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어머니의 친필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8. 4. 23. 11:50

고전의 향기006             (2008. 4. 21. 월)

어머니의 친필

우리 어머니께서 언문으로 《서주연의(西周演義)》 10여 책을 필사하셨는데 원본 자체가 한 책이 결본이어서 완질을 갖추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그것을 늘 아쉬워하며 지내신 지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옛것을 좋아하는 어떤 집에서 완전한 본을 얻게 되어 다시 써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완질을 갖추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어머니께 그 책을 빌려 보고 싶다고 애걸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바로 전질을 가져가도록 허락하셨다. 얼마 지난 뒤 그 여인이 문으로 들어와 사죄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빌린 책을 삼가 돌려드립니다. 그런데 길에서 한 책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잃어버린 부분이 무엇인지를 물으셨는데 공교롭게도 예전에 다시 써서 빠진 데를 보충한 그 책이었다. 완질을 갖추었던 것이 이제 다시 낙질이 된지라 어머니께서는 속으로 몹시 안타까워하셨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겨울, 나는 아내를 이끌고 남산 아래 마을에 살게 되었다. 아내는 마침 병석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터라 같은 집에 사는 친척 부인에게 책을 빌렸다.

친척 부인은 책자 한 권을 건네주었는데 아내가 보니 예전에 잃어버렸던, 어머니께서 손수 쓰신 바로 그 책이었다. 내게도 보여주기에 봤더니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내가 그 친척 부인에게 가서 책을 얻게 된 유래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친척 부인의 말은 이러했다.

“나는 그 책을 우리 일가인 아무개한테서 얻었고, 아무개는 그 마을 사람인 아무개한테서 샀지요. 그 마을 사람은 길에서 그 책을 주웠답니다.”

아내는 전에 그 책을 잃어버린 정황을 빠짐없이 말해주면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척 부인은 신기하게 여기면서 돌려주었다. 낙질이 되었던 것이 또 이렇게 하여 다시 완질을 갖추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 낙선재본 서주연의 제1권

지난번에 이 책자를 길에서 잃어버렸을 때 오래 지나서도 누군가가 줍지 않았다면, 분명히 말발굽에 짓밟히고 진흙에 더럽혀져 한 글자 반 조각도 다시 찾지 못했으리라. 설사 요행히도 이러한 재앙을 면해 사람이 주웠더라도 주은 사람이 무지몽매하여 책을 아낄 줄 몰랐다면 진귀하게 여겨 감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찢고 뜯어서 벽을 바르는 종이로 사용했을 것이니, 말발굽에 짓밟히고 진흙에 더럽힌 경우와 무슨 차이가 나겠는가?

또 요행히 이런 재앙을 벗어나서 호사가가 얻어 간직하게 됐다고 치자. 간직하여 가져간 자가 만약 하늘끝 땅모서리 먼 곳에 살아서 저와 나와 만날 길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책자가 비록 탈없이 지낸다 해도 내가 잃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어찌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닐까?

이제 길에서 잃었는데도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고 진흙에 더럽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주웠지만 책을 아낄 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에게 가지 않고 결국 호사가가 간직하게 되었다. 또 하늘끝 땅모서리 먼 곳에 살아서 저와 나와 만날 길이 없는 사람 차지가 되지 않고 내 아내의 친척 부인의 집안사람 수중에 들어갔다. 그 책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끝내 내 손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어머니의 친필이 흩어지고 땅속에 묻혀버리는 지경에까지는 이르게 하지 않으려고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 아닐까? 3년 동안 잃어버렸던 책을 하루아침에 찾는 과정에는 일정한 운수가 개입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기이한 일이다. 기이한 일이야!

그러니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잃었다가 찾은 자초지종을 이렇게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

- 조태억(趙泰億), 〈언서서주연의발(諺書西周演義跋)〉, 《겸재집(謙齋集)》

※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한국문집총간 190집 《겸재집》 42권 발(跋)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설


《서주연의(西周演義)》는 조선 후기에 번역되어 널리 읽힌 중국의 역사소설로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명(明)나라 허중림(許仲琳)이 지었다고 전한다. 은(殷)나라에서 주(周)나라로 바뀌는 중국 고대의 왕조 교체기에 신마(神魔)의 싸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한글로 번역된 것이 일찍부터 읽혔는데 지금도 장서각에는 25권 25책의 한글본이 전해오고 있다.

조태억(1675~1728)은 숙종 때의 명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분이다. 그런 그가 어머니 윤씨(尹氏)가 손수 베낀 소설을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되는 사연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낙질이었던 소설을 어렵게 완질로 만들었다가 또 잃어버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완질로 채워서 보관하는 사연을 읽노라면, 소설을 둘러싸고 안방과 골목에서 여인들이 엮어가는 삶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나타난다.

오늘날이야 소설집 한두 권 잃어버리고 말고 하는 것은 책의 소유자에게도 또 그 주변 사람에게도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정 필요하면 한 권 더 사면 될 뿐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책 한 권 소장하는 것이 퍽 귀한 일이고, 더구나 여성들이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된 책을 가졌다는 것은 너무도 소중하고도 부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손수 베껴서 돌려 읽은 책은 그야말로 집안 사람의 정성과 땀이 배어있고, 그 안에 가정의 역사가 녹아있지 않겠는가?

어머니가 직접 한 자 한 자 베낀 손때 묻은 언문 소설책을 어루만지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샘솟듯 솟아나고 있을 나이든 아들의 모습이 이 글에서 떠오른다.

   필자 : 안대회
  -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산수간에 집을 짓고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