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맨손으로 출발한 우리 경제가 이제는 수출규모 세계 5위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 격동기에 선진국들이 200년 이상에 걸쳐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일구어냈다. 우리 선배들의 땀과 피로 이룬 것이다.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1950년대 한국은 아프리카 나라들보다도 못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의 1인당 소득은 67달러로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그 뒤 8년이 지난 1961년에조차 1인당 소득은 82달러로, 179달러였던 아프리카 가나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마저도 미국 원조 덕이었다. 전쟁 복구가 시작된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원조액은 무려 23억 달러였다. 당시 우리의 수출액과 비교해 보면 미국 원조가 얼마나 큰 금액이었는지 알 수 있다. 1962년 무렵 우리 수출은 5천만 달러였다.
 
그해 정부 주도로 처음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가 설립되었다. 변변한 자원 없는 우리 민족도 한번 해 보자고 무역진흥의 기치를 내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수출 거리라곤 광물과 수산물밖에 없었다. 그런데 1963년에 처음으로 농산물 수출에 성공했다. 바로 농촌 아낙들이 키운 누에고치에서 생산해낸 생사였다. 이로써 1964년에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이를 기념하여 수출의 날이 제정되었다. 이때부터 수출에 나라의 명운을 걸다시피 불철주야 앞만 보며 달렸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70년에 수출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또 그로부터 7년 뒤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100억 달러! 당시로서는 쉽게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대통령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 일본은 16년 걸렸다. 우리는 불과 7년 걸렸다.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이렇게 달려와 2011년 수출액은 5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탈리아를 제치고 수출 7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50년도 채 안된 사이에 11000배나 증가한 것이다. 3월 프랑스 신문은 자기네가 한국한테 수출 총액이 추월당했음을 보도했다. 이로써 우리는 올해 프랑스를 제치고 수출 5강이 되었다.(1)
 
세계은행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30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세계 197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한다. 자그마치 30년을 1등으로 달려온 민족이다. 세계 경제사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 바깥을 향한 경제정책이 우리 민족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1960년 이후 50년간 세계 경제는 6배 커진데 비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은 34.5배나 늘어났다.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이었다. 유대인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근대 경제사도 우리 한민족의 업적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16세기 식민지 개척으로 근대 최초의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은 1000년 동안에 1.6, 16~17세기 해상무역 강국이었던 네덜란드는 200년 사이에 5.6, 18세기 산업혁명으로 패권국가가 된 영국은 170년 동안에 9.4배 성장했다. 미국은 1870년부터 1940년까지 9.5, 일본은 1913년부터 1970년까지 14.1배 각각 성장했다. 우리 경제성장이 정말 대단했으며 산업 현장에서 우리 선배들이 흘린 엄청난 땀과 눈물의 결과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한국, 한국인>은 우리 현대사를 경제사적, 무역사적 입장에서 조명하였다. 무역진흥 업무에 32년간 몸담았던 필자가 더 이상 기억이나 자료가 훼실되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 여겼다. 고백해야 할 것은 이 글의 자료 가운데 많은 부분을 여러 책과 인터넷 검색으로 수집했다. 이를 통해 여러 선학들의 좋은 글을 많이 인용했거나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한 조각, 한 조각의 짜깁기가 큰 보자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널리 이해하리라 믿는다. 참고문헌은 익명의 자료를 제외하고는 각 문단 말미에 밝혔다. 그럼에도 이 글에 있는 오류나 잘못은 당연히 필자의 몫이다. 잘못을 지적해 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고치겠다. 끝으로 이 글을 수출 진흥 일선에서 수고하는 KOTRA 식구들에게 바친다.
 
 
1950년대, 중석이 한국 수출을 먹여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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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석, 텅스텐
 
광복 직후인 1946년 우리나라의 수출 품목은 오징어와 중석이었다. 수출 대상국은 중국과 일본 단 두 나라였다. 연간 수출액은 350만 달러에 불과했다. 1950년대조차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수출품목이 없었다. 땅 속과 바다 속에서 찾아낸 광물과 수산물이 고작이었다. 땅 속에서 파낸 광물은 미국에 팔고 바다 속 수산물은 일본에 팔았다.
 
