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중국역사의 4대 미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20. 5. 26. 16:11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청나라 초엽 무렵 정설로 정리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4대 미인에는 조비연이 들어가지 않고 엉뚱하게도 가상인물이 한 사람 포함되어 있다. 이 영광스러운 네 명의 미인에는 춘추전국 시대의 서시(西施), 전한 시대의 왕소군(王昭君), 삼국 시대의 초선(貂嬋), 당나라의 양귀비가 선정되었는데, 엄격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이 네 사람의 별명을 이어 붙여서 만든 '침어낙안 폐월수화(沉魚落雁 閉月羞花)'라는 말의 운율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 중에서 '폐월(閉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초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소설책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가공의 캐릭터이다. 이 책에는 초선이 한 왕실의 중신인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가기(歌妓), 현대 사회의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높은 벼슬아치인 왕윤과 원조교제하던 가수 지망생이었다. 아주 예쁘고 총명한 여자로 왕윤이 아예 수양딸로 삼아서 공공연하게 동거하고 있던 중이었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권력을 잡은 후 황제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자 왕윤은 먼저 조조에게 황제의 뜻이 담긴 칠성검을 주어서 그의 암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그러자 초선이 죽음을 무릅쓰고 동탁을 제거하는 막중한 임무에 자원한다. 초선은 동탁과 그가 가장 신임하는 장수 여포 사이를 이간시켜 결국 여포가 동탁을 죽이게 한다. 연의에서는 극적인 사건이지만, 실제 중국의 정사로 분류되는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서는 동탁과 여포가 갈라지는 발단이 된 이 사건에 대해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布與卓侍婢私通)'라고만 적고 있으며, 초선이라는 이름은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삼국지연의》에는 초선의 미모를 묘사하는 아주 그럴듯한 장면까지 실려 있다. 초선이 밤에 후원에 나와 왕윤이 무사하기를 빌며 기원을 드리자 때마침 달이 구름에 가렸다. 이에 왕윤이 초선에게 말하기를 "너무나 아름다운 너의 모습에 달도 부끄러워 모습을 가렸구나."라고 했다. '달이 숨다'라는 의미의 '폐월(閉月)'은 바로 이 대사에서 기원한 별명이다. 초선은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아무리 총명하고 아름다운 팜므 파탈이었다고 해도 이 책에서는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은 전한의 9대 황제인 선제(宣帝) 시절의 인물이다. 선제 원년에 한나라의 황실에서는 공주 한 사람을 북방 훈족각주1) 의 군주인 호한야 선우(呼韓耶 單于)에게 시집보내야 할 형편이었다. 선제는 자신의 혈육 대신 멀리 보내도 슬프지 않을 것 같은 후궁들 중에서 한 명을 보내기로 했다. 당시는 선제 원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는 수많은 궁중의 여자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 못했으므로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그들의 화상을 그려 바치게 해서 하룻밤 은총을 베풀 대상을 고르곤 했다.

그러자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들은 모두 모연수에게 뇌물을 써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 주도록 부탁했으나 평범한 집안 출신의 왕소군은 그러한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삐친 모연수는 왕소군의 초상을 가능한 한 평범하게 그리고 얼굴에 큼직한 점까지 하나 찍어 놓았다. 당연히 왕소군은 열다섯 살에 입궐해서 3년 동안 황제의 총애를 받기는커녕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선제는 모연수가 그린 초상화들을 보고 그중에서 훈의 선우에게 넘겨도 아깝지 않을 평범한 여인을 골라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왕소군이었다. 왕소군이 떠나는 날에야 그녀를 처음 본 선제는 땅을 치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하는 것으로 울분을 풀었다.

일설에 의하면 선제는 왕소군을 보내기 전에 혼수를 준비한다는 구실로 시간을 벌어서 그녀와 사흘 동안 동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세가인을 훈에 보낸 사실을 무척 배 아파하던 훗날의 중국 역사가들이 슬그머니 추가한 기사로 보인다. 선제 자체가 그런 대담한 일을 벌일만한 인물이 못 되었으며, 그즈음에 호한야는 황궁에 머물고 있었다. 여러 번 통혼을 한 한 왕실과 훈족 왕실 사이의 긴밀한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이런 처사가 있었다면 즉각 호한야 선우에게 보고됐을 것이다.

