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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고서 한단고기(桓檀古記)는 고려 말 행촌 이암이 저술한 단군세기(檀君世記), 신라시대 승려 안함로가 편찬한 삼성기(三聖記). 조선 중종 때 편찬된 태백일사(太白逸史). 고려 말에 씌어진 북부여기(北夫餘記) 등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놓은 사서이고 1911년 운초 계연수라는 학자가 지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조정에서 옛 역사를 기록한 고서를 수집했는데 200권이 넘는다 했다. 따라서 조선중기까지 그러한 고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사학계는 너무 삼국사기에 목을 매이는 것 같은데, 이제 글로벌시대에 역사 인식을 달리하고 위대한 민족역사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특히, 한단고기,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와 조선 숙종 때 쓰인 규원사화 등의 고서를 깊이 연구해야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웃나라 중국은 25사를 그들의 정사로 인정하는데, 우리의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귀중한 사료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에게 억눌린, 상대적으로 열등감이 가는 역사는 슬그머니 수정하고 왜곡시켜 거꾸로 씨름판에서 몸싸움하듯이 상당히 뒤집기를 잘한다. 발해의 역사를 자기네들 변방의 역사로 뒤집기를 한 것이 그 예이며, 이제 고구려의 역사도 자기네들의 역사로 조작과, 뒤집기 작업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검의 시조는 치우(蚩尤) 장군
삼성기(신라시대 안함로 저) 하편에 기록하기를,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파내류산 아래 한 인씨의 나라가 있는데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에 이른다. 천해(天海)의 동쪽 땅이며 파내류의 나라라고 한다. (천해는 고려시대 북해(北海)라고 하였는데, 북해는 바이칼호수를 말한다)
또 삼성기에,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 山)의 흑수에 내려와 신시(神市)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배달(倍達)이라 지었다. 신시말기에 `치우천왕(蚩尤天王 기원전 2707년) ‘이 있었으며, 청구(靑邱)를 개척하여 18세를 전하였으며 그 역년은 1565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지금도 중국의 산동성 안에 치우의 능과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중국인들은 치우를 전쟁승리의 신으로 추앙했다고 한다. 치우천왕의 능이 산동성에 있다는 것은 청구국(배달국)의 활동 중심지가 산동성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요즈음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는 승리의 신 `치우’를 형상화한 것이고 그래서 치우의 기운을 받아 우리 선수들이 축구를 잘 하는가 보다.
치우는 배달국의 14대 천왕이며, 그 당시 중국의 황제(黃帝)의 군사를 물리치고 황제를 신하국으로 삼았는데 중국인들은 그 사실을 감추고 역으로 뒤집어 씌어 이야기한다. 우리가 왜 치우천왕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치우야 말로 우리나라 검의 시조(始祖)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청동검을 제작하여 중국 황제의 군사제를 상대로 백전백승했기 때문이 그 이유이다.
치우는 세계 최초로 철을 캐내어 투구와 갑옷과 무기를 만들었으며, 이를 본 중국의 황제의 군사들은 두려워하며 ‘머리는 구리로 이마는 쇠로 만들어졌다 하여 이른바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불렸다 한다. 관자도 “치우가 검의 기원이다” 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검의 기원은 배달나라의 제14대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이 청동검을 만들어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의 군사를 물리친 것이 우리나라 검(본국검)의 기원이다.
당시 천문지리에 통달한 자부선생이란 대학자가 민족고유의 도(道)가 집대성된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이란 책을 지어 치우천황에게 바친 기록이 단기고사, 계원사, 한단고기에 남아 전해 오고 있다. 중국의 황제는 이 책을 얻어 중국으로 가서 황제내경(黃帝內經)을 편찬하는 업적을 남긴다. 동양의 한의학계는 지금도 황제내경을 한의학의 기초로 삼아 중히 여긴다.
본국검은 한민족의 국검 (國劒)!
어느 나라 어느 국가이든 그 나라에는 국가와 민족을 지켜온 병술들이 수천 년의 역사와 함께 계승되어 오고 있다. 어떤 경우는 신체의 기술로, 한 경우는 유구한 전통을 함축한 기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특히 선사시대 치우장군으로부터 계승 발전된 우리나라 검술은 수천 년이 흘러오는 동안 어떤 형태로든 유유히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무예 본국검』 특정한 검술명칭이 아니라 문자가 함축하고 있는 뜻인 “本(근본 본), 國(나라국), 劒(칼검)”이다. 즉,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을 보호하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물리친 근본적인 것, 우리 민족의 뿌리정신인 나라의 국검『國劒』인 것이다.
