 소통되는 아주 활기차게 소통되는 그런 콜로키움을 한 번 해보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오늘도 하다보니까 앞 부분이 딱딱한거 같습니다. 특히 선생님 소개를 드릴려치면 항상 그런 지적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워낙 유명하신 분이고 해가지고 별도의 소개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책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책 날개에 있는 것을 참조하시고 촌음을 아껴서 곧바로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왜곡된 고조선의 역사
고조선이란 책을 가지고 뭐 우리 역사 오천년만에 처음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한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왜 우리 역사 오천년 만이냐? 이천년 만에 처음이지. 바로 오천년만에 처음이냐? 이천년만의 처음이냐? 여기에 큰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해외 나가서 우리 역사를 소개한 책들을 보면 한국사는 이천년된 역사로 다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것은 이천년된 역사를 소개하는 그런 책들이 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쓴 책을 보고 그렇게 소개하는 것이죠. 그 단적인 얘가 제가 이 책에서도 누누이 말슴 드렸듯이 일단 우리 국사 교과서를 보면은 상당히 의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공부하신분들 모이신거 같은데 실제 여러분들도 국사 교과서 앞부분을 보면 무슨 이야기 하는지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습니다.
학생들은 그러죠? 국사는 암기과목이라고. 근데 전 세계에서 국사가 암기과목으로 취급되어 있는 나라도 우리나라 밖에 없을겁니다. 왜 암기과목일 수 밖에 없느냐? 단군에 관련해서 기록을 보면 우리 국사 교과서를 보면 단군에 대해 분명히 나옵니다 나오기는.
뭐라고 나오냐면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BC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 글쓰는 사람들은 콤마 하나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 문장론 배울때 콤마를 어디를 찍으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느냐?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느냐 이런 얘기를 하지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라고 콤마찍고 끝나는 것과 건국했다고 한다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라는 겁니다.
무슨 차이냐? 건국했다라고 끝맺으면 그거는 교과서를 쓰는 사람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죠. 건국했다고 한다라고 끊으면은 교과서 쓴 사람의 인식이 아니라 일연의 삼국유사에 그렇게 쓰여져 있을 뿐이다라는 걸 뜻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타 교과서에 다른 부분들을 살펴보면 과연 이 국사 교과서를 저술한 사람들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라고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또 한 부분을 우리가 살펴봐야 되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청동기 시대 때 국가가 수립된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들 다 그렇게 배웠죠?
근데 실제 청동기 시대 때에야 국가가 수립되느냐? 여기 이 사실을 의심해보신적 있습니까?
이집트 고왕국이나 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 이런 데를 다 청동기 시대 아닙니다. 다 석기 시대 때 국가가 수립됬습니다.
뭐 아즈텍 문명이나 이런걸 갖다가 국가가 아니다라고 말하면 세계 학계에서 상당히 망신당하죠. 유독 청동기 시대 때 국가가 수립된다 라고 명기한 교과서도 한국 교과서 밖에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명기한거죠. 저희 어릴때 제가 한 중학교쯤 다닐 때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문제 나옵니다. 고조선, 고구려, 뭐 백제 이렇게 나와서 답이 뭔지 아세요? 고구려라고 써야 답이 됬습니다. 고조선은 국가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지금 현재의 국사교과서는 청동기 시대 때 국가가 수립된다 라고 설명을 해놓고 그 다음에 청동기 시대에는 한반도에서는 BC 10세기 만주에서는 BC 13세기에서 15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다 또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보세요. 청동기 시대 때 국가가 시작되는데, 그 청동기 시대는 한반도에서는 10세기, 만주에서는 13,15세기에 수립된다 라고 하면 우리 역사에서 국가의 시작은 암만 빨라도 한반도로 시작할 경우 BC10세기 이상으로 못 올라가죠?
만주에서 시작되었다고 봤을 경우도 BC15세기 이상 못 올라갑니다. 그나마 이번 개정된 교과서에서 상당히 많이 올려 잡아준겁니다. 그 이전에는 그냥 BC8세기로 다 통일해버렸습니다.
많이 양보해서 그럼 10세기 15세기로 봐준다 할지라도 그렇게되면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말한 BC24세기에 단군이 건국했다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됩니까? 그 이야기는 단군이 건국했다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9세기에서 13세기 이상이 없어지는 게 되죠.
우리가 그냥 고조선이라고 말하지만 고조선은 이렇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셋으로 나누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 식으로 청동기 시대 때 국가가 수립된다 라고 단정을 해놓고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한반도에서는 10세기, 만주에서는 13,15세기라고 할 경우에 그 빈 공간,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빈 공간에 속하는 조선은 어디겠어요? 당연히 단군 조선은 거기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교묘하게 이야기하는 거죠.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는 위만조선 때 실제로 고조선이 실제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위만조선때 우리 역사가 실재했고 그 나머지는 단군 조선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쓰면 상당한 반발이 있을 테니까 마치 단군 조선도 인정하는 듯이 모호하게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뭐 한다라고 써주고 실제로 청동기 시대를 거론하면서 실제 내용을 보면 위만조선부터 고조선이 실제로 있었다라고 주장을 하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면 그렇게 따지면 우리 역사의 시작에서 단군이 없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기자조선이나 저 삼조선중에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되는데, 기자나 위만은 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입니까? 다 중국에서 왔지요. 물론 기자의 성격과 위만의 성격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 쪽 지역이 또 동이족들이 죽 살던 지역이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를 도출할 수 는 있는데, 그건 논외로 치더라도 그렇게 되면 어쨌든 기자나 위만에서부터 우리 역사가 시작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중국에서 말하는 동북 공정이 맞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동북공정의 목적
중국에서 동북 공정을 제기 할때 다들 왜 제기하느냐? 그 목적을 다 이야기할 때 만주 지역에 있는 우리 교포들이 통일되고 난 다음에 동요될까봐 미리 제기하는 거다 라고 거기다 설명을 했습니다. 그럴 때 제가 몇 년전에 한 시사잡지에다가 글을 쓰기를 뭐라고 썼냐면 그게 아니라 오히려 동북 공정의 진짜 목적은 북한 영토에 있다고 봐야 된다. 그리고 중국이 동북 공정에서 하고 싶은 말하고 싶은 대상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일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가 생각할때는 북한이 급격한 사태가 발생해서 북한에 어떤 정치 체제가 붕괴한다고 하면 우리가 들어가서 통일할걸로 생각하죠? 그러나 실제로는 국제정치역학상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실제 가능한 북한이 급격히 붕괴했을때 가능한 시나리오는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는 오히려 중국 쪽에서 친중 괴뢰정권을 수립하기가 훨씬 더 가깝죠. 그렇게 되면 중국 쪽에서는 미국만 설득 시키면 미국만 양해를 하면 북한 지역을 가져가는데 장애 요소가 별로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하고 난 후로 여러 매체를 했더니 얼마전 중국 대사가 중국은 북한 지역을 동북 사성 중에 하나로 삼을 생각이 없다라고 말을 했는데, 그 이야기는 현재로서는 크게 신빙성을 두기가 곤란합니다.
왜냐면 현재 중국이 티벳트를 비롯해서 신간이나 여러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군사적 점령 상태를 다 해제하고 우리는 다른 민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런 위협이 상존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무조건 우리 논리만 가지고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저 쪽에서 청동기 시대를 가지고 이야기 하면 우리도 그럼 양보해가지고 청동기 시대로 해보자 이거죠.
단일민족주의 사상과 순수혈통주의의 출원
그럴때 우리는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좁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단일민족이다 순수혈통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그런데 흔히들 보면 순수혈통이다 단일민족이다 하는 이거를 갖다가 크게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오해하냐면? 단일 민족을 주장하고 순수혈통을 주장하는 분들이 또 한편으로는 자기네 족보로 보니까 우리 조상이 시조가 중국에서 왔다 이걸 아주 자랑하거든요.
그럼 순수혈통을 주장하면서 시조는 중국에서 왔다는걸 자랑한다 이게 서로 안 맞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식할 때 많은 장애가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패권주의 사관과 또 하나 우리 내부에 있는 또 유학사관도 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 순수혈통주의나 단일민족 주의 사상이 어디서 나오냐 하면 원래 중국에서 우리를 바라 볼때에 우리민족을 동이족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이족내에는 우리 뿐만 아니라 말갈, 지금의 만주족 들어가죠? 몽고족 들어가죠? 그 다음 거란, 속신 이 민족들이 다 들어갑니다. 이 민족들은 언어형태도 다 같습니다. 다 같은 민족들인데 중국에서 볼 때 때에 따라서 언제는 동이족이라 부르고 언제는 동호라고 부르고 그렇게 불렀던 중국에서 바라 볼때 동북쪽에 살던 민족의 통칭인데, 유학자들 생각에 우리는 우리의 뿌리는 이 동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뿌리는 중화다 중국이다 해서 우리를 중국하고 연결시키고 과거에 같은 민족이었던 동이족에 속했던 여러 민족들을 오랑캐로 내 몬거죠. 우리 맘 속에서 내 몬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 뿌리는 중화에 있다 하는 사대주의 사상, 중화사상의 극치에서 나온 것이 순수혈통입니다.
순수혈통의 뿌리는 우리는 중화민족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노니까 우리 역사는 자연히 좁아질 수 밖에 없는 거지요.
홍산문화
여기에서 보면은 이 홍산문화라는걸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데 이 우하량 유적이라는게 있고 이 동산체제사유적이라는게 있고, 내몽고에 가면 홍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빨갛지 않습니까? 그래서 홍산인데 내몽고 적봉시란 곳이 있는데 내몽고 적봉시 북쪽에 보면 홍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저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많은 유적 유물들이 나옵니다.
저걸 통치해서 홍산문화라고 부르는데, 중국측 자료들을 보면 홍산문화는 중국의 한 문화다라고 설명을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 문화가 아니라는걸 잘 압니다. 동이족의 문화이죠.
그래서 홍산문화중에 아주 중요한 문화중에 하나가 이 우하량 유적이라는 건데, 이 우하량 유적에서는 여신탈도 나오고 각종 옥들도 나오고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저 무덤 형태는 중국 식 무덤형태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 나타나는 고구려때까지 나타나는 우리의 전통 무덤형식하고 같습니다.
제가 제작년에 저 쪽 답사를 가봤더니 저 우하량 유적의 한가운데를 빵 뚫어가지고 사차선 도로를 놓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자기네 문화라고 해놓고 유적의 한 가운데를 파괴해서, 백미터만 옆으로 돌아가면 되는데, 거기는 큰 산으로 막혀있는 지역도 아니기 때문에 돌아가는데 별 지장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돌아가고 그냥 사차선 도로를 유적을 깔아 뭉개고 사차선 도로를 놓고 있다라는게 뜻하는게 뭐겠습니까? 중국 쪽에서는 아는 겁니다. 이 홍산 문화는 동이문화고 이 홍산 문화가 계속 연구되고 밝혀지면 밝혀질 수록 중국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동북 공정에 상당히 불리하다라는걸 알고 의도적으로 파괴를 하고 있는 거지요.
그 반면에 우리는 홍산문화가 뭔지를 못 들어본 분들이 대한민국 분들 중에 아마 95%이상은 될 정도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자체가 상당히 협소해져 있는 거지요.
삼조당-치우의 중국 역사 편입 작업
그 중에 또 하나 예가, 이 치우를 볼 수 있는데, 저 중국의 북경에 가보면 하북성 북서쪽으로 백 한 삼사십키로를 가면 하북성 탁록현이란 곳이 있습니다.
저 탁록현에 가면 귀근원이라는 원을 갖다 커다랗게 지어 놨는데, 이름 그대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정원이다 뭐 근본으로 돌아가는 장소다 그런 뜻이죠.
저 귀근원 안에 들어가보면 삼조당이라는게 있습니다. 세 조상을 모시는 당이다 하는 뜻인데, 그 삼조당에 모신 세 조상, 중국 중화 민족의 세 조상이라는 거죠. 그 세 조상 중에 신농씨와 그 다음에 중국인의 조상이라고 하는 황제와 그 다음에 치우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안에 들어가보면 그림이 동이족의 조상 치우이고, 이건 중국인의 조상 황제인데, 중국인들은 황제를 중국민족의 조상으로 믿어서 의심치 않아 왔습니다. 전설상 뭐 중원 각 민족의 공동조상이다 라고 하는 건데 그 반면에 이 치우는 중국에서 한족의 조상으로 전혀 여기지 않아 왔습니다. 오히려 치우는 황제와 싸워 온 중화민족의 조상인 황제와 싸워 온 아주 이민족의 대표로서 자기네들 역사 바깥으로 몰았던 그런 인물이죠.
중요한거는 중국에서 이 귀근원과 삼조당을 언제 세웠느냐가 중요합니다. 1990년대에 세웁니다. 1990년대에 중국에서는 동북공정뿐만 아니라 서북공정, 서남공정, 현재에 중국 영토내에 있는 여러 다른 민족들 중국 민족하고는 다른 민족들의 역사를 편입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귀근원을 세우고 귀근원 안에 삼조당을 세운 거죠.
그래서 삼조당 안에다가 전에는 전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치우까지도 자기네 조상으로 편입시킨 겁니다.