왕소군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왕소군은 훈의 옷으로 갈아입고 호한야 선우와 함께 장안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녀가 막 훈의 영역으로 넘어갈 때 마침 기러기 떼가 그녀의 머리 위를 날았다. 그러자 그녀는 비파를 꺼내어 연주하면서 자작한 노래를 불렀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바로 그 노래였다.

훈의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겠구나.(春來不似春)

왕소군이 노래를 부르자 그 노래가 너무나 처연하고 아름다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었다. 또한 하늘을 날던 기러기 떼까지 그 노래에 넋을 잃고 날갯짓 하는 것을 잊어버려 땅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그래서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이 '기러기가 떨어졌다'라는 의미의 낙안(落雁)이다. 이 정도면 중국인들의 과장법은 이미 그 당시에 예술적 경지까지 이른 것이 확실하다. 더욱이 왕소군을 본 적도 없는 후대의 중국인들은 그녀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수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애통해했다.

소군이 옥으로 만든 말안장을 잡고(昭君拂玉鞍)
말 위에서 울어 뺨이 붉어졌구나.(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今日漢宮人)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 땅의 첩이 되는구나.(明朝胡地妾)

이 시는 시선(詩仙)이라고까지 불리는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쓴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시이다. 유감스럽게도 위대한 시인이 쓴 이 시는 중국인들이 훈족을 포함한 다른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근거 없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오만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런 윤색은 지극히 중국적인 관점일 뿐이다. 물론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날 때야 무척 슬펐을 것이고 그녀의 노래도 심금을 울렸겠지만, 훈족의 땅에 도착한 후에도 그렇게 슬퍼했을지는 극히 의문이다.

유교의 영향을 적게 받은 북방의 유라시아 초원은 당시의 중국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신장되어 있던 지역이었다. 더욱이 왕소군은 선우의 첩이 된 적이 없다. 당시 호한야 선우는 50대 중반의 홀아비였으며, 왕소군은 도착하자마자 알지(閼氏)에 봉해졌다. 알지는 선우의 공식적인 부인을 의미하는 말로 중국의 황후들보다 권한이 훨씬 컸다. 후일 몽골의 '카툰'과 마찬가지로 선우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재산권과 통치권의 일부를 행사할 수 있었다.

선우가 원정에 나서거나 질병 등으로 유고가 발생했을 때 알지는 선우를 대신한다. 선우가 사망한 경우에도 다음 선우가 대부족회의를 통해 선출될 때까지 알지가 전체 훈족을 통치하는데, 항상 이동을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대부족회의를 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통치기간이 여러 해가 될 때도 있었다.

왕소군을 애통해하는 중국인들의 정서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훈의 땅에서 두 명의 선우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호한야는 왕소군과 재혼한 지 3년 남짓 만에 아들 하나만 남기고 죽었다. 선우의 지위는 전처소생의 장남 복주루(復株累)에게 별 탈 없이 승계되었다. 복주루는 혈기왕성한 미남 청년이었으며, 열여덟 살에 시집 온 왕소군은 이때 겨우 스물두 살의 한창 나이였다. 복주루는 훈의 전통에 따라 왕소군에게 청혼했으며,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만약 중국이었다면 이러한 재혼은 큰 스캔들이었겠지만, 가장이 죽었을 때 거친 환경에 홀로 남겨진 미망인들과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큰 미덕으로 삼고 있던 훈족에게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왕소군은 복주루와의 사이에서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 후일의 사서를 통해 두 명의 딸은 확실하게 실존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으며, 많게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설까지 있다.

