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楊士彦)과 그 어머니
일찍이 회양군수(淮陽郡守) 재직 시 금강산(金剛山)에 드나들며 ‘금강산 유람기’를 남긴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그의 명성에 걸맞는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란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남아있다. 조선 전기 3대 서예가(書藝家)중 한사람으로서 큰 글씨를 잘 썼다고 전하며 그의 호가 봉래(蓬萊)라는 점을 생각하면 다분히 자기과시욕이 발동한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시조시인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가 남긴 ‘봉래시집(蓬萊詩集)’ 중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시조 시(詩) 한수가 있는데 이 시조는 매우 유명하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는 우리가 알기로는 양사언이 모든 일에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교훈 조 詩(시)로만 알고 있었는데 깊은 내력을 살펴보니 처절하게 살다간 그의 어머니를 그리는 시라는 해석이 kBS 역사 이야기에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楊士彦(양사언)과 그의 어머니". 우리 선조들로부터 현세에 이르기 까지 위대한 인물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대부분 그들 어머니의 은공이 뒤에 숨어 있고, 이러한 모성애의 은공(恩功)으로 훌륭한 인물은 더욱 훌륭한 인물로 재탄생 되어질 수 있다.
우리 역사인물로 익히 알고 있는 율곡(栗谷)과 신사임당. 만호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것이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대표적 한민족의 어머니이리라.
그러나 "양사언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楊希洙)'가 전라도 영광의 사또로 부임해 내려가는 꽃 피는 춘삼월의 어느 날 어느 촌 고을을 지날 즈음, 전날 부임 축하연으로 술에 절어 밥을 먹지 못해 배가 무척 고파서 밥을 먹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농촌의 각 가정에 농번기라 사람들이 없었다. 이 집 저 집 둘러보는 중에 어느 한 집에서 한 소녀가 공손하게 나와 식사 대접을 하겠노라고 아뢰었다. 그리고는 신관 사또가 거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냐고 하며 안으로 모시고서 부지런히 밥을 지어 진지 상을 차려 올렸다. 그 소녀의 대하는 태도나 말솜씨가 어찌나 어른스러우며 예의 바른지 사또는 너무나 기특하게 여겨 조반을 잘 얻어먹은 젊은 신관 사또 '양희수'는 고마움에 보답을 하게 되는데 신관 사또 '양희수'는 소매에서 부채 청선(靑扇)과 홍선(紅扇) 두 자루를 꺼내 소녀에게 주었다. 그냥 전달하기는 멋 적어 사또가 농담을 섞어 부채를 건너면서
"이는 고마움으로 내가 너에게 채단(綵緞) 대신 주는 것이니 어서 받으라."
이 말을 들은 소녀는 귀를 의심해 이 말을 뜯어보니 `채단'이라 함은 결혼 전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청색홍색의 옷감들이 아닌가. 깜짝 놀란 소녀는 안방으로 뛰어가 장롱을 뒤져 급히 홍보를 가져와서 바닥에 깔고 청선(靑扇), 홍선(紅扇)을 내려놓으라고 여쭈었다. 이에 도리어 어리둥절한 사또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폐백에 바치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면서 사또가 주는 두 자루의 부채는 홍보 위에 놓여졌고 소녀는 잘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이것을 인연이라 할까.
사또 '양희수'는 이런 저런 업무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한 노인이 사또를 뵙자고 찾아 왔다.
"몇 년 전 부임할 때 시골집에 들려 아침 식사를 하고 어느 소녀에게 청선(靑扇), 홍선(紅扇) 두 자루를 주고 간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옛 추억을 더듬어 사또는 조금 생각하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 말하며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을 건넸다. 그때서야 이 노인은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셨군요. 그 여식이 과년한 제 딸년인데 그 이후로 시집을 보내려 해도 어느 곳으로도 시집을 안가겠다고 해서 영문을 몰라 이렇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또의 머리 속엔 참으로 기특함에 놀라고
"그 정성이 지극하거늘 내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소. 날짜를 잡아 아내로 맞이 하겠소."
밥 한 끼 얻어먹고 대가로 부채 두 자루 선물했으면 밥값으로 충분할 텐데, 졸지에 아내로까지 맞이하게 되었으니 인연인가 아니면 신의 축복인가! 마치 어느 삼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이다. 이 소녀가 바로 양사언의 생모이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이야기를 여기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사또는 정실부인이 있었고 이 부인과의 사이에 '양사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처, 즉 소실인 이 소녀와의 사이에 양사언과 양사기, 두 아들이 태어났다. 사준, 사언, 사기 , 이 삼형제는 자라면서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 났으며 인품과 풍채도 좋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하며, 형제애가 깊어 중국의 '소순, 소식, 소철' 삼형제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정실부인이 죽고 ‘양희수‘ 집안의 모든 살림살이를 후처인 사언의 생모가 이를 도맡아 하게 되고 세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아들들이 아무리 훌륭하면 뭣하나. 자기가 낳은 두 아이가 모두 서자들인데. 이 시대의 어쩔 수 없는 가족제도 이었으니 말이다.
