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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온 국민의 슬픔이 되어버린 숭례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8. 7. 7. 23:47

 

 

조선 초기 건물을 대표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서울의 城門 
國威의 상징 南大門의 歷史 
崇禮門(숭례문)은 南大門의 정식 칭호다.  


  南大門은 바로 동쪽에 서울 最古最大(최고최대)의 재래시장인 南大門市場(남대문시장)을 끼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外來(외래) 관광객들 중 84.7%가 서울을 다녀가고, 서울 방문 外來 관광객들 가운데 절반 이상(50.5%)이 南大門市場을 한 번씩은 찾는다(한국관광공사의 2000년 실태조사). 하루 24시간 내내 잠 자지 않고 不夜城(불야성)을 이루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南大門市場이다. 여기서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의 살 냄새」를 맡으며 쇼핑도 하고 南大門도 만난다. 바로 이런 점에서 南大門은 세계인들에게 제시한 한국의 상징이다.


 崇禮門은 漢城都城(한성도성)의 4大門 중에서도 서열 제1위인 正門이었다. 따라서 이 大門은 외국인이라면 그 신분이 使臣(사신)일지라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國威(국위)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女眞(여진)의 사신은 반드시 東小門(동소문)만을 통해 도성에 들어올 수 있었고, 倭國(왜국)의 사신은 시체나 빠져나가 水口門(수구문)이라 불렸던 光熙門(광희문·중구 광희동)만 통과할 수 있었다.
 
  조선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끝난 후 히데요시(秀吉) 집안을 패망시키고 성립된 도쿠가와(德川) 幕府(막부)의 왜국과 국교가 재개되었지만, 왜국 사신에 대해선 都城(도성) 출입까지 봉쇄했다. 왜국 사신은 都城에서 1000리나 떨어진 釜山浦(부산포)의 草梁倭館(초량왜관)에 머물면서 우리 禮曹(예조)의 통제를 받는 東萊府使(동래부사)나 그 下官인 倭學訓導(왜학훈도:종9품관)와 외교교섭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木造건물의 모델 
  
  崇禮門의 예술적 가치를 거론하자면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木造(목조)건축 전문가들은 『숭례문은 전형적인 多包(다포) 양식으로서 그 구조의 견실함이 자랑거리』라고 입을 모은다. 도대체 多包가 뭔가? 多包를 알려면 우선 우리 木造 건물의 핵심 부분인 木共包(공포)부터 이해해야 한다.
 
  좀 거칠게 말하면 木共包는 기와지붕 바로 밑 쪽에 닭벼슬처럼 쭈뼛쭈뼛하게 돌출한 구조물을 말한다. 木共包에는 화려한 단청까지 칠해져 매우 현란한 모습이다. 그래서 그 고유 기능보다 美觀(미관) 때문에 설치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기와지붕은 대단히 무겁다. 木共包는 이런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치는 力學的(역학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高麗(고려) 시대에는 대체로 기둥들의 바로 윗부분에만 木共包를 설치했다. 이런 木造 건축물을 柱心包(주심포)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건축물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柱心包만으로는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麗末鮮初(여말선초)에 이르면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木共包를 끼워 넣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多包 양식이다. 崇禮門은 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崇禮門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太祖 5년(1396) 1월 도성을 쌓을 때부터다. 석축과 문루 등의 건설은 기술과 시일을 요하는 것이었던 만큼 太祖 7년 2월8일에 완공되었다.
 
