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의 乍晴乍雨(사청사우)
乍晴還雨雨還晴 사청환우우환청 天道猶然況世情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예아변시환훼아 逃名却自爲求名 도명각자위구명 花門花謝春何管 화개화사춘하관 雲去雲來山不爭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認 기어세인수기인 取歡無處得平生 취환무처득평생 언뜻 개었다가 다시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라. 나를 기리다가 문득 돌이켜 나를 헐뜯고 공명을 피하더니 도리어 스스로 공명을 구함이라.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다스릴고 구름 가고 구름 오되, 산은 다투지 않음이라.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반드시 기억해 알아두라. 기쁨을 취하려 한들 어디에서 평생 즐거움을 얻을 것인가를. 비오락 볕나락 흐리락 개일락 하늘도 저렇거니 사람에서랴 날 기리는 이 문득 날 헐 것이요 이름 숨김은 도로 구함일레라 꽃이야 피든 지든 봄은 무심코 구름이야 가건 오건 산은 말이 없네 세상 사람들이여.. 유념하시라 한 평생 낙붙일 곳 땅엔 없느니 세상 인심의 변덕스러움을 날씨에 읊은 것으로 세속적인 명리를 떠나 무위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작자의 인생관의 피력이다. 1.2구는 변덕스러운 세태인정이요, 3,4구는 그를 부연한 한 예시이다. 이 시는 손중섭 편저 '옛시정을 찾아서'에 의하면 " 남을 기리는 일은, 언제 그 태도가 표변하여 그를 헐뜯을지도 모를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이 오늘날의 인정이요, '명예'를 뜬구름인 양 여기는 사람도, 기실 오히려 은근히 '명예'를 구하는 이중성을 지니는 현실세태를 노래한 詩이다. 보라. 봄은 꽃으로 하여 봄다워지건마는, 그러나 봄은, 꽃이야 피건 지건 관심 밖으로, 자연에 맡겨 놓고 있을 뿐이요, 산 위로 넘나드는 구름에 따라 산의 얼굴도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산은, 구름이야 가든 오든,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는 일이 없이, 그저 저 흐르는 대로 맡겨 놓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공연히 제 스스로 바빠, 입신출세다 부귀공명이다 동분서주 안달하지만, 설사 뜻대로 얻었다 한들, 필경 그것이 무엇이랴. 기쁨도 잠깐의 일, 그에 새로운 고뇌도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한 곳에 뿌리 내려, 한 생애를 자득할 만큼의 기쁨을 얻을 곳이란 이 지상에는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다만 저 대자연 처럼, 욕심없이 얽매임없이, 담담히 유유히 순리대로 살아가는 거기에, 오히려 은근한 생의 즐거움은 있는 것이라고, 세인에게 충언하고 있다. 동시에 이 끝구는, 어느 한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작자 자신의 유랑의 변이기도 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의 시는 자신의 삶을 담고 있다. 그의 삶 또한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기에 이런 생각이 나왔는지 모른다.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년~1493년)
조선 초기의 문인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세조의 왕위찬탈에 불만을 품고 승려로 생활하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비단을 선물하자, 비단들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남효온·안응세(安應世)· 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상처한 후 재취하지 않았고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뒤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효온과 함께 영월 육신사에 배향되었다. 경력 : 1782년 이조판서 추증 저서 : '유금오록(遊金鰲錄)', '금오신화(金鰲新話)', '관동일록 (關東日錄)', 100여편의 시 '매월당집 梅月堂集' 김시습 사후 18년에 중종의 명으로 자료를 수집 10년이 걸려 3권의 문집으로 처음 완성. '매월당시사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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