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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보개산에 청련암(靑蓮菴)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대궐에서 나온 한 궁녀가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의 간절한 바람은 다시는 남자의 압제를 받지 않도록 내세에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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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의 이치는 과연 존재하는가?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쾌락을 취하는 것은 단지 오늘이 있을 뿐 내일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현세의 삶을 괴롭게 하면서 내세의 즐거움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어찌 엉성하고 모자란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왕공(王公)과 귀인들 가운데에는 종종 제 몸을 손상시켜 가물가물 숨이 넘어가는데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저들은 후세의 즐거움을 도모하려는 자들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떤 일인가? 영달하여 알려지기를 바란다면 왕공과 귀인보다 더한 것이 없고,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란다면 제 육체를 손상시키면서도 슬퍼하지 않으니, 건강과 장수가 그들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는가? 이는 천명을 알지 못하므로 빠져들어 헤어날 줄 모른 채 경거망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녀자들의 경우는 살아가기가 매우 괴로우니 남의 압제를 받기 때문이다. 더구나 궁중에서 홀몸으로 답답하게 살면서 한을 품고 있는 여인이야 어떠하겠는가? 나는 경자년(1720) 겨울 보개산(寶盖山) 영주동(靈珠洞)에 머물고 있었다. 언덕 너머에 청련암(靑蓮菴)이 있었는데, 바로 나인(內人) 김씨 여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달 밝은 밤이면 김씨 여인은 『법화경(法華經)』을 외웠는데, 그 소리가 맑고 고우면서도 애절하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글퍼졌다. 승려를 통하여 그 여인이 어디에 살며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 알아보니 모두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 김씨 여인은 궁녀인지라 고운 얼굴에 검은 눈동자를 지녀 사람들이 모두 절대가인이라 하였다. 입으로는 맛좋은 고기를 물리도록 먹고 몸으로는 아름다운 비단을 질리도록 걸쳤을 것이니, 남편과 자식은 있지만 변변한 옷이나 끼니도 잇지 못하는 가난한 시골 아낙네들의 부러움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궁벽한 산골 으슥한 숲속에서 외로이 덤덤하게 살면서도 후회하지 않고 있다. 이는 마음에 필시 큰 슬픔이 있어 그러한 것이다. 화려한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넓은 침상에서 잠드는 것은 그 여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정말 원하는 것은 내세에 여자로 태어나 남에게 압제를 당하는 일을 면하는 것뿐이다. 불교의 이치는 비록 황당하여 입증할 수 없지만 사정이 곤란하고 행동이 구애되어 마음을 둘 데가 없으면 부득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저 왕공와 귀인들은 부인의 몸도 아니요, 당대에 기염을 토하여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였을 터인데 마음에 무슨 불만이 있어 천명을 편히 여겨 순종하지 못하고 저렇게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는가?
청련암을 중수할 때 김씨 여인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김씨 여인의 사정이 슬퍼 이렇게 글을 써주고, 아울러 왕공과 귀인을 위한 경계로 삼는다. 절간의 기둥을 새로 단청한 일이나 안개와 구름이 변화무쌍한 풍경에 대해서는 말할 겨를이 없어 줄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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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유약_임득명("옥계십이승첩" 중)_삼성출판박물관소장 ☞ 우리 땅 우리 진경 도록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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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도수(金道洙),〈청련암기(靑蓮菴記)〉《춘주유고(春洲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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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문인 김도수(金道洙, 1699-1733)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김도수는 청풍김씨(淸風金氏) 명문가의 후예로, 증조부는 김육(金堉)이다. 그러나 부친이 측실의 소생이라 속세의 부귀영달을 꿈꾸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젊은 시절 패설(稗說)에 탐닉하였고, 절간을 전전하면서 불경과 장자(莊子)를 탐독하였다. 이 때문에 한때 《창선감의록》의 저자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의 스승 이덕수(李德壽)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불교에 관심이 많았기에 그 대다수가 불교 서적이었다. 김도수로서는 자신을 이해해 줄 스승을 찾은 셈이다.
김도수는 이처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1720년 22세 때 철원의 보개산 영지동에 살면서 불서를 읽었는데, 인근 청련암에 한 궁녀가 살고 있었다. 그 궁녀는 대궐에 있을 때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나이가 들어 대궐에서 나와 절간에 몸을 의탁하는 처지였다. 궁녀는 열심히 염불을 외우며 내세에는 사내의 압제를 받지 않도록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기를 빌었다.
김도수는 불교의 이치가 허황하다고 거듭 말하였지만, 그만큼 불교에 탐닉한 문인은 조선에서 그리 흔하지 않다. 드러내놓고 불교의 이치를 고평할 수는 없는 처지였기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부족할 것이 없는 왕공과 귀인들이 불교에 빠진 것은 천명을 따르지 못한 잘못이라 하였지만, 부귀와 수명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기에 불교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다는 은근한 뜻을 읽을 수 있다. 사람이 너무나 슬퍼 마음을 붙일 데가 없으면 종교에 귀의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긍정의 논리가 엿보인다. 내세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도록 해달라는 발원은 그 궁녀가 실제로 말한 것이겠지만, 이를 그대로 옮긴 김도수의 마음 한켠에도 조선시대의 가련한 여인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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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