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5.16 군사혁명 57주기를 축하합니다
박정희
5.16 군사혁명 57주기를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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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업적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전개(국민의식개혁)
1961년06월14일 부정축재 처리법 공포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1년06월30일 능의선 개통
1961년07월14일 원자력 개원
1961년07월22일 경제기획원 신설
1961년08월03일 김포가도 포장 기공
1961년08월08일 황지지선 기공(1961.6.13~1962.12.10)
1961년08월19일 섬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1961년09월21일 춘천수력발전소 기공
1961년09월23일 대한 중선창연(蒼鉛)자가제련공장 준공
1961년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1월13일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01월20일 상법제정 공포
1962년02월01일 국민은행 발족
1962년02월02일 기술진흥 5개년계획 발표
1962년02월03일 울산공업지구설정 및 기공
1962년02월10일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 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3월19일 핵분열 연쇄반응 일으키는 원자로의 임계도달 시험
1962년04월02일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04월30일 해양경비대 창설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 창설
1962년06월01일 무역진흥공사 발족
1962년06월18일 건설부 신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2년07월19일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낙성
1962년09월10일 남양송신소 준공
1962년10월20일 해운센터 기공식
1962년10월23일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 송배전신 및 케이블공장 기공
1962년11월04일 광주디젤발전소 준공
1962년11월06일 동해북부선(옥계-경포대간)개통
1962년11월18일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
1962년11월20일 제4시멘트공장 건설
1962년11월25일 부정거래단속법을 제정
1962년11월28일 난민정착사업장 제방 준공
1962년12월01일 마포아파트 준공
1962년12월15일 김포,강화간 대교건설(~1970.1.26)
1962년12월24일 생활보호법 제정
1962년12월28일 호남 비료 나주공장 준공
1963년01월01일 교육자치제 실시
1963년01월10일 외자도입 강력추진
1963년01월18일 원호센터 준공
1963년01월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2월04일 지방문화재육성
1963년03월15일 동진강지역 종합개발공사 기공, 김해, 진도(63~69)
1963년03월21일 감사원 개원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04월02일 무제한 송전실시
1963년04월10일 부녀회관 건립 기공
1963년05월14일 남대문 중수공사 준공
1963년07월20일 제대군인 개간농장 입주
1963년08월08일 한국나이론 공장 건설(대구)
1963년08월08일 국사교육통일방안 확정
1963년09월01일 철도청 발족
1963년09월01일 노동청 발족
1963년09월06일 국토종합개발계획 조사착수
1963년09월06일 동대문 개축 준공
1963년09월10일 문화재 보수 5개년계획 확정
1963년09월17일 가족계획사업 추진
1963년09월25일 직업재활원 개원
1963년09월26일 PVC 제조공장 기공
1963년10월10일 가정법원 개원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1월01일 미터제 실시
1964년05월07일 울산 정유공장 건설
1964년05월07일 국립중앙의료원 설립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복원 준공
1964년08월20일 감천화력발전소 건설(부산)
1964년11월29일 울산 제3비료 공장 기공식-매암동,
충주비료와 미국 스위프트 투자단의 공동투자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70년 10억불/77년 100억불
82년 200억불/85년 300억불/88년 500억불 달성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와 정상회담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추진)
1965년03월19일 방공 포병대대 창설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 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
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즉시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창설:1975.9.22)
1965년12월02일 식량증산 5개년계획 확정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레스)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국 군장비현대화계획 발표
1966년08월03일 산림청 신설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 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 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 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정화, 현충탑 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 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 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0월 0일 포항항 건설(~1973)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 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 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 건설착수
1968년03월22일 석유화학계열공업 기공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3개년 계획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 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 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 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1968년02월01일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간) 기공식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 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 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지역 국립공원 지정
1968년12월11일 광화문 복원
1968년12월16일 한국 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 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개혁
(중학교무시험, 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 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 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 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공장 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 신도시건설 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 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 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
