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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과 학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4. 1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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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과 학문

2009. 04. 13. (월)

옛사람들은 등산을 세상살이에 비유하였다. 사마광(司馬光)은 “산을 오르는 데는 방법이 있다. 천천히 가면 피곤하지 않고, 평평한 곳에 발을 디디면 넘어지지 않는다.(登山有道, 徐行則不困, 措足於平穩之地則不跌)” 하였고, 정자(程子)는 “산을 오를 때 평탄한 곳에서는 큰 걸음으로 나아가지만 험난한 곳을 만나면 멈추고 만다.(登山方於平易皆能闊步而進, 一遇峻險則止矣).” 하였다. 그리고 주자(朱子)는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곳에 오르려 하지만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人多要至高處, 不知自底處).”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명언에 견줄 만한 글이 있다. 아래에 보이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식견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성현의 글을 읽고 그 명목(名目)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성현의 글을 읽어 명목을 이해한 사람이 다시 깊이 생각하고 정밀하게 살피면, 그 명목의 이치가 마음과 눈 사이에 뚜렷이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우칠 것입니다. 그러면 성현의 말씀이 과연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다만 이 단계에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한 가지 단서만 깨우친 사람도 있고 전체를 깨우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를 깨우친 사람 중에서도 깨우침의 깊고 얕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입으로만 읽고 눈으로만 본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우친 것이므로 모두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목의 이치가 마음과 눈 사이에 뚜렷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사람이 직접 행동하여 아는 것을 실천에 옮긴다면 급기야 직접 그 경지를 밟고 몸소 그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눈으로 보고 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참된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따르는 것이고, 중간 단계는 바라보는 것이며, 높은 단계는 그 땅을 밟고 직접 보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러하지요. 여기에 높은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 정상은 경치가 매우 빼어나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사람은 그 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다. 누군가 산 정상에 물이 있다고 하면 물이 있다 여기고, 누군가 산 정상에 바위가 있다고 하면 역시 바위가 있다 여기겠지요. 직접 보지 못하고 남의 말만 따르므로 어떤 사람이 물도 없고 바위도 없다고 하면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골라 그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말도 믿을 만하겠지요. 성현의 말씀은 반드시 믿을 만하므로 어김없이 따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따르더라도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을 잘못 전하는 경우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학자들의 도에 대한 소견 역시 이와 같습니다. 성현의 말씀만 좇을 뿐 그 뜻을 알지 못하므로 그 본뜻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잘못된 기록을 보고서 억지로 맞추어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산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산 위의 빼어난 경치가 눈에 가득 찰 것입니다. 직접 바라보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잘못 전한 말이 어찌 그를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빼어난 경치를 좋아한 나머지 반드시 그 땅을 직접 밟고자 산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그 경치를 직접 보고나서는 좋아하면서 그저 말만 좇아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박장대소하고지만, 여기에 만족하고 산을 오르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산을 바라만 보는 사람들 중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동쪽에서 그 동쪽 면을 보는 자가 있고, 서쪽에서 서쪽 면을 보는 자가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구애되지 않고 그 전체를 보는 자도 있습니다. 한 쪽만 보았는지 전체를 보았는지 하는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직접 본 것입니다. 직접 보지 않고 남의 말을 따르는 사람도 전체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한 쪽 면만이라도 직접 바라본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빼어난 경치를 바라보고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옷을 걷어붙이고 달려가 애써 산을 오르게 되었다고 합시다. 하지만 맡은 짐이 무겁고 길이 먼 데다 역량에 한계가 있으므로 정상까지 다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정상에 오르고 나면 빼어난 경치가 모두 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은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산 정상에 도달한 사람들 중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동쪽을 바라보고서 동쪽으로 오르는 사람도 있고, 서쪽을 바라보고서 서쪽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으며, 그 전체를 바라보고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한 쪽으로만 오른 사람은 끝까지 오를 수는 있겠지만 산을 오르는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성과를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세 단계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도 곡절이 있어서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 산이 있는 곳을 먼저 알고서 비록 바라보지 못했더라도 산을 오르는 일을 그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산 정상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발과 눈이 함께 도달하여 곧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증삼(曾參)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또 그 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우연히 산길을 만나 산을 오르게 되었지만 애당초 산을 알지 못한 데다 산 정상을 바라보지도 않았기에 끝내 산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마광(司馬光)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어찌 다 열거하겠습니까?  

이렇게 비유하자면 요즘 학자들은 대부분 남의 말을 따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비록 별 탈 없는 말을 할 수야 있겠지만 겉모양을 따라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겉모양을 따라 흉내를 내면서도 별 탈 없는 말을 하는 사람조차 많이 볼 수가 없으니 더욱 한탄스럽습니다.        

◁◀ 관암도(冠巖圖)_고산구곡가(古山九曲歌) 중 제1곡_김홍도_개인 소장

- 이이(李珥), 〈성호원에게 답하다(答成浩原)〉,《율곡전서(栗谷全書)》

※ 이 글의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 수록된 한국문집총간 44집 《율곡전서(栗谷全書)》10권 서(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원문 바로가기]

[해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뛰어난 학자이면서 동시에 걸출한 문장가였다. 그의 글은 난삽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고 논리가 명쾌하다. 학문의 단계를 등산에 비유한 이 글은 이이가 벗 성혼(成渾)에게 보낸 편지이다. 매우 길기 때문에 여기서는 전반부만 잘라서 보였다.  

이이는 이 글에서 학자를 산의 정상에까지 오른 사람, 산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 산에 대해 남의 말만 듣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세 단계 가운데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고 하였다. 산의 정상에까지 오른 사람은 성현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 등은 산의 정상에 올라 산의 아름다움을 직접 보고 겪었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모름지기 산의 정상에 오르기를 기약해야 한다.

이이가 이렇게 비유한 까닭은 자득(自得)의 학문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이는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을 비교하였다. 조광조가 으뜸이요, 이황이 다음이며, 서경덕이 다시 그 다음이지만, 자득의 측면에서는 조광조와 서경덕이 앞서고 이황은 주자의 학설만 따랐기에 겉모양을 따라 흉내를 낸 의양(依樣)의 학문이라 하였다.

의양의 학문조차 따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자득의 학문을 바라보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현대는 창의성의 시대라니 더욱 그러하다. 이이가 가장 높이 평가한 조광조가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산을 오를 때 산꼭대기에 오르기를 기약하면 꼭대기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산허리에는 이를 수 있다. 산허리에 오르기를 기약한다면 산 아래를 떠나지도 못한 채 멈추고야 말 것이다.(登山, 期至山頂者, 雖不至頂, 可至山腰矣, 若期至山腰, 則不離山底而必止矣)”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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