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있는 존재는 반드시 죽음이 있게 마련이고, 죽으면 형체와 마음도 모두 사라진다. 이것이 유학(儒學)하는 사람들이 해온 말이자 떳떳한 이치이다. 이와 달리 불교를 믿는 자는 ‘형체는 사라져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선도(仙道)를 믿는 자는 ‘형체와 마음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두 가지 견해는 떳떳한 이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더러 믿기도 한다. 한편,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은 ‘마음은 사라져도 형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더욱 신기하다.
거기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자기가 지닌 기예를 최대한 발휘한다면, 대상 인물의 귀와 눈은 마치 실제로 듣고 보는 것처럼 그리고, 입은 말하는 것처럼 그리며, 머리털과 수염은 움직이는 것처럼 그린다. 그래서 일백 세대가 지난 뒤에라도 그 사람을 직접 본 듯 느끼게 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도(道)가 조물주의 오묘한 솜씨를 빼앗았기 때문에 선도나 불교와 더불어 같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졌는데도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는 과연 무슨 이익이 있겠으며, 후세에는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또 지금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유학을 종주로 삼고서 선도와 불교까지 아우르는 도를 추구한다고 치자. 이렇게 하는 사람을 그래 도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유학을 추구하는 사람은 형체와 마음이 모두 사라진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떳떳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체와 마음이 사라지고 만다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은 성인이고 걸(桀)임금과 도척은 미치광이임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말을 기록하고 행동한 일을 적어놓는 학문이 생기게 된 것이다. 말과 행동한 일이 전해진다면 그 마음이 전해질 것이며, 형체가 간혹 여기에 붙어서 전해질 것이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이전삼모(二典三謨)_1)처럼 성인을 묘사한 글이 이른바 ‘형체는 사라져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아니겠으며, 《논어(論語)》 가운데 들어있는 〈향당(鄕黨)〉편_2)이 이른바 ‘형체와 마음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이런 것이 이른바 ‘유학을 종주로 삼고서 선도와 불교까지 아우르는 도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군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이지 형체가 아니다. 그 마음이 이미 후세에 전해졌다면, 그 형체가 후세에 전해져도 좋고, 전해지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후세에 전해질 만한 가치가 없다면, 그 형체만이 홀로 전해질 리는 전혀 없다. 따라서 초상화를 그리는 자가 가는 길은 오로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만이 독점할 뿐 군자는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다.
호남 사람 박선행(朴善行)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서울에서 이름이 높다. 나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하길래 나는 웃으며 사양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 형체가 후세에 전해질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대가 아니라도 반드시 내 형체를 묘사할 자가 나타나리라. 내가 그대에게 맡길 필요가 굳이 있겠는가?”
돌아가려고 하는 그에게 이 글을 지어서 선물한다.
- 남유용(南有容), 〈증사진자박선행서(贈寫眞者朴善行序)〉,《뇌연집(뇌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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