(의무교육9년으로 연장, 교육제신설, 교원에게 병역)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 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방직기계 준공식 참석(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1970년07월0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 위해 다목적댐 건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서원 보수 정화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지구 다목적농업 개발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2일 서울지하철 기공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10일 서울 북악 터널 개통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 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 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획 확정
1972년03월23일 현대 울산조선소 기공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4월21일 새마을 운동 노래 작사, 작곡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 702개 섬 개발계획 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0월31일 석유화학공장 합동 준공, 울산 석유화학8개공장 건설
1972년11월04일 육산리 고분군 정화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3월03일 한국방송공사 설립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
(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 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 UN동시가입 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 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기계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 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협정 체결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 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 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보수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 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 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 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성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 할 수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 및 특별학급 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 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8년07월01일 부가가치세, 의료보험 실시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 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 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 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1백 억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01일 국민체조 보급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 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 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쨰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1월30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
-
박정희
5.16 군사혁명 57주기를 축하
Bismarck
Also sprach Bismarck
비스마르크 가라사대 -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써-
무슨 말인고하니,
국가의 중대사는 민주주의 의회제도의 맹점인
다수결의 원칙이나,촛불선동이나 드루킹 같은 여론조작 같은
인민재판이 아닌 오직 국가안위을 위한 철통같은 군대의 화력과 피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해설 :
독일이
주목하고있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능력입니다.
바이에른, 뷔 르템 베르크 바덴은 각각의 자유주의를 인정 하겠지만,
그러므로, 자신에 프로이센의 역할을 할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이센은 그 힘을 결집하고 기회를 위해 유지해야합니다. 기회는 이미 몇번이고 놓쳐 왔습니다.
비엔나 협약 후 프로이센 국경은 건전한 국가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큰 문제의 해결은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
이것은 1848 년 및 1849년의 큰 결함이었다 - 철과 피에 의해하는 것입니다.
Nicht auf Preußens Liberalismus sieht Deutschland,
sondern auf seine Macht; Bayern, Württemberg, Baden mögen dem Liberalismus indulgieren,
darum wird ihnen doch keiner Preußens Rolle anweisen; Preußen muß seine Kraft zusammenfassen und zusammenhalten auf den günstigen Augenblick,
der schon einige Male verpaßt ist; Preußens Grenzen nach den Wiener Verträgen sind zu einem gesunden Staatsleben nicht günstig; nicht durch Reden oder Majoritätsbeschlüsse werden die großen Fragen der Zeit entschieden – das ist der große Fehler von 1848 und 1849 gewesen – sondern durch Eisen und Blut. - Otto von Bismarck -
Hitler
역시 자서전 Mein Kampf에서 동일하게 역설한 외침이 있다
편집하면,
아래:
Demokratie ist ein Wert, der auf der ideologischen Grundlage des Prinzips
der parlamentarischen Mehrheit begründet ist, die die Idee der Gleichheit der Menschen anerkennt.
Jedoch,
Die Demokratie hat nicht die Macht, Grausamkeiten auszurotten.
Der Grund ist, dass Opportunisten die Defekte der Demokratie umkehren und sie ausnutzen, um Macht zu schaffen.
So ist die Gefahr, Geschichte zu zerstören, unvermeidlich, auch wenn sie als Zeichen verkleidet ist.
Der Glaube, dass jeder glücklich sein wird, wenn das demokratische System aufrechterhalten wird, ist eine falsche Illusion
Es liegt in der Verantwortung jedes einzelnen Bürgers, mit einer solchen Propaganda verwechselt zu werden und das Schicksal des Landes aufzugeben.
민주주의는
인간 평등사상을 인정하는
의회주의적 다수결의 원칙에 그 이념적 기초를 두고 성립되는 가치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만행을 뿌리 뽑을 힘이없다 . 그 이유는
기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결함을 역이용하고 그에 편승하여 권력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간판으로 위장한다' 해도 역사가 퇴보되는 위험성은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 체제만 유지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은 그릇된 망상이다
그러한
프로파간다에 착각되어 나라의 운명을 떠맡긴 결과는 국민 각자의 책임이다
Democracy is a value that is established on the ideological basis
of the principle of the parliamentary majority which recognizes the idea of human equality.
