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의 글밭 - 詩.書.畵/서예자료

입춘서 전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9. 2. 3. 21:41

입춘서 전설

올 겨울은 별로 추위다운 추위도 없이 지나고

단 대목 섣달 그믐에 겨울비가 부슬 부술 내립니다

안경넘어로 달력을 보니 내일이 벌서 입춘입니다


이는 정녕 봄을 재촉하는 봄비 일진대

봄 맞이 입춘서라도 써야 되겠기에


붓을 들어 입춘서를 써서 불로그 대문에 올립니다

요즘 재주 좋은 분들은

이 글을 출력하여 대문에 붙일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매년 입춘이면 저희집과 함께 대문에 부치자고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 여러분께 드리는

작은 써비스라는 말씀 올립니다


요즘 나라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입춘서는 우리 한민족의 오랜 풍속입니다

이 풍속은 입춘날 따뜻한 봄의 양기가 대문으로 들어 올때

상서롭고 길하고 건강한 기운이 함께 들어오세요

하는 기원 문이지요


무릇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입춘서를 붙이는 것도 복을 짓는 것이고

남 잘 되게 하는 일을 정초에 한가지 하면

더욱 확실히 복짓는 일이 되겠지요

팔심오만명이나 되는 남촌선생 힐링캠프 우리 회원님들

한해 동안 저에게 보내주신 성원에 깊은 감사 드리오며

세배 올립니다 기해년 복돼지 꿈 꾸시고

복 많이 지으세요 감사합니다










입춘서 전설


                                                            밀양 퇴로리 이씨고가 대문의 입춘서| 역마살 향기     

    


- 밀양 퇴로리 이씨고가


밀양 퇴로리는 여주이씨의 세거지입니다. 이곳 이씨고가는 여주이씨 자유헌공(自濡軒公, 이만백(李萬白, 1656~1716))파의 종가로, 1890년 자유헌공의 7대손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 1838~1912)가 퇴로리에 들어와 살면서 세워졌습니다.


지금 이씨고가는 이근성 씨 가옥과 이우성 씨 가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우성(李佑成) 씨 가옥은 이익구의 손자 이재형(李載衡, 1891~1979)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1912년도에 제작된 지적원도를 보면 이곳 지목이 밭으로 나와 있어 가옥은 그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대문


이우성 씨 가옥 대문에 '처용(處容)'과 '비형(鼻荊)'라 쓴 입춘서가 붙어 있습니다.


입춘 때가 되면 벽사(僻邪)를 위해 좋은 뜻의 글귀를 써 대문·기둥·대들보 등에 붙이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입춘서라 하며, 입춘축이라고도 합니다.




벽사의 의미로 쓰인 입춘서에 '처용'이 사용된 것은 쉽게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비형'은 왜 사용되었을까요? 그 내력이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의 시호(諡號)는 진지대왕(眞智大王)으로,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년)에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나랏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의 남편도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이 평시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서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으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 하며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들이 숲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가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버리면 비형도 집으로 돌아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를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황천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를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 귀신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을 그의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 무리는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 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 담장


이번 여름 무더위는 시작부터 대단합니다. 해가 갈수록 여름나기가 힘들어집니다. 소나기라도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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