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뚝섬의 치우 유적 둑신사를 복원하자
‘치우천왕’이라는 뛰어난 장수이자 임금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조상이라는 지식이 일반인들에게 보편화 된 것은, 「배달나라 14대 임금 ‘자오지 환웅’」이란 기록을 담고 있는 『한단고기』등의 옛 기록보다도, ‘붉은악마’라고 하는 작년의 월드컵 축구 응원단에 그
공로를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명소 뚝섬, 그곳이 ‘둑신사’라고 하는
치우천왕 유적과 역사를 간직한 곳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중국의 치우천왕 역사 복원
중국의 한족들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자기들의 시조인 황제에게 대들었던, 포학한 반역자이자
‘악신’이라던 치우를 이제는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고 있다.
1995년 하북성 탁록현에서는 탁록중화삼조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탁록이 중화문명의 발상지’라면서
삼조당(三祖堂)을 짓고 염제(동이족의 시조)․황제(화하족의 시조)․치우(묘족의 시조)라는 세 조상의 좌상을 봉안하면서 자기들은 단순한 한족이 아니고 동이족과 묘족을 합쳐진 ‘중화족’이라며
새로운 민족칭호를 만들었고, 2002년 산동성 문상현에서는 중국 내에 최소한 7개 이상인 것으로 알려진
치우천왕의 무덤 중 문상현 남왕진에 있었다는 무덤(정확한 위치는 연변의 조선족인 고 송호상이
2001년에 찾아 복원을 신청)의 복원을 시작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며,
지난 9월에 치우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비용을 지원해달라고 찾아온 바 있다.
그런데 한족의 기록이나 전설에 남아있는 치우는 대부분 사나웠던 난폭자였고, 동이족이나 만주족
계통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등 높이 받들었으나 한족의 탄압(?)으로 지금은 거의 없어졌으며,
많은 갈래의 묘족들은 지금도 그들의 공동조상으로 받들고 여러 가지 행사를 하고 있다.
다민족이 단합이나 관광수입 증대를 위한다고는 해도 중국에서 이러한 치우천왕을 새로 만든
중화족의 공동시조로까지 받들면서, 그 유물과 유적들을 복원하고 있다는 것은 중화주의라는 패권주의
추구 목적의 동북공정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국민들만 치우천왕 인식
이처럼 지나인들이 치우천황에 대한 역사 재편을 서두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치우천황에
대한 인식과 연구는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하다. 한배달 치우학회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조직이나 연구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치우천왕이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 했기에, 그래서 붉은악마의 상징이 되었기에, 에니메이션과 게임 등 일부 분야에서 치우천황을 소재로 다양한 문화상품을 기획하고, 태견이나 검법 등 무술분야에서 그를 무예의 조종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자료부족으로 우리의 선조라는 확신조차 하지 못하고, 영정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치우천왕과 그 문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연구와 자료의 발굴 및 그 복원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전투전 둑제는 치우에 대한 제사
순수 우리나라 기록에서 치우는 치우기(혜성으로 이 별이 나타나면 난리가 났다고 함)와 중국의 역사책 내용 인용(황제와의 관계 등)이 주류이고 그 다음 제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 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으로서 용강의 조라 할지니”(《환단고기》신시본기)
“마제단(禡祭壇)은 동북교(東北郊)에 있으며,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하였는데, 강무(講武)하기 하루 전날에 제사를 지낸다. 신위(神位)에는 웅석(熊席)을 깔고, 활과 화살을 앞에 두고 활꽂이를 뒤에 세우고, 큰 기(大旗) 두 개를 남문 밖에 세웠었다.”(연려실기술 제4권)
그리고 치우와 관련 둑(纛;도,독)은 둑기, 둑제, 둑신이란 단어로 《성호사설》, 이순신의 《난중일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 여러 번 등장한다.
“『송서』(宋書)에…도(纛)라는 기는 본래 군중(軍中)에서 쓰는 대조기(大早旗) 이름인데, 군사가 출발할 때에 이 기에 제사 지내며, 검은 비단으로 치우(蚩尤) 머리와 같이 만들었다고 하였다.”(성호사설 제9권)
“(1593 癸巳年 2月 初4日, 1594 甲午年 9月 初8日, 1595 乙未年 9月 20日)둑제를 지냈다.”(난중일기)
* 연구결과 이순신 장군은 전황과 징후로 보아 전쟁이 가까워졌을 때 둑제를 지냈다.
