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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사 교과서 무슨 자료를 보고 썼나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5. 00:19

국사 교과서 무슨 자료를 보고 썼나

한나라의 혜제(惠帝, 기원전 195~188) 때 고후(高后)가 섭정하면서 천하가 안정되자 요동태수에 의해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고, 주변 소읍들을 정복해 항복시키고 임둔과 진번도 와서 복종해 사방 수천 리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서> ‘조선전’의 내용도 거의 같다.

이 글을 볼 때 유의해야 할 점은 한나라를 중심으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역대 기록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무조건 낮춰 기록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것도 자신과 싸웠던 나라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게 비하한다는 점이다. <사기>와 <한서>의 조선 관련 기록은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왕 노관의 신하였다가 다시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이다.

연왕 노관은 한 고조 유방(劉邦)과 같은 풍인(豊人) 출신으로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워 유씨(劉氏)가 아닌 이성제후(異姓諸侯) 7인 중 한 명이다. 노관은 연왕에 봉해졌으나 한 고조가 이성제후들을 제거하려고 하자 북방 흉노로 망명해 흉노의 황제로부터 동호노왕(東胡盧王)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사기>나 <한서> 기록만으로는 위만이 조선왕이 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삼국지> ‘동이열전’ ‘한(韓)조’에 더욱 자세한 정보가 등장한다.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는 글이 있다. 어째 심상찮다. 준왕이 왕이라고 칭한 것이 참람하다며 후(侯)라고 제멋대로 낮추는가 하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이 사필귀정이라는 식이다. <삼국지>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더욱 자세한 사항을 기록한다.

“옛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으로 공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는데, 그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조선왕의) 자손(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弱化)되었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조)

이 대목은 위만이 등장하기 전의 조선이 강성한 나라였음을 말해 준다.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중국인들이 고조선도 주나라의 한 제후국이었다고 강변하기 위한 대목에 불과하다.

<삼국지>의 내용은 연나라가 동쪽 고조선을 공격하려 하자 고조선왕이 역습하려고 했는데 고조선의 대부 예가 말리자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 후 조선왕의 후손이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조선왕의 후손이 교만’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조선의 세력이 강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진개가 “조선의 서쪽 영토 2,000여 리를 빼앗았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고조선이 평안남도 일대에 걸친 작은 소국이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좋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체가 3,000리이며 현재의 평안남도는 1만2,300여㎡로 200여 리에 불과하다. 당시의 리(里)와 현재의 리(里)가 약간의 차이는 나겠지만 2,000여 리를 빼앗기고도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했다면 고조선은 광대한 강역을 지닌 제국일 수밖에 없다. 이때는 부왕과 준왕이 등장하기 이전이다. 그러나 국사 교과서는 이런 내용은 모두 사장시킨 채 위만이 정권을 빼앗은 다음 고조선이 강성해졌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이다.

<출처:월간중앙 2006년 10월호 이덕일>

출처 :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
글쓴이 : 개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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