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사진·그림

능소화 전설과 청계천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6. 4. 24. 21:32
 청계천 산책길에서  2012/6/23일
 

청계천의 유래

                                                                                                         이 명 철

                                                                                                (한국문화관광해설사)

 

 

‘청계문화관’은 청계천의 푸른 물결을 상징하는 긴 유리튜브 형태다.

 ‘청계문화관’에서 교육을 받는 자체가 우리 고창 해설사의 청계천 야간조명을 견학하는

강한 상징적 이미지를 주는 셈이다.

교육은 과거의 흔적이 없는, 개발의 ‘뉴’가 아닌, 과거의 좋은 개념을 포함한

개발인 ‘네오’의 큰 흐름(페러다임)을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간간히 쉬는 시간에 청계천을 바라보며,

옛 판자촌을 재현한 ‘청계연탄’ ‘공명상회’ ‘만화가계’ 등을 보았다.

‘판잣집 테마촌’을 봄으로써 개발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올망졸망 새끼 청둥오리


조선시대의 청계천은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던 하천으로

년 중 몇 달을 제외하고는 말라있던 건천(乾川)이었으며,

큰비가 내리면 물이 불어나 인근 민가를 덮치는 사나운 하천으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한다.

개발 기록을 보면, 태종은 ‘개천도감(開川都監)’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개천의 본류를 정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1412년 정월부터 대대적인 청계천 공사를 시작하였다.

무장읍성을 축성하던 연대와 비슷하다.

세종대에 이르러 도성 백성의 생활하천으로 삼아 생활수를 하천에 흘려보내게 하여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고창읍성의 축성연대와 거의 비슷하니,

청계천의 역사와 고창의 역사는 같이 발달해왔다는 생각을 해본다.

영조 대에는 대규모의 준천 사업이 실시되었다.

1760년 준천사를 설치하고 개천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었으며, 1773년에는 개천 양안에 석축공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준천은 2,3연마다 한 번씩 이루어졌으며 고종 때에는 준천업무가 한성부 관할로 이관되었고,

대한제국 초기에는 ‘마차회사’라는 민영회사가 준천공사를 청부 받아 사업을 이어가는 등의

변천을 거듭하여 왔다는 역사를 상기하면서 상류로 향한다.

차를 타고 청계천을 거슬려 올라가면서,

성북천과 장릉천의 지류가 합류되던 두 개의 물이 만난다는 다리인 ‘두물다리’는

서로 만나는 형상을 보고,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중 철거하지 않고 남겨둔 세 개의 교각,

조명이 없는 탓인지 흉물스러움도 본다.

 아주큰 잉어들이 떼를지어 다닌다


청계천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곳 1위 터널분수는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곁 모습만 보면서 차는 달린다.

눈여겨본다거나 캠코더에 뭘 담으려하는 그 자체가 무리임을 알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함에 대한 부담은 똬리를 틀고 남아있다.

무학교와 비우당교, 소망의 벽도 그냥 지나간 것 같다.

리듬벽천의 색색의 조명의 조화로움도 주마간산이었고,

옛날 “논밭 가운데 황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며 살았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황학교도 느낌 없이 그냥 지나쳤다.

 요리보고 저리보고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갈 때 그의 비(妃)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 혹은 ‘영영 건넌다리’라고 전해지기도 한 이 다리는 도성 밖으로 나온 운구행렬들이

장지로 이동하는 주요통로였는데, 삶과 죽음의 갈림길로 한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넌다는 뜻에서 영도교(永渡橋)라 이름하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듣는다.

 징검다리 정취가 시원하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와 홍인문 성곽을 보수할 때 이 다리를 헐어 석재로 사용하는 대신

 나무다리를 놓거나 그 옆에는 ‘디엄돌’이라고 해서 개천바닥에 돌을 띄엄띄엄 놓을 때도 있었으나,

1933년 3월 경성부청에서 철근 콘크리트로 다리를 개조하였다는데,

현재 영도교의 모습은 경복궁의 열주와 옛 영도교의 석교 이미지를 복원하여

역사를 기리는 교량으로 연출되었다.

다산교(茶山橋)는 사장교(斜張橋):탑에서 비스듬히 친 케이블로 대들보를 매단 다리)의 주탑을

풀잎모양으로 형상화하여 친자연적 이미지를 반영한 현대적 교량인데,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호를 붙인 다리다. 그러나 옛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청계천 빨래터 역시 옛 아낙네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인데,

빨래 돌이 콩크리트로 되어 있는 것이 좀 서운하였다.