But
Democracy does not have the power to root out atrocities.
The reason is that opportunists reverse the defects of democracy and take advantage of them to create power.
Thus, the danger of demolishing history is inevitable even if it is disguised as a sign.
The belief that everyone will be happy if the democratic system is maintained is a false delusion
It is the responsibility of each citizen to be mistaken for such a propaganda and to give up the fate of the country
5.16의 새벽
글쓴이:
성령 최 성 주
그 날은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라디오가 시끄러웠고 신문에는
색안경을 낀 깡마른 軍人이 보였다.
그리고 革命公約이 나왔고 우리는 그것을 줄줄 외웠다.
그렇게 5.16은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의 집권기에 成長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반대하는 街頭 데모를 하다가
군인들에게 잡혀서 필동에 있는 首警司에 끌려갔다.
거기서 한나절을 머리 박고 기합을 받았다.
主動者를 가려내고
나와 데모대는 장충체육관 광장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하숙집 歸家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
승객들에게 박정희의 독재를 소리 높혀 설명했다.
50여 년의 星霜이 흐른 뒤,
나는 初老가 되어 그를 다시 생각한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가 아니었으면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내가 이렇게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사는 것은
순전히 그의 德分으로 여긴다.
바로 그 5.16
그날의 새벽이 아니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는 빨갱이 혐의로 死刑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아끼는 몇 사람의 도움으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김창룡 특무대 수사관과
정보국장 백선엽이 그를 도왔다.
그들은 박정희를 알았던 것이다.
이로서 박정희는 다시 軍服을 입는다.
4.19는 혁명이 맞지만
그것으로 나라를 바꾸는 데는 力不足이었다.
張勉 정권은 무능하여 4.19 세력에 끌려 나녔다.
外信기자가 장면에게 이렇게 물었다.
"새 나라가 되었는데
국민을 어떻게 먹여 살리겠습니까?"
장면은 이렇게 답변을 했다.
"求乞을 해서라도 먹여 살리겠다."
이것이 장면과 그 정권의 生存방식이다.
또한 이것이 박정희를 부르는 端初가 된 것이다.
5월 15일 늦은 밤
육영수는 큰딸 근혜의 숙제를 도왔다.
이때 박정희가 방에 들어와 外出을 알렸다.
그는 근혜의 등을 어루만지고 근영, 지만이의
자는 모습을 마지막 心情으로 바라보았다.
(저 애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육여사는 어둠 속으로 남편을 배웅하고
걷은 빨래를 꼼꼼히 개켰다.
(우리는 내일 새벽을 어떻게 맞이할까?)
그러나 이미 혁명계획이 누설(漏泄)되었다.
30사단 참모들이 다투다가
누군가가 고자질을 한 것이다.
방첩대 감시조가 민간인 복장으로 따라 붙었다.
나이는 6살 아래지만 상급자인 장도영 中將에게
이미 혁명계획을 알린 바 있다.
그것은 協助하거나 默認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은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다가 鎭壓을 명한 것이다.
박정희는 흐트러진 병력을 규합하여
한강 인도교 南端에 섰다.
이미 다리 건너 용산 쪽에는
진압군이 바리케이트로 沮止線을 치고 기다렸다.
박정희가 前進을 하자 진압군의 총알이 빗발쳤다.
擧事가 탄로났다는 소문을 들은 혁명군이 망설였다.
박정희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차에서 내려 한강교를 뚜벅뚜벅 걸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兵力은 그를 믿고 전진을 계속했다.
한편 6군단 포병부대가
대포를 이끌고 의정부를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美軍의 검문소가 있었다.
이곳에서도 神은 혁명군을 도왔다.
