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선생 건강교실/생리학 강의

내경도와 해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20. 11. 27. 18:52

상징적 논설이 인체에서 작용하는 그림

수행이 깊어지면 내 몸이 수백리 산천경계로 보입니다 하늘에는 봉황이 날고 하단전에는 큰바다에 용이 굽이칩니다

象言破疑(상언파의)

象言破疑 - 상징적인 언어들이 몸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파악한다

悟元老師(劉一明) 先生께서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것으로 많은 상징적인 용어가 몸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음양의 원리에 기본을 두고 있으며 음양과 오행에 깊은 이해가 있어야

내용을 파악하기 쉽다.

그러나 道家(도가) 수행공부 자체가 영적인 원리를 깊이 이해해야 더욱 깊은 경지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마음수련이 중요하며 마음 수련을 하지 않을 경우 공부에

진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부디 사형들의 깊은 통찰로 수행에 한층 전진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어렵게 구한 이 글을 보냅니다. 유일명 선생은 전진도 용문파 11대 장문인으로서

고효가직해, 상언파의, 통문관등 20여종의 저술을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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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수만권에 달하는 丹經(단경)은 모두가 象徵的(상징적)인 언어로 되어 있다. 상징적인 언어란 사실대로 바로 말한 것이 아니며 분명하게 설명한것도 아니나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말도

아니며, 괴이한 말도 아닌 것이다. 이것은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고 가리키는 것이

있으면 실증이 있듯이 상징을 빌려 사실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후인은 그 뜻을 헤아리지 않고 단지 그 常智(상지)에 집착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유학자

들은 그것을 읽고 피상적인 밖의 상징으로 여겼고 심지어는 상징에 집착하여 제멋대로

생각함으로써 잘 못된 길과 삿된 행위에 빠져 스스로 성과 명을 해친 사람을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오호라 이것이 어찌 옛 성인과 앞 서 가신 현인들께서

상징을 빌려 말씀을 남긴 본래의 뜻이었겠는가

 

주역에 말하길 法想(법상)은 하늘과 땅보다 큰 것이 없고 變通(변통)四時(사시)보다 큰 것이 없고 형상을 드러내고 밝은 것을 나타내는 것은 해와 달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하였다.

단경은 모두 周易(주역)을 근본으로 하여 지어진 것으로서 그 약물과 화후는 모두 천지와 일월과 사시를 빌려 그 오묘함을 드러낸 것이다

 

만약에 단경의 상징적인 언어를 괴이하고 허망하다거나 피상적이라 여긴다면 역에 있는

바람과 구름, 우레와 번개, 용과 호랑이, 소와 말, 사슴과 양, 거북이와 꿩 등의 상징과

더불어 소경이 능히 본다, 절름발이가 능히 걷는다 그 담 위에 올랐으되 벗의 머리카락이 비녀에 모아지듯 모일 것이다.

 

살을 물어뜯되 코를 상하니 궁둥이가 등걸에 곤함이라 귀신을 한 수레에 실음이라

양을 찌르나 피가 없으니 등의 상징도 또한 모두 괴이하고 허망하다거나 피상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정도가 실 전 된 지 이미 오래되어 어재 오늘이 아니다. 내가 진사를

만난 후로부터 여러 문파의 단경을 수집하여 서로를 참고하여 살핀 다음에야 비로소 상징적인 언어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스승에게 얻은 바를 참 동 직지, 오진 직지, 주역 천진, 서유 원지 등의 책 안에 모두 다 누설하였으나 배우는 사람들이 꿰뚫어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또 상 언 파의 한 권을 저술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림과 괘상을 그려 넣어 옳고 그름을 자세히 구분하여 방문을 일소하고 정도를 지향케 하고 삿된 가르침을 쓸어버리고

참된 가르침을 깨닫도록 하였다. 이것이 곧 나의 바람이니 이 책을 보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또한 사람 살리는 기술을 말한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대수 롭 게 여겨 웃어넘기지

않으면 참으로 다행이겠다.

 

가경 16년 신미년 봄 정월

서운산에서 소박 늙은이인 오원자 유일명이 세심정에서 친히 서문을 쓰다.

 

象言說(상언설)

수진의 공부에 관하여 옛 경전에서는 대부분 무위의 도를 말하였지 유위의 도에 관한 말은 극히 드물었다. 다만 무위의 도는 오직 뛰어난 지혜를 지닌 사람만이 돈오원통하여 일료

백당하며 입제성역하고 그 다음으로 중하의 사람들은 성질이 우둔하고 근진이 깊고 식견이

적은데 만약 무위의 도를 행하면 역량이 미치지 못하므로 결단코 모든 인연을 다 비우고

곧바로 피안에 오를 수는 없다. 후에 한나라의 위백양 선옹께서 역도를 표준삼아 참동게를 저술하여 중하의 사람들을 인도하셨다. 이는 유상으로 무상을 비유하고 유형으로 무형을

비유한 것으로 비로소 금단이라는 명칭과 연홍, 사은, 오토, 용호, 영차, 약물, 정로,

팽련 등의 법상을 말씀하셨다.

 

이후로부터 도를 이룬 여러 진인들은 모두 참동계를 본받아 단경을 저술하여 오묘한 원리를 펼치셨으니 그 뜻은 모두 뒤에 배우는 살마들이 이것에 근거하여 저것을 참조하고 저것을 참고하여 이것을 증명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에 배우는 사람들이 말속에 숨긴 뜻을 궁구하거나 상징을 빌린 이치를 연구하지 않아서 금단, 연홍, 정로의 말들을 보고 복식으로 잘못알아 마침내 노화에 빠지거나 오토, 용호의 말들을 보고 장부라고 잘못 알아 마침내 존상으로 빠지거나 타가, 아가, 음양, 남녀라는 말들을 보고 규단이라고 잘못 알아 마침내 채취로 빠지거나 역순, 전도의 말들을 보고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잘못 알아 마침내 운전으로 빠지거나 수성 무위라는 말들을 보고 적멸이라고 잘못 알아 마침내 완공으로 빠지거나 수명 무위라는 말들을 보고 파롱이라고 잘못 알아 마침내 집상에 빠졌으니 이러한 여러 문호들은 모두 사슴을 말이라 하고 까마귀를 봉황이라고 하는 것으로 性命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性命을 해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조사께서 그 당시 상징을 빌려 비유로 말씀하신 뜻이겠는가?

 

무룻 상이란 형상이다. 이 사물을 말하여 저 사물을 상징하거나 저쪽 일을 말하여 이쪽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험삼아 눈 앞에서 누구나 함께 볼수 있고 함께 알 수 있는 사물로써 그것을 말한다면 예를들어 음식을 삶거나 볶을 때 냄비는 솥에 부뚜막은 화로에 해당한다.

냄비속에 물을 채우고 부뚜막 밑에서 물을 땐다. 불은 본래 불타오르고 물은 본래 흘러내리는 법인데 이제 냄비 속에 물은 위에 있고 부뚜막 밑의 불은 아래에 있으니 물과 불이 거꾸로 되어 피차 서로 어우러져 음식이 익게 된다. 이것이 보통의 물과 불이 서로 어울리는

모양이다. 사람의 강한 것의 성질은 조급하여 움직임이 많은데 움직임은 곧 불에 속한다. 를 활용하여 을 기르며 강으로써 유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강과 유가 상당하여 조급하거나 느긋하지도 안항 중정하면 大道를 쉽게 이루게 되니 이것이 神水神火

서로 어울리는 원리이다.

 

보통의 물과 불이 서로 이루어 주는 모양을 빌려서 신수와 신화가 서로 어울리는 원리로

비유하면 그 이치가 분명해진다.

또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본래 가업이 부유하였는데 분수를 지키지 않아 재산을 낭비하여 거의 탕진할 무렵에 홀연히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애를 쓰고 노력하여 생활에 힘쓴결과

차츰 재산을 쌓아 재산이 점점 많아짐으로써 마침내 가업을 다시 옛날처럼 일으켜 세웠다면 이것이 바로 환원반본하는 모양이다.

 

사람의 정신과 영기는 본래 충분하여 두루 가득차 있었는데 후천과 사귀어 그 조화에

따름으로써 정을 소모하고 신을 피로하게 하여 원기가 쇠패하게 되면 원본의 소모가 거의 다한 것이다. 만약 개두환면을 깨닫고 정분질욕하며 한사존성하고 점차로 공을 배풀면 마침내 귀근복명하는 때가 있게 된다. 이것이 환원반본하는 원리이다. 세상 사람들의 환원반본하는 모양을 취하여 수도에서 환원반본하는 원리를 비유하면 그 이치가 분명해진다.