왕소군은 사회 활동도 무척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훈족의 역사상 최초로 초원에 초등 교육시스템을 도입해서 훈족의 어린이들에게 다양한 방면의 중국 문화를 소개하고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여인들을 위해서는 진보된 길쌈 기술을 도입했다. 당연히 훈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그녀가 생존했던 기간 동안 훈과 한나라 사이에 전쟁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훈의 땅에서 60년 동안 살다 생을 마감하자 훈족은 그녀를 정성스럽게 장례 지내고 그녀의 무덤에 '푸른 무덤'이라는 의미인 '청총(靑塚)'각주2)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녀가 따뜻한 고향을 떠나 추운 북방에 들어와 살면서 항상 푸른 풀이 돋아나는 자신의 고향땅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겠지만, 바로 그 이름 때문에 후일 그녀의 무덤에는 겨울이 와도 풀이 시들지 않는다는 전설이 생겼다.

왕소군이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여인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장에서 말하는 팜므 파탈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떨칠 수 없는 생각은 그녀가 중국인들의 생각처럼 야만적인 세계로 내팽개쳐진 가여운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안락한 황궁에서 떠나기는 했지만 새롭게 맞이한 인생을 기회로 삼아 적극적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행운아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중국의 4대 미인 중에서 연대기상의 마지막 인물은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은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이다. 그녀의 본명은 옥환(玉環)이며, 태어날 때 손목에 옥팔찌를 두르고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꽃이 부끄러워한다'는 의미의 '수화(羞花)'의 유래는 이렇다. 어느 날 양귀비가 내원을 거닐다 함수초(含羞草)각주3) 라는 식물의 꽃에 손을 댔는데 갑자기 잎이 말리면서 움츠려들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시녀가 그녀의 미색에 꽃이 부끄러워하며 움츠렸다는 소문을 냈는데, 이 소문이 그대로 그녀의 별명이 되었다.

양옥환은 꽤 괜찮은 집안 출신이지만 부모가 일찍 죽어 하남부(河南府)의 사조(士曹)라는 관직에 있던 숙부 양현교의 집에서 자랐다. 용모도 빼어난데다 총명하고 성격이 활달하고 명랑했으며 시와 음악과 춤에 능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당의 수도 장안에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또한 그녀는 현종 황제가 가장 아끼던 딸 함의공주(咸宜公主)와 친하게 지냈는데, 함의의 소개로 그녀의 오빠이자 현종의 열여덟 번째 아들인 수왕(壽王)과 만났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서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이때 그녀의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다.

원나라 화가 전선이 그린 말에 오르는 양귀비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시 현종은 현명한 정치를 펼쳐서 제국의 혼란이 수습되고 상업과 무역이 번창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했는데, 현종의 시대 중 이 전반부의 시기를 '개원의 치(開元之治)'라는 이름을 붙여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종의 시대 일찌감치부터 이미 환관 고력사(高力士)나 재상 이임보(李林甫)와 같은 간신들이 활개를 치면서 황제의 총명을 흐리고 있었다.

현종에게는 원래 무혜비(武惠妃)라는 오랫동안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옥환과 결혼한 수왕과 함의공주가 바로 이 무혜비의 소생이었다. 그런데 옥환이 수왕과 결혼한 지 2년 만에 무혜비가 죽자 현종은 큰 충격에 빠졌다. 원래 감상적인 성격이었던 현종은 생전에 무혜비가 거처하던 궁을 찾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곳에 마냥 서 있곤 했다.

그런데 당시 여러 해 동안 현종을 보좌하던 고력사는 아첨의 귀재였다. 그는 죽은 무혜비의 대안으로 양옥환을 떠올렸다. 아마 무혜비와 양옥환은 분위기나 스타일이 비슷한 글래머 타입의 미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옥환은 엄연히 현종의 며느리였다. 현종과 고력사는 오랫동안 기회만 엿보다 여산에 있는 온천궁으로 행차하면서 은밀하게 양옥환을 불렀다. 수왕과 옥환 부부는 사건의 전모와 부왕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했지만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쉰다섯 살의 시아버지는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스물한 살의 며느리를 범하고, 여러 날 밤낮을 그녀와 함께 보냈다. 일을 저지를 때야 뒷일을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사태를 수습하는 일이 문제였다.

