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의 위치와 강동의 위치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조조는 부랴 부랴 허창으로 돌아 옵니다.
허창은 曹魏(조위)의 도읍지 이지요.
조조가 자신의 나라 이름을 魏(위) 라고 하는 것은
중원은 戰國時代의 魏나라 지역에서 일어 났기 때문입니다.
위 라는 이름으로 나타 나는 나라는
秦 말 陳 涉(진섭) 이 세운 나라와 漢 말 조조의 아들인
曹 丕(조비) 가 세운 나라와 東 晋 때 拓 拔 珪 가 세운 (北)魏와 隋 ) 말
이 밀 ( 李 密 ) 이 세운 나라이름으로 쓰였습니다.
모두 전국시대의 위나라 지역 정서를 자극하기 위하여 만든
나라 이름이지요.
조조는 패전으로 낙담하는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 합니다.
"우리는 아직 幷州, 冀州, 淸州, 幽州 가 건재 하다"
동양 역사학은 이들 지역을 아래 지도 처럼 비정하지요.
정말 그럴까요?
이제 부터 중국 삼국 시대가 얼마나 잘못 햐석 되고 있느지
하나 하나 짚어 보겠습니다.
손권의 오나라를 孫吳(손오)라고 합니다.
손오의 治所(다스리는 곳)를 江東(강동)이라 합니다.
그야말로 "강의 동쪽"이라는 말이지요 .
손오의 영토가 지금의 양자강 하류 지역으로 비정하고
손오의 도읍지를 지금의 상하이라고 하는 동양 역사. 절대로 아닙니다.
필자가 누누이 말하지만 長江(장강)과 揚子江(양자강)은 그 위치가 다릅니다.
적벽대전이 일어난 지역은 장강 즉 강의 중류 지역이며
江東(강동)이란 장강 즉 강의 중류를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만약 지금의 상하이가 손오의 도읍지라면 조조는 어찌하여 강의 하류로
바로 진격을 해야 함에도 강을 거슬러서 적벽으로 쳐들어 갔던 것일까요?
만약 지금의 상하이가 손오의 도읍지엿다면 아마도 83만의 병력을 움직엿던 조조는
병력을 나누어 일부는 주유의 수군을 적벽에 묶어 두고 나머지 병력으로
양자강으로 내려가서 텅텅 비어 있는 소오의 도읍지를 마음껏 유린 할 수 있는데
대단한 지략가인 조조는 어찌하여 적벽에 모든 병력을 all in 했던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조조의 진격 루트는 지금의 한수를 따라 하류로 내려 갔던 것이며
한수의 하류는 장강을 만나는 것이고 장강을 따라 내려 가면
오의 도읍지라고 비정하는 상하이가 나타 납니다.
즉 손오의 도읍지는 적벽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야 하는 것이지요.
지금의 동양 역사학은 강동과 중원을 위의 지도라고 하지요.
위 지도는 일본이 그린 지도 입니다.
그렇다면 훗날 동진의 도읍지라는 건업의 위치 역시
장강 유역으로 옮겨 져야 맞는 진짜 역사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적벽대전 당시 손오의 군대와 유비의 병력을 다 합쳐서 7만~8만이라고 합니다. 저렇게 넓은 오나라의 영토 안에서 국가의 운명을 가를 전투에 어찌 하여 병력이 손오는 고작 5~6만 밖에 동원을 못했을까요?
이 대목에서 가장 분명한 오류는 장강의 범위이며 손오의 강동은 장강의 범주를 벗어 나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강의 상류는 금사강, 강의 중류는 장강, 그리고 강의 하류는 양자강이엇다는 사실을 간과 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동양 역사학자들 참으로 딱 합니다.
공손연의 요동 위치
자 또 하나의 역사의 거짓은 조조가
"우리는 아직 幷州와 冀州, 淸州, 幽州가 건재 하다"
라고 말한 대목에도 있습니다. 동양 역사가 말하는 정주, 기주, 청주 유주의 지도를 볼까요? 그런데 아래 지도는 지금의 중국이 주장하는 198년 지도 입니다. 조조는 205년 원담 을 멸망시키고, 206년 고간 을 멸망시키고, 207 년 오환 · 원상 연합군을 무찌르고 원상을 멸망시킴으로써 원소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손에 넣고 오환 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 하남, 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형성된 지도가 아래와 같다는 것이지요.
260년대 삼국의 영토를 봅시다. 한반도 황해도 끼지가 조조의 영토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와 같은 역사가 사실이라면 한반도 북서부 지역은 도데체 언제 부터 우리 역사 엿던 것일까요? 이때의 고구리 국왕은 중천왕이며 중천왕 때에는 별다른 전란은 없었고 다만 조위의 군대와 梁貊(양맥)에서 한판 뜬 기록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양맥의 梁은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가 도읍을 大梁(대량)으로 옮긴 후의 도읍지 이름이며 貊(맥)은 종족을 나타내는 한자와 합하여진 이름이며 대량의 위치는 지금의 하남성 카이펑이라고 합니다.