물론, 어떤 외부의 침략으로 그 맥이 사장되었다가 다시 부활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서가 중요하고 사적 문헌 기록을 중시 여기는 이유이다. 우리나라 무술사에 가장 기록이 풍부한 기술적 자료를 보유한 본국검은 그러한 역사적, 기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민족문화로, 더 나아가 “세계적인 문화 트렌드”로 발전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뜻 깊은 민족문화창달에 뜻 있는 독지가와, 기업가와 정부의 지원과 관심을 기대해 본다.
국검의 근원 소도(蘇塗)와 국자랑(國子郞)
고조선시대에 발생한 『소도(蘇塗)』라고 하는 것은 제천단을 모셔놓고 민속적 의식을 치르는 일 뿐만 아니라 젊은 화랑들이 모여서 학문을 배우고 육기(六技)를 익혔다. 또 소도행사의 우두머리는 국선(國仙)이 담당했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는,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는데 그것은 충, 효, 신, 인, 용의 오상지도(五常之道)이다.
소도의 옆에는 언제나 경당을 세우고 미혼의 자제들에게 사물을 상습케 했는데, 그것은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며, 노래를 부르고, 주먹치기(수박), 검술(본국검)등의 육기를 말한다.
이 화랑제도는 고구려 신라, 백제에도 세습되어 졌다. 한편으로는 무사도의 상징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민족종교적으로 이념화하여 무속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본국검은 국선화랑의 주력 무예 이였다
기록상으로는 신라시대의 황창이 본국검의 효시라고 하지만 화랑풍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본국검이 뒤따랐던 것이다. 즉 국선화랑과 본국검은 활과 화살 관계와 같다.
따라서 화랑풍류의 역사는 본국검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다. 그 정당성은 조선 정조의 『무예도보통지』가 입증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1790년 정조 명선)』의 본국검 편에 보면,『황창(黃倡)은 황창(黃昌)이라고도 한다. 곧 신라에 설치하였던 화랑(花郞)이다~~ 술랑(術郞), 영랑(永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의 사선랑(四仙郞)이 이 같은 이들이다. 그런고로 황창랑이다.
화랑의 도중(徒衆)이 수천이나 되는데 서로 충성과 신의를 닦았다. 이제 황창랑으로 인하여 본국검의 연기(緣起)가 된다.
모원의(茅元儀, 중국 명나라 장수 1594~1640)도 검보를 조선에서 얻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서역(西域)의 등운(等韻)에 비하였음은 이는 조선이 스스로 본국의 보를 창안한 것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따라서 본국검은 화랑들의 심신수련과 구국 충정을 위한 검법이었다.
본국검은 창시무예 신검(新劒)인가?
이러한 역사적 사료가 증명하고 그 기법까지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고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작금의 어떤 무예인들과 학자는 본국검이 신검(新劒,새로 생긴 검술)이 아닌가 하고 의구심을 가진다.
이는 너무나 무책임한 발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명히 무예도보통지 본국검 편에는 “본국검은 화랑의 한사람인 황창으로부터 연기(緣紀)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명확하게 화랑의 검술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 눈을 뜨고 글을 읽지 못하는 맹인 행세를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그 유래를 확인하고 있다.
승람에는 이첨이 말하기를, ”내가 을축년 겨울에 경주에 갔는데 배공이 향악을 베풀어 나를 맞이하였는데 탈을 쓴 어린이가 칼춤을 추는 것으로 보아 물으니, 신라에 황창이라는 소년이 백제에 건너가 잡혀 죽으니 그를 기리기 위해 지금도 칼춤을 춘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속칭『신검(新劒)』의 언급은 새롭다는 신(新)자가 아닌, 신라의 의미인 신(新)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헌상의 앞 뒤 내용에 적합하다고 본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되어 있는 24기중 일부 검술과 격구를 제외한 나머지 기예들은 중국과 일본의 기예를 수집하여 기록하였지만, 본국검총보와 예도 28세와 같이 유일한 한민족의 전통검술을 기록한 의미는 우리 것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성을 표방한 편찬자들의 사명감이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특히 본국검과 예도28세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당시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화랑검술을 전승한 것이란 점을 밝히고 있다. 예도28세와 본국검의 기예는 별개의 검술기법이아니라 기법의 명칭과 투로 등을 분석해 볼 때 같은 부류의 기법임이 확실하다.
