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호학의 군주 정조와 파초 그림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9. 8. 3. 20:18

고전컬럼 고전칼럼 -

열 여섯 번째 이야기  호학의 군주 정조와 파초 그림  

2009. 07. 29. (수)   1.
  나는 파초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사랑방에는 파초 한 그루가 있었다. 그런데 남국에서나 볼 수 있는 파초가 왜 우리 집

사랑방에 있었는지 잘 알 지 못했다.

나는 파초 옆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면서 그날 배운 글자를 써 보는 일이 이를 갈 나이에 내가 했던 주요 일과였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대학에 들어가 비로소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면서 여러 학자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자들의 논설은 물론 그들이 지닌 여러 가지 아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특히 화훼에 관한 학자들의 취향은 아주 흥미로웠다. 송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을 읽으면서,

진(晉)나라 도잠(陶潛)은 국화를 사랑했고 당나라 이후로 사람들이 부귀를 사모하여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좋아했으며,

주돈이 자신은 연꽃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학(理學)의 비조(鼻祖) 주돈이에 의해 연꽃이 불교의 꽃에서 성리학의 꽃으로

새로 태어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여말 선초에 성리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이후 활동했던 학자나 관료들의 화훼에 대한 취향도 다양했다.

조선 이학의 조(祖)로 일컬어지는 정몽주(鄭夢周)는 국화를 사랑했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는 더불어 말은 할 수 있지만

그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몰라 싫다고 했다. 반면 국화는 서로 말은 안 통하지만 그 마음이 꽃다운 것을 사랑한다고 했다.

어찌 정몽주가 생각하듯 인간을 그렇게 각박하게만 말할 수 있겠는가 마는 세상인심이 야박했던 고려 말의 시절은 아마 그에게

그렇게 비쳐졌던가 보다. 정몽주는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국화를 위해 한잔 술을 들었고, 평소 잘 웃지 않았지만

국화를 위해 한 바탕 웃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황(李滉)은 매화를 무척 사랑하여 너무나 많은 매화시를 남겼다.

아예 매화를 읊은 그의 시를 모은 시첩이 따로 간행되었을 정도이다.

그는 매화를 매형(梅兄)이라 불렀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매형에게 자신의 불결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면 옛 선인들은 왜 이러한 꽃들을 좋아하고 사랑했을까. 도잠이 사랑했던 국화는 은일과 고상한 절개를,

주돈이가 사랑했던 연꽃은 군자의 기풍을, 이황을 비롯한 많은 문인 학자들이 좋아했던 매화 역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어디 이뿐이랴. 군자를 의미하는 난초와 대나무며, 세한(歲寒)에도 절개를 변하지 않는 소나무 등등 그야말로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꽃과 풀, 나무의 종류는 너무나 다양하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자연 속의 꽃과 풀, 나무에 대해 많은 시를 읊었고 글을 남기고 그림을 그려 그것이 지닌 물성을 닮고자 하였다.


▶ 정조대왕필파초도(사진출처_문화재청 홈페이지)         2.
  정조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호학(好學)의 군주이다.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글씨를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 중에 가장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군주이다. 그의 저서 홍재전서(弘齋全書)는 모두 백 책이다.

이 책은 우리 시대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현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고전번역원 사이트에서도 원문과 번역문을 쉽게 검색하여 활용할 수 있다.

  정조는 자기가 거처하는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이러한 일은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추진해오던

탕평의 정치를 완수하고 싶은 열망을 은근하게 표현하여 신민(臣民)들에게 알린 것이다. 오늘날 여러 학자들이 정조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고, 많은 정치가들이 정조의 정치철학에서 무엇인가 배우고 싶어 한다. 정조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학자를 최대로

예우하고 학자와 담론을 통해 청신한 정치이념을 늘 배우고자 했던 진지한 자세이다.