저기 씌인 글씨는 제가 만든게 아니라 중국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거를 그대로 전제한겁니다. 한번 볼까요?
치우는 뭐 전설상 중국의 삼고사신이다, 사악한 신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그리고 구려족의 수령이다. 이것이 중요한 건데, 이 구려족, 이 구려족은 바로 동이족에 하나다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치우가 바로 동이족의 조상이 되는 건데, 사마천의 사기나 여러 기록들을 보면 치우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환단고기나 이런 책들에도 치우에 대해서 나오죠.
그래서 붉은 악마에서 막 치우를 가지고 했을 때 다들 치우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궁금하게 생각하게 하는 분들 많았는데 환단고기에 나온다 이렇게 하면 기존 학계에서는 다 위서라고 하고 믿지 않고 있죠.
근데 치우가 역사 문헌상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사기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은 여러분들 잘 아시죠?
사마천은 흉노하고 싸우러 갔다가 패배한 이릉장군을 옹호하다가 궁형을 당하지 않습니까? 뭐 궁형은 남성기능을 못쓰게 해서 내시나 환관같은 그런 인물로 만드는 형벌인데, 사대부로서 궁형을 받으면은 대게 궁형을 받느니 자결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냐면 사대부로서 그 치욕을 견딜 수 없다 해가지고 자결을 하던지 아니면 집안에 돈이 상당히 많으면은 많은 속전을 내고 신분은 귀족에서 서인으로 떨어지지만 목숨은 건지는 것인데 사마천은 자기 친구 위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돈이 없어가지고 속전도 못내고 그래서 이 사대부로서 이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해서 사마천은 그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서 사기를 쓰지 않습니까? 바로 사기를 쓰기 위해서 난 살아 남았다 하는 건데.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중국 각지로 다 답사를 다닙니다. 뭐 세계 역사상 답사의 원조가 사마천이라 볼 수 있는데, 사기에 보면 자기가 답사다닌 기록을 다 지역을 기록해 놓습니다.
이 때 사마천은 중국의 원 조상은 시작이 삼황오제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희 씨, 신농씨 하는 삼황부터 시작하는데 사마천이 답사다녀보고 집안이 원래 사관집안이니까 여러 사료를 봤지만 삼황은 중국의 실재했던 역사로 보기 곤란하다. 사마천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삼황에 관한 부분은 사기에서 빼버립니다.
현재 남아있는 사기에 삼황에 관련되어 있는 부분들이 들어가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거는 당나라 시대 때 장수결이라는 인물이 집어 넣은 거죠. 사마천의 실제 역사적 사실로 생각한거는 오제부터입니다. 오제의 첫 번째가 황제이고 이 황제와 싸웠던 인물이 바로 치우라는 거죠.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 치우라는 인물은 중국인의 조상인 황제와 싸웠던 그러니까 이게 1대1일로 싸운게 아닌게 되는 거죠. 각자 자기 자신의 군대를 거느리고 싸우는데 저 아래 나오는 동두철액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것도 역시 사기에 나오는 기록인데, 동두철액, 치우가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이다 이게 뭘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때 치우로 대표되는 집단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여러 중국 고대기록들에서 황제집단과 치우집단이 싸우는 그 장면을 죽 여러사료를 종합해보면 처음에는 치우 집단이 승리를 합니다. 승리하는 이유가 저 치우집단은 동두철액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금속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황제집단은 그걸 못갖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전쟁이 계속 오래되는 동안에 금속문명 기술이 저 쪽으로 넘어가면서 전세가 역전되는 겁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중국 한족이 인구는 동이족보다 많았던거죠. 그래서 같은 이게 같은 무기를 지녔다면 인구 많은 쪽이 이기는 확률이 높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이 삼조당에 나와 있는 그림인데, 동두철액이라고 해놓고 치우가 갖고 있는건 뭘 갖고 있습니까? 돌도끼 갖고 있죠? 사람들이 자기네 조상으로 편입을 시켜놓긴 1990년도에 그야말로 환부역조라는 말 아시죠? 아버지를 바꾸고 조상을 바꾸는걸 갖다가 환부역조해서 치우를 중국인의 조상으로 편입을 시켜놨지만 자기네 실제 조상인 황제하고 싸웠던 인물이기 때문에 황제를 보세요 얼마나 멋있게 그려놨나? 이렇게 그려놓고 치우는 자기네 조상이라면서 아주 야만적인 모습으로 그려놓지 않습니까?
탁록현에 치우마을이라고 있는데 그 마을에서 빨래 하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치우에 관한 이야기나 합자동이라는것은 보이는 강이 대릉하입니다. 만주에 가보시면 요하가 있고 요하 서쪽에 대릉하가 있고 대릉하 서쪽에 난하가 있는데 이 대릉하를 막아 놓고 대릉하를 막아 놓은 댐인데 이 쪽에 있는 여기가 합자동 석기 유적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그런 유적이고 이것도 근처에 가보면 동산추이 제사 유적이라고 동산추란 요쪽 지역에 가보면 우리 옛날 조상들이 하늘에 제사 지냈던 그런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아주 조금 남아 있죠. 거의 뭐 관리를 중점 문물 보호단이라고 써놨는데 거의 방치한 상태이다 시피해가지고 아주 작은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적들이 홍산문화, 홍산문화로 표현되는 이 중국 만주 그리고 내몽고 지역의 이 쪽 문화들이 고조선의 전사라고 볼 수 있는데, 저 홍산문화 중에서 여러 층의 홍산문화에는 여러 개의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나온 청동기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청동기 중에, 저 쪽 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 중에 저 홍산문화중에는 상청문화 하청문화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있는데, 그 중에 발굴된 청동기로 조사를 해보면 가장 빠른것과 가장 빠른걸로 제외를 하고 중간것을 놓고 봐도 BC24세기때것이 나옵니다. BC24세기 때 청동기가 출토가 된다는 거죠.
중국에서 저 쪽 지역을 본격적으로 조사한지가 얼마 안되기 때문에 아마 조사하면 할수록 그 연대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조사한바로도 저 홍산문화중에 BC24세기에 청동기가 출토된다 라는걸 갖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이야기한 BC24세기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라고 하는 것이 사실로 받아 들여질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저 홍산 문화는 분명히 중국문화하고 다른 우리 민족의 문화이고, 우리 민족의 문화다라고 우리가 인식을 한다면 우리가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폭이 상당히 넓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 지역에서 출토된 그런 유물들은 중국 문명하고는 완전히 다른 문명들이죠.
고조선의 유물-고인돌과 청동 비파형 동검
우리 나라를 갖다가 고인돌 왕국이라고 하죠? 저는 고인돌 여기저기 그려놓은 뭐 고인돌이 전북 고창에도 있고 많은데, 가서 고인돌 설명해놓은 설명문 중에 고인돌을 갖다 고조선의 유물이다라고 설명해 놓은건 거의 못봤습니다. 여러분은 본적 있어요?
고조선 시대같이 문헌이 부족한 시대는 유물로 우리가 해석을 해야 되는데 그 유물중에서 대표적인 표지유물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것을 고조선 같은 경우,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바로 고인돌이고 또 하나는 청동 비파형 동검 이런 것들인데, 보면은 고인돌은 이것은 중국 요녕성에 있는 고인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화도에 있는 고인돌이고, 북방식으로 되어 있죠? 북방식은 우리가 탁자식이라고 부르고, 이걸 보면 저 남쪽 흑산도에 있는 고인돌입니다.
고인돌의 용도가 뭐냐 하면 백프로 다 밝혀진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 아니면 무덤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때에 고인돌이라는 형태의 무덤을 사용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저 만주지역에서부터 저 흑산도까지 퍼져 있었다라는걸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무덤이 뭡니까? 무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을 매장하는 곳이지만, 무덤의 의미는 뭐냐하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문입니다. 사람은 다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덤은 사람은 죽어서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으로 가는 거지요.
그래서 같은 형식의 무덤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같은 내세관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 만주 북부에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과 그리고 한반도에 만든 사람들과 저 남방의 흑산도에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같은 문화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이 고인돌은 상동반도에서도 한 두 점 정도가 발굴이 됐고, 발견이 됐고, 아마 연구가 진전되면 그 쪽 지역에서는 더 나올 가능성이 있는데, 현재의 그 하하족이라고 불리우는 중국 민족이 사는 지역에서는 단 한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도 묘한거죠.
확연히 고인돌을 가지고 그 경계가 그어지는 겁니다.
또 하나는 비파형 동검을 볼 수가 있는데, 이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흔히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문명은 중국에서 들어왔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과서가 항상 그런 식으로 기술을 하고 있구요, 청동기도 마찬가지이고 철기도 마찬가지고 다 중국에서 왔을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다 교과서가 서술이 됩니다.
그래서 얼마전 주몽이라는 드라마에도 보니까 뭐 한사군은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 쪽에서는 그 철기문화를 입수하기 위해서 애쓰는 그런 장면들이 나오죠.
그것도 다 청동기나 철기나 다 중국문명이 우리보다 우수했을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냐?
이걸 보면 청동검은 주석과 아연의 합금인데 우리 나라 청동검에는 아연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연은 보통 섭씨 7-8백도면은 날라갑니다. 그런데 청동검을 만들려면 섭씨1200도씨 이상 가열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청동기의 아연을 어떻게 섞느냐 하는 거는 가장 고난도에 속하는 기술이죠.
우리나라 청동기는 아연이 2-30%씩 들어가 있습니다. 중국 청동기는 아연이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 당시 중국에서는 이 아연을 합금할 기술이 없었던 거죠. 다시 말씀드리면 고조선의 청동기술이 중국의 청동기술보다 뛰어 났다는 겁니다.
우리는 막연한 고정관념 속에서 중국것이 항상 발전했고, 우리는 중국에서 모든 문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라는 생각 속에서 청동기 저것도 중국에서 왔다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 청동기의 비파형 동검의 분포지역을 보면 우리가 또 재밌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이 비파형 동검은 또 중국 지역에서는 전혀 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을 보면, 바로 동이족의 세력범위, 다시 말씀드리면 고조선의 세력범위하고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라고 볼 수 있지요. 출토한 지역보다 약간 실제 광역은 조금 더 넓게 자방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저희가 내몽고 지역에 있는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인데 여러분도 뭐 내몽고 지역에까지 저 비파형 동검이 있다 라는 거를 잘 들어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저희는 답사를 다니면서 요즘에 내몽고나 이 쪽 중국 지역에 청동검을 찾아서 답사를 몇 번 다녔는데, 이 중국 박물관도 적봉시 박물관이 됐든 오환기란 곳이 있는데 박물관이 됐든, 한국에서 왔다 그러면 대단히 신경 많이 씁니다.
예전에는 일본에서 왔다 그러면 신경 많이 썼는데, 요즘은 일본은 별로 신경 안쓰고 한국에서 왔다 그러면 대단히 신경 많이 쓰죠.
한국에서 왔다 그러면 먼저 물어보는게 역사공부하느냐? 이걸 먼저 물어 봅니다.
저희 집안 가훈 중에 하나가 거짓말 하지 말라 인데 근데 저 지역가서는 어쩔 수 없이 선의의 거짓말을 좀 해야 됩니다. 그러면 지금 보신 이쪽거는 내몽고 지역의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이죠. 거푸집은 비파형 동검을 만드는 틀인데 저 틀이 나왔다 하는 것은 고조선의 중심 지역 중에 하나라는 걸 뜻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포항제철이 있는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이 있는 광양지역이나 이렇게 철 생산의 중심지라는 뜻이죠.
저희가 가서 이런거 사진 하나 찍으려면 상당히 고도의 작전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왔다 그러면 다 처음에 저희가 적봉 박물관에 처음 갔을 때, 분명히 비파형 동검이 있다는걸 알고 갔는데 싹 없어졌습니다. 어디 갔느냐 물어보면 중앙에서 다 가져갔다 북경에서 다 가져갔다 그렇게 답하죠. 그렇게 답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듣는 우리나 다 거짓말이라는건 서로 압니다.
그러다 몇 달 후에 어느날 갑자기 가보면 있습니다. 있으면 절대 사진을 못 찍게 하죠. 보통 요즘은 전 세계 박물관들이 사진 대게 찍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데 왜 못 찍게 하느냐 하면 그 때서야 중앙에서 특별지시가 내려와서 이거는 못찍게 명령이 내려왔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중국은 상당히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라는 느낌이 중앙에서부터 아래말단까지 상당히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라는 느낌을 답사 다니면서 여러차례 봤습니다.
중국에서는 마치 비파형 동검이 내몽고지역같은데서 출토됬다? 있다라고 말하는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걸 상당히 두려워 합니다.
왜 두려워 하겠어요? 그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지역은 중국 역사가 아닌 겁니다. 곧 고조선 역사이고 우리 역사이지 중국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지역을 현재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거죠.
우리가 항상 중국 청동 제조 기술이 더 우수하다 라고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여깄는 다누세문경을 보면 다누세문경에 선과 선 사이가 0.3미리입니다. 지금의 컴퓨터로도 저거를 못 그립니다.
지금 여러분들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제도 잘 하는 분이 그려도 저걸 못 그립니다.