따라서 본국검과 예도 28세는 고유한 한민족의 전통검술이다.
현재 사)대한본국검협회가 사용하는 모든 기예는 전통성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고스란히 전승하고 있다. 다만 수백 년이 경과된 난해한 검술을 현대인의 수준에 알맞게 단계적인 과정으로 편성작업을 해 놓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잘못된 주장을 하는 자는 특정종목을 옹호하고 유구한 전통을 소유한 본국검의 정체성을 훼손하기위한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세계 최고(最古)의 검술 본국검,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으로
배달국의 치우천왕으로부터 연기(緣起)가 되고, 고조선의 소도에서 검술을 연마하였으며 삼국시대 국선화랑들의 주력무예이였던 본국검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검술로서 진정으로 우리 한민족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고귀한 보배요 문화유산이다.
작금에 대한민국 국민에 의하여 전통무예진흥법이 제정되고 그 시행령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정부와 관련부서 담당자들은 이러한 갚진 『민족무예 본국검』을 국가적 문화 트렌드로 육성하고 지원하는 강구책을 마련하는데 일말의 주저함이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라 확신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고려의 선량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 화랑도와 백제 무사도의 계승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무사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민속신앙을 섬기면서 예악을 즐겼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경쟁과 투쟁 속에서는 그들이 무장으로서 전쟁터에 수없이 출전하여 무인적 기질이 다분하였지만, 다소 태평스러웠던 고려시대에는 전투적 기질이 온화해지고 예악과 놀이를 즐기며 세월을 보내면서 그러한 무속적 측면으로 그 유풍이 정착되어진 것이라 봐야 한다.
산무사(散武士)와 국민개병제(國民改兵制)
고려시대는 삼국의 통일로 인해 고구려의 무사적 계승은 북반무사라 일컬었으며, 신라, 백제의 무사적 계승은 남반무사라 일컬었으므로 국선 화랑도의 정신과 검법의 수련방법을 그대로 이어 받았음은 물론이고, 이는 본국검이 고려로 계승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고려초기에는 화랑제도가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아 운영되었고, 중기에는 이 화랑제도가 두 갈래로 변화한다. 그 하나는 화랑들이 정규 군대로 편입이 되었거나 산무사(散武士)로 남아 활동하였고, 또 한 갈래는 무속의 형태로 갈라진다. 이러한 원인은 화랑제도가 지니고 있는 속성 때문이다.
산무사제도(散武士制度)란, 일상생활에서는 각기 흩어져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는 개별적 무사를 말한다. 이 산무사제도는 고구려시대의 조의선인의 역할과 매우 흡사하다. 당연히 이들의 주력무기는 검이다. 이들의 전투방식은 가까운 접근전에서는 검술을 사용하고 원거리에서는 활을 사용한다.
또한 이 산무사 제도는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사병제도나 국민개병제와 같은 방식의 제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안자산의 조선무사영웅전(1919년)의 기록을 보면, 「본국검을 연습할 때는 노래를 지어 창가(唱歌)를 부르며 수행하고, 인민이 모두 국민개병제로 상습(常習)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주력무예는 검술, 수박, 궁술, 격구였다
고려시대에 주로 많이 상습(常習)한 무예는 수박, 궁술, 검술, 격구이다. 『고려사』 최충헌전에 전하는 기록을 보면, 「명종4년 사람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어 중방의 힘센 자로 하여금 수박과 검술을 하게 하여 승자는 곧 ‘교위대정’의 상을 주었다」고 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와서 고려 풍습을 보고 지은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시대 검의 발달형태를 잘 알 수 있다. 「패검의 장식은 모양이 길고 예리하며 백금과 검은 물소뼈를 섞어 만들었다. 바다상어가죽으로 칼집을 만들고 곁에 고리를 만들어 색끈으로 꿰거나 혹은 혁대(革帶), 상옥체, 봉필(琫珌) 등으로 하니 역시 옛날의 유제(遺制)이다. 문위교위(門衛校尉), 중검랑기(中檢郞騎)가 모두 차고 다녔다」고 기록했다.