“기사일에 군대 사열이 끝난 후에 왕이 친히 궁문(宮門)에서 독기(纛旗)를 제사지냈다.”(『고려사』〈충렬왕 정해 13년(1287)〉조)
“영안군(永安君)에게 명하여 둑신(纛神)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제사에 참여한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武服)의 차림이었다.”(『조선왕조실록』〈태조 2년 1월 16일〉조)
“삼군(三軍)의 둑(纛)을 강안전(康安殿)의 간락청(看樂廳)에 옮겨 두었다.”(『조선왕조실록』〈정종 1년 8월 25일〉조)
“군기(軍機) 때문에 율(律)을 범하여 둑기(纛旗) 밑에서 참형을 받게 되었다.”(『조선왕조실록』〈중종27년〉조)
뚝섬에 둑신사가 있었다
최근 들어 이러한 둑기나 둑신을 모셨던 사당인 ‘둑신사’의 존재를 언급한 분은 고 조자용박사이다.
“둑신사(纛神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둑신사의 ‘둑(纛)’자는 ‘도’라고도 읽고 ‘독’이라고도 읽는데 바로 동대문 밖 뚝섬에 이 둑신사가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뚝섬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바로 이 둑신사의 ‘둑’에서 온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둑신사에 벽화가 있었는데 벽화의 그림이 바로 치우와 황제의 탁록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크기는 높이가 6자, 길이가 36자 정도로 커다란 것이었다는데 지금 이 벽화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왜정 말기까지는 있었다고 하는데…”
“또 둑신기라고 있었어요. 치우기라고도 하는데 이 둑신기의 깃발이 바로 우리나라 태극기의 원형입니다. 이 둑신기에는 괘가 여덟 개가 다 들어있고 가운데에 음양이 있는데 이것이 치우기입니다.” (이 둑신기는 계간 한배달 43호에 게재)
이 외에도 충북 괴산군, 청원군에도 치우사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치우의 정신적 유산이
중국은 근래에 들어 갑자기 무덤을 비롯한 치우천황의 유적을 찾아 복원하고 있는데,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물질적인 유산보다 ‘마제단’ ‘둑’ ‘둑기’, ‘둑신’, 등과 같은 정신적인 유산이, 씨름, 장승, 치미, 해치, 단오적령부, 단팥죽 등과 함께 간직되어 왔다.
지역적으로 좌․우가 뇌의 좌․우와 같이 우측이 보다 정신적인 문화에 가깝다는 김상일 교수의 지적처럼 우측인 우리나라가 정신문화에서 중국에 앞섰음일까.
안타까운 것은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훌륭한 정신문화의 내역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복원할 생각도 하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치우학회에서 국제학술대회까지 하여도 학계에서는 관심이 없지만, 그나마 작년 월드컵 이후 붉은악마의 영향으로 국민들 사이에는 치우천황에 대한 인식이 높아가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둑신사(纛神祀)’를 복원하자
마제와 둑제의 기록, 뚝이라는 우리말과 수호신(군신, 전쟁신, 승리의 신)이라는 치우의 위상의 관계, 그리고 우리 민속에 남아 있는 치우의 흔적 등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직면할 중국과의 치우역사 논쟁 등에 대비하는 치우역사 정립 차원에서라도 둑신사는 하루빨리 복원하여야 한다.
‘둑신사’의 존재를 밝힌 계간 한배달 제43호의 기록, 그리고 현재 서울의 ‘뚝섬’이란 지명이 바로 ‘둑신사’가 있던 곳에서 유래된 지명이라는 고증 등만 하더라도 그 복원은 추진할 수 있을 것이며, 서울의 정신적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치우가 아시아지역 여러 종족의 선조이므로 앞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을 고려한다면 더욱 서둘러야 한다. 미래세계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는 정부가 되어도 좋고 아니면 신뢰받는 단체나 모임에서 주관해도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가 관심을 갖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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