  太祖 때 건설된 崇禮門은 世宗 15년(1433)부터 改築(개축)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 이유는 崇禮門이 기울거나 퇴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崇禮門의 改築 필요성에 대해 世宗은 영의정 黃喜(황희), 좌의정 孟思誠(맹사성) 등 세 정승을 불러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景福宮(경복궁) 오른 팔의 山勢(산세)가 낮고 확 트여서 껴안는 형국이 아닌 까닭에 南大門 밖에 못을 파고 門 안에 支天寺(지천사)를 세운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南大門이 저렇게 낮은 것은 처음에 땅을 파서 편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땅을 높게 돋우어서 산맥에 연하게 하고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떤가』 
  
  世宗이 개축하려 하니 反論 거세 
  
  그러나 南大門의 개축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大臣들은 모두 찬성했으나 司憲府(사헌부)와 司諫院(사간원)의 젊은 관원들이 대번에 『아니 올시다』라고 들고 일어났다. 반대의 이유는 太祖 이래 궁궐을 짓는다, 都城을 쌓는다, 淸溪川(청계천) 다리를 놓는다고 해서 백성들에게 이미 많은 부역을 부과한 만큼 「이제는 좀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南大門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져 15년 후인 世宗 29년(1447) 8월에야 착공되었다. 조선왕조 최고의 治績(치적)을 올린 世宗大王이지만, 오늘날 帝王的(제왕적) 대통령과는 달리 獨斷獨走(독단독주)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南大門 하나를 개축하기 위해 신하들의 동의를 얻는 데 15년 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世宗 30년 5월에 완공된 이 공사는 좌참찬(종1품 벼슬) 鄭(정분)이 담당했다. 기존의 南大門을 완전히 헐어내고 바닥을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石門을 쌓고 門樓(문루)를 건축했으므로 補修(보수)나 重修(중수)가 아닌 완전한 개축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世宗 임금의 天才的 藝術性(예술성)이 나타난다. 땅을 돋우고 基壇(기단)까지 높직이 쌓아 그 위에다 문루를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南大門의 모습이 날아갈 듯 훤칠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南大門 건축방식은 조선왕조 건축물의 모범이 되었다.
 
  중국 北京 紫禁城(북경 자금성)의 정문인 午門(오문) 같은 것은 규모만 장대할 뿐 서울 南大門처럼 훤칠하지 않다. 일본 奈良(나라)의 東大寺(도다이지) 같은 것도 옆으로 펑퍼짐하게 벌어져 둔중한 느낌을 준다. 잦은 지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南大門은 애시당초 높직한 基壇 위에 올라 있는 데다 기와지붕의 線(선)이 봄 바람에 휘날리는 여성의 치마처럼 끝자락에서 상큼한 곡선을 이루면서 하늘로 치솟고 있다. 지붕은 겹치마, 각 추녀마루에는 龍頭(용두)와 雜像(잡상)이 놓이고, 용마루 끝에는 鷲頭(취두:수리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양녕大君이 쓴 「崇禮門」 
  
  건물의 평면은 아래 위층 모두가 정면 5間, 측면 2間이며,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문(무지개 모양의 문)의 윗면인 중앙칸만이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고, 위층은 널마루이다.
 
  문루 2층에 붙어 있는 編額(편액)에서도 만만찮은 필력을 느낄 수 있다. 「芝峰類說」(지봉유설)에 따르면 편액 「崇禮門」을 쓴 사람은 世宗의 큰형인 讓寧大君(양녕대군)이다. 다른 門의 편액이 가로로 쓰인 것과 달리 세로로 쓰인 것은 崇禮의 두 글자가 불꽃을 의미하며 景福宮을 마주보는 冠岳山(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 후 32년이 지난 成宗 9년(1478)에 이르러 南大門이 옆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흙으로 높게 돋우었던 남대문의 기반이 침하했기 때문이었다. 南大門의 改作공사는 다음 해 5월경에 완공되었다. 世宗 때의 건축 모델을 그대로 따랐다.
 
  건축구조는 성벽보다 일단 높게 화강석으로 陸橋(육교)를 만들어 城路(성로)를 잇고, 그 아래로 홍예(아치)를 틀음으로써 대문을 내고 장방형 육교 上面에 重層樓(중층루)를 세워 완성했다. 건물 주위에는 여장(凹凸 모양의 성가퀴)이 쌓였고, 그 좌우 측면의 한쪽으로는 각기 통용문이 개설되었으며 여장 內로 떨어지는 빗물 등은 石漏槽(석루조)를 통해 모두 排水(배수)되게 되었다. 개작된 南大門은 이로부터 1961년까지 약 500년 간 존속했다.
 