 낮잠자는 청둥오리 가족
멋진생각 풍경사랑멋진생각印


맑은내다리는 나비의 힘찬 비상을 아치구조와 크로스 케이블로 조화시켜

 힘찬 도약과 패션중심의 상징성을 연출하고 있는데, 다리명칭은 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이란다.

오간수교(五間水橋)는 개천의 물이 성 밖으로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설치한 홍예문(紅霓門:아치형 문)으로 이것이 다섯 개 있었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했다는데,

이 다리의 멋진 조명 역시 볼 수 없었다.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 버들다리,

나비의 힘찬 나래짓을 3차원 아치와 케이블로 형상화한 나래교,

다리 부근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 마전교(馬廛橋) 등 많은 교량들의 조명을 볼 수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주변 대형 건물의 불빛에 흡수되어 예술적 가치는커녕 사장(死藏)된 느낌만 드는 것이었다.

청둥오리가 새끼를 데리고 노닌다.


청계천 주변사람들은 왈자(曰子)들이라 불렀다 한다.

왈자란 기술직 중인, 경아전(京衙前), 군교, 시전상인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서울의 기층문화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이었다.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를 담아 이름 지은 새벽다리,

 키다리 외가리가 서성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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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배나무고개, 배 고개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배오개로 불리어진 배오개다리,

소경이 많아 소경다리라 불렀던 세운교,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했던 관수교,

청계천의 물 높이를 측정한 수표교(임시보도교), 삼일로 인근에 위치한다는 삼일교,

긴 창고가 있었다는 장통교(長通橋), 광교의 갤러리도 희미한 불빛이었고,

청계천의 첫 번째 다리 모전교(毛廛橋)는 모전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류에서 거꾸로 여기 상류까지 온 것이다.

경찰버스가 광장의 양 옆에 상가의 건물처럼 즐비하게 서 있는 곳,

여기가 바로 촛불 시위의 현장인 청계광장이란다.

 

 

 

 청계광장은 만남과 화합,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 담긴 장소이다.

촛불은 아직 켜져 있지 않았으며, 경찰들만 방패를 들고 길 입구마다 서있었다.

촛불 분수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었으며,

4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도 희미한 조명 때문에 힘을 잃고 있었다.

광장입구에 설치된 대형 조형물 ‘스프링(spring)'도 불빛 없이 어둠에 서 있었다.

고창읍성의 야간 경관조명을 보았는가. 아름다운 선율 따라 은은하고 아담한 조명.

낮에는 쑤꾹새(뻐꾸기) 울고 밤이면 소쩍새 울며,

청설모와 다람쥐 뛰노는 모양성의 멋스러움을 생각하면서,

인사동의 밤거리도 거닐어 보면서 청계의 하루는 지나가고,

우리는 남산에서 여장을 풀었다.

 

 오늘도 이렇게 청계천을 산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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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에는 능소화가 곳곳에 심어져있다
요즘 가뭄이 신해 모든 식물들이 갈증을 호소하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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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중 궁궐의 꽃, 능소화에 슬픈 전설
이 꽃을 ‘구중궁궐의 꽃’이라 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답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아
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번도 찾아 오지를 않았다...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들였건만 아마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어디 한 둘이었겠습니까?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 까지 기거 하게 된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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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는가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을 너머너머 쳐다보며
안타까이 기다림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답니다.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상사병 내지는 영양 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구중궁궐의 한 여인은
초상조차도 치루어 지지 않은채
담장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라고 한
그녀의 유언을 시녀들은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드는때
빈의 처소 담장에는 조금이라도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으니
그것이 능소화입니다.

덩굴로 크는 아름다운 꽃이지요.
아무튼 능소화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이 담장을 휘어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데 그 꽃잎의 모습이
 정말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 하다.
한이 많은 탓일까요,
 아니면 한 명의 지아비 외에는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꽃 모습에 반해 꽃을 따다 가지고 놀면
꽃의 충이 눈에 들어가 실명을 한다니 조심해야 한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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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부터 능소화를 알면서 늘상 능소화가 피어나면 
 이쁜 모습으로 담아오곤 했다.
 철철철  물흐르는소리가 시원하다
  물은 참좋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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