다시 한 번 고력사가 기지를 발휘했다. 옥환을 여도사의 신분으로 위장시켜 황궁 안에 있던 태진궁(太眞宮)이라는 도가의 사당에서 제사를 받들도록 한 것이다. 현종은 그녀에게 태진(太眞)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밤마다 시중을 들게 했다. 또한 수왕을 다른 여자와 결혼시켜 옥환을 되찾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를 원천봉쇄했다.

그렇지만 겨우 여도사의 신분으로 만족할 옥환이 아니었다. 현종을 사로잡기 위한 갖가지 노력 끝에 입궁한 지 5년 만에 드디어 후궁 중에서 최고의 직위인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황후 자리가 공석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내명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양귀비는 단지 미인이라는 것 때문에 현종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비파 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던 천재적인 예술가였으며, 바로 이러한 기질적인 특성을 현종과 공유하고 있었다. 현종이 불교음악을 바탕으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는 곡을 만들자 양귀비는 그 자리에서 이 곡에 음을 붙여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췄다고 한다. 그녀는 음악뿐 아니라 시문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스스로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던 현종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였던 것이다.

모든 쾌락 중에서 정신적인 쾌락은 다른 것이 줄 수 없는 최고의 희열을 선사한다. 양귀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현종은 중신들이 모이는 아침 조회에 빠진 적이 없고 밤늦은 시각까지 국정을 살피는 정열적인 군주였다. 때문에 이임보나 고력사 같은 소인배들이 주변에 있다고 해도 그들이 활동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양귀비와 함께 최고 수준의 예술을 추구할 수 있게 되자 조회에 참석하기는커녕 국정 전반을 아예 이임보에게 떠넘겼다.

양귀비에게는 친형제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같이 자란 다섯 명의 사촌 형제들이 있었다. 크게 될 역량을 전혀 갖추지 못한 두 명의 오빠와 양귀비만큼이나 아름다웠다고 하는 세 명의 언니들은 모두 황제가 하사한 호화로운 집에 살면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렸다. 현종은 근본적으로 영민한 사람이었다. 양현교의 자녀들에게 권세와 호사는 허락했지만 그들에게 전권을 위임하지는 않았다.

그들보다는 육촌 오빠인 양소(陽釗)가 문제였다. 사서에서는 그를 학문에는 어두웠으나 계수에는 무척 밝았다고 평하고 있다. 양소는 멀리 촉(蜀) 땅에서 미관말직에 있다가 양귀비의 후광으로 장안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의 출세는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 그는 재정 분야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면서 현종의 신임을 얻고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는 교활한 자였다. 현종에게 아부하면서 파당을 만들고 재물을 갈취했다. 양국충으로 새로 태어난 양소는 재상 이임보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머지않아 현종과 양귀비를 파멸시키게 될 삼진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이 등장한다. 그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최고의 실력자였으며 변경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으로 인해서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아부하는 실력은 군사적인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 양국충과 같은 과에 속하는 부류였다. 그는 현종 황제를 아버지로, 자기보다 열한 살이나 어린 양귀비를 어머니로 섬겼다.

양국충과 안녹산은 이임보를 제거하기 위해 의기투합했으며, 양귀비는 안녹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현종과 양귀비 사이에 끈끈하게 이어진 정신적인 유대감이야 그 누가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가 없는 것이었지만, 34년이라는 물리적인 나이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의 육체라는 것은 때때로 정신을 배신하는 법이다. 이 와중에 19년 동안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온갖 비리의 온상이었던 이임보가 죽었다.

양국충과 안녹산의 제휴 관계도 자연스럽게 끝나고 두 사람은 경쟁 관계로 돌변했다. 이 경쟁에서 항상 황제를 가까운 위치에서 보좌할 수 있는 양국충이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자 안녹산은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항했다. 모반을 일으킨 것이다. 실전으로 단련된 15만의 정예 병력을 지휘하는 안녹산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제2의 도시 낙양이 함락되고 방어선이 뚫리자 현종은 장안을 떠나 피난길에 나섰다.