검문소 미군 초병(哨兵)들은 혁명군 통과를
오히려 반기며 교통정리까지 해 주었다.
그들은 아마도 훈련차 出動으로 여겼을 것이다.
한강 인도교 총격전에서 진압군의 총알은
박정희를 비껴갔고 혁명은 드디어 성공했다.
피해는 부상자 몇 명을 낸 것이 전부다.
김종필이 KBS를 점령하고
새벽 5시 첫 뉴스를 이렇게 시작했다.
은인자중하던 軍部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에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서 革命公約 6개항이 방송을 탔다.
나는 이들에게 감사하며 머리를 숙인다.
김창룡과 백선엽이다.
그 둘이 아니었으면 박정희는 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박정희를 비껴간 총알에 감사한다.
만일 그 때 총알 하나가 그를 맞혔다면
대한민국의 前進의 역사는 中斷 되었다.
의정부 美軍 검문소의 초병들에게도 敬意를 표한다.
그들의 검문으로 擧事가 發覺되었다면
혁명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좌절되었을 것이다.
國軍이 美軍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5월은 계절의 女王이라며 行事와 記念日이 많다.
근로자의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가정의날, 발명의날, 광주5.18, 노무현 서거의날 등이다.
그러나 5.16은 아무도 기리지 않는
"무념(無念)의 날"이 되었다.
일부 세력은 지금도 그것을
革命이 아닌 '구데타'라고 우긴다.
最貧國에서 세계 10대 經濟大國을 이루었고
산업화를 지나 전자산업은
세계一流가 되었는데 말이다.
먹고 남는 쌀이
창고에 넘쳐나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
그것이 뭔 대수인가?
그가 나라를 富强케 하고 공산군을 막았으며
국토를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바꾸어 가꾸었고
국민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自信感을 심었다면
나는 그가 공산당 친일파를 넘어
흉악한 强盜라 하더라도 머리를 숙여 존경할 것이다.
그가 국민을 운명적 굶주림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나라와 국민을
제 몸과 가족보다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동안 소찬(素饌)을 들었고
군복과 양복은 修繕해서 입었으며 革帶는 낡았다.
그가 生前에 남긴 재산은
낡은 신당동 자택 말고는 없다.
그가 권력을 공고(鞏固)히 유지코자 한 것은
중단 없는 국가발전이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죽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아라!"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간다.
그를 생각만 하면 그냥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것은 病이 맞다.
왜냐하면 症勢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것도 重病이며 痼疾病이고 不治病이다.
이 병에서 해방되고자 한다면 죽는 길 말고 없다. *
*이제 그날이 다가왔다.
5.16말이다.
현 정권을 생각하면 그가 더욱 그립다.
그는 키도 작고 깡 말랐지만
생각은 지구를 넘어 우주를 향했다.
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제 자신보다 국가와 민족을 더 사랑했다는 점이다.
다시 5.16을 맞아 지난 글을 뒤져 올린다.
문재인과 그 세력들의 반역과 배반의 정치에
한 없는 우려와 분노를 느끼면서...
글쓴이:
자유라는
Liberty와 Freedom의
兩
용어와 그 개념의 차이
에브라함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 1863에서 찾아본다.
자유라는
Liberty와 Freedom의
兩
용어와 그 개념의 차이
에브라함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 1863에서 찾아본다.
주사파가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Liberty에는 천부인권의 자유개념
Freedom에는 억압된 인권에서 해방자유개념이 내재하기 때문.
Keine Freiheit fuer die Feinde der Freiheit -
자유의 적들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된다.
자유의 적들에게 자유란 없다 !
