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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전쟁엔 전문가, 평화 만들기에선 어린아이"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8. 2. 19. 13:14

인간은 전쟁엔 전문가, 평화 만들기에선 어린아이"

조선일보|기사입력 2008-02-18 02:55 기사원문보기
[새로운 문명이 온다] [4] 비폭력적 공존의 세계

북아일랜드 평화운동으로 노벨상 수상 메어리드 매과이어 여사

평화는 가능하다는 우리 스스로의 믿음이 가장 중요한 일

사랑·자비같은 비폭력의 힘만이 세상을 참되게 변화시켜


21세기 새로운 문명은 기다리면 저절로 찾아오는 '선물'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와 공존의 신(新)문명은 이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힘겨운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12명 교수로 구성된 '새로운 문명이 온다' 기획취재팀은 '비폭력적 공존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새 문명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사상)가 지난 40여 년간 가톨릭과 신교 사이의 종교분쟁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졌던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현장으로 날아가 메어리드 매과이어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1976년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살생을 중단하라"고 외치며 전국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30여 년간 지속적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비폭력만이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매과이어 여사는 "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우리 안의 편견을 깨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고 무기와 총을 만드는 방법은 잘 알고 있지만, 평화 만들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평화 만들기에 관한 한 인간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지난달 찾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지난 40여 년간 가톨릭과 신교의 종교분쟁으로 유혈사태가 벌어졌던 이곳에서 더 이상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양측은 퇴임 전인 토니 블레어 총리의 중재로 맺은 평화협정에 따라 지난해 5월 무기를 모두 반납했다. 하지만 거리의 건물 곳곳에는 '순교자'들의 얼굴을 그린 걸개 그림이 나부끼고 있었고, 신·구교 지역 사이에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철제 담장이 높게 둘러쳐져 있었다. 도시는 회색 구름이 잔뜩 낀 날씨만큼이나 음산했다.

◆'평화는 가능하다'는 믿음이 중요

유혈사태의 중심 현장이었던 벨파스트 피나기(Finaghy) 거리를 함께 걷던 메어리드 매과이어(Mairead Maguire·64) 여사는 " '평화는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교육과 계몽을 한다면 '비폭력적 공존'이라는 인류의 새 문명을 열어갈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그녀는 "우리 안에서 '폭력의 문화(cultures of violence)'를 없애는 일이 가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화협정이 맺어졌지만 지역 주민들 사이의 통합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 양측 종교기관이 나서서 교환방문, 친구 만들기, 이웃되기 프로그램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곳에 사는 주민들끼리 서로 왕래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국에서는 충돌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높은 담장을 세웠는데, 오히려 이것이 공포와 불신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톨릭과 신교도 사이의 갈등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북아일랜드 평화운동으로 노벨상을 받은 메어리드 매과이어 여사(오른쪽)가 정윤재 교수에게 유혈 사태로 얼룩졌던 종교분쟁의 현장을 안내하고 있다. /정윤재 교수 제공

"1960년대에는 신·구교 모두 미국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에 영향을 받아 함께 인권개선운동에 참여했어요. 1969년 일부 과격한 신교도들이 이 운동을 물리적으로 공격하자, 영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했던 가톨릭신자들 사이에 '폭력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양측 극단주의자들은 각각 아일랜드공화국군(IRA·가톨릭계)과 얼스터자위군(UVF·신교계)을 조직하고 서로 전투를 벌였어요. 신·구교를 막론하고 예배당은 모두 폭력 센터였고, 순진한 어린 아이들마저 총을 들었습니다."

◆"폭력은 종교의 가르침 아니다"

―여사가 평화운동을 벌이게 된 계기는 뭡니까.

"1976년 8월 열아홉 살짜리 IRA 지원병 대니 레논(Danny Lennon)이 영국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았습니다. 동시에 그가 몰던 차가 반대편 인도로 돌진해서 마침 엄마와 함께 걷고 있던 내 어린 조카 3명을 죽게 했지요. 그들의 엄마인 내 여동생은 크게 다쳤고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날 저는 벨파스트 시내에서 이런 무모한 폭력과 살생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를 주도했고, 비폭력 평화집회는 전국으로 번져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운동을 전개했습니까.

"살생·구속·보복 그리고 전과자의 대량생산이라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았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이 총을 들고 싸우도록 방치하고 있는 정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평화주의자가 아닐지라도 우리가 믿는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이제라도 깊이 반성하고 크리스천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Christ-like) 합니다.' 서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서로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현실을 비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시민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수 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No More Killing(살생은 이제 그만)!'을 외치며 시위를 했습니다. 저는 동료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 집회를 주도했고, 전국 각 도시를 방문하며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5개월쯤 지나자 벨파스트에서 교전횟수는 70% 이상 줄었고, 종교적 이유로 인한 무모한 살생은 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폭력만이 세상을 참되게 변화시켜"

―세계 평화에 대한 비폭력적 접근이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런 견해는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여전히 '정의로운 전쟁론'에 사로잡혀 있는 데서 비롯되는 지혜롭지 못한 편견일 뿐입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가 '사랑' '인내' '존경' '비폭력'에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생명의 인정, 사랑과 자비, 인내와 존경과 같은 비폭력의 힘만이 세상을 참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과이어 여사의 조카들이 희생되었던 길목에 서서 잠시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녀에게 이 사건은 여전히 트라우마(내면의 상처)로 남아있는 듯했다. 길을 걷다가 전 IRA대원이던 톰 켈리(Tom Kelly)씨와 전 UVF 대원이었다는 짐 테이트(Jim Tate)씨를 만났다. 그들은 "이제 총을 겨누는 싸움에 질렸다. 우리는 아이들이 평화로운 가운데 학교 다니며 즐겁게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평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말에서 작지만 강한 희망이 느껴졌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벨파스트(북아일랜드)=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