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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의 복사꽃 구경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4. 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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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의 복사꽃 구경

2009. 04. 06. (월)

 조선시대의 서울에는 꽃구경으로 이름난 곳이 여럿 있었다. 흥인문은 축축 늘어진 버들로 유명했고, 다백운루(多白雲樓), 석양루(夕陽樓), 영미정(永美亭), 정릉은 진달래꽃이, 유란동(幽蘭洞)과 필운동(弼雲洞)은 살구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으로 손꼽혔다. 복사꽃은 동네 이름 그대로 도화동(桃花洞)이 최고였으며 묵사동(墨寺洞)도 명성이 높았다. 지금 서울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은 적지 않지만, 복사꽃이 아름다운 곳은 찾기가 어렵다. 서울의 복사꽃은 옛글에서나 찾아야 할 것이다.  

도성의 동쪽으로 나가 북쪽으로 3, 4리를 가면 북적동(北笛洞)이 있다. 북적동은 도성에 가까우면서 명승지로 소문난 곳이다. 봄이 저물 무렵이면 하루라도 거리에 사람이 없는 때가 없다. 나는 천성이 둔하여 도성 밖으로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도성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나갈 때뿐이다. 이 날은 어떤 사람이 억지로 독촉하는 바람에 소매와 옷깃을 나란히 하고 느릿느릿 걸어서 북적동에 도착하였다.

북적동 입구에는 드러누운 너럭바위 위로 물이 질펀하게 흐르는데, 물가를 따라 계속 이어져 있어 이곳저곳 골라 밟기도 하고 풀쩍 뛰어넘기도 하였다. 북적동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하던 바위가 길쭉하게 이어지고 질펀하게 흐르던 물은 한 곳으로 모여 골짜기 가운데에서 개울을 이루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언덕이 있으며 언덕이 높이 솟아 산을 이루는데 둘레가 거의 몇 리나 되었다. 사이사이에 촌락이 별처럼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었다.

촌락 너머로 언덕에서 산에 이르기까지 복사꽃이 빽빽하게 피어 있었다. 흰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으며, 짙붉은 것도 연붉은 것도 있었다. 게다가 꼿꼿한 소나무와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의 일산이나 병풍같은 모습이 희뿌연 비와 희미한 안개 사이로 어리비쳤다. 왕왕 꽃잎이 개울로 떨어지면 개울물이 온통 꽃잎과 같은 색으로 변하는 듯하였다.

마을에 김씨 성을 가진 업무(業武: 무관의 서자)가 있는데 나와 구면이다. 개울 상류에서 동쪽으로 꺾어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뚫고 그의 집을 찾아갔다. 초가집이 호젓하고 깔끔하여 속세에 있는 집 같지가 않았다. 주인이 나더러 앉으라고 마루를 양보하고는 몸소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정성껏 대접하였다. 조금 있자니 관리들이 말과 수레를 타고 시끌벅적하게 집을 지나가는데 술에 취해 노래하고 춤추느라 먼지가 자욱하였다. 내가 주인에게 말하였다.
“어르신이 이곳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젊은 시절을 거쳐 늙어서까지 하루라도 오늘처럼 골짜기가 요란하지 않았던 날이 없지요?”

그러자 주인이 말하였다.
“사방의 교외에 명승지로 알려진 곳은 동쪽 교외가 최고인데 동쪽 교외에서도 북적동이 더욱 유명하지요. 아리따운 꽃이 향기를 뿜고 아름다운 경치가 자태를 뽐낼 때면 도성의 남녀들이 미어지지 않는 날이 없지요. 그러다 꽃이 지고 물이 줄면 산은 텅 비어 버립니다. 때때로 오가는 이들이라고는 푸닥거리를 하는 노인이나 빨래하는 아낙네뿐이요, 봇물이 빠진 듯 썰렁하지 않은 적이 없지요.”

나는 객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1년 사이에도 땅에 이처럼 성쇠가 있는 법이니, 백년 인생이야 말할 것이 있겠소? 이와 같은 것을 누가 억지로 꾀어서 그렇게 하거나 억지로 빼앗아서 그렇게 한 것이겠소?”

나는 한숨을 쉬며 배회하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서 시를 잘하는 이들은 모두 시를 지었으나 나만 짓지 못하였기에 마침내 그 일을 기록하여 시권의 머리에 얹는다.        

↑ 도성연융북한합도(都城鍊戎北漢合圖) 중 일부_동국여도(東國輿圖)_규장각 소장

- 서형수(徐瀅修),〈북적동에서 노닐고 쓴 글(遊北笛洞記)〉,《명고전집(明皐全集)》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261집 《명고전집(明皐全集)》8권 기(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북적동(北笛洞)은 북저동(北渚洞)이라고도 하는데, 복사꽃이 아름다워 도화동(桃花洞)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도화동은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오늘날 성북동 일대다. 서형수보다 한 세대 위인 채제공(蔡濟恭) 역시 도화동으로 복사꽃 구경을 다녀온 뒤 <북저동에서 노닐고 쓴 글(遊北渚洞記)>을 남겼다. 이 글에 따르면 혜화문을 나서 성곽을 끼고 몇 리 정도 가면 도화동이 나타나는데, 그 곁에 선잠단(先蠶壇)이 있으며 백 보 쯤 떨어진 곳에 어영둔(御營屯)이 있다고 하였다.  

도화동은 조선 초기부터 복숭아나무가 많았던 곳으로, 복사꽃이 만개하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가서 구경하였다고 한다. 북적댄다고 하여 북적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겠지만, 도화동은 봄이면 복사꽃을 구경하려는 인파로 북적대었으니, 우연의 일치라 하겠다.

한적한 삶을 누리던 서형수(1749~1824)는 교외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화사하게 핀 복사꽃을 구경하자는 벗의 권유를 물리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지금 성북동 일대는 고급 주택가로 변하여 구경거리가 없지만 200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봄이면 북한산에서 내려온 개울물이 반석 위로 철철 넘쳐흐르고, 개울 양쪽 언덕에 복사꽃이 울긋불긋 불타올랐다.

그러나 꽃피는 시절이 지나면 도화동도 적막해진다. 서형수는 이 말을 듣고 인간사의 성쇠를 생각하였다. 인간사의 성쇠야 어찌하겠는가! 200여 년이 지난 지금, 꽃 피는 계절이 찾아와도 도화동에 복사꽃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복사꽃 피는 동네라는 도화동이라는 이름마저 기억에서 사라졌으니.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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