이상,
뭔 말인가는, 자유롭게 이해 바랍니다
ㅎㅇㅎ
https://en.wikipedia.org/wiki/Liberty
vs.
https://en.wikipedia.org/wiki/Freedom
-
Hitler의
자서전 Mein Kampf에서-
편집하면,
민주주의는
인간 평등사상을 인정하는
의회주의적 다수결의 원칙에 그 이념적 기초를 두고 성립되는 가치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만행을 뿌리 뽑을 힘이없다 . 그 이유는
기회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결함을 역이용하고 그에 편승하여 권력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간판으로 위장한다' 해도 역사가 퇴보되는 위험성은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 체제만 유지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은 그릇된 망상이다
그러한
프로파간다에 착각되어 나라의 운명을 떠맡긴 결과는 국민 각자의 책임이다
Bismarck
Also sprach Bismarck
비스마르크 가라사대 -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써-
무슨 말인고하니,
국가의 중대사는 민주주의 의회제도의 맹점인
다수결의 원칙이나,촛불선동이나 드루킹 같은 여론조작 같은
인민재판이 아닌
오직 국가안위을 위한 철통같은 군대의 화력과 피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독일이
주목하고있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능력입니다.
바이에른, 뷔 르템 베르크 바덴은 각각의 자유주의를 인정 하겠지만,
그러므로, 자신에 프로이센의 역할을 할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이센은 그 힘을 결집하고 기회를 위해 유지해야합니다. 기회는 이미 몇번이고 놓쳐 왔습니다.
비엔나 협약 후 프로이센 국경은 건전한 국가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큰 문제의 해결은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
이것은 1848 년 및 1849년의 큰 결함이었다 - 철과 피에 의해하는 것입니다.
Nicht auf Preußens Liberalismus sieht Deutschland,
sondern auf seine Macht; Bayern, Württemberg, Baden mögen dem Liberalismus indulgieren,
darum wird ihnen doch keiner Preußens Rolle anweisen; Preußen muß seine Kraft zusammenfassen und zusammenhalten auf den günstigen Augenblick,
der schon einige Male verpaßt ist; Preußens Grenzen nach den Wiener Verträgen sind zu einem gesunden Staatsleben nicht günstig; nicht durch Reden oder Majoritätsbeschlüsse werden die großen Fragen der Zeit entschieden – das ist der große Fehler von 1848 und 1849 gewesen – sondern durch Eisen und Blut.
- Otto von Bismar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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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연설문
여든 하고도 일곱해 전(1776),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속에 잉태된 나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에 바쳐진 새 나라를 이 대륙에 낳았습니다.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지금 우리는 그러한 나라, 혹은 이같이 잉태되고 이와 같이 헌신된 나라들이
오래도록 버틸수가 있는가 시험받는 내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의 거대한 격전지가 되었던 싸움터에 모였습니다.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우리는 이 땅의 일부를,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이곳에서 생명을 바친 이들에게 마지막 안식처로서 바치고자 모였습니다.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이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해 줘야 마땅하고 옳은 일인 것입니다.
we can not dedicate, we can not consecrate, we can not hallow this ground.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하거나… 봉헌 하거나… 신성하게 할 수 없습니다.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이곳에서 싸우다가 죽거나 혹은 살아남은 용사들이 이미 이 땅을 신성하게 하였으며,
우리의 미약한 힘으로는 더 이상 보탤 수도, 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세상은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우리, 살아남은 이에게 남겨진 일은 오히려,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오래도록 고결하게 추진해온,
끝나지 않은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것입니다.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그것은 그들의 고귀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신의 가호 아래, 이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살아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From a manuscript document of a Presidential pardon, countersigned by William H. Seward.
Date 18 February 1862
Source Heritage Auction Gallery
Author Abraham Lincoln
리버티와 프리덤이 신대륙 미국으로 넘어와 충돌한 것이 남북전쟁이다.
그런데 자유의 여신상은 '자유(Freedom)의 여신상'이 아니라 '자유(Liberty)의 여신상'으로 불린다.
여신상은 이민의 나라, 자유의 나라 미국을 상징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이 여신상이 외치는 자유는 완전한 자유인 '프리덤'이 아닌 불평등한 특권적 자유인 '리버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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