고려시대에는 검의 치장을 매우 모양 있게 했으며 이러한 치장으로 신분의 상징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필을 차고 다녔다.
도필(刀筆)이란 것은 칼과 붓을 꽂는 나무로 만든 집이다. 그 모양새는 3칸인데 그 중의 하나는 붓을 꽂고 그중의 둘은 칼을 꽂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 이하의 관리와 지웅, 방자, 친시(親侍)가 그것을 찬다.
이 도필은 신분이 낮은 방자나 일정한 임무가 없는 관원, 심부름하는 집사 등이 차고 다녔다. 그러나 검 제조술은 매우 뛰어나 잘 만들어졌다고 하므로 고려시대의 검 제조술은 일본의 검 제련술보다 한차원이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시대에는 검의 형태가 일자형이었으나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검의 날과 등이 굽은 형태 즉, 현대의 검 형태와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이렇듯이 고려시대에는 검을 일상생활에서 차고 다니며 애용하고 신분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검의 기술 또한 매우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중기에 태평세월의 지속으로 해서 우리 검술이 실기(失技)되어 『무예제보』나 『무예도보통지』에 중국이나 일본 토유류의 검술을 도입하였지만, 고려시대만 해도 우리 한민족의 검술은 궁술 이상으로 국민 대중이 상습(常習)하였다는 『고려사』나 『고려도경』을 통해 입증하였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검술 본국검, 제2의 태권도처럼 세계화하자
그러므로 작금의 한국체육과학원의 전통무예진흥법 관련 종목지정 분류 조사과정에 우리 한민족의 전통 민속무예인 국궁, 택견, 씨름과 함께 본국검이 전승종목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한번 생각을 해보자, 적이 칼을 들고 달려드는데 우리 군사는 칼을 안 쓰고 씨름이나 택견을 하여 싸웠겠는가? 어릴 때 동네에서 칼싸움하던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전래해오던 검술이 존재하였고, 바로 그 검술이 우리나라 호국의 검 즉, 본국검(本國劒)인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검술 본국검을 태권도와 같이 세계로 나아가 국위선양을 위해 공헌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적극 육성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동일하게 문무양반제도와 산무사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 공신들의 사병혁파는 국민개병제인 산무사제도를 해산하는 결과를 초래해 고려시대의 무사활동 풍습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와 정반대로 정치적으로 문사계급이 등극해 무사계급을 하층에 두다보니, 무사들의 사기가 위축돼 산무사제도가 약화됐다. 문약정치가 지속되면서 숭문천무(崇文賤武)의 경향이 깊어만 갔고, 그로 인해 조선의 국방력은 형편없이 쇠약해졌다. 그 결과 임진왜란(1592년)으로 인해 7년간의 국가위난에 처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 선조의 명에 따라 훈국랑 한교는 특히 살수에 관한 것을 주역하고 ≪무예제보(1598년 선조 31년)≫를 편찬했다. 한교의 ≪무예제보≫는 잃어버렸던 한민족의 무예를 되찾는 대신,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등 중국의 무예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고, 나중에 ≪무예신보≫, ≪무예도보통지≫를 제작하는 근간이 됐다.
무예신보, 민간에 전승돼 오던 화랑검술 본국검 수록
1759년 (영조35년)에 ≪무예신보≫를 편찬했는데 이는 사도세자의 명으로 ≪무예제보≫의 6기에 12기를 더해 18기를 기록한 것이다. 죽장창, 기창, 예도, 교전, 본국검, 제독검, 월도, 협도, 쌍검, 권법, 편곤등 12기를 추가 기록했다.
1790년(정조14년)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는데 이는 정조의 명으로 조선시대 실학자 박제가, 이덕수, 백동수가 편술했다. 무예신보에 6기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마상재, 격구)를 더해 24기가 됐다.