 

또 예를들면 세상의 남자와 여자가 서로 짝을 지어 둘이 하나로 합하면 능히 자손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人道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 몸의 음과 서로 알맞게 어울려 하나로 합하면 능히 부처나 신선을 낳을 수 있으니 이것이 丹道의 영원히 이어지는 원리를 비유하면 그 이치가 분명해진다. 단경은 모두 이와같은 상징을 빌려 원리를

비유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상징으로 가르쳐 실천하여야 할 원리를 깨닫게 하고자 함이지

사람들에게 상징에 매달려 원리를 등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그 원리를 궁구하지 않고 단지 그 상징만 알 뿐이니 슬픈 일이다.

단경에는 상징으로 말한 것이 대단히 많으니 학자는 모름지기 상징을 통하여 원리를

궁구하되 상징을 이해하면 말을 잊고 뜻을 깨달아 상징을 잊게 되어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順逆說(순역설)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순리로 행하는 도는 알고 있으니 거꾸로 운행하는 도는 알지 못한다.

무엇을 순리라 하는가? 그 조화를 거스르는 것이다. 조화를 따르게 되면 사람과 만물을 낳게 되는데 생로병사의 윤회를 멈출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조화를 거스르게 되면 신선과 부처를 이루게 되어 불생불멸하여 수명이 천지와 같아진다.

보통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를 이루어 몸이 태어난 후에 2.8수가 가득차면 후천과 어울려서 안으로는 칠정과 육욕에 그 (정기신)을 미혹하게 하고 밖으로는 온갖 인연과 사무로 그 형체를 피로하게 한다.

 

거짖을 진실로 알면 삿된 것을 바른 것으로 알며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아 그 욕망에

끄달려 가지않는 곳이 없으니 본래 지니고 있던 정기신인 세가지 보물을 거의 소진하고

원래 지닌 圓明한 진성이 완전히 어두워지더라도 목구멍에 호흡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그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낳고 죽는 것을 반복하여 만 겁 토록 괴로운 경계에 빠지는 것이다. 이른바 염라대왕이 부르지 않더라도 스스로 죽음에 몸을 던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만일 큰 지혜를 갖춘 사람이 조화를 거꾸로 돌리어 조화에 속박당하지 않으며 음양이

도용에 끄 달리지 않고 만물이 끌어당기는데 끌려가지 않으며 온갖 인연에 옮겨 다니지

않아서 큰 불 속에서도 연꽃을 심으며 진흙탕 속에서도 배를 끌어당기고 세상 법을 빌려

도법을 닦으며 人道에 의지하여 天道를 온전히 한다면 겁을 지내오면서 물든 번뇌의 뿌리를

다 뽑아 버리게 된다. 또 뒤에 일어나게 되는 객기를 붙잡아 한꺼번에 소제하여 없애버리면 목숨도 또한 스스로 관장하게 되며 하늘에 달려 있지 않게 된다.

 

또 그전의 건원면목을 다시 회복하여 몸이 윤회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삼계를 뛰어넘어

금강처럼 부서지지 않는 물체가 된다. 다만 여기서 순응하는 중에 거꾸로 움직이는 것은

천기로 구전 심수하는 비밀이니 반드시 진사로부터 지점을 받아야 하며 사사로운 소견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공부인들이 자기의 반딧불 같은 총명과 대롱으로 보는 좁은 소견을 믿고 몇 구절의 화두나 몇 가지 공안을 대충 보아 기억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도를 안다고 말하면서 다시 사람을 찾지도 않는 사람들 앞에서 뽐내면서 어지러운 말만 입에 가득하니 이는 자기가

장님이면서 사람을 끌어다 장님을 만드는 것이니 죄과만 더욱 깊어질 뿐이다.

 

또한 자기가 제일이라고 우기는 애매 모호한 무리들이 있으니 진사를 알지 못하며 아침

저녁으로 남의 문전만 기웃거리며 몇 가지 소승공부를 배운 것을 가지고 도가 있는 것으로 자부하니 즉 밝은 스승이 바로 앞에 있어도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기를 꺼려하고 어지러운 짓거리를 하고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心氣를 아래로 내리고 腎氣를 위로 올리는 것이 역행이라 하거나 혹은 환정 보뇌하는 것을 역행이라 하거나 혹은 폐기정신 하는 것을 역행이라 하거나 혹은 채음보양하는 것을 역행이라 하거나 혹은 남자는 아래에 여자는 위로 올라가는 것을 역행이라고 하니 이와같은 부류가 셀 수 없이 많으나 모두 성도와 어긋나며 조화를 거꾸로 운행하는 공부가 아니며 이것들은 모두 죽음을 자초하는 도이지 생을 도모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거꾸로 한다는 것이 부모가 나의 몸을 낳는 처음으로 거슬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집을 떠나 멀리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니 비록 거꾸로 운행한다고 하여도 실은 순리로 행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거스르는 중에

크게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행하는 것과 서로 어긋나는 까닭에 역이라고 말한 것이다.

방문으로 잘못된 길을 가는 무리들은 역이라는 한 글자에 미혹되어 마침내 물질적인

이 육체에다가 온갖 노력을 행 하나 결국 허망하게 끝날 뿐이니 어찌 어리석지 아니한가?

藥物說(약물설)

단경자서에서 말한 약물을 채취하고 금단을 팽련한다는 것은 모두 선천의 무형하고 무질한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지 세상에 형체가 있고 재질이 있는 약이나 또한 사람 몸에 있는 형체가 있고 재질이 있는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후부터는 거짓을 받아들이고 순진을 잃어버려 본래 원만하게 갖추어진 보물이 거의 소진되면 일신이

순음으로 변화하여 사기가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마치 몸에 큰 병이 들어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으니 진정한 영약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음을 바꾸어

양으로 만들어서 性命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영약이란 어떤 약인가? 바로 선천진일지기이며 선천정기신인 세가지 보물이다. 선천진일지기는 또 진종자라고도 부른다. 이 기는 색상에 떨어지지 않으며, 지극한 무이면서

지극한 유를 머금고, 지극한 허이면서 지극한 실을 머금고 있는 진공묘유인 것이니 정기신 세가지 보물을 통솔하여 거느린다. 세가지 보물 또한 형체가 있는 물건이 아니고 무형한

본질인 것이다.

 

옥섬노인이 말하기를 그 정은 교감정이 아니라 옥황의 입안에서 나오는 침이며, 그 기는

호흡기가 아니라 바로 태소연임을 알아야 하며, 그 신은 사려신이 아니라 가히 원시와 서로 비견할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三家(정기신)로 나뉘었으나 모두 선천일기로

돌아간다. 삼가가 합하면 일기를 이루고 일기가 나뉘면 삼가가 되니 채약한다는 것은 곧

이 일기를 채취하고 삼보를 운행하고 진화로 단련하여 단을 만들어 한 몸에 점화시키면

모든 음기가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으면 티가 없는 본래의 물건인 순양으로 돌아간다.

마치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약을 써서 고치면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이른바 약물이란 상징으로 비유한 것인데 후세에 공부하는 사람이 단경에 나와있는 약물의 이론을 보고 형체나 재질이 있는 물건으로 잘못 알아서 마침내 산중에 있는 약초들을 채취하여 이것들을 배합하여 복용함으로서 망령되게 장생하기를 바라며 혹은 오금과 팔석을

캐어서 단약을 제조한 다음 이를 복용하여 선계로 날아 오를 수 있다는 망상을 하였다.

이는 눈에 보이는 약으로서는 단지 눈에 보이는 병을 고칠 수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형한 병을 고치려면

선천진일지기를 채취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참동에 말하기를 동류라야 공을 베풀기가 쉬우니 종자가 다르면 교묘한 솜씨를 부리기

어렵다고 하였고, 오진에 말하기를 대나무가 망가졌으면 반드시 대나무로 고치는 것이 마땅하며 닭을 부화하려면 마땅히 알을 사용해야 닭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동류가

아니면 단지 힘만 들뿐이니 어찌 진연이 성기에 합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

였다. 진연이란 곧 선천진일지기이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볼 때 평범한 약을 선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火候說(화후설)

단경자서에서 말한 화후란 바로 수지하려는 공부의 순서에 관한 준칙을 비유한 것이다.

수지하는 공력에는 선후가 있고 완급이 있고, 진퇴의 상황이 있다.

