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인산 김일훈 선생 일대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20. 8. 10. 16:36

인산 십대 원년

1. 1971년 인산한방암의학 원년 - 11월 대한화보 <신종철학 역비전>에 암처방 연재.

2. 1992년 5월 19일 인산 서거.

3. 1943년 인산의철학 원년 - 총독부 습격 모의 사건으로 묘향산에 피신, 강선암에 은거, 유불도 삼교와 한의학을 연구.

4. 1924년 인산독립운동 원년 - 일본인 불량배들을 징치, 만주로 피신, 독립운동에 투신.

5. 1915년 인산의학 원년 - 오색 무지개를 보고 의약의 원리를 터득.

6. 1976년 인산문화예술 원년 - 함양 위성음사 가입, 한시 <사운정 > 등 창작.

7. 1917년 인산죽염 원년 - 구전금단의 9회 고열용융 원리를 설파, 죽염 제조법 발명.

8. 1988년 인산사리장 원년 - 1월 최은아, 삼남 김윤수와 결혼, 9월 예정(서울대법대생) 출산, 함양에서 인산선생 시봉, 사리장 제조법 전수.

9. 1909년 5월 14일 인산 탄신

0. 1980년 인산의학고전 원년 - <우주와신약> 출간. 이후 1981년 <구세신방>, 1986년 <신약>, 1992년 <신약본초>, 2004년 <신약본초3> 등 출간.

인산 김일훈 선생 일대기인산 김일훈 선생은 조선 순종 3년(1909) 음력 3월 25일 오후 10시경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연흥리에서 아버지 김경삼金慶參과 어머니 강릉 유씨劉氏 사이의 7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구름 속에 숨어 있던 용이 품안으로 날아드는 태몽을 꾸어 구름 운雲자에 용 용龍자를 써 ‘운룡’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구름 속 용이 날아들다

훈장으로 초빙된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 운룡은 남달리 총명했다. 1913년, 다섯 살 때 네 살 위의 누나가 당시 유학자儒學者이자 명의名醫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 김면섭金冕燮으로부터 한글을 배우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고 스스로 한글을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창제되었음을 간파했다.

한글을 터득한 이후에는 홀로 옥편을 읽으며 한자를 깨쳤다. 이러한 소년의 총명함은 ‘생이지지生而知之’, 즉 타고난 것이었다.

1915년 운룡은 일곱 살의 나이에 무지개를 보고 우주의 비밀을 깨달았다. 우주의 별들이 어떤 성질을 지니고 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지 알게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구료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일화를 한 가지 소개하자면, 운룡이 여덟 살 때 이웃집 아저씨가 독사에게 물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운룡은 “명태, 즉 북어는 몸 안에 수정수기水精水氣가 강하므로 독사의 강한 화독火毒을 눌러주는 최상의 해독약이 된다”며 처마에 걸려 있는 마른 명태 다섯 마리를 고아 그 물을 마시게 했고, 아저씨는 후유증 없이 살아났다.

운룡은 1917년, 아홉 살 때 9회 죽염의 원리를 완성했다. 운룡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소금을 두 번 구워 만든 죽염을 먹었는데, 하루는 할아버지가 소금을 굽는 것을 보다가 “소금을 구울 때 아홉 번 반복해서 구워야 하고 아홉 번째 구울 때는 송진과 관솔 등으로 화력을 돋우어 소금을 용해시켜야만 제대로 효과가 난다”고 설명했다.

운룡은 열여섯 살인 1924년, 동네에서 횡포를 부리고 다니던 일본인 아이 열다섯 명을 친구 네 명과 함께 때려눕혔다. 이를 발견한 일본인 순경이 쫓아오자 운룡은 압록강을 유유히 헤엄쳐 만주로 피신했고, 이때부터 운룡은

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독립운동을 한창 하던 때에도 운룡은 환자들을 돌보았다. 열여덟 살에 묘향산으로 들어간 운룡은 9회 죽염을 만들어 위장병 환자에게 나누어 줘 병을 고치게 했다.

운룡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인산仁山이라는 호를 가지게 된다. 이는 독립지사 석계 문빈 선생과 임시정부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 평북의 유학자 김두운 등이 붙여준 것인데, 묘향산 등에 은거하면서 인술仁術을 이용해 병자들의

병을 고쳐온 운룡의 ‘활인구세’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핵단 등 신약 만드는 데 성공

1945년, 광복을 맞은 후 인산 선생은 스스로 일훈一勳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여운형, 방주혁 선생 댁에 머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한의학과 양의학의 장점을 살린 종합병원 건립과 한의과대학 설립, 방역의 한방 이용 등을 건의했으나 “풀을 뜯어 먹이고 쇠꼬챙이로 사람을 찌르는 것도 의학이냐”는 보건행정 담당 미국 고문관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 일로 인산은 정계와 완전히 결별하고 계룡산으로 낙향했다.

1950년, 인산 선생은 곧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3월에 부산으로 내려가 세춘한의원을 열었다. 전쟁이 발발한 후 충남 공주군 태화산 마곡사 근처로 이사해 살던 인산 선생은 휴전 후 논산 계룡산 서쪽의 상월면 상도리로 이사했다.

1955년 서울로 올라와 종로1가 평택여관(화신여관)에 묵으면서 함태영 부통령의 부탁으로 삼일정신선양회 설립에 참여했으나 조직을 선거운동에 이용하는 것을 보고 사임한 후 대전으로 내려갔다.