그런데 청동기는 그려서 만드는게 아니라 아까 거푸집을 봤듯이 거푸집을 만들고 거푸집에 주물을 떠서 그 청동 물을 넣은 다음에 위로 덮고 나중에 굳은 다음에 떼서 만드는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저 정교한 저 선을 보세요 얼마나 정교한가? 저 정교한 청동기는 지금도 지금 기술로도 만들 수 없습니다. 아주 세계 청동기 제조사상 불가사의 중에 하나죠. 근데 중국 청동기는 덩치는 큰게 많아도 이렇게 세밀한 거는 그 근처에 오는 것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중국 여러 박물관이라는 박물관은 많이 가본 사람중에 하나인데 청동기 가서 암만 봐도 저렇게 정교한 청동기는 없습니다.
당시 고조선의 청동 제조기술은 당시 세계최고였다해도 전혀 과언이 아닌겁니다. 그러면 청동기에서 철기 발전해서 철기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마치 철기는 위만이 갖고 온것처럼 이렇게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청동기 기술이 그렇게 발달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중국보다 이 고조선 청동기술이 발달했다라는게 뜻하는거는 마찬가지로 그 청동기에서 나오는 철기 제조 기술도 아주 발달했다라고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건데 우리는 모든 것이 하여간 발전된건 전부다 중국에서 왔다 왔을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서 역사서를 쓰는 겁니다.
그럼 위만에 관해서 나와 있는 고대의 많은 기록중에 위만이 철기를 갖고 왔다 라는 기록 전혀 없습니다. 기록에 있다 그러면 고조선에 원래 철기 기술이 없었는데 위만이 가져왔다 라는 고대 기록이 또 남아 있다라면 할말 없죠 그건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 들여야 되는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위만이 철기를 가져온 것처럼 그렇게 서술하는 그 자체가 상당히 큰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죠.
또 하나 문제점이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사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 우리나라의 주류학설에 따르면 고조선의 강역은 평안도 일대에 걸쳐있는 작은 소국입니다. 근데 작은 소국인데 기존 학설에 따르면 작은 소국과 중국 한나라가 왜 전쟁을 하느냐? 이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겁니다.
전쟁의 시작이 고조선이 한나라로 중국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에 조공 바치러 가는 여러나라를 못가게 막았다 해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그러면 한나라에 가는걸 막을려면 평안도에 있어가지고 무슨 재주로 저 만주나 북방에 있는 민족이나 나라들이 가는거를 평안남도에 있어가지고 무슨 재주로 막겠습니까? 이 전제 자체가 틀린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고조선에 관한 중국의 사료들을 보면 예를 들어 그런 사료가 있습니다. 뭐 예군 남녀가 28만명을 들어서 항복했다 하는 건데 예는 예라는 나라를 뜻하고 군은 군장을 뜻하는 거죠. 고조선은 예라는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라는걸 뜻합니다.
중국이 사료들을 면밀히 보면 고조선의 번국들이 있었다 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는 고조선의 산하에 여러 번국들, 제후국들을 거느리는 거느렸던 황제국이라는 이야기인데, 그 중에 하나 예라는 나라만 해도 그 28만명의 인구가 있었다는 거죠.
중국하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 한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전쟁이 2년 가까이 막 끌지 않습니까? 근데 이 전쟁의 기록들을 면밀히 살펴볼 때, 우리가 상당히 의문스러운 구절들이 많습니다.
해방되지 못한 역사관-한사군
뭐 첫째는 여기서 저하고 연배 비슷한 분들은 아마 초등학교 때 한사군이란 것에 대해서 달달 외웠을 겁니다. 시험에도 나왔죠. 한사군 이름 다 외워야 되고 낙랑이다 뭐 진번이다 임번 현도다 이름 다 외워야 되고 위치까지도 낙랑은 뭐 평안도 일대 해가지고 위치까지 다 외워야 됬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한사군이 뭡니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지역에다가 설치했다는 중국의 식민통치기관 아닙니까? 그 이름과 위치를 우리가 초등학교 때 달달 외워야 됐다? 해방된 나라에서 달달 외워야 됐다? 이거는 마치 우리 초등학교 중학생들에게 일본 총독 이름 외우게 하는거하고 똑같습니다. 조선의 주둔했던 조선 총독부의 1대 총독은 누구냐? 2대 총독은 누구냐? 이게 시험문제 나온가 하고 똑같은 겁니다. 다를게 하나도 없는 거죠.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사건이 무려 2200여년전에 있었던 사실인데, 2200여년전의 식민통치기관의 이름과 위치를 왜 외워야 했을까? 여기서 우리가 나라는 해방됐지만 역사관에서는 전혀 해방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왔다는걸 알 수가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과연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그렇게 진행됐느냐? 사마천이 살아 있을 때 묵도한겁니다. 이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은, 근데 이 전쟁 기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전쟁에 관한 경과를 죽 보면은 결론적으로는 중국이 이겼다는 거죠. 이겼는데 이기고 돌아왔으니까 한무제가 이기고 돌아온 장군들을 표창해야 되지 않습니까? 장군들을 심사해서 상을 줘야 되는데, 어떻하냐면 순차란 장군과 양복이란 장군이 있습니다.
순차란 장군은 오니까 목을 베서 귀시합니다. 귀시가 뭡니까? 그냥 목 베는것도 아니고 저자거리에서 목을 베서 그냥 구경거리로 만드는 거죠. 또 한 사령관 양복이라는 사령관은 사형 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돈을 바치니까 신분은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귀족에서 강등시키고 목숨은 막대한 돈을 받고 살려줍니다.
그 외에 위산이라는 인물과 공선소라는 인물은 이미 사형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마천이 뭐라고 부기하냐면 조선과 전쟁에 나섰던 인물중에는 아무도 제후로 봉함을 받은 사람이 없다.
원래 장군으로 중국에서 나가서 전쟁에 싸워서 이기고 돌아오면 장군에서 후, 제후로 봉함을 받는게 중국의 포상의 관례입니다.
근데 고조선과의 전쟁은 이기고 돌아 왔는데 아무도 제후로 봉함을 받기는 커녕 다 사형을 당합니다. 이상하죠? 전 세계 전쟁 역사상 이런 아무런 우여 곡절이 있을지라도 전쟁은 결과가 중요한거 아닙니까? 결과가 이게 좋으면 이겼으면 다 상을 주는 건데, 이겼다고 써놓고 오히려 상을 주는게 아니라 다 사형시킵니다.
이건 제가 만든 말이 아니라 사마천의 사기에 다 나와 있는 겁니다. 그 반면에 고조선이 무너지는게 전쟁에서 져서 무너졌다기 보다는 고조선 지배층이 분열하면서 자체 붕괴하는겁니다.
자체붕괴한 결과, 고조선에서 한나라에 항복한 사람들 이 사람들은 전부다 제후로 봉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후로 봉함을 받는 지역이 여기에 황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이 쪽 지역이죠.
발해를 중심으로 저 산동반도에서부터 위쪽에 이르는 이런 지역들. 이건 점점으로 연결한건데 실제로 뭐 이 사람들이 제후로 봉함을 받은 받긴 받았지만 봉함을 받은 지역은 따지면 호수로 따지면 불과 수백호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지역들을 받는 겁니다.
근데 어쨌든 위치가 왜 고조선에서 한참 떨어진 이 쪽 지역을 봉지로 줬을까? 이거를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것과 연결해서 중요한 것이 한사군의 위치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것이 중요한데, 이 그림이 우리가 초등학교 때 달달 외워야 됐던 위치의 말하자면 근본 사료라고 볼 수 있는데, 이병도씨가 쓴 국사대관에 나오는 한사군을 나타내는 겁니다.
보면 평양지역에 낙랑군이 있죠? 다른 모든 삼군도 한반도 내에 걸쳐서 있는걸로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낙랑군입니다. 왜냐면 낙랑군은 한사군의 중심지입니다. 한사군의.
한사군의 중심 - 낙랑군의 위치
그래서 과연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냐 하는 점은 우리가 고조선사를 바라 볼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가 됩니다. 지금까지는 전부다 낙랑군은 바로 평양 일대에 있었다 라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낙랑군의 위치를 실제 어디냐라는걸 알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사기태강지리지에 나옵니다.
이게 사기태강지리지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소기, 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라는 거죠. 여기서 우리가 수성현과 바로 이 갈석산이 어딘가를 찾으면은 낙랑군의 위치가 어딘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 수성현과 특히 갈석산이 어디냐? 여기만 찾아보면 낙랑군의 위치를 알수가 있는 거죠.
근데 이병도씨가 뭐라 했냐면 이 수성은 황해도에 보면 수안이라고 있습니다. 아마 수성은 수안일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거가 뭐냐? 근거는 숫자 하나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이 쓴 책을 보면 맹랑하지만 이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그 글에다가 맹랑하지만 나는 황해도 수성을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 맹랑하면 하지 말아야죠.
근거가 이거 딱 하나입니다. 그럼 중국 여러 지명중에 숫자 같은 지명 찾으면 백개 이상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갈석산이 있어야죠. 갈석산이 수안에 있습니까? 없으니까 그냥 근처에 산 하나 갖다가 저걸 갈석산이라고 했을 것이다 라고 해서 비극인건 그렇게 돼서 이 수성현이 실제로 황해도 수안이 됐다는 거죠. 그래서 보면 장성소기 여기에 장성이 시작됀다. 장성이 뭡니까? 만리장성이죠? 그러다보니까 중국의 만리장성이 이 안까지 그림을 보시면 중국의 각 박물관들 한번 다녀보세요. 다녀보시면 중국 박물관들에서 만리장성을 저 한반도 안 황해도 까지 끌어다 놨습니다. 그 이론 제공을 우리가 한 겁니다.
그럼 실제로 우리가 한 번 수성현과 갈석산을 한 번 찾아보자 라는 건데 지금 하북성 창려현이란데 가보면 갈석산이라는데가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입구에 신악갈석이라고 써있죠? 갈석산이 있습니다 가보면. 저희가 작년에 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왔습니다. 꼭대기에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창려현 전경이 나오는데, 위에서 보면 요새지죠. 사방이 산으로 거의 둘러쌓여져 있고, 저 끝에쯤 보이는 데가 바로 발해입니다.
그리고 저 지역이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하고 아주 가까운 지역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와 있는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다 하는 이야기는 현재 창려현 갈석산하고 모든 부분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저 근처에 바로 산해관을 비롯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저기에서 끝나고 끝나는 지역이니까 시작하는 지역이죠. 장성이 저기에서 시작되고 또 하나는 이 수나라 시대, 수양제가 있었던 수나라 시대에 관한 역사책이 수서 아닙니까? 이 수서에 보면 수성현이 바로 현재의 이름으로 현재의 이름인 창려현이다 라는 구절이 수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사기태강지리지나 수서나 이런 모든 사료를, 중국 사료를 종합해 보고 그리고 실제로 현재의 갈석산에 저 하북성 창려현에 가보면 현재 갈석산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언제 시간되시면 북경에서 하루 코스면 하루나 넉넉히 잡아서 이틀 코스면 하루 코스면 충분히 다녀올 지역입니다. 저길 구경하고 나서 밤중에 북경까지 들어갔으니까 일찍 출발하면 하루면 갈 수 있는 지역인데, 분명히 중국 고대 기록을 보면 낙랑군 지역은 현재의 하북성 창려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근데 저걸 갖다가 지금까지도 현재까지도 평양지역에 있다. 얼마전까지 고구려 연구재단 홈페이지에까지 이 낙랑군을 평양지역에 있는걸로 그려놨었습니다.
낙랑군이 여기 보시는데로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 저 지역에 있느냐 아니면 평양지역에 있느냐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낙랑군이 지금 우리가 사료에서 보고 실제 답사로 확인한 하북성 지역에 있느냐? 있다라고 하면 이 의미는 뭐냐하면 한 나라는 고조선 영토를 거의 차지하지 못한겁니다.
차지했다라고 해봤자 약간 저 일대 조금 차지해서 거기에다가 형식적으로 낙랑군이다 하는 거를 만들었다는 거죠. 그리고 광대한 고조선의 옛지역들은 우리 선조들이 그냥 계속 다스리고 살고 했다는 겁니다.
그 지역에서 부여가 나오고 고구려가 나오고 옥저가 나오고 동여가 나오고 다 나오는 거죠.
한사군은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그냥 사군을 설치했다 이렇게만 딱 나옵니다. 그리고 이름자체도 안 나옵니다.
저 보세요. 사마천이 살아 있을 때 목격한 전쟁인데,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까지 당했던 사람이 그 옛날 일까지 다 답사 다녀가면서 기록을 했던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을 때 목도한 전쟁의 결과로 한사군을 설치했으면 왜 그걸 이름을 기록을 안했겠느냐? 그리고 어떤 기록에는 중국 어떤 기록에는 2군으로 나오고 어떤 기록에는 또 3군으로 나옵니다. 아주 혼재가 되어 있는 거죠. 이러한 것들이 말해주는게 뭐냐? 결국은 고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이라는 거는 외형상 중국이 이겼다라는 형태를 취했지만 사실은 이긴 것이 아니라 그냥 고조선은 상부체제가 자체 붕괴한거고 붕괴한데서 전쟁이 끝났고 중국은 한나라는 고조선 영역을 거의 차지하지 못했다라는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 결론이 또 나오는 이유가 뭐냐하면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지 않습니까? 침공할 때 보면 좌군 12군, 우군 12군을 나눠가지고 진격로를 너는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와라 하는 진격로를 다 제시를 해줍니다. 그 진격로에 이 사군 이름이 거의 다 나옵니다. 낙랑군도 나오고 뭐도 나오고 다 나옵니다. 근데 여기에서 한 번 보세요.