당연히 먼저 해야 할 것을 나중에 하거나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먼저 해서는 안되며, 당연히 나아가야 할 때에 물러나거나 물러나야 할 때에 나아 가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화롯불에 약을 달일 때 문과 무, 진과 퇴, 다 끓었으면 멈춰야 하는 현상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진에 있어 공을 베풀때에 순서를 상징을 빌려 설명한 것을 화후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후의 공을 사용할때는 연월일시에 구애되어서는 안되며

매순간 상황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

 

당연히 먼저 해야 할 것은 먼저 하고 뒤에 해야 할 것은 뒤에 하여야 하며, 당연히 서둘러야 할 것은 서두르고 늦추어야 할 것은 늦추어야 하며, 당연히 나아가야 하면 나아가고

물러나야 하면 물러나서 상황에 따라 변통하되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여야 한다.

이른바 당연히 먼저 할 것이란 먼저 안을 엄밀하게 하고 당연히 뒤에 할 것이란 뒤에는

그 밖을 방어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서둘러야 한다는 것은 공을 베풀 때는 서두르라는

것이요, 당연히 늦추어야 한다는 것은 온양을 느긋하게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양이 부족하면 반드시 양을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요, 당연히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음이 바야흐로 생겨나면 반드시 음을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후의 참다운 원리이다.

 

工家에서 말하는 子時進陽火하고 午時退陰苻하며, 卯酉 二時에는 마땅히 沐浴해야 한다는 말은 잘못이다. 또한 동지에는 진양화하고 하지에는 퇴음부하며 춘분과 추분에는 마땅히 목욕해야 한다는 말도 잘못이다. 무릇 하늘에는 하늘의 자오묘유가 있고 사람에는 사람의 자오묘유가 있는데 어찌 하늘의 자오묘유로 사람의 자오묘유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몸에 작용하는 자오묘유는 매순간마다 수시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옛 경에 말하기를 하늘가에서 자오를 찾을 필요가 없으니 몸 안에서 일양이 저절로 생겨남이 있으리라고 하였으니 양이 생겨나는 때가 자이며, 음이 생겨나는 때가 오이다. 양이

음과 함께 합하는 때가 묘이며, 음이 양과 함께 합하는 때가 유이다. 이른바 이것이 살아 있는 자오묘유인 것이니 어찌 이것이 하늘가를 기준한 죽은 자오묘유와 같을 수 있겠는가?

금단사백자에 말하기를 화후는 때에서 찾지 말것이니 동지는 자에 있지 않고 아울러 목욕법의 묘유도 헛된 비유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오진편에 말하기를 비록 주사와 흑연을 안다 하더라도 화후를 알지 못하면 오히려 쓸데없는 것이라. 대도는 전부 수지력에 달렸으니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단을 맺지 못한다고 하였다. 동지에 자가 있지 않다고 하고 묘유는 헛된 비유이다라 하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단을 맺지 못한다고 하는 말들에서 가히 하늘가의 자오묘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이것이 하늘을 기준한 자오묘유라고 한다면 열두시 가운데 단지 네 시간만 수지할 뿐 나머지 여덟시간은 버려서 쓰지 않는 것이니 어찌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입약경에 말하기를 하루 열두시 안에 뜻이 이르는 곳이면 모두 수행아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에 마땅히 연월일시 매순간에 공을 베풀어 수지하며 위험을 방비하는데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64괘의 화후에 관한 말도 역시 음양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방법을 가리킨 말로 사람들에게 때에 따라 가감변통하여 공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찌 이것이 사람으로 64괘의 순서에 의지하여 수행하라고 가르친 것이겠는가?

오진에 말하기를 가운데에 을 설정함은 본래 형상을 본뜬 것이니 득상망언하면 뜻이 저절로 밝아지리라. 세상의 모든 어리석은 무리들이 오직 에 빠져 도리어 卦氣로 수행하여 날라 올라가기를 바라는구나라고 하였다.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옛 사람이 상징을 취하고 말을 설정한 뜻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 뜻을 이해하였으면 상은 잊어야 한다.

수진하려는 도에 관한 천경만전이 모두 상징적인 말로 되어 있다.

비록 상징을 취한 것이 다양하나 모두 음양, 역순, 약물, 진가, 화후의 법칙을 밝힌 것으로 그밖에 다시 다른 이론이 없는 것이다.

나는 스승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스스로 터득하고 실제로 상징 가운데 숨은 뜻을 깨달아 감히 나 혼자만의 것으로 하지 않고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려고 한다.

이에 단경의 요긴한 대목을 뽑아내어 조목별로 나누고 그림을 그려 참다운 원리를 전하며 시비를 명석하게 가려서 배우는 사람들의 의심을 깨뜨리고자 한다. 그 나머지는 유추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태중면목(胎中面目)

부모님이 자기를 낳기 이전에는 남녀음양(男女陰陽)의 두 기운이 교감하는 시기인 것이니, 아득하고 어두운 묘명함 가운데에, 한 점 생명력의 기틀이 있어서 허무한 가운데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이 선천(先天)의 진일(眞一)의 조상의 기운이 되는 것이라.

이 기운이 정기와 혈액 속으로 들어가서, 정기와 혈액이 도용(陶鎔)이 되어 혼연일체가 되어 혼연히 하나가 되니, 형체가 없으면서도 형체가 생겨나게 되고, 그 품질은 없지만 곧 품질의 바탕이 생겨나니, 사람의 몸 속으로는 오장육부가 되고, 몸밖으로는 오관(, , , , )과 백해(白骸)가 변하고 화생(化生)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서 완전함을 이룬 것이라, 비록 태아를 회포하고 있는 부인들이라도, 이런 까닭을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를 못한다. 혹 의심하기를 사람이 포태(胞胎)속에 있을 때에, 그 배꼽의 탯줄이 어머니의 기운과 상통이 되어서, 어머니가 숨을 내쉬면 그 태아도 또한 숨을 내쉬고, 어머니가 숨을 들이쉬면 그 태아도 숨을 들이쉬어서, 점점 차례로 변화하여 그 형체를 이루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라, 무릇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기운은 우리가 사는 후천 세상의 기운인 것이니, 후천의 기운이 어찌하여 정액과 혈액을 변화를 시키며 변화를 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그 기운이 포태(胞胎)한 그 속에까지 들어갈 수 있겠는가, 어머니의 포태 속에는 다만 선천의 한 점 기운이 있으니 아주 혼혼(混混)하고 륜륜(淪淪)하게 되어서, 처음 시작의 태기가 응결이 되고, 이미 태기가 잘 길러줘서 마침내는 완성하게 되니 태가 된다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처음에 태가 시작이 되고 마지막에 가서 태가 완성이 되는 것은 다 이 조기(祖氣)가 성취하여 구별되는 것이며, 거기에 잡된 것을 더한 것이 없는 것이라. 이 시기를 당하여서 비록 사람의 형체는 있지만 사람의 도는 없는 것이며, 천지의 만물과 물과 불과 칼날과 병장 기라도 능히 함께 상하지를 않을 것이며, 칠정오욕(七情六慾)과 오적사상(五賊四相)도 함께 능히 그를 가까이하지를 못할 것이다.

궁구하여서 진실한 그 곳에 도달하여서 볼 것 같으면 다만 하나의 텅빈 허공일 따름인 것이다.

예전의 신선들이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도를 수련하여 부모가 자기 몸을 낳아주기 이전의 그 면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 경지이며 곧 허공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니,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무성무취(無聲無臭)의 경지인 것이다. 무성무취 곧 이것은 무극(無極)인 것이라, 무의 지극한 경지는 곧 이 하나의 무의 따름인 것이라.

 

2. 영아면목(靈兒面目)

사람이 어머니의 뱃속에 있은 지 10달이 되면 그 태()가 아주 원만하여, 참외가 익은 것과 같아서 그 꼭지가 떨어지고 포태(胞胎)를 깨드리고 나온다. 이때에, 발은 하늘로 향하고 머리는 땅으로 향하여서, ! 하는 그 한마디 소리에 바야흐로 후천의 기운을 접촉하게 되어서, 그 코와 입으로 하여 들어가서 배꼽 밑에 있는 기해(氣海)인 단전(丹田)까지 기운이 내려가니, 그래서 선천의 원기와 더불어 서로 합하게 되는 것이다. 선천은 몸의 전체가

되는 것이며 후천은 활용이 되는 것이니, 후천 이라는 것은 선천을 빌려 가지고, 호흡이

왕래하게 되고 선천은 후천의 힘을 빌려 가지고 혈맥을 잘 기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 하는 하나의 소리가 날 때를 당하여서는, 여러 수천만년 역겁 윤회의 식신(識神)도 또한 이 구멍에 들어가니 선천의 원신(元神)과 더불어서 아주 혼연히 하나가 된다. 원신은 식신의 힘을 빌어 가지고 존속이 되고, 식신은 이 원신을 빌려 가지고 신령스럽게 되는 것이다.