≪무예도보통지≫는 특히 대부분 중국의 기예나 일본의 토유류를 도입했으나, 유독 우리 선조가 물려준 전통검술인 『본국검』과 『조선세법(예도28세)』부분을 수록한 것은 외국의 무예와 차별화해 우리 전통검술의 가치성과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명나라 대장주 모원의(1594~1640)가 쓴 ≪무비지(武備志1621년 간행)≫ ‘권86검법편“에 보면, 본국검을 「조선세법」이라 칭하고 예도(본국검의 종류)24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세법(예도 28세)은 ≪무비지≫의 기록을 근거하면 모원의는 이 비결을 조선에서 얻었다 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안법(眼法), 격법(擊法), 세법(洗法), 자법(刺法)을 익힌다. 격법에는 표두격(豹頭擊), 과좌격(跨左擊), 과우격(跨右擊), 익좌격(翼左擊), 익우격(翼右擊)의 5가지가 있고, 자법에는 역린자(逆鱗刺), 탄복자(坦腹刺), 쌍명자(雙明刺), 좌협자(左夾刺), 우협자(右夾刺)의 5가지가 있다. 격법(格法)에는 거정격(擧鼎格) 선풍격(旋風格) 어거격(御車格) 3가지가 있고세법(洗法)에는 봉두세(鳳頭勢), 호혈세(虎穴勢), 등교세(騰蛟勢)의 3가지가 있다.」
이와 같은 조선세법은 기법의 세밀함과 체계적인 면은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본법을 바탕으로 해 24세로 분류하고 정조 때 4세를 증보했다.
무예도보통지의 24기는 맨손무예, 검술, 창봉술, 마상무예, 격구 등의 종목으로 분업화 필요
무예도보통지의 24기 중 대부분의 기예는 중국이나 일본 것을 도입했지만 본국검과 예도28세(조선세법)와 예도총도는 이 책의 편찬 이전에 삼국시대부터 전래돼온 고유한 우리 무예란 점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국검과 조선세법은 무예도보통지 속의 한정된 무예가 아니라, 한민족의 호국검술로서 예부터 전승돼 온 별도의 종목인 ‘검술 또는 격검종목’이란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검술의 종목이 24반무예나 18기의 무예종목에 포함돼서는 안 될 것이다. 각각의 종목단체마다 그 종목의 성격에 따라 주로 다루고 수련하는 기예가 분류돼 특성화를 구축해야 각각의 단체와 종목끼리 중복성을 피하고, 이것을 익히는 국민 대중들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무진법 관련 전통무예의 분류과정에 본국검, 마상무예, 격구, 24반무예, 18기의 분업화에 따라 검술분야 즉, 무예도보통지의 검술분야는 대한본국검협회에 수련 과목 영역으로 분류해 종목적 특성화를 구축해야 타당하다고 본다.
당연히 마상무예, 격구 18기 등도 24기에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 각 분야의 종목이 종합적으로 구성돼 있는 무예도보통지의 24기는 한 단체가 모두 다 관리하기가 현실적으로 상당한 무리가 따르며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맨손종목인 권법, 본국검, 예도28세, 예도총도, 제독검, 쌍수도 등 검술분야, 창, 봉, 장창, 낭선, 편곤 등 봉술분야, 말타기를 위주로 한 마상재, 마상무예,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 등은 한 단체가 운용하기는 상당한 문재점에 봉착할 것이며, 배우는 수련생들은 평생 익히기도 힘들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무예도보통지 복원 종목들이 각기 그 종목의 성격에 따라 분류해 특성화를 구축하는 것이 전통무예 진흥에 꼭 필요한 사안이다.
민속무예 본국검 특허상표 등록 확보한지 오래돼
민속무예 본국검 종목은 벌써 30년 전에 대한민국무술단체 300개 중 국내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단일체계를 구축했고, 수십 년 전부터 사단법인을 설립해 본국검 특허상표 등록과 지적소유권등록도 확보한 상태이다.
따라서 국내의 본국검의 명칭이나 기법을 사용해 체육도장을 운영하는 단체와 개인은 조속한 시일 내에 사용을 중단해 줄 것이며, 만약 이행하지 않을시 법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임을 엄숙히 통고하는 바이다.