1957년부터는 경남 함양, 전북 남원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함양 휴천에 살 때는 함지박을 깎아 오도재를 넘어 70리 거리의 마천 장터나 30리 거리의 함양 장터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었다. 인산 선생은 함지박 파는 솜씨가 좋아서 함지박 하나를 파서 팔면 쌀 서 말 값을 받을 정도였다.

1960년 겨울, 선생은 삼봉산 자락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고쳤다. 인산 선생이 시각장애인 노승을 쑥뜸으로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 30대 여인을 쑥뜸으로 일어서게 하면서 서울 장안에는 ‘묘향산 활불活佛이 나타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 주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인산 선생은 생전 “오늘날에 고서古書에 의한 처방은 마치 양동이로 산불을 끄자고 덤비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이므로 오늘날 사람의 병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심각한 공해에 찌들어 독

성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현실에 맞는 의술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인산 선생은 1962년 즈음부터 일 년에 보통 4~5차례씩 이사를 다니면서 한반도 자연물의 약성을 연구하고, 오핵단・삼보주사三寶注射와 같은 전설의 신약을 제조하는 실험에 몰두했다.

1962년 삼양동 북한산 기슭에서 땅을 파내고 지붕을 얹어 토굴을 만들어 살다가 셋방을 얻어 전전하였다. 1967년 서울 중구 충무로5가로 주거지를 옮겨 성혜聖惠한의원을 열고 본격적으로 병자를 구제하기 시작했다.

1. 1988년 4월 3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인산 선생 강연회 2. 인산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저울.

3. 1948년 40세 때의 인산 선생.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 인산 선생 찾아

1970년에는 종로구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전 재산을 들여 각종 암약 제조 실험을 한 끝에 오핵단 등 신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74년 즈음에는 경남 함양에 내려와 살며 병자 구제에 힘쓰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대통령에게 ‘의약부국醫藥富國의 길’이라는 건의문을 일곱 차례 제출하는 한편, 서울역 앞 동자동 고려한방병원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난치병 치

료에 힘을 기울였다.

1980년에는 드디어 인산 선생의 첫 저서인 《우주와 신약》이 세상에 나왔다. 72세의 나이에 쓴 이 책에는 인산 선생만의 독특한 우주관과 의학이론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은 이듬해(1981년) 한글화되어 《구세신방救世神方》으로 출간되었다.

인산 선생은 이 해 12월 31일에 가족을 데리고 경남 함양으로 낙향했다. 1983년 하동에서 상동으로 이사하면서 광복 후 78번째 이사를 했다. 여기에서도 환자들을 돌보며 ‘지리산에 죽을 사람도 고치는 도사가 있다’는 소문이 났고 전국의 암・난치병 환자들이 물어물어 찾아왔다.

1986년에는 《신약神藥》이 출간되었다. 《신약》은 인산 선생이 자신의 의론을 구술하고 이를 차남 김윤세(인산가 회장)가 정리해 5년간 집필한 혁명적 의학 서적이다. 《신약》은 초판 4,000부를 찍었다. 54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두껍고 내용이 어려워 잘 안 팔릴 것이라는 출판사의 예상을 뒤엎고 6개월 만에 3판까지 팔려 단기간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때부터 언론매체를 통해 인산 선생의 삶이 조명되기 시작했고, 전국 각지의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당시 11평짜리 작은 집은 200여 명의 암・난치병 환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인산 선생은 하루 평균 10시간, 150여 명의 환자들을 돌보았다. 인산 선생은 환자의 얼굴을 보면 몇 가지 묻고는 진맥이나 별다른 상담 없이 처방을 일러주었다. 주변 사람은 “이제 그만 쉬셔야 한다”고 했으나 그때마다 단호하게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사람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환자 돌보는 일을 옆에서 돕던 차남 김윤세 회장은 환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강연을 듣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드디어 1986년 6월 21일, 서울 《한국일보》 송현클럽에서 인산 선생의 첫 번째 건강 강연회가 열렸다. 300여 명이 만석인 강당에 500명이 넘게 들어찼고, 강의가 끝난 후에도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인산 선생은 1991년까지 총 32회의 대중 강연회를 통해 인산의학의 묘방과 현대 질병의 최고의 처방으로 알려진 ‘구운 마늘 죽염요법’을 공개했다.

수많은 환자에게 살길을 알려주었으나 인산 선생은 대가로 돈을 받는 일이 결코 없었다. 그 스스로는 남루한 차림을 하였고, 심지어 한겨울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자는 날이 많았다.

인산 선생은 돈과 인술을 맞바꾸는 의료기술자가 아니라 저마다 딱한 사연을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살길을 일러준 ‘민초의 의황’이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활인구세의 삶 살아

인산 선생은 1992년 5월 19일(음력 4월 17일) 오후 11시 25분 경남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김윤세 회장의 집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인산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살리는 활인구세의 인생철학을 몸소 실천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측은히 여기고 돌보았으며 나라에 대한 충정과 효孝를 강조했다. 인산 선생은 “강연 내용을 사후에 출간하

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에 따라 《신약본초神藥本草》를 출간해 49재 때 영전에 바쳤다.

[출처] [인산 (仁山 김일훈) 선생 일대기] 일곱 살 나이에 우주의 비밀 풀고, 한평생 30여만 명의 병자 구료|작성자 청학산인 김윤세

 

남촌선생 가요반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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