갓난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비록 후천의 기운과 후천의 신이 있지만, 선천의 기운이 후천의 기운을 통솔하게 되는 것이고, 후천은 선천을 잘 순종하여서 이 선천과 후천이 혼연히 완성되는 것이다. 이때를 당해서는, 아주 혼혼돈돈(混混沌沌)되어서 인식도 없고, 또 알지도

못하지만, 하나의 참일 따름인 것이다. 예전에 신선들이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자기 몸이 태어나는 곳을 잘 선택하여 가지는 것은, 곧 궁구하여서 그 몸이 태어나는 처음 시초의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곧 궁구하여서 영아의 면목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몸이 생겨나는 곳이 부인의 산문(産門)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과 망령된 말이라 하는 것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무릇 이 몸이 태어나는 시초에는

그 어린아이의 면목(面目)이 순수하게 흰빛이며 죄가 없으니, 이것은 성현의 배태(胚胎)인 것이며, 신선과 부처(仙佛)의 싹이 되니 날으는 새도 이 아이를 쫓지를 않으니, 맹수나

뭇 짐승도 아기와 싸우지를 아니하는 것이다. 대개 모든 짐승들이 이 아이를 쫓지도 않으며 다치지도 않는 것은 그 아이가 무심(無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심을 가지고 있은 즉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하여서 무슨 재앙이 있으며, 무슨 근심이 있으리요, 이것은 곧 처음 시초의 지극한 상징인 것이라, 시극(始極)이라 함은 처음 시작의 지극함이니,

후천의 모든 욕심을 사귀지 않는 그 경지인 것이라.

비록 후천과 더불어 서로 혼현히 순수하게 되나 이것은 선천의 관()의 일이며,

그 처음 시초의 지극한 경지에 있음을 인유함이니, 없는 것을 인유하여 가지고 바야흐로

시작이 되는 것이라. 이것이 영아의 참모습인 것이다.

 

3. 해아면목(孩兒面目)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점점 자라나므로 부터 능히 걷지도 하고, 능히 달음박질도 하고, 능히 말도 하고 능히 말대답도 하여,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르치고 또 인도하는 것을 따르게

되니, 그것을 이름하여 그 경지를 해아(孩兒)라고 하는 것이라. - 兒孩(아해)-아이

또 이름하기를 해아의 그 "동자"라고 하는 것이라, 그 해아는 무슨 인식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그 손을 잡고 다니는 어린아이들은 이미 인식도 있고, 알음알이도 있지만은,

뜬 구름이 저 태허(太虛)의 공중에 있는 것을 면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인식도 있고 알음알이가 있는 것은, 이것은 처음 시작의 지극함을 인유하여 점차적으로

태극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태극(太極)이라 하는 것은 그 큰 것이 지극한 것이며, 이 큰 것이 지극하게 된즉 반드시 작아지고, ()이 지극하게 된즉 반드시 음()이 되는 시기인 것이라.

다만 작은 것이 오지 않는 것은 음이 생겨나지 않은 것이며, 작은 것이 오지 않는 것을

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나 오히려 이것은 선천이 용서를 하는 것이라.

후천 세상에 은밀히 숨어있는 것은 비록 지식도 있고 알음알이도 있으나, 그 뿌리의 티끌이 발생이 안된 것이어서, 객기가 오히려 침범하지 않았으니, 어린아이는 배가 고프면 다만

먹기만 하고, 추우면 옷을 입고,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에 따라서

일어나고 없어지게 된다.

이 세상에는 부귀영화와 궁통(窮通)이 있지만 어린아이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그 자연함을 순종하여서 결코 잡된 생각이 없으니, 또한 성현의 경지로 배태가

이것인 것이며, 신선과 부처님의 뿌리와 싹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해아를 가지고서 해아라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해아는 갓난아이를 말한 것이며, 해아는 동자를 말한 것이라, 동자는 천진의 경지를 다 갖추고 있으니, 신분이 높고 낮음도, 지식도 각각 차별이 있지 아니하니, 그런 까닭으로 예전 신선들은 다 근본으로 돌아가고, 으뜸으로 환원하게 되는 것을 해아의 본래의 면목이라 하는 것이다. 완악한 아이들의 면목으로는 이 법을 선택하여 가지지는 않는 것이다.

 

4. 음양분판(陰陽分判)

어린아이로부터 점점 자라나서 2 x 8 = 16살쯤이 되면 기운이 가득 차게 되어서, 양의 기운이 지극하게 되니 음이 생겨나게 된다. 날마다 하나의 구멍을 자꾸 끌로 쪼아 파니 음양이 두 가지로 나누어 져서, 각각 한곳에서 살게 되니, 그 참 속에서 거짓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식이 점점 열리게 되고,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니 이것은 태극이 나누어져 가지고 태극이 태극이 되어 가지고 음양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소위 말하자면은 2x8=16살에 기운이 넉넉하다는 것은, 비유하건대 하늘의 달이 상현(上弦)과 하현(下弦)의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서, 그 빛나는 것이 아주 원만한 현상이 되는 것이니, 그 선천의 양의 지극함을 비유하는 것은 태극과 같은 것이라. 양이 지극하게 되면 반드시 음이 되는 것은, 비유하자면 태극이 한번 혼미한 가운데 개벽이 되어서 음양이 두개로 이탈하게 되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2x8=16살의 생음(生陰)의 설명을 가지고, 의심하기를 남자가 16살이 되면 그 음정(陰精)이 누설이 된다 라고 만 알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시험삼아 이 세상의 남자를 관찰하여 보면은, 14-15살이 되어서 그 정액이 배출이 되는 사람도 있고, 16-17세 되어 가지고 누정(淚精)이 되는 사람도 있고, 18-19세에 배설이 되는 사람도 있어서, 그 나이가 많고 적은 데에 따라 같지 않으니, 2x8=16살이란 것은 나이를 의존한 것없이 기운이 가득하고 영만(盈滿)하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라. 따라서 16살이 되면 기운이 가득하고 영만(盈滿)하게 되는 것이다.

 

5. 오행분위(五行分位)

음양(陰陽)이 한번 나누게 되면 이에 따라서 오행이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오행은 금, , , , 5가지 기운이니 오행이 선천에 있어서는 곧 토생금하고, 금생수하고 수생목하고 목생화하고, 화생토하니 오행이 하나의 기운으로 발생하여서, , , , , (,,,,)의 오덕(五德)이 되는 것이다.

후천에 있어서는 토극수(土剋水)하고, 수극화(水剋火)하고, 화극금(火剋金)하고, 금극목(金剋木)하고, 목극토(木剋土)하니 오행이 서로 상하게 되어, 발생하는 것이 희, , , , (,,,, )욕심인 오적(五賊)이 되는 것이다. 이 오행이 서로 합하면 곧 오덕(五德)이 구비하여 가지고, 혼연히 하나가 되나, 이 오행이 나누어져 흩어지게 된즉, 오적(五賊)이 일어나기 되어서, 그래서 음기와 양기가 서로 섞이고 얼룩지고 복잡하게 되는 것이라.

오행이 한번 나누어지게 되면 식신(識神)이 점점 일어나게 되고, 뿌리의 티끌이 점점 발생하게 되어서, 참 진실한 것은 위치를 물러가게 되고, 거짓된 것이 권리를 담당하여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무렵쯤 가면은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그 면목을 모두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오장(五臟)이 오행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알지를 못한다. 무릇 오장이라 하는 것은 형상도 있고, 그 바탕의 품질도 있는 탁한 물질인 것이니, 후천의 오행에 여우(旅寓)하는 것이 그것이다.

선천의 오행이 도덕의 기원은 아닌 것이다. 만약에 오장을 가지고서 곧 오행이라고 한다면, 오장이 어찌하여 능히 나누어지고 합할 수 있으리오, 오행에는 선천과 후천의 구별이 있으니, 선천은 이 몸이 태어난 뒤에 나타나게 되며, 선천은 이 몸이 태어나기 이전에 근본을 하고 있고, 후천은 이 몸이 태어난 뒤에 나타나게 된다. 선천은 성인으로 태어나게 되고, 후천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으니, 두 가지의 오행을 비록 선과 후로 나눌 수 가 있으나, 이것은 다 활발한 경지인 것이며, 정한 위치를 둘 수가 없는 것이니, 어찌 가히 오장의 그 혼탁한 물질을 가지고 오행을 삼을 수 있을 것인가.