낙랑이 당시 수양제가 공격하려고 했던 평양성 지역이, 고구려 수도가 평양성 아닙니까? 근데 기존의 견해대로 낙랑이 평양에 있다 그러면 수양제가 처음에 24군을 출발시키는데가 북경 북부의 탁현이라는 곳인데 거기에서 출발시키면서 너는 낙랑을 거쳐가지고 낙랑으로 와라 이 얘기니까 앞뒤가 안 맞는 거죠.
그 얘기가 가능하려면 수양제가 공수부대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공중에 떠가지고 공수부대가 내려오면 되는데 그렇지 않는 한 이게 앞뒤 말이 안 맞는 겁니다. 그럼 이런 여러 많은 실증적인 사료들이 있으면 우리가 기존에 믿어 왔던 한사군의 위치 지정이 대단히 잘못됐구나 라는 거를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실제로 고구려 동천왕 같은 경우를 보면 동천왕이 막 서안평을 공격하지 않습니까? 고구려 동천왕의 싸우고 하는 지역들이 저 서쪽으로 위나라하고 싸우는 건데, 저 동천왕이 서쪽으로 진격을 해가지고 위나라하고 막 싸움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다 이 당시에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나 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는 거죠.
정리을 하면 한사군이라는 거는 중국에서 고대 기록은 그 당시 전쟁의 기록은 우리가 중국 사료 밖에 남아 있는게 없으니까 고조선 측에서 쓴 사료는 없기 때문에 중국 사료를 가지고 우리가 해석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 사료를 해석을 하고 그 다음에 중국 사료에 나와 있는 사료와 그 지역들을 답사를 다녀보면 결국은 한사군이라는 것은 저 난하근처 산해관 일대의 고조선 서쪽 끝자락 일부를 차지했으면 그 쪽 극히 일부를 차지해서 형식적으로 한사군이란걸 만들었을수는 있지만 고조선의 옛 주요한 옛 지역들은 한나라가 전혀 차지하지 못했다.
못했으니까 한무제가 이기고 돌아온 장수들을 다 사형시키지 않겠습니까? 그 땅을 전부다 차지해가지고 고조선을 다 차지해가지고 돌아왔다라면 이기고 돌아온 장수를 갖다가 사형시키는 세계 전쟁 역사상 그런 임금은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준왕의 도주로
또 하나의 우리가 고조선사를 볼 때에 또 하나의 문제가 고조선의 준왕의 도주로인데 우리는 흔히 고조선이 멸망할 때 수도가 평양이었다 라고 생각하고 고조선의 준왕이 평양에서 위만이 들어오니까 도주해가지고 남쪽으로 가서 마한, 마한의 왕이 되었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준왕은 마한의 왕이고, 마한은 곧 백제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여기에서도 우리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면 최치원의 글을 보면 마한은 곧 고구려다 하는 글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금 대다수의 한국 학계 이런 쪽에서는 마한은 백제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최치원은 천 몇 백년전의 인물인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걸 갖다가 이병도씨가 그건 최치원이 잘못본거다 하니까 다 잘못본걸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이렇게 보면 역사공부하기 아주 편한 나라입니다. 자기 생각해가지고 자기 생각하고 안 맞는 기록이 나오면 기록이 잘못된 거니까 공부하기 아주 편하죠.
여러분도 시험칠 때 자기가 모르면 답이 틀렸다라고 하면 혼자 다 백점 맞으면 좋겠지만 과연 그런가? 준왕의 도주로를 기록한 중국의 기록들을 보면 이 주입해라고 쓰고 있습니다. 달려서 바다로 들어갔다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해로로 도주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평양 일대다 하면 평양에서 호남지역으로 충청도나 호남지역으로 도주한다 적이 막 쳐들오는데 도주한다 치면 뭘로 도주하겠어요? 말타고 그냥 도주하든지 걸어서 뛰어가는게 평양 지역에서는 훨씬 유리한겁니다. 배를 부리고 배에 싣고 이렇게 할때에는 상당히 앞에 높은 산이나 뭐가 가로 막혀 있어가지고 뱃길로 돌아가는게 훨씬 빨러야 되는 거죠.
근데 뭐 대동강 이쪽 유역들은 그렇게 하기가 배를 부려가지고 배를 통해서 도주하는 시간보다는 그냥 육로로 뛰는게 훨씬 빠른 지역이죠.
그렇게 따지면 주입해를 통해서 바다로 달려 들어서 도망갔다 라고 하는 거는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는데로 저 요동반도 한번 여러분들 비행기타고 심양이나 장천이나 이런쪽 가실 때 요동반도 지날 때 아래를 한번 내려다 보세요. 상당히 험합니다.
이 요동반도를 육로로 도주하기는 상당히 곤란하니까 요동반도는 해로로 도주하는게 상당히 나은게 되는 거죠.
그 중국 고대 기록중에 왕검성, 왕검성에는 폐수가 흐르는데, 그 폐수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동쪽 바다로 빠진다. 예를 들면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의 위치를 우리가 추적하는 겁니다. 추적하는 단서중에 하나가 중국 고대 지리서중에 왕검성에 폐수가 흐르는데 폐수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동쪽 바다로 빠진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동강은 어느 바다로 빠져요? 서쪽 바다로 빠지죠? 서해로 빠지죠. 그리고 동남쪽으로 흐르지 않고 서쪽으로 흐르죠 서남쪽으로. 근데 이것도 안 맞다 하니까 이병도씨가 이거는 서쪽을 동쪽으로 잘못쓴거다. 그래야 평양하고 위치가 맞죠.
고조선 왕검성의 위치가 평양이라고 하면 그건 이병도씨 말이 맞는 거죠. 옛날 중국의 역도원이라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도 그 양반도 그냥 왕검성이 지금의 평양성이다 생각하니까 안 맞는 거죠. 안 맞으니까 이거는 동쪽이라고 쓴거는 서쪽이라고 바꿔야 된다. 역도원이라는 사람도 공부하기 참 편한 머리를 가진 분이죠. 그렇게 되면 왕검성의 위치를 우리가 평양이라고 봤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아까 우리가 고인돌을 봤지 않습니까? 만주지역에도 광범위하게 많은 고인돌이 퍼져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 역사가 한반도내에 국한된 시간보다는 오히려 그 넓은 대륙과 해양에 걸쳐있었던 때가 훨씬 더 깁니다.
한반도가 우리 역사의 주 무대가 된게 몇 년 입니까? 불과 천 몇 백년 되지 않습니다. 그 훨씬 그것보다 몇 배 더 되는 기간동안은 우리가 저 만주대륙, 내몽고 일대를 다 포함한 만주대륙이 우리의 역사무대였고, 일본열도까지 포함한 대해양이 우리 역사의 무대였다는 겁니다.
그 때는 무궁화 삼천리 반도강산 아름답긴 하지만 언젠가는 그 애국가 그 구절은 고쳐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제가 내몽고 갔을때 내몽고 사막의 오아시스인데, 아까 제가 내몽고 지역에서 그 고조선의 동검인 청동검이 많이 출토된다고 그랬죠? 그 당시 다 우리 선조들이 다녔던 역사의 무대입니다.
실제 하나 저 보면 내몽고 적봉 위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시라무렌 강이라고 있습니다. 그 시라무렌 강을 갖다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면 염수라고 나오는데, 그 시라무렌 강이 염수다 하면 사람들이 안 믿었습니다.
실제로 옛날에 독립운동 하던 분들은 역사 공부를 아주 깊이 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뭐 환단고기나 이런 책들도 사실은 대종교 계통에서 많이 쓴 책들인데 대종교에서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모시면서 역사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그런 세력인데 가보면 시라무렌 강 위쪽에 가보면 실제 염수 짠 물이 있습니다. 가보고 나서야 비로서 얼마전에 KBS 역사스페셜 팀에서 가보고 실제로 있으니까 이게 맞다라고 했는데 그럼 옛날에 저렇게 광대한 고조선의 영토가 이렇게 광대했다라고 하면 과거에는 이 그림과 이 고조선을 평안도 일대에 걸쳐있던 작은 나라였다라고 배워 왔던것과 한번 비교해보세요.
이거는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난하라고 한거는 제가 만든게 아니라 러시아에서 고조선을 연구한 유엔부틴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 유엔부틴이라는 러시아 학자가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난하다 라고 해가지고 저 양반이 만들어 놓은걸 갖다가 저희가 차용을 한거죠.
대륙의 지배자 기마민족 고조선
그러면 고조선이 그 당시에 어떻게 저렇게 광대한 지역을 영위할수 있었는가? 물론 국경이라는게 지금같이 세관이 있어가지고 뭐 여권 검사하고 그런 개념은 아니죠.
그것이 왜 가능하나면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기마민족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마민족에 나중에 농경성이 가미가 되는 건데, 이 기마민족이란 거는 지금 여러분 말로 이동하는 것과 자동차로 이동하는것 어떤게 빠르겠어요?
고속도로로 가면 자동차가 빠릅니다. 만주지역 가보신분 아시겠지만, 요 근래와서 도로 사정이 조금 나아졌지만 불과 십년전만 해도 말로 가는게 차로 가는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말은 왠만한 지역 다 가지 않습니까? 물 어느 정도 있어도 가고, 사막도 가고, 왠만한 초원지대 다 가지 않습니까? 자동차는 정확하게 자동차 길이 닦여져 있지 않으면 못가죠.
말의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빠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고조선에서 부여가 나오고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오고. 보면은 고구려의 벽화를 보세요. 다 기마무사들이죠. 이 기마무사들이기 때문에 광대한 영토를 영유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에게 그러면 그 당시 유목민, 기마민족의 습성이나 이런게 뭐가 살아 남아 있느냐? 뭐가 남아 있을거 같습니까? 삼겹살 좋아하는 이게 다 기마민족의 풍습입니다.
전 세계에서 삼겹살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한국이죠. 유럽에서까지 다 수입해가지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삼겹살 아주 먹기 곤란한 음식입니다. 연기 피어 오르고 골치 아프고 한번 먹을라면 냄세 베고 막 이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겹살을 그렇게 구워먹고, 만주 집안시 같은데 가보면 집안에는 고구려 불고기라는게 있습니다. 풍로에다가 불고기 갖다 화덕놓고 그 위에 소고기 불고기 해먹는 건데, 그게 보다 원형에 보다 가깝게 남아 있는 거죠.
삼겹살 보다 가깝게 남아 있는게 만주 집안에 가보면 있는 그런 불고기인데, 저는 우리 민족이 현재 해방 이후에 많은 발전을 했지 않습니까? 많은 발전을 한 이유가 우리 민족 내부에 내재해 있는 이 대륙성과 해양성 이 기마민족성이 발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대양 육대주를 막 누비면서 우리 아버님 세대 형님 세대들이 그렇게 살아왔지 않습니까?
그거 하나로서 그 기마정신 하나가지고 죽 발전을 한건데, 그 이전에 우리 역사가 한반도에 갇혀 있을 때 온갖 많은 불행한 일들이 생깁니다. 물론 고려나 조선이나 조선같은 나라는 제가 조선에 관련되어 있는 책들 여러권 썼는데, 조선은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철인 정치가 실현됐던 그런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철학자들이 나와서 정치하던 뭐 그러한 나라인데, 그 자체 내부에 들어가면 나름대로 정교한 여러 시스템들이 있습니다만 큰 우리가 오늘의 주제에 맞춘 큰 틀에서 비추어 볼때는 우리 민족에 내재해 있는 유목성, 기마성은 거의 다 없어지고 농경성만 남아있던 사회라고 볼수 있습니다.
기마민족성과 성공한 한국 자본주의
우리 민족 내부의 농경성만 살아 있으면 어떻게 되냐하면 결국 내면에는 기마민족성이 잠재해 있습니다. 이게 결국 내부에서 싸우는 걸로 표출이 되면, 우리 민족 자체로 보면 큰 불행한 결과가 초래가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도 내부에서 싸우다 보니까 내부가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갈려서 싸우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은 밖으로 나가야 되는데, 총들고 나가자는 얘기가 아니죠.
우리 민족의 한국 자본주의라는거는 한국이 세계 십대 뭐 교역국으로까지 발전 했는데 한국 자본주의야말로 세계에 수출할만한 발달사입니다.
제가 올 여름에 유럽 지역을 가봤는데, 영국의 대영박물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 가보면 전부다 유물이라고 있는게 전부다 약탈해온겁니다. 약탈박물관이에요 이거는.
대영박물관이면 영국 물건이 있어야 되고, 프랑스 박물관이면 프랑스 물건이 있어야지요. 있는거는 전부 이집트 거, 소아시아거, 전부다 가져온 겁니다.