무예도보통지의 24기는 정조 때 편찬하여 어영청의 중순등록시험(1751년~1816년)으로 사용되어오다가 조선 말기에 와서는 서양의 병기를 도입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개입으로 구식군대는 해체되고 일본식 군 제도를 편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무예도보통지의 24기는 자동적으로 폐기될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한일 강제 병합에 저항한 구식군대 군인들이 전국적으로 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한 의병들에 의해 24기의 일부인 격검(擊劍)이 근거리전투에 사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반에 전래되어 가전무예로 전승되어진다.
그 시대의 시대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은 수비대라 칭하고 일제에 저항한 우리 백성들은 의병이라 불렀다. 왜인들이 우리 땅에 침입하여 자신들이 수비대라 했으니, 한 국가가 미약해지면 얼마나 처참해 지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일제강점기 항일전투에 목숨을 바친 의병들의 숫자가 10만이 넘는다니 우리 민족의 구국을 위한 전국적인 전쟁 상황이었다고 봐야한다.
조선무사영웅전은 한민족 전통무예의 전승교과서
우리 한민족의 건국이래 가장 어려운 국난에 처해진 상황에서 잃어버린 국혼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민족이 대륙을 정별 하던 상무적(尙武的) 기상은 국민들에게 되새기고, 한민족의 무사도의 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1919년 안자산선생이 조선무사영웅전을 편찬 하였다.
이 조선무사영웅전은 정조 때의 무예도보통지보다 차원이 높은 문화적, 사적 가치성이 존재함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정조의 무예도보통지는 주로 군의 병술을 강화키 위해서 편찬 되었지만, 조선무사영웅전은 일제 36년간의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민족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민간에 전승되어오던 고유한 전통무예들만 기술적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 그 가치성은 따지려면 국보급 문화재적인 가치가 존재함을 지적한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말기에는 무예도보의 24기는 소실되고 일제강점기에 주로 민간에 전래 되어오던 종목을 말하며, 궁술(弓術), 격검(擊劍), 유술(柔術), 경마(競馬), 축구(격구)(蹴球), 석전(石戰) 등 六種 이니 이하에 낙술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에 전승되어 오던 우리나라 전통무예는 이 6종(六種) 이라고 명확히 입증한 자료이다. 격검이란 표기는, 옛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를 근거하면 검술, 격검, 검법 등으로 지칭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전통검술 또는 검법이란 뜻과 같다. 따라서『본국검』이란 명칭과 의미가 동일한 것이다.
조선무사영웅전은 한민족 전통무예를 전대에서 현대, 후대로 계승되어 지는 중요한 역사적 문헌자료이고, 무사도의 사상과 이념, 무사도의 윤리, 무사도의 종교, 무사의 가악과 문학 등을 기록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전통무예의 교과서적인 역할을 수반하고 있으므로 무예인이라면 꼭 공부해야 할 지침서이다.
본국검의 수련체제, 조선무사영웅전의 격검 11門이 근간
조선무사영웅전의『격검』편에 이르기를, 고대검법은 무육(武育)중에서 가장 발달한 것이니 고구려의 괴유(怪由), 신라의 황창랑(黃昌郞) 등의 유명한 대가라 할 것이다….
격검은 서양에서도(Enging) 성행한 것이지만은 조선에서는 무사의 발흥 또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에 좇아 인민이 모두 상습(常習)한 것이다. 이 검법은 주장 예도법(銳刀法)으로 정리하여 그 과목을 말하면 거정세, 정검세, 좌익세, 표두세, 탄복세, 과우세, 요략세, 어거세, 전기세, 간수세, 은망세, 찬격세, 요격세, 전시세, 우익세, 게격세, 좌협세, 과좌세, 흔격세, 역린세, 렴시세, 우협세, 봉두세, 횡충세, 도타세, 참사세, 조천세, 보운세 등 28세로 기록하였다.