중석과 철광석, 흑연이 그 무렵 우리 수출의 중심이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광물 비중은 6080%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석의 주요 생산지였는데 무거운 돌이라 하여 중석(重石)이라 불렀다. 중석을 텅스텐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스웨덴어로 '무거운(tung) (sten)'이란 뜻이다. 이름 그대로 중석은 무겁고 단단하다.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단단한 금속이다. 따라서 금속원소 중 녹는점이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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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중석의 용도는 강철에 5%정도 섞으면 강철이 단단해지고 강해져 높은 온도에서 변형되지 않는다. 텅스텐이 들어간 강철은 처음에는 공구 만드는데 쓰였다. 그 뒤 중석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었다. 특히 중석으로 만든 포신이 강한 열을 견뎠다. 강철보다 단단한 중석은 탱크와 같은 군수산업의 핵심 광물이었다. 이후 중석은 고온에서도 잘 녹지 않아 전구의 필라멘트로 쓰였다. 강철의 녹는점이 섭씨 1500도 내외인데 비해 중석(텅스텐)은 금속 중 가장 높아 섭씨 3410도가 되어야 녹는다. 그렇다 보니 강한 열을 이겨내야 하는 필라멘트, 무기재료, 특수강, 초경합금의 소재로 사용됐다.
 
한국전쟁은 세계적으로 군수산업에 대한 관심을 높여 해외시장에서 중석을 비롯한 광산물 수요를 급증시켰다. 이로 인해 중석 가격이 폭등했다. 그러자 1951년부터 광산물 수출이 활기를 띠었다. 중석은 1950년대 내내 우리나라 1위 수출상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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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계 최대의 중석(텅스텐) 광산이 바로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산이다. 한때 세계 생산량의 15를 점유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은 19523, 2년에 걸쳐 15천 톤을 수입해가기로 계약했다. 이듬해 우리나라 수출총액 3,958만 달러 가운데 68%가 중석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었다. 이른바 중석불(重石弗)’이었다.
 
수산물은 일본에 수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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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식./ 조선DB

그리고 일본에 오징어, 한천(우뭇가사리 가공품), 김 등을 수출했다. 1950년대 수출은 광물 비중이 70~80%, 수산물이 20~30%였다. 그 무렵 품질 좋은 수산물은 수출하고 하치들이 우리네 몫이었다. 김은 바닷가 바위 옷 같다 해서 해의(海衣), 해태(海苔)라 했다. 천연 김은 귀해 <삼국유사>에 왕의 폐백품목이라는 기록이 있다. 1420년대 쓰인 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김을 최초로 양식한 시기를 조선중기 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1650년경 전남 광양의 김여익이 처음으로 김 양식기술을 개발해 보급했다 한다. 김여익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조정이 항복하자 태인도에 숨어살던 중 소나무와 밤나무 가지를 이용해 김 양식 방법을 창안했다. 이후 김은 왕실에 바치는 특산물이었는데 하루는 임금이 김으로 맛있게 수라를 드신 후 음식 이름을 물었다. '광양에 사는 김여익이 만든 음식입니다.'고 아뢰자 임금이 '그럼 앞으로 이 바다풀을 그 사람 성을 따 김으로 부르도록 하여라'라고 해 ''이라 불렸다고 한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하늘이 내린 영양의 보고가 바로 김이다. 마른 김 5장에 들어 있는 단백질 양이 달걀 1개에 들어 있는 양과 비슷하다. 또 김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타민 C가 귤의 세 배, 비타민A와 비타민B군이 일반 야채의 열 배 가깝게 들어 있다. 또한 필수아미노산··마그네슘·나트륨·칼륨·규소··망간 등 우리 인체에 필요한 미네랄과 철분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일종의 종합비타민인 셈이다. 게다가 콜레스테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성분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가 한국 김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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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김을 먹고 있는 휴잭맨 딸
 
최근 김의 세계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1953년 일본에 첫 수출을 시작한 김은 1970년대 대량 양식을 통해 수출이 늘어나다 근래 들어 큰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종래 주로 일본과 중국에만 수출하던 김이 2012년에는 70여 개국으로 늘어났다. 금액도 23천만 달러를 기록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수출국이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그간 농수산물 분야 수출 1위였던 인삼도 추월했다. 이제는 미국이 일본을 제치고 우리 김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김은 웰빙, 채식 열풍과 더불어 성장가치가 높다. 지난해 김 수출액은 274백만 달러를 상회했다. 한국의 주요 김 수출국은 미국, 일본, 태국, 중국 순으로 나타났다. 이 기세라면 3억 달러 수출도 멀지 않았다. 한류의 힘이 먹거리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포항제철을 탄생시킨 대한중석
 
우리나라 중석의 역사는 19164월 강원도 영월의 상동광산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1923년 일본인이 광산을 열었다. 이후 1952년 대한중석이 설립되어 강원 상동광산과 경북 달성광산을 인수해 운영했다. 1960년도 당시 대한중석은 우리나라 유일의 외화벌이 국영기업이었다. 회사의 수출액이 국가 전체 수출액의 약 60%를 차지했다. 대한민국 수출을 거의 혼자 책임지다 시피 했다. 대통령은 자기가 가장 믿는 사람을 대한중석 사장으로 앉힐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박태준을 196412월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했다.
 