그러다가 제가 그 박물관을 나와서 보니까 한국산 차들이 왔다갔다 하고 유럽 사람들이 한국산 핸드폰 초콜릿폰이라고 불리는 그게 유럽에서 인기가 좋은데 그거 들고 서로 통화를 합니다. 그 때 제가 뭘 느꼈냐면 인류사의 20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입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했던, 힘으로 지배해서 노예로 삼고, 식민지로 삼았던 그런 제국의 시대인데, 그런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중에서 그 식민지 본국에 최첨단 제품을 수출하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거는 그래서 한국의 서양의 자본주의 발달사라고 하는 것은 거의다 해외 식민지를 가지고 많은 무수의 민족들에게 제3세계 민족들에게 고통을 줘가면서 살찌운거지만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까지에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통 받는 다른 민족들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죠?
우리나라가 발전을 성취한 이거는 세계에 수출할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성취해서 동남아시아가 됐던 아프리카가 됐던 이런 나라가 발전을 했을 경우,이거는 새로운 한국사의 새로운 모델이 되는 거죠.
동이족대연합도-중국의 패권주의 경계
근데 그런 견지에서 제가 한 번 제가 지도를 만들어 본게 있습니다. 이름해서 동이족대연합도라고 붙여 봤는데, 저 지도에 보시면 저 파란색으로 죽 그려진데, 바다에서부터 파란색으로 죽 그려진데는 중국의 영토입니다.
그런데 제가 또 파란색을 하나 또 그었지 않습니까? 이건 뭐냐면 원래 중국의 영토는 이 부분입니다.
나머지 땅들은 중국의 영토라고 보기에 곤란한 그런 지역들입니다. 중국이 이 쪽 지역에는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이 쪽 지역에는 서북공정을 진행하고 이쪽 지역에는 서남공정을 진행해서 여러 현재 중국 영토내에 있는 여러 지역들을 다 중국 영토로 편입을 시키고 있는데 왜 그러한 일들을 하느냐?
중국을 흔히 56개 민족이 합쳐져서 된 다민족 국가다 이런 말을 하죠. 그거는 중국의 공식설명이고, 56개 민족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 중국의 한족이 차지하고 있는 인구 비율은 91%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55개 민족이 차지하고 있는 인구비율이 0.9%입니다. 그 반면에 영토를 가지고 따지면 이 0.9%에 지나지 않는 이 소수민족의 원래 영토가 63%입니다.
그리고 현재 중국인들, 한족들이 가지고 있는 영토는 37%밖에 안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36.5%되는데, 그러다보니까 중국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이 소수민족이 다 떨어져 나가면 91% 달하는 인구가 현재 영토의 37%에서 살아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죠.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딴 지역들에 대해서 군사적인 점령을 전혀 풀 생각이 없는 겁니다.
중국 인민 해방군이 티벳트를 점령한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1950년 10월달입니다. 1950년 시월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바로 이 한반도내에서 치열하게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죠?
이 전쟁에 전부다 미국도 발목 잡히고 다 발목 잡혀있는 동안 중국군의 일부가 티벳트에 들어가서 점령을 한겁니다. 그 쪽말로는 해방 시켰다고 그러죠.
그런 용어를 제가 두 번 봤습니다. 한번은 일본이 1930년대에 만주지역을 들어가면서 만주 민중을 해방시킨다 하고 들어가서 만주국 수립했죠.
마찬가지로 지금 중국군이 티벳트 점령하면서 티벳트 지역을 해방시켰다 이렇게 말합니다.
티벳트와 중국은 같은 나라일수가 전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인종적으로 보나 종교로 보나 모든 것이 다 틀린 나라이죠. 그냥 군사적으로 점령한겁니다.
우리가 1910년도에 나라를 일본한테 뺏겼지 않습니까? 그리고 1919년에 뭐가 일어납니까? 3.1운동이 일어나죠? 마찬가지로 1950년에 중국에게 나라를 빼앗겼다가 1959년에 티벳트 민족 해방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때 달라이라마쪽 자료에 따르면 6백만 인구중에 2백만 가까이가 죽었다는 겁니다.
이 때 너무 많은 사람들 죽었기 때문에 티벳트에서는 그 당시 조금 젊다 하는 사람은 거의 다 죽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티벳트가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건데, 현재는 저 티벳트 지역에는 오십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핵실험을 하면 항상 실험하는 장소는 저 티벳트 그 옆에 있는 청해성, 옛날 다 티벳트 지역이죠. 그 쪽에서 항상 핵실험을 합니다.
우리가 중국이 설마 우리 나라를 북한 지역을 차지하겠느냐? 물론 중국에 두 흐름이 있습니다. 중국이 앞의 미래를 현재와 같은 패권국가로 계속 갈거냐? 아니면 체제민주화로 갈거냐 하는 양쪽 흐름이 있는데 중국이 물론 민주화가 되면 우리가 별 걱정할건 없습니다. 민주화 체제가 수립이 되고 각 소수 민족들이 자기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되면 더 이상 위협이 안되겠죠.
현재로서는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는게 분명하기 때문에 상당히 경계를 해야 되는 겁니다.
뭐 독도 문제 하나 가지고는 질이나 차원에서 아주 틀린 문제이죠. 그럴때 현재 우리나라 현 상태로 이렇게 가면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하겠다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제가 아까 단일민족론이다 순수혈통론이다 하는 이게 다 사대주의에서 나왔다라고 하는데 지금 상황도 우리나라 우파는 친미사대주의이고 좌파는 친중 친북 사대주의 아닙니까? 이렇게 가다가 과연 저 그림을 한 번 보세요. 중국이 저렇게 거대한데 우리 한반도가 저 조그만 지경에 처해가지고 중국이 현재 상태로 발전해 나가면 우리 한국이 나중에 독립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도 우리가 사실 우려를 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빨간색으로 그린 거는 바로 중국에서 동이라고 불렸던 동이족이라고 불렸던 민족들을 묶은 겁니다. 묶어보면 저기에는 우리 민족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 만주족, 말갈족이 들어가고 몽골족이 들어가죠. 그래서 이 세 현재에 남아 있는 거란족도 일부 있고 하는데, 현재는 남아있는 형체를 찾아보긴 어렵고, 현재 남아 있는 이 쪽 민족들만 쭉 묶어 보면 이렇게 큰 그림이 됩니다.
그리고 저 속에서 중국에 지금 현재 점령당해 있는 여러 소수민족들이 나중에 독립해 나간다라고 했을 경우에는 상당히 거의 중국하고 땅덩어리로 따져도 별로 뒤지지 않는 넓은 영토가 되는 거죠.
이걸 우리는 마찬가지로 뭐 군사적으로 이렇게 하자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자본이나 기술이나 이런 것과 저쪽 몽골이나 만주 지역이 갖고 있는 어떤 영토나 지하자원이나 이런것하고 같이 연합하면 서로가 상승하는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꿈으로 보이십니까?
21세기 한민족이 나아가야 할 미래
지금 당장은 꿈일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그 꿈은 꿈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현실로 미래는 현실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 우리 사회가 아주 혼란에 빠져 있는게 국가 아젠다를 상실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해방 이후에 우리의 과제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과제가 있었고, 또 하나는 정치민주화를 이룩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그 두 과제를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 현재로서는 달성했지 않습니까?
달성한 지금에 그럼 우리가 어디로 갈거냐? 달성한 다음에 우리가 뭘 지향해야 할거냐? 바로 이것이 새로운 아젠다가 나와야 될 시점인데, 이 아젠다를 미래로 가지 않고 자꾸 과거로 가다 보니까 우리끼리 싸우기만 하고 아무것도 이룬거는 없고, 서로간에 마음에 상처만 주고 이렇게 되었던 거죠.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의 발전을 부러워 하고 있습니다. 왜냐 우리나라는 또 이거를 자력으로 다 달성한 겁니다. 누가 갖다준 경제발전이 아니고, 누가 갖다준 민주화가 아니고 우리 자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우리 자력으로 민주화를 이룩했지 않습니까? 그럼 이 달성한 제3세계 여러 국가들이 부러워하고 있는 이 한국의 성취를 제가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제3세계에 나눠주면서 이 성과를 같이 공유를 하면서 발전을 해나가면서 우리 옛 고대사의 강역들을 우리 옛 선조들의 정신에 따라서 동이족을 죽 묶는 연합하는 그런 형태로 나가는 것이 우리 민족이 21세기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겠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끝>
예, 그럼 지금부터 질의응답 시간을 갖기로 하겠습니다. 나도 단군의 자손이라. 참 무섭고 무섭디 무서운 그 경책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책을 앞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얘기가 있죠. 보면은 ‘국사 교과서에는 단군 조선이 없다.’ 참 우리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게 오늘 선생님께서는 그 우리가 알아야 하는 그 뿌리 역사에 대한 각종 쟁점들을 잘 그 집고 정리를 쭉 해주셨습니다. 또 명쾌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한 한 시간정도 가량의 시간을 통해 가지고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들. 그것은 오늘 말씀해주신 내용 중에서도 좋고 아니면은 이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라는 요 책 내용을 읽으시다가 궁금한 내용을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아니면은 이 그 지금 현재 공부하시는 분들이 좀 많으시는 것 같던데, 지금 교과서 문제들도 있기 때문에 혹시 공부하다가 궁금한 내용 그런 것까지도 말씀을 해주셔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지금 그 질의하실 때는 다 아시겠지만 자기의 신원을 좀 밝히시고 질문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time 1: 40
질문 : 홍산문화와 배달시대의 관계/북삼한과 남삼한에 관련한 우리영토의 위치
예. 연구실장 문계석입니다. 좋은 강의를 들어서 고맙습니다. 제가 지금 두 가지만 좀 알고 싶어서 여쭙는 건데요. 그 첫 번째는 아마 그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얘기죠. '석유환국, 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라고 하는 거. 그 다음에 우리 여기 '환단고기에도 보면은 [환국-배달-단군조선] 이렇게 연계된다' 라고 볼 수 있는데, 아까 말씀하신 그 적봉에 있는 홍산 문화와 관련해서 그 배달 시대와 연관시켜서 볼 수 있는지. 그 그렇게 의문이 드는 것은 지금 고조선까지 그 홍산 문화까지 전부 포함을 시켰는데. 고조선, 단군 조선의 근위는 어디냐. 추론지는. 그런 것을 우리가 미루어 짐작해본다면은 아마 ‘배달 시대가 그쪽과 연관시켜 볼 수 있지 않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 하나 하고 다른 하나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 아시죠. 거기에 보면은 그 ‘삼한관경제’와 관련해서 ‘대북삼한’과 ‘남삼한’ 얘기들이 나옵니다. ‘북삼한’과 ‘남삼한’과 관련해서 그 우리 영토에 보면은 어떻게 위치를 잡을 수 있고 이동 경로는 어떻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지 그 선생님께서 우리가 알기 쉽게 설명을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당히 난해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 관계에 대해서는 뭐 저도 정확하게 ‘이것이 맞다 틀리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아직까지 우리가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게 그 사실들이 객관화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객관화라는 말은 저뿐만 아니라 제 3자가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근거들이 충분히 있을 때 객관화하자는 주장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질문하신 부분은 그 어떤 부분들은 옛날 사료들에도 나오지만 어떤 부분들은 최근에 발견된 사료들은 등장을 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하면.