이 소실부인의 서러움과 한탄은 적자가 아닌 서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실부인의 유일한 꿈은 자기 아들들의 머리에서 서자의 딱지를 떼 내는 일이었다.
그러다 남편 '양희수'가 죽고 장례 날에 이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족들 모두를 모이게 한 후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양씨 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들이 재주가 있고 총명하며 풍채도 있거늘 첩이 낳았다 하여 나라 풍습은 그들에게서 서자의 너울을 벗겨주지 않는다."
고 말하면서 장손인 적자 양사준에게 울면서 부탁하기를
"첩이 또한 이 다음에 서모의 누를 가지고 죽은 후라도 우리 큰 아드님께서는 석 달 복밖에 입지 않으실 터이니, 이리되면 그때 가서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복제가 혼돈하여 사람이 모르게 될 것이다“
“내 이미 마음을 다진 몸, 무엇을 주저 하리까 만은 내가 죽은 뒤 사언, 사기 두 형제한테 서자란 말로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죽어서도 기꺼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구나”
그리고 그 말을 마친 후 바로 양사언의 어머니는 가슴에 품고 있던 치국(治鞫)하던 단검을 꺼내 가슴을 찌른 후 앞으로 엎드려 자결을 하고 말았다. 순간의 일이었다. 세 아들들이 어머니를 부둥켜안았을 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아들을 서자의 멍에를 풀어주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던 여인, 죽음으로써 잘 못된 제도와 부조리한 인간 차별화를 타파하고 싶었었던 선구자적인 신여성(新女性)인 이 양사언 어머니의 죽음에 이른 교훈은 종국엔 양사언을 더욱 훌륭한 문인(文人))이요 떳떳한 선비로서 생을 누리게 하는데 이 어머니의 스스로의 희생이 양사언의 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이후 양사언은 서적자의 신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그의 나이 27세 때에 식년병과(式年丙科)란 과거에 급제하면서 여러 높은 관직에 까지 승차하였고 시인으로서, 서예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과 모정의 깊은 은덕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양사언은 만호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 3대 명서예가(名書藝家)이자 문필가이다. 양사언은 천성적으로 자연을 좋아해 풍광 좋고 아름다운 산이 있는 고을의 원님으로 돌아다녔고 그는 여러 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즐겨 썼던 호가 蓬萊(봉래)였으며 평생을 금강산을 자주 찾아 금강산의 매력에 흠뻑 젖어 살게 된 인물이었다.
여름 금강산을 蓬萊山(봉래산)이라 하고 이와 같은 연유에서 그는 자호로 蓬萊(봉래)라 하였다. 금강산을 노래하고 금강산을 그린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만은 얼마나 금강산을 사랑했으면 자기의 호를 蓬萊(봉래)라 했겠는가.
여기 그의 오언절구 두루마리 시한수를 옮겨 놓는다. 이 작품은 그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霜餘水反壑 (상여수반학) 서리 녹아내린 물 계곡으로 흘러가고
風落木歸山 (풍락목귀산) 바람에 진 나무 잎도 산으로 돌아가네.
염염歲華晩 (염염세화만) 어느덧 세월 흘러 한 해가 저물어 가니
昆蟲皆閉關 (곤충개폐관) 벌레도 모두 다 숨어 움츠리네.
이 두루마리는 오언절구시축(五言絶句詩軸)으로 크기가(103.5×57.2Cm이다. 임창순(任昌淳)의 구장(舊藏)으로 이 시축은 현재 호암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한국미술전집 11, 임창순 편, 동화출판공사, 1975. 간행에서도 감상 할수 있다. 호암 미술관측 해설에 의하면“본 작품은 봉래의 장기인 초서가 유감 없이 드러난 것으로 활달 분방한 필세가 잘 나타나 있고, ‘봉래산인(蓬萊散人)’·‘양사언인(楊士彦印)’의 도장 2 과(顆)가 찍혀 있다. 단, 사진으로는 도장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설문에 전하고 있다.
|
악성 위장병 고치기 클릭->http://cafe.daum.net/skachstj 010-5775 5091 |
'놀라운 공부 > 옛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근담(菜根譚)-본성이 맑으면 심신을 건강하게 길러나간다. (0) | 2010.04.07 |
---|---|
채근담(菜根譚) (0) | 2010.04.06 |
[스크랩] 효(孝)를 충(忠)보다 앞세운 현자(賢者)이야기 (0) | 2010.03.19 |
“眞經은 글자나 종이가 아닌 口傳心授될 뿐”| (0) | 2010.03.08 |
겸손은 높고도 빛난다 (0) | 2010.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