그 무렵 정부는 농업 중심의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인 제조업을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 산업의 쌀인 철강생산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박태준의 경영능력이 검증되자, 196510월 대통령이 나는 고속도로 건설을 직접 맡을 테니 임자는 종합제철을 맡아라며 특명을 내린다. 그리고 정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을 만들면서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을 포함시켰다. 당시 믿을 건 중석불뿐이었다. 19684월 정부는 대한중석과 합작으로(정부 75%, 대한중석 25%) 포항제철을 설립하고 포철 초대사장에 박태준을 기용했다.
 
워런 버핏이 투자한 대구텍
 
그 뒤 대한중석은 1970년대 중석을 소재로 하는 초경합금 공장을 건설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중석은 1980년대 이후 세계 최대 매장국인 중국이 수출시장에 뛰어들면서 공급이 넘쳐났다. 중석의 국제시세가 톤당 38달러로 폭락했다. 당시 국내 생산원가는 98달러였다. 그러자 우리 중석산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결국 1994년에 상동광산이 폐쇄되었다. 같은 해 3, 문민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방침으로 거평그룹이 대한중석을 인수했다. 민영화 1호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후 불어 닥친 외환위기로 거평그룹조차 부도가 나 망하자 대한중석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대한중석을 눈여겨 본 회사가 있었다. 바로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금속가공 다국적기업 IMC그룹이었다. IMC1998년에 대한중석을 인수했다. 외국 매각기업 1호였다. IMC는 대한중석 상호를 대구텍(TaeguTec)으로 바꾸고 절삭공구를 생산하고 있다. 대구텍이 IMC에 인수될 당시 매출은 1000억 원 수준이었지만 현재 연 매출은 5000억 원 정도다. 대구텍은 한국 절삭분야 1위일 뿐 아니라 생산량의 65%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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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이런 IMC의 경영활동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계 최대 갑부이자 투자가인 워런 버핏이었다. 그는 2006년 대구텍을 포함해 IMC의 경영상황을 철저하게 분석한 후 이를 사들였다. 버핏은 이에 그치지 않고 상동광산 운영업체인 상동마이닝을 주목했다. 그는 2007년과 2011년 두 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 상동마이닝은 20123월 초 IMC그룹과 총 7500만 달러 규모의 투자협약을 체결했다. 상동광산 재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광물 탐사 및 경제성 평가기관인 워드롭사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상동광산 상층부 광량만 앞으로 10년 이상 개발이 가능한 3500만 톤에 이른다고 한다. 중석의 질도 최상급이다. 이곳에 최상급 텅스텐 1300톤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후 100~200년간 채광이 가능한 양이다.
 
세계적으로 텅스텐 수요가 늘면서 국제가격은 199410kg38달러에서 20131350달러를 웃돌았다. 상동광산의 텅스텐과 몰리브덴 매장량의 잠재가치가 60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되었다. 상동광산은 중석 매장량에서 단일 광산으로는 세계 최대이다. 버핏이 이 같은 호재를 눈여겨봤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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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2011년 3월 21일 오전 대구텍에서 열린 제2공장 착공식에 참석, 내빈들과 함께 발파 버튼을 누르고 있다. /조선DB

 관련 업계에 따르면 버핏이 광물자원에 투자한 것은 처음이다. 텅스텐은 희토류와 함께 세계적으로 확보전이 치열한 전략광물이다. 주로 백열등 필라멘트, 절삭공구, 무기, 골프채, 전기전자부품에 주로 쓰이지만, 최근에는 의료기기·LCD·LED·우주산업 관련 필수 광물로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상동광산은 단일광산 기준으로 중석(텅스텐) 매장량이 세계 최대이다. 그 만큼 투자처로서는 높은 가치를 지닌 곳이다. 특히 중국정부의 희토류 수출규제 강화로 희토류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광물 투자가 주목받고 있다. 이런 추세에 맞춰 '투자의 귀재' 위런 버핏이 상동광산에 투자한 것이다.(출처; 부산세관박물관장, 월간조선 2012.4월호 권세진 기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