당시 사람들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양국충과 양귀비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 일행을 호위하던 근위군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양국충을 죽이고 나서 양귀비까지 내달라고 요구했다. 황제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능력이 없었다. 고력사와 양귀비 단 두 사람만 작은 불당에 들어가 예불을 올린 다음 밖으로 나왔다. 고력사는 긴 비단 천을 꼬아서 배나무에 걸고 한쪽 끝을 양귀비의 목에 감았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다음해 겨울에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거의 폐인이 되어 태상왕으로 물러난 채 양귀비의 초상 앞에서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여러 해를 혼자 지낸 현종은 어느 초여름 날 옥피리를 꺼내 멋지게 연주하더니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고 명했다. 그날 밤 늦게까지 현종의 처소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태상왕이 목격되었다.

양귀비를 당나라가 멸망한 주요 원인으로 보는 견해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당 왕조는 양귀비가 죽은 다음에도 150년이나 더 지속되었으며, 망한 원인도 체제가 가지고 있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이다. 개방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상공업이 발달해서 나라 전체의 부는 크게 증가했지만 체제의 결함으로 인해 그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렇지만 현종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완벽하게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양귀비는 분명히 팜므 파탈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엄정하게 이야기한다면, 사실 현종의 몰락도 근본적으로는 양귀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격적인 결함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군주보다는 예술가에 훨씬 더 어울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이 역사를 뛰어넘는 큰 스캔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양귀비보다 두 세대 정도 뒤에 태어난 백거이(白居易)는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7언 장시로 노래했다.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고 하는 이 천재 시인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장장 120행이나 되는 멋진 시를 만들었는데, 이 명시가 바로 〈장한가(長恨歌)〉이다. 현대 젊은 남녀들이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연리지(連理枝)'나 홍콩 영화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이 이 시의 가장 마지막 구절에 들어 있다.

하늘에 있다고 하면 비익조가 되고 싶고(在天願作比翼鳥)
땅에 있다면 연리지가 되고 싶다 했었네.(在地願爲連理枝)
끝없는 하늘과 땅도 끝날 때가 있건만(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그칠 때가 없구나.(此限綿綿無絶期)

비익조는 암수가 짝을 찾으면 자웅동체가 되어 한 마리가 한쪽 날개로만 날아다닌다는 전설 속의 새이며,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가지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한 그루의 나무처럼 된 상태를 말한다.

'치명적인 유혹자' 팜므 파탈이라면 중국사의 4대 미인 중에서 단연코 춘추 시대 월나라 출신의 미녀 침어(侵魚) 서시(西施)를 꼽을 수 있다. 수화 양귀비 역시 당 왕조 몰락에 일부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주변의 상황에 의해 강요된 삶을 살았던 운명의 희생양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다. 그렇지만 서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가슴에 보이지 않는 독기를 품은 채 목표에 의도적으로 접근한 대단히 위험한 여자였다.

그녀의 별명인 침어라는 말은, 서시가 연못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란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侵魚)'라는 과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녀와 관련해서는 침어 이외에도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역사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자(莊子)가 〈천운편(天運編)〉에 적어 놓은 일화이며, 역사적 사실은 아닐 확률이 높다.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가 그린 서시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서시는 권문세가 출신이 아니라 저라산(苧羅山) 부근에 살던 나무꾼의 딸이었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그 미모가 워낙 출중해서 부근의 남자들 중 서시에게 연정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같은 동네에는 추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녀는 서시가 왜 그렇게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궁금했기 때문에 서시를 항상 따라다니면서 그 이유를 알고자 했다. 그런데 서시에게는 원래 심장병이 있었다. 가끔 그녀의 약한 심장이 발작을 하는데 통증이 올 때마다 서시는 멈추어 서서 한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추녀는 바로 그것이 서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해 자신도 한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다. 그러자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거나 도망을 갔다고 한다.