이 법을 배움에는 그 해설을 창가(唱歌)로 지어서 취미를 유발하여 수련케 한 것이니 아마도 신라의 무오병법(武烏兵法)으로부터 정설을 지어온듯 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격검의 종류는 고법(古法)을 더 연구한 것과 타방(他邦)의 법을 취하여 새로이 첨가한 것을 포함하여 모두11문(門)으로 정하니, ①쌍도 ②예도 28세 ③왜도 ④교전법 ⑤제독검 ⑥본국특법 ⑦쌍검 ⑧마상쌍검 ⑨월도 ⑩마상월도 ⑪협도 등이다. 여기서 우리 본국고유의 것은 본국특법이라 하여 특별히 다루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회에서는 무예도보통지 보다 조선무사영웅전의 『격검』을 『본국검』의 수련체제로 삼고 있으며, 일본 것 왜도를 빼고 예도총도를 대신사용하고, 조선 검무(劍舞)를 추가하여 총 12문(門)으로 본회의 수련체제를 정립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선무사영웅전은 일본 제국주위자들의 한민족 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끊어져가는 우리 전통무예가 민족정기를 담고 부활하여 자손만대로 계승되어지도록 한민족 전통무예의 정거장 역할을 한 점을 깊이 되새겨 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천년 민족문화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계승되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인들은 우리의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서 우리 국토의 줄기 백두대간의 맥을 자르는 행위를 자행했다. 또, 전국의 명당에 쇠막대기를 박고, 조상대대로 이어져오던 이름을 창씨개명(創始改名)시켰다.
이러한 시기에 안자산의 <조선무사영웅전>은 민족혼과 얼의 계승을 위해 심히 중대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 무예경전이다. 일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무사영웅전에서 입증한 일제강점기까지 전승되어 오던 민속무예는 궁술, 경마(마상재), 축구, 격구, 격검(본국검), 유술(택견, 씨름), 석전 등이다.
이중 석전은 종목의 성격상 전래되지 못했고, 유술은 부분적으로 분화하여 씨름, 택견 등으로 전승 발전되어 현재 제도권에 진입하여 스포츠화를 이루었다. 궁술, 축구, 경마도 제도권에 진입하여 스포츠로 발전했다. 단지, 경마는 전통식이 아닌 서구식의 경기방식을 도입했다. 따라서 마상재, 격구는 전통식으로 개발 육성할 필요가 있다.
■ 민족정기 본국검, 제도권에 진입돼야
그러나 1919년부터 2011년 현재 92년이 경과한 이 시점에서 한번 뒤돌아 볼 때, 유독 고조선시대부터 중세, 근대, 현대로 역사 계승이 진행되면서 우리 민족을 지켜온 가장 중요한 정신무예인 ‘격검(본국검)’이 아직까지 제도권의 진입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제도권에 진입한 일본검도(켄도)의 견제와 정부의 체육정책과 생활체육 제도의 불합리성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의 상징인 ‘국검’이 침체의 상황에 처해 있다.
민속무예 ‘본국검’은 조선무사영웅전의 ‘격검’에서 나열한, 본국특법, 예도, 쌍검, 쌍수도(용검, 장도), 교전, 협도, 월도, 마상쌍검, 마상월도, 제독검, 검무, 곤방 등 12문(門)을 복원 전승한 전통무예이다. 경기방식과 복식은 일본검도와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무예이다. 예를 들면, 서양식 스포츠 양궁과 전통 국궁이 서로 다른 것과 같고, 우리 전통의 씨름과 일본 스모가 서로 다른 것과 같다. 따라서 일본식 경기방식을 도입한 검도(켄도)경기와 민속무예12반 본국검(격검)은 서로 다른 별개의 종목임을 명확히 해둔다.
■ 정부는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고쳐야 한다
따라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청와대 체육정책 전문위원은 우리 선조가 물려준 고유한 정신과 호국의 혼이 스며있는 민속무예 본국검을 위시한 전통무예가 우리 국민체육으로 올바르게 육성 발전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검토하여 잘못된 제도와 관행은 고치고, 혹시 잘못된 관행으로 인하여 국민개인이, 국민대중이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전통무예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음지 속에서 우리 것이 좋아 평생 몸을 바쳐 수련하고 연구해 왔다. 우리는 전통을 전승하여 민족문화유산으로 남기고 후세에 길이 전수하겠다는 사명감으로 개인 재산을 헌납하고 오늘도 제자양성과 전통무예 육성보급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2008년 3월 국민들이 음지 속에서 어렵게 인고의 고행을 견디며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무예인들을 지원 육성하기위해 전통무예진흥법이 제정되었다. 벌써 4년째 접어들었다. 이제 정부도 하루 빨리 시행령을 발표하여 진행하고 우선적으로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민속무예만이라도 먼저 지정 육성방안을 마련하는 결단력 있는 정책시행이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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