- 환단고기 연구의 필요성
마찬가지입니다. ‘환단고기’도 그렇고 ‘규원사화’도 그렇고 이것을 읽고 많은 분들이 그 많은 분들은 사실로 믿고 또 많은 분들은 ‘이게 위서다.’ 라고 주장을 하는데. 저는 ‘이것이 사실이다 위서다.’ 라는 그 차원에서 ‘이제는 한 차원 좀 넘어가야 된다.’ 라고 계속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뭐냐면은 ‘환단고기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환단고기‘의 내용이 ‘맞다 틀리다.’ 라는 차원에서 ‘환단고기’를 한번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에서 치우 관련된 부분을 이렇게 쭉 쓰면서, 만약 ‘환단고기’만을 가지고 썼다고 그러면은 호응받기가 곤란한. 또는 다시 말씀 드리면 아주 어느 학계 쪽에서는 상당히 강하게 공격해 왔을 가능성이 있겠죠.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쓸 때, 물론 ‘환단고기’도 인용을 했지만 주로는 ‘사마천의 사기’나 그 사기의 주석에 나오는 여러 구절들을 가지고 치우를 갖다가 그 상을 제시를 했기 때문에. 그 말하자면 보다 중립지대에 있는 분들이 치우에 대해 이렇게, 보다 과거에 비해서는 좀 가깝게 받아들인, ‘우리의 동이족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좀 덜 한 측면도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부분은 ‘환국이다 배달국이다.’ 하는 이런 부분들은. 물론 환국은 ‘삼국유사’에도 나오기도 합니다만 그 짤막하게 그렇게 나오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해서는 그 연구를 하려면, 그러니까 역사학이라는 것은 옛날이야기를 옛날 자료를 가지고 설명을 해야 됩니다. 옛날이야기를 갖다가 지금 자료로 설명을 하면은 공감대를, 그러니까 역대학문적인 방법에서 공감대를 객관적으로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이 ‘환단고기’나 이쪽을 연구하시는 분들이 좀 그 ‘환단고기’사를 보다 좀 깊이 연구해서 그 ‘환단고기’ 라는 책이 여러 고대에 있는 여러 사서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중국 ‘사마천의 사기‘뿐 만 아니라 산해경이나 여러 중국 사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중국의 뭐 25사에 속하는 역사서도 좋고 아닌 책도 좋고 하여간 ‘지금 남아있는 고대 사료들과 환단고기의 내용을 좀 엄밀하게 고증해볼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 지속적인 후속연구가 필요한 홍산문화와 우리문화와의 관계
그러니까 홍산 문화는 제가 ‘고조선의 전사가 아니냐. 라고 전사로 받아들여야 되지 않느냐.’ 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이야기는 결국 우리 동이족의 역사도 그 홍산 문화로 포함시켜야 하지 않느냐 하는 부분인데.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홍산 문화에 관한 연구가 대단히 미약한 상황에 있는 거죠. 현재 그러니까 뭐 여기 계신 분들도 좋고 누가 홍산 문화와 중국문화의 차이점 또는 홍산 문화와 우리 역사의 유사점 같은 것을 보다 연구를 해서. 제가 아까 보여드린 뭐 무덤의 형태나 뭐 이런 것들과 계속적인 어떤 후속 연구를 통해서 ‘우리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라는 것이 객관화 됐을 때, 우리 역사 속에 편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 미완으로 끝난 단재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
그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은 저는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하는데. 그 분도 한국 고대사에 대해서 많은 글을 쓰셨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 분의 글이 거의 다 완결 된 것은 거의 없죠. 거의 다 미완으로 끝났고. 또 하나는 그 분도 어떤 그 많은 주장을 하시면서 출처를 정확하게 안 밝히신 부분이 많기 때문에, 또 이것도 저희가 사용하다보면,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되니까 그것도 좀 약한 부분이, 그 부분은 ‘결국 신채호 선생의 글은 다 맞다.’ 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신채호 선생이 했다고 해서 다 맞다.’는 게 아니라 ‘신채호 선생이 다른 사서에 없는 이야기를 했다.’ 고 그러면 ‘그 사서는 근거가 뭐냐.’라는 근거를 또 제시해야 되는 그 임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신채호 선생의 글을 보면은 뭐 ‘좌현왕이다 우현왕이다’ 뭐 고조선 관련된 그런 글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은. 아마 좌현왕 우현왕 같은 경우에 흉노에 왕좌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흉노족이 황제가 있고 그 다음에 좌현왕, 우현왕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마 신채호 선생이 그 흉노에 관한 고대의 어떤 사료들을 보고 그것을 고조선 쪽에 적용을 한 게 아닌가 하는 뭐 그 정도 제가 추측은 여러 사료들을 보면서 추측은 할 수 있는데. ‘단재 선생 자신이 무슨 책을 보고 그렇게 짰다’라고 정확하게 설명을 안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고조선의 모습이 실제 모습이 그랬다.’ 라고 하기에는. 또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주장했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고조선의 실제 모습이 그 신채호 선생님이 말한 그대로다.’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중간 단계가 몇 개가 더 필요한 거죠. 그래서 바로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계속적인 뭐 연구대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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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적인 설득력으로 공감대를 넓혀가야 할 고대사 연구
그리고 특히 신채호 선생 한 분만 해도 우리가 많은 부분 연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분을 보면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했었고, 그래서 아나키스트는 국제 연대 조직이니까. 당시 북경대 뭐 총장이었던 이혁균이나 최원배 이런 분들과 교류를 하면서 ‘북경대 도서관에 있는 사고전서를 섭렵을 했다.’라는 기록도 있으니까. 아마 단재 선생이 그 사고전서를 보는 과정에서 거기에서 많은 것들을 추출하지 않았냐 싶은데. 바로 단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사고전서를 섭렵했다.’라는 것이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주는 거죠. 왜냐하면 지금 현재 한국 고대사가 논쟁하는 내용들을 보면은 거의 다 뭐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이거 가지고 많이 얘기를 합니다. 서로가 같은 글자를 가지고 같은 문장을 가지고 해석만 달리해서 막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거죠. 이미 다 공개가 됐고 뭐하면은 ‘자기 자신의 주장이 옳다.’라고 하려면은 더 이상 ‘삼국지 위지 동이전’만 가지고 하지 말고 ‘삼국지’ 자체에도 이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나오고. 뭐 ‘한서’, ‘후한서’ 이런 데에도 ‘동이전’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본문에도 많은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럼 이 본문을 보다 더 철저하게 연구를 해서 본문에는 이런 조항들이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라고 그 쪽으로 우리 학문의 연구방향이 나가야 이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로 본문에는 ‘한서’, ‘본문에는 이런 이런 구절이 나와서 우리가 고조선을 이렇게 볼 수 있다.’ 라고 ‘주장을 했을 때 학문적인 설득력을 얻어가고 공감대를 좀 넓혀갈 수 있다.’라고 생각이 되는 겁니다. 지금 차원에서는 아직까지 ‘환단고기‘ 자체도 연구가 제대로 안 됐고, 이게 뭐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도 사실 제대로 연구가 안 됐기 때문에 그거는 훗날에 연구 과제 일 수 밖에 없다. 지금 차원에서는. 뭐 대답이 상당히 미진하겠지만 그 정도로 답변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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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문 : 고조선과 부여와의 고리는 무엇인가?
예. 선생님 강의를 잘 들었습니다. 저도 뭐 그 한국사는 아니지만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여러 책들을 제가 읽어 보았는데, 전부가 다 납득이 가고 매우 그 일반 대중한테도 어필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책이 되가지고 ‘야. 그 선생님의 성공의 비결이 이런 데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좀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까 그 기마 민족 이야기를 하셨는데, 고조선, 그리고 부여, 그리고 그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 백제. 그 나라를 건국한 세력들이 이 기마 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또 일본으로 또 건너간 것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좀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고조선하고 이 부여하고의 그 고리가 어떤 것인지. 그것을 현재 그 일반 학자들이 인용하는 고대 사료들을 통해서 그 어느 정도 그 입증을 해 낼 수 있는지 그것이 좀 알고 싶습니다. 연구소의 김현일 연구위원입니다.
-‘고조선의 왕통을 계승했다’는 인식을 가졌던 부여의 지배층
고조선과 부여의 관계가 상당히 그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오기 때문에 부여라는 나라의 실체가 상당히 중요한데. 부여사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별로 많이 남아있는 자료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이것도 중국 쪽 사료를 보면은 그나마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좀 남아있는데. 여기에서 부여 같은 경우는 고조선과 연결시키려면 해모수 같은 경우가 단군하고 같이 언급되는 그런 몇 몇 단편적인 사료가 현재로써는 거의 우리가 볼 수 있는 고조선과 연결시킨. 그러니까 부여 자체만 가지고 연구를 하면 이런 것들이 좀 더 나올 수 있는데. 부여 자체만 가지고 충분히 책 한 권 분량이 될 수 있는데 이 부여와 고조선과의 관계를 가지고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그런 단편적으로 단군과 해모수를 연결을 하는 그 정도 이야기만이 현재론 사료로 남아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짤막한 한 두 가지의 이 사료만 가지고도 우리가 그 근거가 전혀 없는 것과 한 두 문장이라도 근거가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그 어떻게 인식을 했다. 그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을 했다.‘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부여의 왕족이 단군 이쪽하고 스스로를 같이 그 뿌리로 인식했다.’라는 걸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단서라고 볼 수가 있겠죠. 이런 경우는 후대로 가면 발해 같은 경우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우리는 고구려의 사람이다.’라고 일본에 가서 이야기한 것들이 일본의 자료에는 나오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발해를 갖다가 자기네 중국사로 편입을 하려고 하는 중국 쪽 의도의 그 짧은 구절이지만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발해 사신들이 자기 자신들을 고구려의 사신이다.’라고 말했다는 그 짧은 구절이 많은 걸 갖다가 엎어버리듯이. 고조선과 부여의 관계도 부여의 곡성들. 그러니까 ‘왕성, 그 부여의 지배층들 같은 경우는 그런 한 두 가지 그 단서를 가지고 고조선을 계승했다.’라고, ‘고조선의 왕통을 계승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지금 차원에서는 그 이상의 또 많은 사료들이 더 이상의 자료들이 연구해서 나오면 보다 그 심화된 말씀을 드릴 수가 있을 텐데 현재는 그 정도 말씀을 드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헌데 이 공부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이 질문들이 좀 딴 데서 받는 질문들하곤 상당히 질이 조금 틀리군요. 딴 분도 질문 해주시죠. 너무 초반에 어려운 질문을 하시니까 딴 분들이.
time 00:18
질문 : 질문 토기로 신시배달 연구의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지?
예. 저도 연구소의 황경선입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좀 학술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책을 보고 안 것을 한번 선생님을 통해서 확인을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까 연구소 실장님이 ‘단군 조선과 환국-배달‘ 이런 문제를 질문을 하셨는데, 저도 유사한 질문입니다. 저는 그 마찬가지로 조선 상고사 책에서 보면 주석을 단 이만열씨가 책의 이해를 위해서 자신이 해설한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단군 조선의 성립과정 해가지고 그 분의 주장은 뭐 질문 토기’라고 하나요? 그 질문 토기를 사용하는 그런 그 족속이 기존에 있었는데, 그게 BCS 3천년, 4천년 쯤 해가지고 그 무문 토기를 쓰는, 그것은 ‘홍산 문화와 연결됐다.’라고 그 분은 주장을 하는 데 그 무문 토기를 가진 민족이. 또 그 민족의 특징은 뭐 천손사상이 있고 또 태양신을 숭배하고 또 묵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그런 견해가 그 질문 토기를 퇴치하는 그런 속에서 단군 조선의 성립을 보는데. 제가 여기에서 하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바로 요런 과정에서 우리가 아까 저기 제기됐던 신시 배달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졌거든요? 그래서 선생님께 한번 드려 보고 싶은 것은 이런 주장에 어떤 뭐 학문성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을 하시고. 또 그런 주장에 대해서 제가 생각하듯이 어떤 배달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실마리로 삼아볼 수 있는지 이런 것 들을 한번 질문 드려보겠습니다.
- 그 시대에 배달국이라고 스스로 불렀다 등등 기타의 1차 사료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우리 민족의 처음 그 시작하는 그 태양 숭배 사상이나 천손 사상이나 이런 것들은 우리가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데. 배달이라는 용어 자체가 상당히 후대에 나왔기 때문에 후대에 그 처음에 등장하는 용어를 가지고 아주 그 고대를 설명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가 설명을 갖다가 그 말씀하신 그 교수분이 그 설명을 하기를 지금 나와 있는 출토된 유물을 가지고 그 유물을 이렇게 이렇게 해석해서 우리 고대사의 형태를 그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데. ‘그 후대에 나와 있는 용어를. 한참 후대에 나온 용어를 가지고 그 전대의 시대다.’라고 이렇게 말할 때는 중간에 많은 단계가 필요하다는 거죠. 과연 배달이란 그 홍산 문화나 이런 쪽의 그걸 가지고 고조선의 전사를 가지고 ‘우리가 배달국이다.’라고 말을 하려면 그 시대 때 배달국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든지 뭐했든지 하는 그 일차 사료가 있어야 되는데, 그 일차 사료가 없는 상황에서 주장을 하게 되면 내부 주장으로 끝나고 확산하기에는 상당히 곤란한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민족의 그 뭐랄까요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이런 구절들도 보면 지금 특이한 그런 것들이 상당히 많죠. 이게 다른 나라의 건국 어떤 그 사화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홍익인간의 개념이라거나 직접 하늘과 직접 연결해가지고 하는 그런 부분이라거나 하는 상당히 특이한 요소들이 많은데. 그런 현재 현존하고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이렇게 설명 하는 것은 해석의 요지가 상당히 좀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넓을 수 있으니까 가능한데. 그 후대에 나온 용어를 가지고 전대를 갖다가 이렇게 설명을 할 때는 마찬가지로 많은 중간. 그 ‘왜 그럼 그 시대 때 배달이라고 불렀다.’는 그 믿지 않는 쪽에서, 그럼 ‘그 당시에 홍산 이쪽에 문화를 건설하는 사람들을 배달국이라고 불렀다.’ 라고 하는 그 당시의 근거가 있느냐 라고 나오면은 상당히 대답이 궁색해지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그 자체를 더 그 연구할 필요가 있다.’ 라고 밖에 답변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뭐 너무 공부하신 분들이 어려운 질문 하시니까 좀 쉬운 질문도 좀..
time 00:22
질문 : 개벽 실제상황은 보셨는지요?
아, 저는 진성조라고 합니다. 이덕일 선생님의 그 책을 재밌게 본 애독자입니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하고 ‘조선왕 독살 사건’을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제가 그 질문을 그 연구소 박사님이 수준 높은 질문을 많이 하셨으니까 저는 좀 쉬운 질문 하겠습니다. 우리 그 대원출판사에서 나온 저희들 증산도 종정님께서 쓰신 그 ‘개벽 실제상황’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한번 읽어보셨는지요. 또 그 책을 보시고 느낀 소감 같은 걸 한번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정리된 소감을 얘기할 정도로 깊이 보지는 못했다.