 

6. 후천용사(後天用事)

음양(陰陽)이 나누게 되니 오행이 여기서 분리가 된다. 후천의 기운이 한번 사귀게 되면 선천의 기운은 물러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에 기질(氣質)의 성품을 받은 것이 발생을 하고, 몸밖에서 오는 습관에 물들린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외래의 티끌이 육근(六根)의 머리를 생겨나게 하며 문마다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고, 칠정(七情)의 서자의 종자가 여러 가지로 재앙을 생기게 하니, 순백한 그 전체가 음기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음기가 한번 속으로 들어가니 음기가 점점 자라나고, 양기가 점점 사라지게 되어서, 음기가 자랄 수록 양기는 더욱 사라지니 사라지고 또 사라져서 그 욕심을 따라하는 것이 이르르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모든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기질의 성품을 가지고서, 진성(眞性)이라고 삼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 진실한 심성이란 것은 천명의 심성이며, 선천에 소속이 되어서 사람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다. 기질의 심성은 사람의 성품으로 후천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사람에는 해로움이 있으니, 어찌 가히 후천의 성품을 가지고 이것으로 선천의 성품이라 할 수 있겠는가.

 

7. 순음무양(純陰無陽)

후천의 이 세상은 욕심을 가지고 용사(用事) 를 하니, ()은 앞으로 전진하고, ()은 물러가는 형상이다. 날마다 음은 전진을 하고 양은 후퇴를 하게되니, 해마다 한해를 그렇게 하여서, 마음속으로는 만가지의 잡념이 재앙을 짖게 되고, 밖으로는 만물의 욕심에 끌리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과 몸밖이 서로 공격을 가하게 되니, 양기가 사라져서 다 없어지고 순수한 음이 되고, 결국에는 정기신(精氣神) 3가지 보배가, 다 소모되고 끝나게 된다. 이때에는 혼과 넋도 몸에 존속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죽지 아니하고 어찌 능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그 나이의 수명을 가지고 명()이 끊어진다고 생각을 하며, 하늘에 둔 것이 아닌 줄도 알지를 못한다.

무릇 사람의 인생을 의탁할 곳은 양기인 것이니, 하나의 양기라도 있어서 이 몸에 남아 있다면 죽지를 아니하는 것이며, 하나의 음기가 전진하게 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양기는 자연히 죽는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7가지 도면은 조화지술을 순행하는 세상 사람이 살아나가는 도인 것이라.

 

 

8. 련기축기(煉己築基)

참 진실한 경지를 수련하는 도()는 선천(先天)으로 반환(返還)하는 도인 것이다. 돌아올 "()"자는 내가 이미 가지고 또 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돌아올 "()"자는 양의 기운을 이미 잊어버렸지마는 다시 얻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순음 속에서 그 본래의 진양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후천을 용사(用事) 함으로부터 순음(純陰)이 되었으니 선천의 양기가 다 소멸이 되고 다함에 미쳐 가거늘 만약에 선천의 기운으로 반환하는 공을 두지 않으면, 어찌 능히 없는 것을 가지고 다시 이끌어서 할 수 있으며 잊어버린 것으로 인하여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선천의 양기로 반환하는 공덕은 련기(煉己)를 하고 축기(築基)를 하는 것보다도 더 먼저 할 것이 없다.

"련기(煉己)"라는 것은 억겁의 근본 티끌을 잘 단련하는 것과 기질의 편성도 단련하여서 일체 습관에 물들은 나쁜 기운[習染客氣]과 분(忿)함을 징계하고 욕심을 잘 막기를 극기복예(克己復禮)하는 공덕으로 능히 분함을 징계하고 분함을 막는 일이다.

극기복예를 하는 것은 곧 생각도 없고 염려하는 것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요동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니 근본이 아주 굳고 견고한 것이다. 비유하건대 집을 하나 짓더라도 그 기초를 쌓는 것과 같으니 그 기초의 바탕을 아주 견고하게 하면 나무의 재목과 벽돌과 기왓장 같은 것을 사람을 인유하여 그것을 잘 주작하여 짓는 것처럼 충실한 기반을 잡아야 한다.

련기(煉己)는 기초 바탕을 구축하는데 있는 것이며, 축기(築基)는 자기 몸을 수련하는 데 있는 련기(煉己)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련기(煉己)를 가지고 수심으로 삼고, 축기(築基)를 가지고 폐정(閉精)으로 삼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무릇 련기(煉己)의 공을 바야흐로 끝마치게 되는 일이라. 만약에 음을 다하고 양을 순수하게 하는 그런 시기에 도달하도록 련기(煉己)의 공은 가히 멈추지 말아야 될 것이다. 만약에 마음을 지키고 폐정(閉精)하는 것이, 축기(築基)가 된다고 한다면 어찌 능히 금단의 대사를 할 수 있으리오, 옛 신선들이 말하기를 환단(還丹)을 한다는 것은 일시에 있는 것이며, 련기(煉己)하는 것은 반드시 열 달이 걸린다 하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자 하며, 수심폐정(守心閉精)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9. 천양진심(天良眞心)

연기(煉己)를 한다 축기(築其)를 한다 하는 것을 억지로 강작(强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쓰라린 고초를 겪고 힘을 들여서 용공(用功)을 해야 한다. 먼저 긴요한 것은 하늘의 양심인 참 마음을 알아서 이 참된 진심을 빌리므로 자기 몸을 연기(煉己)한 즉 캄캄하게 어두운 그 속에 곧 한점의 양기가 생겨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어서 이름하여 말하기를 참 진령(眞靈)이라고 한다.

참 진령(眞靈)이 나타나게 되면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찬연히 분명하게 되어서, 물욕에 흔들리지 않고 티끌의 인연에도 물들지 않게 된다. 그 몸을 수련하는 것은 심히 쉬운 일이나 아미 진심을 깨달아 얻지 못한 즉 사정(邪正)을 분간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없다. 이것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제어하는 것을 뜻한다. 마침내는 사람의 인심(人心)을 가지고 그 공덕을 삼아서 강제적으로 하고 억지로 지우니 소위 말하자면 이 망령된 것을 물리치고 제거하면, 그 상상이 거듭되어 가지고 병이 더하게 된다. 진실한 진여(眞如)의 경지를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감에 또한 착각이 있을 수 있으니, 어찌 하여서 멈추지 않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으리오, 어리석은 사람은 사람의 인심을 가지고, 인심을 그릇 인정하여서 진심으로 삼으니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무릇 진심은 무심(無心)으로 하는 것이며, 무심의 마음은 하늘이 주는 진실한 양심의 마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천양(天良)의 마음이 있으면 어찌 자기에게 극거(克去)치 못하는 어려움이 있으리오.

백자(百字)글에서 이르되 움직이고 고요함에 그 종조를 알게 되면 그 없는 일의 경지를 다시 누구한테 찾을 수 있으리오 하였으며, 황학부(黃鶴)에 이르되 이괘(離掛)속의 칠반(七般)의 주사(朱砂)가 진종(眞宗)이 없은 즉, 때때로 머물러 두기가 어렵다 하였다. 장삼봉은 이르되, 축기(築其)할 때에는 반드시 탁약(탁약)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며 연기(煉己)할 때에는 도리어 진연(眞鉛)을 가지고 조종(祖宗)을 삼을 것이라 하였다.

진종(眞宗)이라 하는 것과 탁약(탁약)과 진연(眞鉛)이라 하는 것이니 이는 다 하늘의 양심이며 참 마음의 별명인 것이다. 슬프도다! 하늘이 주는 참 진실한 양심과 참 마음을 어찌 쉽게 알 수 있으리오 이것을 알 수가 있는 사람은 곧 그 하나를 얻어 가지고, 모든 일을 다 끝마칠 수 있다.

마침내는 사람의 인심(人心)을 가지고 그 용공(用功)을 삼아서 강제적으로 하고 억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 인심(人心)은 도심(道心)에 대치되는 말이다. 인정에 끌리게 되어 올바르게 할 수 없으며 우주의 대도(大道)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심이 제일 인줄로 착각하게 되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심을 가지고 활용을 한다는 것은 욕심껏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잘못하는 것이다. 또한 수도(修道)함에도 인심을 가지고 강제로 이루려고 하니 강제로 이룬다는 것은 참선(參禪)을 한다, 금식 기도를 한다, 육경신(六庚辛)을 한다 하는 것들도 모두 여기에 속한다.

 

10. 양장음소(陽長陰消)

하늘에서 내리는 참 진실한 양심과 진심을 알게 되면, 주인공은 중앙 한복판에 은좌(隱坐)하여서, ()를 수행(修行)하니 음기는 날로 감()하여지고, 그 공덕(功德)은 날마다 더 불어나게 된다. 양기(陽氣)는 점점 더 자라나고, 음기(陰氣)는 점점 사라지게 되니, ()의 기운은 자라나고 또 자라나게 되지만 음()의 기운은 사라지고 모두 소멸이 된다. 결국에 가서는 양의 기운을 더 길러야 되겠다.

