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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효(孝)를 충(忠)보다 앞세운 현자(賢者)이야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0. 3. 19. 11:57

북소리·죽비소리·철부지소리(103)


효(孝)를 충(忠)보다 앞세운 현자(賢者)이야기


           임금님이 내린 술을 거절한 지조(志操)와

           어머니에 대한 맹약(盟約)과 평생 지켜 낸 효도정신      

   우리나라 동국 18현(賢)과 동방오현(東方五賢) 중의 한분이셨던 일두(一?) 정여창(鄭汝昌1450~1504)선생이 남긴 일화는 참으로 많다. 그 중에서도 어버이에 대한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심지어 임금님이 내린 술상과 술잔을 거절한 이야기가 조선조실록에 까지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는데 효(孝)를 충(忠)보다 앞세운 현자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효가 어떤 것인가를 교훈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일두선생의 나이 18세 때(세조 13년, 1467)에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일두선생의 아버지인 정육을(鄭六乙)공이 당시 함경도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侯)-지금의 군의 지역사령관 격-로서 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순절하였다. 비보를 들은 아들인 정여창은 하인 몇 사람을 데리고 경남 함양에서 멀리 함경도까지 2천리 길을 달려 보름 만에 현지에 당도하여 보니 이미 음력 6월 염천(炎天)이라 전사자의 시신들이 부식되어 있었는데 며칠 동안 헤맨 끝에 산더미처럼 널려 있는 전사자의 시체들 속에서 겨우 부친의 시신을 찾아 거두어 고향을 향해 내려오게 되었다. 그 시기는 우기라 더위와 장마로 굵은 장대비가 며칠 간 심하게 내리는 우중임에도 계속 호곡(號哭)하고 운구하면서 하인들이 삿갓이나 도롱이를 입도록 권유했지만 아비 잃은 죄인이라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하며, 아버지의 유체(遺體)를 찾아 나선지 한달 여 만에 시신을 모시고 고향에 돌아와 가례(家禮)에 따라 정중히 상례를 치르고 이로부터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 무렵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아들이며 그의 장인인 도평군(桃平君) 까지 세상을 떠 모두 3년 상(喪)이 끝났을 무렵엔 감수성이 예민하고 혈기왕성할 20세 전후의 젊은이로 성장했고 학문에 정진해야만 할 때 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상을 끝내고도 한없이 공경하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 인생이 무상함의 충격과 애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가끔 친구들과 그 격정을 달래려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하루는 일두 정여창선생이 친구들과 술을 취하도록 많이 마셔 들판에 쓰러져 밤새워 잔적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뜬 눈으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집에 들어온 일두선생은 어머니 방으로 발길을 옮겼으며 그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불러 앉혔으며 잠시 침묵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마신 술로 취해서 들판에서 비몽사몽간에 밤을 지 샌 다음날이라 아직 술이 덜 깬 상태였지만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시간이 잠시 흐른 후 일두선생은 그만 어머니 치마폭에 안기어 흐느끼며 잘못에 대해 마음속으로 뉘우치기 시작했고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말을 꺼내 이르기를,

  “창(昌)아! 네가 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 하는고 !....”

  “너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과부가 된 내가 오직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아왔는데, 지금 너의 하는 짓이 이러하니 내가 누굴 의지해서 산단 말이냐?”

  “어머니! 아버지의 시신을 시체더미 속에서 거들 때의 그 처참한 모습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네가 술에 의지해서 쓰겠는가? 너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 아닌가. 과부의 아들이라 엄훈을 받지 못하므로 반드시 남보다 몇 배나 더 공부하여 지난날의 가풍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마음으로 힘써 나아가야하며 잠깐 동안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술에 취해 있는 동안엔 발전하여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내 일,내 일 하는 동안에 내 머리에는 백발만 늘어 날 것이고 그때 네가 뉘우친들 미치지 못할 것이다. 부지런히 힘써도 세월이 부족하니라.”

 

  그는 어머니가 스스로 한탄의 눈물을 흘리며 인자하면서도 단호하게 타 일루는 어머니의 얼굴과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무릎과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혜한에 흐느끼며 이때 일두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어머니!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용서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거듭해

  “어머니, 죄송하고 잘못하였습니다. 제가 다시는 평생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용서 하시옵소서” 라고 맹약을 했다고 한다.1)

  이 애정 어린 어머니의 준엄하고 인자한 훈계와 아들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약속은 일두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 지켜졌다.

 

  나눈 대화와 약조를 보자. 그 일화를 들춰 보면 이렇다.2)

어머니로부터 받은 꾸지람과 훈계의 영향은 일생을 두고 지속하여 지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인간이란 그 당시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변명과 입에 발린 약속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일두선생만큼은 이를 철저히 지키고 실천한 장본인으로서 즉 훈계가 있고 언약을 한 그날 이후로는 술을 멀리하고 평생토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한다.3)

  그런 일이 있은 후 세월이 흘러 일두선생이 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의 관직에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성종 임금께서 관내의 신하들에게 술을 내린 일이 있었다. 신하인 일두선생에게도 술상이 내려졌고 임금이 내린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은 채 앉아있는 모습을 본 성종임금이 드디어 신하인 일두에게 술을 권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임금이 배석하고 술을 권했지만 일두선생은 감히 임금이 내리는 술잔마저 거절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술을 거절하는 이유로서 일두가 부복하여 나직한 목소리로 아뢰기를,

  “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일찍이 친구들과 더불어 과음하여 실수한 적이 있어 어머님께서 몹시 걱정을 하심으로, 어머님에게 이후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온지라 감히 상명(上命)을 받들지 못하겠사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고하니 그 자리에서 임금도 일두선생의 효심(孝心)에  눈시울을 붉히며

“참으로 훌륭한 선비로구나”

  하고 칭찬하고 술 사양의 뜻을 허락했다한다. 이 기록은 성종실록에 기록되어 지금도 역사의 무게를 앉고 남아 있다. 이런 일화는 아마도 역사에 없는 유일무이한 임금이 내린 술을 거절한 선비의 효심은 충심(忠心)보다 앞세운 현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사실을 보았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훈계는 일두가 평생을 통해 매우 소중한 삶의 좌우명과 지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두는 학행(學行)과 효행(孝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지와 그 실천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성종임금께서 일두선생의 아버지의 공로를 인정하여 참봉의 벼슬을 내려도 사양하고, 당당히 과거를 통해 급제하였으며, 술을 내려도 거절하고 마시지 않는 일두의 이와 같은 학행을 보고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燕山君)이 세자시절에 가정교사격인 세자시강원 설서로 임명 세자를 가르치게 했음은 성종의 이치에 참으로 합당한 인사였다고 생각 한다 .

  임금님이 내린 술과 벼슬을 거절한 지조(志操)와 평생 지켜 낸 스스로의 금주, 어머니에 대한 맹약(盟約)과 평생 지켜 낸 효도정신이야말로 효(孝)를 충(忠)보다 앞세운 가슴에 담을 실천유학자인 현자(賢者)이야기가 효심이 땅에 떨어진 우리시대의 우리 가슴을 때린다.      

 

 <주> 이 글은 '대 한국인' 2010년 3월호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출처 : 북소리 죽비소리 철부지소리
글쓴이 : 청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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