'서시빈목(嚬目)'은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라는 의미이며 '서시효빈(效嚬)'과 의미와 용례가 똑같은 사자성어로 본질을 망각하고 무작정 남의 흉내만 내는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다. '서시봉심(奉心)'은 '서시가 가슴앓이를 한다'라는 의미이지만 '빈목'이나 '효빈'과 마찬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이 이야기를 쓴 장자와 유학의 태두 공자는 동시대의 인물이다. 공자는 전국 시대 말엽이었던 당시에도 이미 고대에 해당하는 주나라의 예법에서 난세를 구할 해결책을 모색했는데, 장자가 이러한 공자의 어리석음을 비난하기 위해서 서시에 관한 그럴듯한 일화를 창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시대가 바뀌면 사회의 기본 이념 또한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었다. 어찌되었건 이 책에서 장자와 공자의 의견 차이는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서시가 월(越)나라의 재상인 범려(范?)에게 스카우트되어 최종적으로 월나라의 숙적인 오(吳)나라의 왕궁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는 상황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여기서는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와 관련이 있다.

주나라 말엽에 해당하는 전국 시대에 중국의 남부에서도 오(吳), 월(越), 초(楚), 정(鄭)과 같은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들 중에도 특히 극심하게 대립하여 서로를 원수로 여겼던 나라가 바로 오나라와 월나라였다.

서시가 한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오왕 합려(閤閭)는 월나라를 공격하다 손에 부상을 입고 그 부상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합려를 계승한 태자 부차(夫差)는 매일 밤 장작더미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면서 자신의 방 앞에는 사람을 세워놓아 자신이 나타날 때마다 "부차야! 아버지의 원수를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하였다. 이 상황이 바로 장작을 베고 눕는다는 의미의 '와신(臥薪)'이다.

이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句踐)은 대부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오나라를 공격하다 크게 패배하고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수습해서 회계산(會稽山)에 들어가 농성을 했다. 그렇지만 그 농성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구천은 부차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당시 부차는 병법의 대가인 오자서(伍子胥)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라고 조언했지만 구천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재상 백비(伯嚭)가 그를 두둔하는 바람에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만다.

자신의 부인과 범려를 데리고 오나라에 들어온 구천은 부차의 명령에 따라 여러 해 동안 합려의 묘를 지키며 말을 기르는 궂은 일을 하면서 월나라로 돌아갈 기회만 기다렸다. 마침 부차가 병에 걸리자 구천은 그를 정성껏 간호해서 병을 낫게 했다. 이에 감동한 부차는 구천을 석방했다. 구천은 월나라로 돌아와서도 꾸준히 부차를 섬겼지만 자신의 처소에 돼지의 쓸개를 걸어두고 항상 그것을 핥아 쓰디쓴 맛을 보면서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라고 소리쳤다. 이 장면이 바로 쓸개를 맛본다는 의미의 '상담(嘗膽)'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치명적인 팜므 파탈, 서시의 활약이 시작된다. 이 무렵 서시는 눈부신 미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월나라로 돌아온 범려는 현대라면 '미스 월드 선발대회' 정도에 해당하는 전국 규모의 미인대회를 개최하는데, 그 우승자가 바로 서시였다. 서시는 범려에게 철저하게 훈련받은 후 중요한 사명을 띠고 오나라로 파견되었다. 오나라를 약화시키는 것이 임무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영웅 중의 영웅 오자서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서시는 영리한 여자였다. 뛰어난 미모와 철저한 훈련을 통해 얻어진 지성을 바탕으로 오왕 부차의 총애를 받았지만, 왕궁에서 다른 여인들과 암투를 벌이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가는 섣부른 행위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차의 명예욕을 끊임없이 자극했을 뿐이다. 잠자리에서는 존경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부차를 칭송했을 것이다. 아무리 목석 같은 남자라도 이런 식의 공격을 버텨낼 사람은 없다.