그 책을 소장은 하고는 있는데. 정독하진 못했고 그냥 훑어본 정도입니다. 그 책에 상당히 많은 내용들이 나오기 때문에 개벽 책에 나오는 그 내용들에서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료를 봤을 때 상당히 의미 있고 흥미로운 그런 사료들을 좀 봤는데. 저는 그런 사료들을 봤을 때, 제가 어떤 책을 쓸 때 ‘개벽 실제상황에 이게 나온다.’ 라고 인용해서 썼을 경우 또 마찬가지로 어떤 객관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사료가 나올 때 반드시 저는 본문을 그 원사료를 확인을 합니다. 원사료 확인하는 게 제가 어떤 부분도 막 확인하다가 원사료 근처까지 갔다가 못 찾아가지고 어디에 쓸려다가 못 쓴 적이 있는데. 다 보지는 못했고 ‘그 정도의 선에서 봤다.’ 라고 생각 하는데. 아직까지 제가 거기에 대해서 정리된 그런 소감을 얘기할 정도로 깊이 보지는 않았으니까 그 정도 제가 봤다는 정도에서 제가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time 00:24
질문 : 고조선의 내세관에 대해서
예. 안녕하세요. 저는 이혜경이라고 합니다. 저는 박사님의 책 중에서 김종서 장군에 대해서 재조명한 ‘거칠 것이 없어라’와 ‘아나키스트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굉장히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오늘 제가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교재 제목이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는데 책에도 보면 고조선의 강역이라든지 어떤 그런 사실 여부, 존재 여부를 증거 하는 데 많은 비중을 할애하셨는데요.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어느 나라든지 어떤 그 나라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어떤 통치 원리라든지 혹은 그 당시의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떤 내세관이라든지 사상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박사님께서 여러 가지 사료나 유물을 조사하시는 과정 중에서 느꼈던 그런 우리 민족의 그 고조선 당시의 어떤 세상을 보는 눈이라든지 아까도 내세관을 말씀하셨는데 그런 것이 있다면 간단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영성이 깊은 한민족, 상생을 추구한 건국이념
근데 유물을 가지고 그러니까 현존하는 사료는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나와 있는 부분들이 가장 직접 사료로는 뭐 그렇고. 그 다음에는 중국의 ‘관자’라거나 ‘산해경’ 이라거나 이러한 고대 사료 중에 고조선에 관해 잠깐 잠깐 언급한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에서는 그런 것들에서는 고조선에서는 무슨 표피가 난다거나 출토. 고조선에서 많이 생산되는 어떤 생산품에 관한 그러한 내용들이죠. 그래서 저는 쭉 다니면서 어떤 유물 같은 것을 봤을 때, 고인돌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상당히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이 과연 그 누구냐. 그 물론 고조선 사람들인데. 이들과 영국에 가보면은 영국에 ‘스톤헨지’라고 있죠. 거기도 상당히 광범위한 고인돌 무리들이 있고. 그 다음에 프랑스에도 가보면은 그러니까 유럽 대륙에도 이 고인돌 군들이 있습니다. 이 유럽의 고인을 가지고 제가 올해 그 영국에 갔을 때 그 고인돌 해가지고 ‘잃어버린 유럽의 문명’이라고 쓴 책도 하나 봤었는데. 유럽 사람들도 이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상당한 그 미스테리한 그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그러한 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나라에 있는 광범위한 이 고인돌과 그리고 저 유럽에 있는 고인돌이 과연 어떻게 연결 되는지. 분명히 세계사 적인 하나의 흐름입니다. 이 ‘거석문화’라는 것이 아주 전 지구적으로 걸쳐있는 하나의 흐름인데. 그 묘한 거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중국 지역에는 전혀 중국 본토에는 고인돌이 또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뭐 이런 생각들을 또 하고. 또 청동기를 놓고 볼 때는 우리나라 청동기와 중국 청동기의 차이는 우리나라 청동기는 고조선 청동기는 주로 무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중국의 청동기는 제사 지내는 이 제기들이 많죠. 제기나 예기들이 많은데. 이렇게 청동기의 성격도 확연히 틀려집니다. 그러면서 그거는 ‘무기가 많다.’ 라는 거는 아까 말씀드린 ‘고조선의 성격 자체가 어떤 기마 민족이다.’ 라는 그 성격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거는 고조선의 건국 사화나 이런 것들을 보면은 오히려 고조선의 어떤 건국 정신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은 전쟁하고는 상당히 또 거리가 먼 그런 어떤 건국과 관련돼서는 그런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저는 가끔 가다 농담조로 ‘우리나라 민족들이 우리 민족이 상당히 영발이 세다.’ 라고 저는 그런 말을 하는데. 실제로 어떤 종교를 놓고 봐도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종교가 들어와서 거의 실패하는 예가 별로 없지 않습니까?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은 상당히 우호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많은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간에 갈등이 또 별로 없는 그런 또 특이한 그 문화 형태를 지닌 민족이 우리 민족인데. 그런 우리 민족이 특히 중국 민족하고 비교 해보면은 이 ‘영적인 차원에서는 확연히 틀리다.’ 라는 걸 많은 데서 느끼게 되죠. 그래서 그러한 ‘영성이 좀 우리 민족이 깊지 않느냐.’ 라는 그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데. 그것이 그 뿌리가 아주 고대부터 아까 제가 보여드린 것 중에 ‘동상치’ 라는 곳에 제사지내는 유적물.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하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그러한 기능들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고 확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 그 성격들을 갖다가 저 같은 경우에는 설명할 때 그 역사학이라는 걸 하다 보면은 상당히 설명에 제한을 많이 받습니다. 그 어떤 사물을 가지고 어떤 해석을 할 때 그 해석이 보편성을 획득해야 되는 그런 노력들을 많이 해야 되니까 그래서 그 정도 선에서 아주 무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복이나 이런 거 보다는 서로 철학이나 이런 쪽에 남아있는 것들을 보면 ‘상생을 또 추구한 이러한 특이한 그 모습이다.’ 라고 받아들이는데. 이걸 갖다가 어떤 하나의 체계화된 그 어떤 모습이나 논술이나 이런 것으로 제시하기에는 아직까지 공부를 조금 더 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역시 어려운 질문을 또 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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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우리 역사가 왜곡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인가?
아 예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국 증산도 대학생 포교부에 소속된 정우진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 선생님 참 책 나올 때마다 족족 사서 보는 이 아주 열성팬인데요. 아까 전에도 그 저도 ‘거칠 것이 없어라’ 라는 책 굉장히 감동 깊게 봤는데. 선생님께서 그 참 그 세조와 어떤 김종서, 그리고 뭐 황부인 그리고 뭐 정분, 그 사건 이후에 정말 ‘조선의 역사는 어떤 정의가 상실된 그런 나라가 되었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굉장히 안타까워 하셨던 그런 대목이 생각이 났구요. 그리고 어떤 단재, 어떤 일관된 맥으로써 어떤 단재 신채호 선생도 그러니까 ‘조선 역사상 일대 사건’이라고 이렇게 말씀했던 서경 천도 운동 요청이 그것이 정말 우리 역사를 이렇게 도끼질 하고 망하게 된 어떤 그런 어떤 ‘단재 신채호 선생만의 어떤 독특한 시각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이 되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환단고기에서 나와 있는 데로 황제 헌원과 치우 천황과의 그 탁록 대전이 결국 사마천의 사기에서 이렇게 황제가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라고 해서 어떤 승자와 패자가 그 이렇게 뒤바뀐 사건 때문에 그 역사 왜곡에 의해서 그 어떤 역사의 어떤 정의가 상실이 되고 우리 역사가 결국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이렇게 선생님께서 그 ‘역사에게 길을 묻다’ 책에서 보듯이 결국은 지금까지도 그 식민 사학의 피해가 어떤 교과서에도 계속 지금 나와 있다고 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연 선생님께서 지금 보시는 그러니까 우리 역사가 이렇게 왜곡되고 도끼질 되고 어떤 가장 큰 일대 사건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 관점에서 어떤 것에서 가장 크게 보시는지 그것을 여쭤보고 싶구요.
질문2: 우리민족의 사상과 비전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두 번째로 아까 전에 예. 일관된 얘깁니다. 그 아까 전에 어떤 정말 ‘우리 역사와 우리 민족의 비젼을 어떤 동이족의 정신으로 묶는 우리 사상으로 이 분열된 어떤 동이족의 대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라고 아주 큰 명제와 비전으로서 아까 강의에서 전해주셨는데요. 또 선생님 개인적으로 과연 그런 그 우리의 사상, 그 비전을 어디에서 과연 찾아야 되는지 한번 여쭙고 싶습니다.
- 장수왕의 ‘평양 천도 사건’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다 아시다시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을 최대 사건으로 이렇게 하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 장수왕의 ‘평양 천도 사건’ 을 최대 사건으로 봅니다. 그 또 제가 우리 민족의 성격을 기마 민족이라고 했는데. ‘기마 민족, 유목 민족은 세력을 길렀을 때 이 산해관을 넘는 거지 안 쪽으로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 장수왕이 그 당시가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아들이니까 고구려의 국력이 가장 강성했을 땐데. 그 강성한 국력을 가지고 평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상당히 그 정국자체가 많이 틀려지죠. 그 이전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나와 있듯이 신라의 내물왕도 광개토대왕에게 스스로를 ‘종 노자’ 쓰면서 ‘노’객이라고 표현한 구절이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오는데. 그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신라 같은 경우는 고구려의 고구려가 천자국 아닙니까. 이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국광상 광개호태왕’ 이라고 해서 왕 앞에 클 태자가 붙어서 태왕인데. 그거는 중국식 표현으로는 바꾸면은 중국식 버젼으로 바꾸면 ‘황제’란 뜻입니다. 그 황제국 중에 거란도 들어가고 말갈도 들어가고 신라도 포함되는데.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신라나 백제가 그 이전에는 상당히 서로가 원수지간이었는데, 서로가 그 손을 잡고 고구려의 남하에 저지하게 되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됐고. 고구려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물론 만주는 계속 그 가지고 있긴 있었지만 그 천도를 하게 됨으로써 이 중심부가 그러니까 고구려라는 나라의 중심부가 만주에서 한반도로 깊숙히 들어오면서 유목성이 상당부분 상실되고 농경성이 강화되지 않았는가. 그것이 우리 역사의 성격을, 우리 민족의 성격을 바꾸는 제가 볼 때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전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가 고구려의 멸망을 가져온 원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고구려가 산해관을 넘어서 갔을 경우에는 물론 갔다고 그래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갔을 때 많은 북방 민족들이 거의 다 정체성을 다 상실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지 않았겠느냐 하는 데.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민족은 대개 중국을 점령했다 이 사라진 민족들이 보면은 문화에 대한 관점들이 좀 약한데, 우리 민족은 이 영성이나 문화나 이쪽 관점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을 옛날부터 유지해왔기 때문에 전 ‘그렇지 않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약간 확대를 시키면은 우리가 아까 동이족 그 개념대로 금나라라든지 청나라 라든지 요나라 라든지 원나라 라든지 ‘이러한 나라들에 대한 인식을 좀 새롭게 바꿀 필요가 있다.’ 라고 생각하죠. 우리가 ‘원나라 같은 경우도 몽골족의 많은 지배를 받았다.’ 라고 말하지만 생각을 바꿔서 해보면은 원나라 세조가 충렬왕에게 자기 자신의 딸을 주지 않습니까. 이건 그 대단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충렬왕은 그 당시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원나라의 직계를 따지자면 왕이 43명 정도가 있습니다. 43명 정도 있는 왕 중에 아무 딸을 갖다가 충렬왕이 달라면 주면 되는데 ‘황제가 자신의 친 딸을 그 고려에게 줬다.’ 라고 하는 거는 당시 원나라의 세계지도를 그림으로 한번 쭉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우리가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고려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당시 원제국의 그림을 러시아, 유럽까지 다 차지한 원제국의 그림을 놓고 볼 때 ‘고려가 그렇게 중요했겠느냐. 황제가 자기 딸까지 줄 정도로 중요했겠느냐.’ 라는 부분에 다다르면 다른 거죠 생각은. 이거는 원나라 그 몽골족 사람들이 우리나라 민족을 바라보는 그 특이한 친원성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정치 역학적인 부분 가지고는 불가능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금나라도 금사에 보면은 금나라의 정사에 보면은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에서 갔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금나라에서 계속 고려를 갖다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기록들이 다 있는데. 그니까 금나라의 황실 자신들이 ‘자기의 뿌리가 고려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쪽에서 그걸 계속 거부한 그런 측면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자꾸 이 동이족의 여타 부분을 전부 다 내몰고 중국하고만 일체화 하고자 하는 그러한 행각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지금부터라도 이제는 그런 그 말하자면 그 정화가 완전히 소중화 사상인데. 중화 사상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서 우리 역사를 보다 넓게 바라보면 금나라사도 달리 보이고 원나라사도 달리 보이고 청나라사도 달리 보일 그런 측면들이 상당히 많은 겁니다. 그런 식으로 역사 인식이 전환이 되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 고대사의 강대했던 영역을 제사함으로서 조국 정신을 되살리자
그리고 두 번째 그 비젼 찾기에 대한 사상을 말씀하셨는데. 그 사상은 제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전 우리 고대사의 강대했던 강역을 제시함으로써 고대 선조들의 조국 정신들을 오늘에 되살리자 정도를 제가 말할 수 있는 거고. ‘되살려야 될 정신이 무엇이냐.’ 라는 부분은 여기 계신 분들께서 연구를 하셔서 제시해야 되는 부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다른 분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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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단군 조선사 복원에 대한 강단 사학자들의 반응
예. 저 월간, 증산도 기간지인 월간 개벽지 기자 이영옥인데요. 제가 세 가지 쉬운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뭐냐면 그러니까 선생님 이런 이렇게 선생님께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가지고 실증적으로 이렇게 단군 조선사를 복원을 하셨는데, 복원을 하고 계신데 그럼 이렇게 책을 이런 고증을 통해서 책을 저술했을 때 기존에 있는 그런 주류 사학자들, 강단 사학자들의 반응은 어떠한지 거기에 대해서 한 가지 궁금하고요.