그리고 당론과 지역과 학파를 뛰어넘는 통합의 정치, 탕평의 정치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정조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주자학자이다. 그가 편찬한 다양한 주자학 저술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주자학자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그런 군주가 아니었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면서도 당시 새로운 학문인

북학(北學)을 적극 수용하여 정치다운 정치를 해보려고 애쓴 군주였다. 그에게 있어 주자학과 북학은 적어도 전혀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주자학을 학문적, 정치적으로 십분 이용하여 주자학을 신봉하는 모든 정치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북학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노론 북학파 학자나 서학을 신봉하는 진보적인 남인 지식인을 적극 비호하고 등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에서 펼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조의 정치는 영호남이란 지역도, 호론(湖論)·낙론(洛論)이란 학파도, 남인·노론이란 당론도 크게 따지지 않았다.

그는 통합하고 통섭할 수 있는 정치적 이념을 지니고 실제 그러한 정치를 추진해 나갔다. 정조의 재임 기간에 이루어진 당파를 뛰어 넘은

인재 등용과 다양한 분야의 서적 편찬사업이나 저명한 인물들의 추숭사업은 그의 통합의 정치적 이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 전통시대 학자들은 학문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덕성을 아주 중시하였다. 송대에 들어와 유학이 성리학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변모하면서

 종래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이념에 더하여 궁리(窮理)와 치지(致知)의 지식공부가 중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의 사이에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다. 덕성을 높인다는 존덕성과 지식을 추구한다는

 도문학에서 그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주자학파와 상산학파 사이에 오랜 논쟁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덕성과 지식의 두 가지 문제는 중요했던 것이다.

  덕성을 잘 기르고 새로운 지식을 배양하는 마음을 파초에서 발견한 송대의 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기철학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장재(張載)이다. 파초는 잎이 지지 않으며, 먼저 나온 잎이 어느 정도 자라면 곧이어 늘 새로운 잎이 말려 나온다.

  그래서 더욱 범상하지가 않다. 장재는 어느 날 파초를 보고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파초의 심 다하여 새 가지가 펼쳐지니 / 芭蕉心盡展新枝
  새로 말린 새 심이 몰래 이미 따르네 / 新卷新心暗已隨
  새 심으로 새 덕 기르길 배우고 싶어라 / 願學新心養新德
  이내 새 잎 따라 새 지식이 생겨나네 / 旋隨新葉起新知

  위 시를 해설한 웅화(熊禾)는 “새 심으로 새 덕을 기른다는 것은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해당하고, 새 잎 따라 새 지식이 생겨난다는 것은

 학문을 말미암는 공부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이 시는 성리대전(性理大全)에도 실려 있어 조선조의 학자들이 널리 애송하였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학자들이 파초를 좋아했고 선비가 거처하는 사랑방에 파초 한 그루 정도가 있었던 것은 훌륭한 인격과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선비들의 바램을 드러낸 것이다.

  정조의 세손 시절 파초 한 그루가 섬돌 아래에서 자라고 있었다. 정조 역시 그 전 시기의 학자들처럼 파초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지식의 갈구와 덕성을 표현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섬돌의 파초를 보고 다음과 같이 시를 읊었다.

  정원에 자란 봄풀은 아름다운데 / 庭苑媚春蕪
  푸른 파초는 새 잎을 펼치었구나 / 綠蕉新葉展
  펼쳐진 그 모습은 비 처럼 길쭉한데 / 展來如箒長
  사물에 의탁하여 대인 되길 힘써야지 / 托物大人勉

  정조의 이 파초시에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덕성을 높이고 지식을 추구하겠다는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장재의 시에서 그러한 시상(詩想)은 다 드러났던 것이다. 정조는 다만 파초 잎이 길게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노력을 통해

  대인(大人:聖人)이 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 대인은 바로 군사(君師)의 지위와 덕을 갖추고 제왕학에 의거하여

  치국평천하를 하는 성인 군주이다.

 정조는 어느 날 붓을 잡고 파초도를 그렸다. 그가 그린 파초도는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보물 제7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전시회에 가서 정조의 파초도를 한참 동안 서서 감상한 적이 있다. 그 그림에 짙게 배어 있는 정조의 덕성을 상상하고

지식을 향한 열망을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그리고 정조가 젊은 시절에 파초시를 쓰면서 이 다음에 군주가 되면 성인의 정치를 펴보겠다던

그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정조의 파초도에 그의 파초시를 여백에 화제(畵題)로 넣어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글쓴이 /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 주요저서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 연구    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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