절세미인 서시의 부추김으로 한껏 고무된 부차는 국내에서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군주로서의 위상을 한껏 높이고 대외적으로는 대군을 조련해서 천하의 패권을 노렸다. 나라의 힘은 꾸준히 약화되어 갔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중국의 강대국인 전국 팔웅(八雄)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현재의 산둥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제(濟)나라였다. 오자서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격한 오나라 군대는 마침내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개선했다. 부차는 마침내 수많은 제후들을 모아 천하의 일을 논하기 시작했다. 원정을 반대했던 오자서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이때 서시는 오나라에서 강력한 동맹자와 제휴할 수 있었으니, 바로 오나라의 재상 백비였다. 원래 오자서는 오나라 사람이 아니라 초(楚)나라 출신으로 태자의 후견인 격인 태자부 태부(太子府 太傅) 오사(伍奢)의 작은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와 형 오상(伍尙)이 비무기(費無忌)라는 소인배의 모함으로 죽자 원한을 품고 초나라를 떠나 우여곡절 끝에 전 왕 합려를 섬기게 되었다. 백비 역시 초나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백주려(伯州黎)가 비무기의 모함으로 죽자 오나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백비는 오자서의 추천으로 벼슬에 나가 뛰어난 권모술수로 고속 출세를 해서 마침내 재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후일 간신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될 인물이다. 오자서가 백비를 추천할 때 그의 인물됨을 꿰뚫어 본 대부(大夫) 피리(被離)가 백비를 평하면서 그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아 필히 살인을 할 관상이니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자 오자서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개작해서 '동병상련 동우상구(同病相憐同憂相救)'라고 대답했다. 같은 병이 있으면 서로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같은 근심이 있으면 서로를 위로한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많이 쓰는 '동병상련'이라는 말은 바로 오자서의 이 대답에서 나왔다. 피리가 이야기했던 매의 눈과 호랑이 걸음이라는 의미의 '응시호보(鷹視虎步)' 역시 어려울 때 서로 돕다가도 일의 성과가 나면 비정하게 배신하는 사람이 있음을 경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오자서를 모함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응시호보의 백비가 비열한 인간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오자서의 인간성에도 큰 결함이 있었다. 그는 오왕 부차와 함께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한 뒤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에 300대의 매질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아무리 충직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질리게 하기 마련이다. 서시는 백비처럼 오자서를 직접 탄핵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왕께서는 용병에서 오자서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이옵니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을 것이다. 서시와 백비의 협공을 받은 오자서는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그가 부차로부터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참으로 끔찍하다.

"나의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으라. (부차의) 관을 짜기 위함이다. 내 두 눈을 도려내어 동문에 걸어라.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오를 멸망시키는 장면을 보기 위함이다."

오자서가 죽고 나서 대략 10년 후에 구천은 마침내 오나라를 멸했다. 회계산의 치욕으로부터는 꼭 20년 만의 일이다. 부차는 자살로 화려한 인생을 마감하면서 오직 오자서 한 사람만을 기억했다.

"내가 죽어서 자서를 볼 낯이 없다."

서시는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면 정작 서시 본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부차가 자살하고 나서 죄의식에 사로잡힌 서시도 그를 따라 자살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중국 역사가들의 상투적인 표현이다. 삼강오륜의 윤리가 머릿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그들에게 아무리 조국을 위해서라지만 지아비를 배신한 서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 나오는 수많은 경국지색 중에서 스스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여인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오나라가 패망했을 때 서시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 대에 들어섰다. 그녀는 범려의 부인이 되었다. 범려와 서시 부부는 구천이 내리는 큰 상과 높은 직위를 마다하고 제나라로 떠났다. 범려는 구천이 '어려움은 함께 나눌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 나누지 못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구천은 오나라를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다음 그를 도왔던 인물들을 모두 제거했다.

범려와 서시 부부는 제나라에서 장사를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어 거부가 되었다. 그제야 그 유명한 재사 범려가 자기 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나라 조정에서 그를 크게 등용했지만 이번에는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미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을 서시가 당시 제나라에서 최고의 미인이라고 칭송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서시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되고 철저하게 교육된 다음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적국에 파견된 세계 최초의 스파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남자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전국 시대 천하의 패자가 될 뻔했던 부차에게 있어서 서시는 깊은 곳에 독을 감추고 있던 치명적인 팜므 파탈이었다. 서시의 이야기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명의 경국지색, 그리고 명예라는 헛된 허상을 쫓는 남자들의 허영심이 조화되어 만들어낸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놀라운 공부 > 역사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산 김일훈 선생 일대기  (0) 2020.08.10
해동밀교  (0) 2020.05.27
예언서 속에 나오는 역대 대통령  (0) 2020.03.26
김지미 결혼인생  (0) 2020.03.14
증산상제님  (0) 2020.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