음기를 더 없애야 하겠다하는 그런 경지를 초월하는 곳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정좌(靜坐)하여서 무위(無爲)로써 적멸(寂減)함으로 완공망상(頑空妄想)하게 되면 양기가 자연히 자라나고 음기가 자연히 소멸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단법(丹法)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음속에서 양을 회복하여야 한다. 만약에 고요하게 정좌하고서, 무위적멸완공(無爲寂滅頑空)을 가지고 양의 기운을 회복하고져 한다면, 양이 어떻게 자연히 오게 되고, 음이 어찌하여 스스로 물러갈 수 있겠는가. "주사(朱砂)""흑연(黑鉛)"을 다 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화후(火候)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비유하지면 한가한 대도시에서 오로지 온전히 수련하고 지탱하는 그 힘을 의지하되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여기서는 단()을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진양(進陽)과 퇴음(退陰)의 도를 알아야 할 것이다.

양장음소(陽長陰消)는 양이 늘어나고 음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도()가 자라고 마()가 물러남을 의미하고 잃었던 선천의 기운으로 회복해 돌아감을 의미한다.

정좌(靜坐)하여서 무위(無爲)로써 적멸(寂減)함은 무엇인가, 고요한 거처에 자리하여 두 눈을 감고 정신 통일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온갖 번뇌(煩惱)가 사라지고 심성의 바닥인 고요한 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여, 완공망상(頑空妄想)하게 되니, 완공은 허공을 구경하는 것이어서 참선(參禪)을 한다 관() 공부를 한다 하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양장음소(陽長陰消)의 원리에서 또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즉 아무리 선()을 한들 어찌 양기가 자라고 음기가 소멸되겠느냐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양기와 음기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인심이 물러나고 도심이 자라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11. 찬족오행((+) 簇五行)

양이 자꾸 자라나고 음이 사라지면, 이제부터는 오행(五行)을 찬족((+) )하여서 모울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행을 찬족((+) )하여서 모은다면 대도는 가히 희망하여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만져 가지고 모으는 찬족하는 그 공덕이니, 이 세상 후천(後天)속에 있으면서 선천오행(先天五行)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후천의 오행들은 피차간에 서로 상극하는 것이며, 선천의 오행은 피차간에 서로 살리는 것이다. 돌아올 "()"자는 서로 상극(相剋)하는 속에서 상생(相生)함을 이루는 것이며, 오행을 서로 상생하여서 살려주면, 혼연한 하늘의 천리(天理)가 될 것이다. 이 오행을 하나의 기운으로 삼으면 사상(四象)이 화합을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지의 뜻을 가지고서 심신의 기운을 인용하여 상하가 서로 사귀게 되고, 간폐(肝肺)의 기운을 운행 시켜서 좌우가 서로 상합(相合)하는 것을 오행을 찬족하는 것이 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잘못임을 알지 못한다. 무릇 오장(五臟)의 기운은 다 형체가 있는 물체이니 형체가 있는 물체는 후천의 찌꺼기 같은 재질로 형성된 것이며, 또 그것이 무너질 수가 있으니, 어찌하여 그것이 응결하여 영구히 무너지지 않는 생명의 보배가 될 수 있겠는가.

오행을 찬족한다는 것은 오행을 모은다는 것이다. 원래 오행은 하나의 기운이 분리되어 나타난 것이니 이러한 오행 때문에 변화가 생기고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생겨나게 된 원인이 된다. 이러한 오행속에 갇혀 있으면 어찌 생사와 윤회속에서 벋어날 수 있겠는가. 상생속에 있으니 은혜가 되고, 상극 속에 있으니 원수가 된다. 이러한 은혜와 미움의 바다 속에서 어찌 대도(大道)를 픶을 수 있으리요.

오행속에서 이를 하나로 하여 회통(會通)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원래의 진면목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이것이 찬족오행의 원리이다.

 

12. 음양혼합(陰陽混合)

오행은 음양속을 쫓아 나누어서 나타났으니, 오행을 찬족하여 만들어 모아서, 이것을 합하여 하나로 삼는 것이다. 곧 음양을 합쳐 하나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음양을 혼합하여 금단(金丹)의 상징을 둔다는 것은 해아면목(孩兒面目)을 하는 것이나, 다만 후천의 기운에 불과한 것이, 오히려 화거(化去)하지 못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다 화거하지 못하였지만 선천(先天)의 양의 기운을 반환하여 돌이키고, 후천으로 곧 순종하는 것은 또한 능히 재하(再下)는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를 쫓아서 다시 하나의 그 무거운 공부를 더할 것 같으면, 금단을 가히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심장(心臟) 신장(腎臟)이 서로 사귄다고도 하고, 혹 독맥(督脈)과 임맥(壬脈)이 서로 모이며, 혹 남녀가 서로 사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 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무릇 금단이라는 것은 선천의 허무한 기운이 엉키고 응결하는 것이다. 어찌 후천의 기운과 혈액의 형상이라는 것들을 가지고 능히 엉기고 응결을 하게 할 수 있으리요.

음양(陽陰)을 모으는 것을 무엇에 비유할 것인가.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라서 혜아(孩兒)가 되며 또 자라서 분별을 하는 것처럼 수도(修道)를 한다는 것은 이 과정을 거꾸로 가는 것에 불과하다. 음양이 혼합됨은 바로 분별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혜아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혜아면목(孩兒面目)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을 모르니 어리석은 사람은 음양이 교감한다고 하여, 남여가 사귀고, 심장과 신장을 통하게 하며, 임맥과 독맥을 통하게 하니 이것은 모두 잘못됨에 불과하며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이다.

 

 

13. 혼연일기(渾然一氣)

음양이 혼성(混成)한 그 반환(返還)에 들어가면, 말하자면 어린아이들이 해아(孩兒)의 면목(面目)을 이미 회복한 것이 된다. 이것을 쫓아서 혼연이 천연(天然)의 진화(眞火)를 운행하게 되어서, 그 후천의 나머지의 음()을 불로 뜨겁게 하여 제거를 하여서, 아는 것도 없고(無識) 화합할 곳도 없는(無和) 그곳에서 신()을 갈무려서 기운을 모으는 곳에 돌아갈 수 있다. 소위 말하자면 남아(男兒)가 잉태할 수 있다고 하는 경지가 여기인 것이다. 저개(這個)에서 이 잉태를 하게 되면 곧 이것은 영아의 얼굴과 같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자기의 몸에서 기운을 받아서 살아 나갈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이는 처음 시작의 지극한 경지이며, 곧 태을(太乙) 진기(眞氣)를 머금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이 홍연(紅鉛)을 채취하고 매자(梅子)를 다 따고, 그것을 복식(服食)하여 먹어서, 성태(聖胎)을 상결(想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만약에 홍연(紅鉛)과 매자(梅子)를 가지고 능히 성태(聖胎)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맺혀지는 것은 혈액의 덩이나 고기 덩어리에 불과 할 것이며, 이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귀신의 태()가 될 따름이니 그 다른 것을 어찌 희망을 할 수 있으리오. 혼연일기는 음양의 두 기운이 화합되는 경지이고 우주가 나타나기 이전의 경지이다. 두 기운이 합하여 하나가 되니 여기에는 다툼도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니 다만 신령스런 기운만 있을 따름이다.

 

14. 태공허무(太空虛無)

성태(聖胎)가 응결되면 다시 열달(十月)의 온양(溫養)하는 공덕을 더하여서, 천연(天然)의 진화(眞火)의 법을 운행하여서 훈증팽련(熏蒸烹煉)하여, 미소함을 인유하여 환하게 나타나게끔 하고, 아주 부드러운 것을 인유하여 견고하게 하여서, 음을 다 박진(剝盡)하여서 없애니, ()가 원만하고 단()이 여기서 형성된다. 마치 참외가 다 익어서 꼭지가 절로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 홀연히 혼돈함을 타파하여서, 청정한 법신(法身)으로 하여 나타나게 되어서, 크게 비고 허무한 경지로 뛰어 들어가서, 삼계(三界)의 밖으로 뛰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라. 이것은 곧 자기 몸이 태어나기 이전의 면목으로 하는 것이며, 또한 무극(無極)의 면목(面目)이 그런 것이며, 그 도는 무극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

그 형체와 신명은 함께 현묘하게 되어서, ()와 더불어서 참 진경에 합할 수가 있으니, 대장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능히 끝마치게 될 수 있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혹은 거울을 상대하여 연신(演神)을 하고, 혹은 묵묵히 말없이 자기의 정문(頂門)을 상상하고, 혹은 자기 얼굴을 면벽(面壁)하고 또 자기의 형체도 잊어 버려서, 음신(陰神)의 종류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금단(金丹)을 하여서 탈화(脫化)를 하는 이 신명은 양신(陽神)인 것이며, 그 일체의 모든 것이 정공(靜功)으로 나타나는 신()은 이에 음신(陰神)이 되는 것이라.