  1961년 보수공사는 5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풍화작용 등으로 석재와 목재가 부숴지거나 썩은 것이 적지 않아 무너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썩은 석재와 목재 이외에는 모두 옛날 자재를 그대로 사용하여 옛 설계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때 여러 가지 銘文(명문)이 발견되고 古丹靑文樣(고단청문양)이 검출되었다. 이에 따라 崇禮門은 당초 八作지붕(사람 人자 모양의 지붕)이었던 것이 후에 현재의 우진각지붕(용마루에서 추녀마루가 合角 없이 바로 내려온 지붕 모습)으로 고쳐졌음이 밝혀졌다. 1997년 12월 보수공사에서는 문루의 기왓장 등이 대폭 교체되었다. 
  
 가토 軍이 통과한 門 
  
  崇禮門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궁궐과 관아가 깡그리 불탄 임진왜란 때도 피해가 없었다. 宣祖(선조) 임금이 평안도로 피난한 가운데 왜군의 2번대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1592년 5월2일 南大門을 통해 도성에 입성했다. 이후 왜군은 1년 간 서울을 점령했다.
 
  丙子胡亂(병자호란·1636) 때는 仁祖 임금이 강화도로 피난가기 위해 南大門을 빠져나오다가 淸軍(청군)의 선봉이 길을 끊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南大門 문루에 올라 선후책을 강구한 끝에 光熙門을 통해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이후 淸軍은 약 50일 간 都城을 점령했지만 南大門은 온전했다.
 
  崇禮門의 모습이 가장 크게 훼손된 것은 1907년부터이다. 그때 崇禮門의 서쪽에 연결되어 있던 성벽이 헐리기 시작하여 그 자리에 도로가 개설됨으로써 崇禮門은 양날개를 잃어버린 나비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1907년 8월1일 해산 명령에 격분한 조선군 시위대가 봉기하자 日本軍은 南大門 문루에다 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시위대가 주둔해 있던 西小門(서소문) 병영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래도 1940년경에 찍은 사진을 보면 南大門 주변은 오히려 한가했다. 전차 하나가 南大門 서쪽을 돌아가는 가운데 고관대작이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세단차 4대와 경호차 1대가 지금의 태평로 쪽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밖에는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는 사람, 차도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우마차와 마부들 등이 눈에 뜨일 따름이다.
 
  오늘날 南大門 주위는 대한화재빌딩, 국제화재빌딩, 서울상공회의소, 대경빌딩, 삼성생명빌딩 등 고층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그 바람에 「國寶 제1호」는 왜소화되어 그 위상에 흠집을 내고 있다. 통행 인구와 자동차가 엄청 폭증한 가운데 南大門은 國寶 제1호로서의 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보존하느냐가 발등에 떨어진 화급한 문제다. 
  
  崇禮門의 가치는 조선 초기의 건축물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시대적인 가치이고, 또 하나는 건축사적 가치이다. 前者는 서울에만도 大小 성문들이 있으나 그 문루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서 조선 초기의 것으로선 崇禮門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後者는 開城 南大門(개성 남대문)에서 이루지 못한 多包집 城門의 표본을 崇禮門에서 개화시켰기 때문이다. 崇禮門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이것은 국민적 숙제이다.(월간조선에서 발췌)

 

 

 

 

 

 

▲ 숭례문(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은 조선 도성(都城)의 정문이다

 

▲ 밤에 바라보는 숭례문은 공작의 꼬리처럼 아름답고 화려하다

 

▲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인 숭례문

 

▲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된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띠고 있지만, 원래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었다고 한다

 

▲ 숭례문 한가운데 무지개처럼 뚫려있는 홍예문

 

▲ 숭례문이라는 글씨는 양녕대군이 썼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로로 썼다

 

▲ 조선의 오래 묵은 어둠을 스물스물 밀쳐내고 있는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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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 Ser Der Sote Lam/그대 곁의 소중한 사람
 
출처 : 촌동네
글쓴이 : 靑海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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