질문 2: 역사 교과서 개정은 얼마나 기대해 볼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요즘에 역사에 대한 드라마가 많이 방영이 되고 있고 또 선생님 이런 책들이 나오면 또 인문 베스트셀러로 오르고 그러니까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앞으로 2010년쯤 되면은 지금 우리나라 현존의 국사 교육이 약하지만 국사 교육이 강화 될 건데, 이런 기존에 있는 교과서에서 보는 내용과 그리고 이런 시중에 나와 있는 이런 책들, 선생님 책들 같은 거를 접한 학생들이 봤을 때 여러 가지 혼란이 있을 거라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면은 앞으로 역사 교과서가 새로 개정이 된다고,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라든가 그리고 또 개정이 됐을 때 그런 단군 조선사 부분이 얼마나 좀 역사가 바르게 정립돼서 기술될 수 있을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만큼 기대를 해 볼 수 있는지 그것도 궁금하고요.
질문 3: 배달국과 홍산문화에 대한 연구 의향은?
그리고 세 번째는 뭐냐면 그 단군 조선사 이전에 아까도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들에서 나왔었는데 그 ‘배달국과 홍산 문화 부분을 연결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앞으로 여기 있는 우리들이 연구를 해봐야 될 그런 과제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지금 사실상 현재로는 선생님께서는 굉장히 베스트셀러 작가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책을 거기에 대한 좀 더 연구를 통해서 저술을 책을 펴냈을 때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해 볼 수 있는데 우리 선생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연구를 해보실 계획이라든가 그런 건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 이길 수 있을 때만 책을 쓴다
저는 책을 쓸 때, 그 원칙이 뭐냐면 그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때만 쓴다.’ 하는 거고. 그리고 ‘최소한 누구하고 이렇게도 최악의 경우 무승부는 갈 수 있을 때 그 때 쓴다.’ 하는 게 하나의 원칙입니다. 그렇기 땜에 많은 기존 설과는 틀린 이야기들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살아남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 드라마에서 잘못된 역사로 대중화 할 경우
그 다음에 역사 드라마 같은 경우는 지금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에 대한 분위기가 떠오르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인데, 그런데 ‘지나치게 상상에 의지하지 않느냐.’ 라는 부분은 또 비판해야 될 부분이죠. 그러니까 역사에 대해서 드라마이기 때문에 상상을 배제할 수는 없는데 ‘역사’자를 붙인 그 어떤 그 드라마가 됐던 소설이 됐던 ‘역사’자를 붙이면은 그 상상에도 개연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전혀 엉뚱하면은 안 되는 거죠. 이것은 저는 쭉 책들을 쓰다가 ‘역사 평설’ 이라는 장르를 하나 예전에 한번 ‘오국사기’라는 것을 갖고 했다가 그런데 그건 크게 성공을 못해서 이번에 다시 개종을 해서 그 ‘위대한 전쟁’이란 제목으로 조만간에 이렇게 나오는데. 그 책 속에서 제가 ‘드라마 타이즈’ 라는 방식을 한번 해봤습니다. ‘드라마 타이즈’ 가 뭐냐면 기존 사료를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식으로 드라마 식으로 꾸미는 그런 방식인데, 그 하나의 없는 사료를 만들어서 한건 아니고 그러니까 기존 사료에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금 재밌게 구성해본 그런 방식인데. 그러한 정도에서 조금 나아간 것이 ‘역사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니냐.’ 라고 생각을 하는데. 요즘 어떤 드라마들을 보면은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를 빙자한 그런 드라마’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상상에 의존하는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은 오히려 그 역사 대중화를 역사를 바르게 대중화 해야지 잘못된 사실을 대중화 할 경우에 또 문제가 되죠. 어떤 학생들 단체에 가서 강연을 한번 해봤더니 ‘질문하라.’고 그러니까 질문 중에 하나가 ‘대조영의 부인이 요즘 드라마에서 달긴가 뭘로 나오나요?’ 그 대조영의 부인에 대해서 막 질문을 하길래. ‘그거는 서류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거고 그 작가가 창조를 한 거다.’ 라고 그렇게 답변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런 문제들이 발생을 하는 거죠.
- 역사 전문가들이 모여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써야 한다
그리고 국사 교육 문제는 교과서 문제는 이것이 큰 저도 고민이고 여러분들도 다 같은 고민일 텐데. 현재 그 국사 교육을 강화해야 된다는 데는 다 동의하지만 ‘국사 시간을 강화해가지고 교육했을 때 가르치는 교재가 또 마찬가지 이 모양이면 이게 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게 돼있죠. 어쨌든 이런 책들을 통해서 상당히 많은 각성들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저도 그 현장 그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들 중에도 이렇게 사석에서는 ‘맞다.’ 라고 ‘제 이야기가 맞다.’ 라고 하는 분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것은 바뀌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보다 중요한 거는 전문가들은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들을 많이 배출해서 이 전문가들이 모여서 올바로 된 국사 교과서를 빨리 써야 되는데. 현재까지는 그런 체재가 안 돼 있으니까 앞으로 그 부분도 저도 노력해야 될 부분이고 여러 분들도 ‘같이 노력해야 될 부분들이 아니냐.’라고 생각이 됩니다.
- 낙랑문화의 미스테리
그리고 저는 홍산 문화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심도 많고 또 홍산 문화 뿐만 아니라 그 지금 평양 일대에서 출토되는 중국 학계에서는 그냥 평양 일대에서 출토되었다고 그러면 전부 다 낙랑이다 라고 하는데 사실 낙랑 문화에 대해서도 미스테리가 상당히 많습니다. 낙랑이라는 사료만 놓고 보면은 본국이 한나라가 망하고 난 뒤에도 낙랑이란 이 정치 체제는 거의 100여년 가까이 존속하는 걸로 이렇게 나오는 데 그건 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예를 들면 1945년 8월 15일 날 일본 본국이 망하니까 그 날 바로 우리가 해방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식민지 정치 체재란 게 그런 건데 본국이 망했는데 왜 그 식민지가 계속 지배권을 유지하면서 그것도 그 강력한 고구려와 맞서면서 이 식민 지배체제는 거의 7~80년 이상을 더 간다 하는 거는 그 발상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말이 안 되는 발상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통용돼 왔는데 그런 부분도 시간이 되면 언제 공부를 좀 하고 싶고 하는데 저도 몸이 하나 밖에 안 되니까 여기에 계신 질문하신 분들이 이렇게 좀 열심히 하셔갖고 역할을 좀 분담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합니다. 예. 또 다른 분, 한 두 분만 더 받고 끝내겠습니다.
time 00:50
질문 1: 식민사학자들과 부딪히는 어려움과 극복의 과제
네. 저는 증산도 포교부 대학생 포교부 정용직입니다. 제가 지금 있는 곳은 전남대학교인데 전남대학교에는 그 도서, 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선생님이 말씀해주시는 내용과 다른 연대표가 있고 또 거기에도 여기에 사진이 실려 있는 청동기들도 있고 많은 유물들이 있는데, 그런 모습들도 보면서 좀 많은 안타까움 들도 느끼고요. 그리고 제가 초등학교 때 배웠을 때는 역시 사회과부도에 나와 있는 고구려 지도는 아주 조그마했는데 지금 갈수록 점점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이렇게 지금 변하고 있지만은 선생님께서 현장에서 기존 사학계, 식민 사학이라 불리는 그런 많은 사람들과 이렇게 어찌 본다면은 직접 마찰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동료 분들이 마찰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한 모습들을 좀 듣고 싶고요. 어려움들을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듣고 싶고 또 그걸 헤쳐 나가야 될 과제들이 뭔지를 알고 싶습니다.
질문 2:후배들에게 전할 수 있는 비전과 철학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그 이러한 저희들이 아직 역사를 저희들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큰 세대이기도 한데 후배들에게 또는 점점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미래의 그런 비젼, 그리고 선생님께서 저희들에게 혼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그런 철학, 그런 가르침을 짧게 듣고 싶습니다.
-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 정신으로 산다
여러분들도 다 아실 겁니다만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중에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죠. 사람이 항상 보면은 한 길을 가면서 가지 않은 길을 막 바라보고 가면은 그 가는 길도 불행한데. 제가 어쨌든 선택한 길을 잘 가다 보면은 모든 길에는 다 어려움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다 있는 거죠. ‘자기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갖다가 그냥 묵묵히 가다 보면은 거기에서 또 다른 어떤 빛이 보이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젊은이들과 전 제 자신이 젊은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항상 청년 정신으로 살아야 된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아마 ‘함석헌 선생님 같은 분이 그렇게 청년 정신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하죠. 하다 보니까 남한테 주는 글이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 항상 몸은 비록 그 장년이 들고 올해가 틀리는 걸 느낄 지는 몰라도 ‘마음은 항상 젊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을 하는데. ‘마음이 젊다.’ 라는 거는 이게 뭐냐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는, 그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 개방된 마음으로 한 길을 간다
하여튼 처음엔 제가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학위는 제가 독립운동사 계통으로 학위를 했는데 글을 가장 많이 쓴 건 조선사로 썼다가 그 다음에 지금은 또 고대사를 하니까 그런 질문들을 하는 데. 그 하다 보면은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이게 알고 싶고 이걸 쭉 하다 보면 거기에서 또 뭐가 나오고 이렇게 되니까 뭐 그렇게 돼서 지금은 그래도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까 다행인 게 하나의 나름의 통사 체계를 고대사부터 근현대사까지 나름의 스스로 통사 체계를 갖추게 된 이것이 다행이 아니냐 싶은 거죠. 그러니까 어느 분야든지 좀 두려워하지 말되. 그러나 한번 선택했으면 오래 가야 되는 모든 것이 쭉 오래갈 때 거기에서 답이 나오지. 세상사가 딱 자기가 뛰어들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해 주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을 하고 그 길을 갈 때 중요한 거는 ‘개방적인 마음을 가져야 된 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오픈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그러나 배타적이지 않고 그 길을 꾸준히 오래 가다 보면은 거기에 어떤 빛이 보이지 않느냐. 그 길을 저는 저 나름대로의 길을 가고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의 길을 가다 보면은 어느 지점에선가 서로 만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 선생님도 어느 정도 아마 매듭을 지어 주신 것 같습니다. 또 궁금한 내용들이 많이 풀리신 것도 같습니다. 또 혹시 오늘 그 여쭤보지 못한 내용들은 그 좀 전에 말씀을 드렸듯이 다음 주에도 콜로키움이 한 번 더 예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시간을 활용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역사 공부. 아까도 선생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만은 역사 공부라 하면은 누구나 재미있고 꼭 그 보고 싶은 내용들이 또 읽으면 읽을 수록 자꾸 점점 더 들어가 줘야 되는데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게 암기를 해야 된다. 또 그 다음에 우리 역사를 읽다 보면은 자꾸 뭔가 어떤 긍지를 갖게 만들기보다는 머리도 조금 그 분명치 않고 또 뒤에 와도 뭔가 자꾸 부끄럽고 그런 그 역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역사를 읽는 사람들 스스로가 뭔가 그 역사 공부에 대해서 조금 외면하게 되는 그런 그 풍조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요번에 그 처음으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그 국사 교과서 고등학교를 한번 쭉 읽어봤어요. 그 선생님 그 책에 나와 있길래. 해서 읽어봤습니다만은 그야 말로 이 고조선사 뭐 이런 부분은 전부 암호 코드로 덮여 있는 것 같애요. 환웅에 대한 문제니 그 다음에 위만조선에 대한 문제니 삼한에 문제니 지금 낙랑군에 대한 문제니. 이런 문제들이 그야말로 선생님의 어떤 그 책이 없이는 이해하기, 연결이 좀 안 되는 듯 한 부분들이 참 많습디다. 어쨌든 지금 우리 역사에 대해 가지고 쉽고 재미있게 글쓰기를 해주시고 계시는 선생님. 그리고 또 어떻게 본다면은 어폐가 있습니다만은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역사를 보다 더 큰마음을 갖게 끔 그런 글쓰기를 해주신 선생님께 항상 그 우리도 그 조그마한 힘을 보태드리며 오늘 콜로키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바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주시고 장시간 말씀을 해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 오늘 이 프로에 참석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박수를 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time 00:5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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