양신은 만년 동안이라도 길이길이 불생(不生)할 수 있고 불멸(不滅)도 할 수 있지만 음신은 불로 단련하여서 몸을 비리는 그 석을 경과하지 않으면은, 또 몸에 들어가서 천문만호(千門萬戶)로 되니 만약에 금단대도(金丹大道)를 점화(點火)하는 것을 깨달아 얻지 못하면, 비록 음신을 가지고 출입하여 자기 스스로가 문득 앞일도 알고 뒤의 일을 깨달아 안다고 할지라도, 윤회(輪廻)를 뛰어넘어 도망하기가 어려우니, 소위 말하자면 그대의 그 천만겁 세월을 배부르게 먹을 지라도 마침내는 공망(空亡)에 떨어질 것이다. 이상의 7가지의 그림은 다 조화지술을 역행을 하여서 신선의 길을 수련하는 것이라.

14의 그림 중에서 순행하고 역운하는 두가지 일을 대략 가히 알것이라, 이 밑에서는 긴요한 상언(象言)을 집어내어서 간사하고 바른것을 나누어서 판단하고 그 진실한 뜻을 가르켜 나타내어서, 학자들에게 보여주니 모든 이와 같은 종류는 자기 뜻으로서 회통(會通)을 하여 볼 것이다.

15. 금단(金丹)

"()"이라는 것은 견고하고 강()하여서 영구히 변하지 않는 물체를 말하며, "()"이라는 것은 매우 원만(圓滿)하고 빛나며 청정(淸淨)하고 이즈러짐이 없는 물체인 것이라.

옛날의 신선들은 금단(金丹)의 이름을 빌려서 원명(圓明)하여 참으로 진실하고 신령스러운 심성을 비유한 것이니, 이 심성을 유교에서는 이 이름하여 왈 태극이라 하고(在儒則 名太極) 불교에서는 원각이라 하고(在佛則名圓覺) 도교에서는 금단이라 하니(在道則名金丹) 이 명칭이 비록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지만 그 실제는 하나를 달리 말할 뿐이다.

유교에서는 잘 수련한 즉 성인이 되고(儒修之則爲聖人) 불교에서는 잘 수련한 즉 부처님이 된다고 하고(釋修之則爲佛), 도교에서는 잘 수련한 즉 신선이 된다고 하여(道修之則爲仙), , , 선 삼교의 성인들은 본래의 참 심성으로써 도를 완성하는 성도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혹 오금(五金)을 사용하여서 그것을 불에 달구고 단련하여 약을 만들어서 팔석(八石)을 삼는다고 하나 이것은 참 금단(金丹)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참진성(眞性)이 크게 짖는 화로(大火爐) 속에 있어 불을 사용하여 단련하여 가지고 성숙되게 한다면, 천지와 더불어 길이 장구(長久)하게 되며, 일월(日月)로 더불어 광명을 할 수 있으니, 어찌 이 범세속에서 그 물질을 가지고서 능히 이룰 수 있으리오.

 

16. 천지지심(天地之心)

()을 수련하는데 제일 중요하게 착안할 것은 반듯이 천지(天地)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지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늘의 진실한 양심과 진실한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은 황홀(恍惚)하고 매우 아득하고 어둡고 묘명(杳冥)하여서 가벼이 어떤 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텅빈 방에서 흰 광명(光明)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면 그 어두움 속에서도 홀연히 밝게 되는 시기인 것이며, 바야흐로 하나의 답서가 노출하게 되니 하늘은 양에 소속이 되고 땅은 음에 소속이 되며 천지의 마음은 이에 양은 음을 벗어나지 않고 음은 양을 벗어나지 않아서 음양(陰陽)이 서로 합하는 마음인 것이다.

음양이 합하여 이 심성이 있게 되고 음양이 나누어지게 되면 이 마음도 없는 것이니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곧 색이라고도 할 수 있고 곧 공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없는 것도 아니니, 곧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이 세상에 색이다 공이다 하는 그곳에 하나도 구애됨이 없고, 있다 없다 하는 것도 여기에는 세울 수 없는 것이니, () 공속의 소유인 것이다. 이 마음을 깨달아 인식()을 얻어 잘 지키고 실수를 하지 않은 즉 큰 근본을 확립하게되고 그 다음의 일은 쉬운 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다 고기덩이의 완악(頑惡)한 그 마음이 그 위에 있어서 이것을 잘 모아서 어루만지되 혹은 운심을 하는 것으로 이것을 천지지심(天地之心)이 라하고 혹 어떤 사람은 중궁에 마음을 머물게 두는 것을 천지에 마음이 된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다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무릇 완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우리가 사는 이 욕심인 후천 세상의 사사로운 욕심과 인심을 말하는 것이니, 마음을 움직이여서 동심(動心)을 한즉, 있다하는 그것에 착상이 되고 마음을 묘하게 한 즉 없다하는 없는 것에 착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곳에 마음이 머물게 하여두면 형상에 집착하게 되니, 이와 같은 마음은 천지의 마음과 더불어서 구름과 비늘()이 서로 상극되는 거와 같다. 대개 천지의 마음은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하나로 되어서 적연(寂然)이 움직이지 않지만은 느끼기만 하면 드디어 통달이 되며, 그 느끼어서 통달된다고 하지 많은 본체는 움직이지 아니하니 어찌 고기덩어리의 완악한 마음을 말하리오.

 

17. 언월로(偃月爐)

반달과 같은 그것은 비슷이 누워서 우러러 있는 눈썹의 반달인 것이다. 달이 그믐이 되면 그것이 지극히 밑으로 나타나 또 그곳에서 밝은 것이 생겨나서, 사람이 지극히 고요한 그 속에서 홀연히 하늘의 뿌리(天根)가 되어 나타나서 노출되어 있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도심(道心)이라고 하는 것이며 반달은 언월의 현상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라, ()라 하는 것은 불을 운행하는 기구라고 할 수 있으니, 그 도심의 양광(陽光)을 가지고서 능히 일신(一身)의 음기(陰氣)를 다스려 단련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또 화로(火爐)가 된다고 비유하였으니, 말 하지면 참된 도심(道心)을 말하는 것은 모두, 천지의 마음을 가지고서 체()로 말을 하고, 천지의 마음이 되는 그것을 가지고 활용()을 하며 말을 하고 있을 다름이다.

그러나 도심(道心)의 한 물체인 것이니 하나를 가지고 달리 말할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단전(丹田) 밑의 불두덩이 뼈밑인 횡골(橫骨)위의 불룩한 곳을 언월로(偃月爐)의 화로(火爐)라고도 하고, 혹은 마음 심()자 한 획이 위로 굽어 올라간 그것을 빗대어 말하기를 그릇된 고기덩어리의 마음이 된다고 하여서 언월로(偃月爐)가 된다고 하였다.

채전가(採戰家)들은 처녀의 산문(産門)을 가지고 언월로(偃月爐)의 화로(火爐)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무릇 언월로(偃月爐)라고 하는 것은 도심(道心)의 빛나는 광휘(光輝)가 되는 것이며, 이 빛나고 비취는 곳에는 모든 사심(邪心)과 사기(邪氣)가 다 멸망이 되니, 능히 성인이 될 수 있고 능히 신선도 될 수 있는 것이라. "자양옹(紫陽翁)"을 찾으라 하고 또 이르시기를 화로 속에는 욕예(꽃술예)가 생겨나고 속에는 주사정(朱砂鼎) 속에는 수은(水銀)이 평지(平只) 하다고 하니 다만 불의 힘을 이용하여 조화를 시킨 다음에 그 황아(黃芽)가 점점 장성하여 자라남을 얻을 수

 

18. 주사정(朱砂鼎)

주사(朱砂)라고 하는 것은 화지색(火之色)이니 그 불로 인()하여, 능히 모든 물체를 단련(火段鍊)을 하여서, 예전의 옳지 못한 것을 모두 제거를 하는 것이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솥 정()자를 가지고 주사정(朱砂鼎) 즉 주사의 솥이라는 상징을 한 것이다.

불이라고 하는 그 물체는 가장 신령스럽고 가장 신비로워서 모든 물체를 감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 신명(神明)은 비취지 아니하는 곳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며 모든 일을 성취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런데 신()에는 원신(元神)과 식신(識神)이 있으니, 식신(識神)을 하면 능히 도()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며, 원신(元神)을 하면 능히 도()를 이룰수가 있는 것이라.