즉 고구리의 중천왕 때에 조위와 카이펑에서 한판 뜬 기록 이외에는
별 다른 기록이 안보이는데 이것은 이상 합니다.
만양 우리 국사가 비정하는 고구리의 위치가 만주라면
조위는 고구리에게 심하게 시달렷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조는 군대를 나누어 멀고 먼 만주에다 군대를 분산할 여유가 있었을까요?
또 하나는 백제와 曹魏(조위)의 관계 입니다.
260년대의 백제왕은 고이왕 때라고 합니다.
고이왕은 낙랑과 신라 그리고 말갈과 군사 적으로 충돌하며 세력을 키워 갔으며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고, 중국 대륙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강원도 북부에 자리잡은 말갈(동예라고 불리는)족이 자주 침범해 왔는데,
고이왕대에는 말갈과도 우호관계가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했으며
재위 13년( 246년 ) 위나라 가 낙랑군(樂浪軍)과 삭방(朔方)과 합공해
고구 리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서 낙랑군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한나라 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帶方郡 (대방군)을 선제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도
고이왕이 이끄는 백제 의 힘이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상 하지 않습니까?
조위로 봐서는 고구리 보다도 백제가 훨신 더 위험한 나라가 아니가요?
그러나 조위가 백제를 공격한 사건은 없으며
이때의 어떤 기록도 백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조위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리를 숙신의 경계에 까지 도망하도록 했다는데 말입니다.
이때의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조위의 동쪽의 키워드는 단연 公孫淵(공손연)입니다.
238년 사마의는 공손연을 토벌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철수를 하지요.
왜 정벌에 성공하고 철수를 했는냐는 질문이 있다면
"그곳은 멀고 험하여 지키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진시황이 한차례 이 지역을 정벌에 성공 햇지만
진시황의 시대가 수년을 지나지 않았으므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 후 한무제가 요동정벌과 낙랑 정벌에 성공을 했지만 멀고 지키기 어려워
요새를 쌓고 방비만 햇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을 사마의가 정벌을 하고 같은 이유로 지키지 못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를 모두 죽이고 철수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고대 중원의 정복자들은 어찌하여
산동반도와 하남의 동쪽 지역을 정복하지 못햇을까요?
바로 沛澤(패택)이라는 곳 때문 입니다.
패택은 우리 역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명이지만 패택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패택은 산서성 남쪽에서 부터 하남땅을 남쪽으로 가로 질러 남사호 까지 연결된
한반도의 두배에 이르는 거대한 늪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雨澤(우택)이라고도 합니다.
우택이란 황하의 하류 물줄기로 형성된 雨路(우로)라는 것입니다.
고대 중원의 왕조가 산동반도와 강소성 일대를 넘보지 못햇던 이유가 바로 패택이라는
지형 때문이었으며 숲이 우거져서 들짐승들이 숨어 산다는 의미로 쓰이며
고대 중원의 왕조들은 죄수를 이곳에다가 유배를 보냈더랫지요.
당 태종은 고구리 공격에 실패하고 바로 패택을 의지하여 살아 돌아 갑니다.
바로 이 패택의 동쪽이 有史가 시작된 이래로 東夷(동이)의 땅입니다.
이와 같은 패택의 지형을 모르고서는 중원에서 가까운 산동성과 하남의 동쪽
그리고 강소성 일대가 왜 중원의 정복 국가의 땅이 아니였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부터 사마의에게 토벌당하고 멸문에 이르는 공손연에 관해서 알아 봅시다.
요동 태수인 公孫淵(공손연)은 스스로 燕王(연왕)이라 칭하지요.
연왕이라 춘추새대의 연나라를 게승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조조는 위왕이하 햇지요.
이때의 요동이란 지금의 요동 반도가 아니라 산서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며
공손연은 산서성 일대의 태수 엿습니다.
이때의 요동을 나타내는 기록을 보지요.
238년 봄 , 태위 사마의 가 우금 , 호준 등을 거느리고
보병 과 기병 4만 명으로 토벌에 나섰으며 고죽(孤竹)과 갈석(碣石)을 지나
6월( 음력 )에는 요수(遼水)에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고죽과 갈석의 위치는 필자가 수 차례 산서성과
漢水 유역에 위치하는 지명이라고 고증을 햇습니다.
그렇다면 요수 역시 산서성 일대에 있다는 말이 되지요.
필자는 이때의 요수는 지금의 汾河(분하)라고 확신을 하며
요수는 고대 遼河(요하)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이때의 幽州(유주)를 지금의 요동반도로 비정을 하고
기주를 지금의 하북 일대로 비정한 결과로
낙랑의 위치가 한반도 북부를 전전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역사가 사실이라면 한반도 북부는
우리 역사로 편입 된지가 얼마 되지 않는 지역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조조의 동쪽 영역은 패택을 넘지 못하엿다는 것이며
위 조조의 영역을 강소성 까지 그린 지도는 허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 현실은 중국은 확대하고 우리는 축소하기에 급급한 역사 패러다임이
오늘날 우리 역사 강역은 한반도 마져 지키기 어려운 처지가 돼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