대개 식신(識神)이라는 것은 아득한 세월에 역겁(億劫)을 두어서 그 뿌리에 티끌을 달고 있게되고, 원신(元神)의 신령함을 빌려서 망령됨이 자꾸 나타나니 자기의 심성(心性)과 성명(性命)을 다 잊어버리는 곳에까지 이르지 아니하면 멈추지 않는 것이라. 반드시 중요한 일은 원신(元神)을 가지고서 식신(識神)을 제거하여야 되는 것이다. 이 식신(識神)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곧 삿된 마음의 불이 꺼져 버리고, 그 사기의 불[邪火]이 꺼진 뒤에는 참 진화(眞火)가 생겨나고, 진화(眞火)가 생겨나야만 그 기운이 화합이 되고 그것이 인온(絪縕)하게 되어서, 그 생기가 멈추지 아니하니, 대도를 가히 희망할 수있는 것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소소하게 밝고 밝은 또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운 그 식신(識神)이 원신(元神)이 된다고 그릇되게 인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조차도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무릇 원신(元神)이라 하는 것은 신이 신령(神靈)이 아닌 그 신인것이며, 신령스러우면서 가장 진실하고, 진실하면서 가장 신령스럽게 되어서, 그야말로 소소(昭昭)히 밝고 령령(靈靈)이 신령스러운 신명이니, 이에 그것이 귀신이면서 참 귀신인 것이라. 비록 신령(神靈)스러우나 거짓이 있는 것은 거짓속에 신령(神靈)스러운 것은 그것이 신이 윤회법(輪廻法)에 어긋나는 종자(種子)가 되는 것이라, 예전에 신선들은 이르되,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오는 것이 생사(生死)의 근본이며 이처럼 어리석은 "(; 어리석을 치)"라는 사람을 본래의 사람이라고 부르더라 라고 하니, 곧 생사(生死)의 뿌리는 식신(識神)이라고 하는 것이라.

 

19. 원빈지문(元牝之門)

()은 양()도 되며 강()한 것도 되고 움직이는 것도 되며, ()은 음()도 되고 부드러움도 되고 고요한 것도 되는 것이다.

원빈지문(元牝之門)은 이에 음양(陰陽)의 구멍()이 되는 것이며 강하고 부드러운 문()이 되는 것이며 움직이고 고요한 동정(動靜)의 관문(關門)이 되는 것이어서, 방향도 없고(無方) 장소도 없고(無所) 형체도 없고(無形) 형상도 없어서(無象) 굽고 곧고 하여서 허공(虛空)에 달려있는 한 구멍과 비슷한 것이니, 오행(五行 ; 水火金木土)이 이르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며 사대(四大)가 이르지 못하는 경지인 곳이며 지극히 없으면서 지극히 있는 것을 함축하게 되고 지극히 텅비어 있는 것 같은데 지극히 진실함을 머금고 있으니 이에 음양이 서로 상합(相合)하는 속에 하나의 구멍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과 코가 원빈(元牝)이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무릇 입과 코라는 것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문이 되는 것이며 음양이 출입하는 문이 아닌 것이라 음양이 서로 합하여야만 신선도 되고 부처도 되건을 [][]로 들이쉬고 내쉬는 그 기운이 어찌 능히 신선이되고 부처가 되리오 오진인(悟眞人)이 이르되 원빈지문(元牝之門)은 세상의 한가로운 일이다. 장차 입과 코로써 망녕되이 들이쉬고 내쉼을 알아 잘 지키는 자만이 선불을 이룰 수 있음이 바로 이것이라.

 

20. 원관일규(元關一竅)

원관(元關)이라 하는 것은 지극히 으뜸되고 현묘한 관문의 입구[關口]인 것이며 죽고 사는 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낳고 죽이는 방(生死戶)이 되며 천인의 세계[天人界]가 되며, 형덕(刑德)을 하는 문이 되는 것이며, 있다 없다 하는 궁[有無窮]이 되는 것이며, 신과 기의 혈[神氣穴]이 되며, 비어있고 진실한 바탕[虛實地]이 되며, 십자로(十字路)라고도 하니 이처럼 여러 가지의 다른 이름이 있으나, 이 하나의 구멍을 형용하지 않은 것이 없다.

원관(元關)이라고 하는 것은 곧 원빈(元牝)이라고 하는 것의 별명의 이름이라, 그 음양이 인하고 있으니, 그런 까닭으로 원관(元關)의 문이라고 말을 하며, 얼마나 현묘한지 가히 측량(測量)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런 까닭으로 원관(元關)의 구멍이라고 말을 하지만은 그 실제는 다 하나의 구멍일 따름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혹 심장 밑에 신장 위의 곳을 원관(元關)이라 하고 혹 어떤 사람은 미려(尾閭)를 원관(元關)이 된다고 하고, 혹은 협척(夾脊)과 쌍관(雙關)을 가지고서 원관(元關)이 된다고 하니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대개 원관(元關)은 정한 위치가 없는 것이니, 만약 정한 위치가 있다고 한다면 곧 원관(元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 "진허백("陳虛白)"이라는 사람은 그 생각하는 머리의 곳을 원관(元關)이라고 하는데 옳은것 같지만, 또 참으로 이것도 아닌 것이라. 그 머리의 생각하는 것이 일어나는 그곳은 이미 후천의 형체가 있는 그곳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어찌하여서 원관(元關)이라고 일컬을 있으리오.

 

나는 지금 여러 사람과 더불어서 분명히 황홀(恍惚)하고 묘명(杳溟)한 그 속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과 있다 없다 하는 유무(有無)가 서로 들어가는 그 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 오진편(悟眞篇)에 말하기를 황홀한 그 가운데에서 현상이 있는 것을 찾을 수 있고, 묘명(墓銘)한 그 속에서 참 진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니 있다, 없다 하는 것을 쫓아서 자연히 서로 들어가지마는 어찌하여서 그 상상하는 생각만으로 생각을 얻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는 것이라, "사백자("四百字)"의 글에는 말하기를 이 구멍은 보통의 평범한 규()가 아닌지라 건곤(乾坤)이 같이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름하기를 신기의 혈(神氣穴)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속에는 감이(坎離)의 정기가 있으니, 이것을 참으로 원관(元關)하나의 "구멍[]"을 말한 것이다.

 

21. 곡신(谷神)

곡신(谷神)이라는 것은 빈 골짜기의 신인 것이다. 곡신의 속명은 애왜(崖娃)라 고 하니, ()라 하는 것은 양쪽 산의 높이 솟아난 그 중간 사이의 골짜기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소리친즉 골자기의 가운데로 소리가 전달하여 가니, 그런 까닭으로 이름하여 곡신(谷神)이라고 하는 것이다.

도를 수련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빌려 가지고 사람의 몸에 허령한 신을 비유한 것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을 텅 비워둔 즉 신령스러워지고, 텅 비어 있지 않으면 신령스럽지 못하니 신령(神靈)스럽다는 것은 바로 텅 비어 있는 그곳에 나타난다는 것을 또한 이름하자니 곡신(谷神)이라고 하는 것이라.

()자는 형체도 없고, 형상도 없이 신령스러워서, 가히 이것으로서 측량하고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니, 소위 말하자면 적연히 고요하며, 움직이지 않지만은 느끼하면 드디어 통달하는 것이 이 신인 것이다. 소위 말하자면 성태(聖胎)가 엉키어서 되는 것은 이 신인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신이 천궁에 있는 것을 곡신(谷神)이라 하고, 혹 어떤 사람은 신이 황정(黃庭)을 지키는 것을 곡신(谷神)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에 말을 하자면 신이 천국에 있고 신이 황정(黃庭)에서 지킨다면, 곧 이것은 텅빌 수 없으니, 텅비어 있지 않으면, 신이 없게 되거늘 어찌 하여금 곡신(谷神)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리요.

오진편(悟眞編)에 이르시니 곡신(谷神)을 깨달으면 길이 길이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반듯이 원빈(元牝)을 잘 의지하여 근기를 확립하여서, 진실한 그 정기로 이미 황금실(黃金室)로 돌아가게 되면은 한 낱알의 신령스러운 영광은 영원히 원빈(元牝)을 이탈하지 아니하고 합하여서 가운데 중()자가 되는 것이라. 곧 비워지게 되고() 비워둔 즉 참 신령이 참 으로 신령스러워서 항상 존속이 되어서 어둡지를 않는 것이라. 참 진실로 정미롭고 또 신명스럽고 빛나는 곡신(谷神)을 다 진령(眞靈)의 한 일물(一物)에 비유하였을 따름인 것이라.

 

22. 금정옥로(金鼎玉爐)

황금의 솥[金鼎]은 강()하고 강()하며 견고한 물질이니 사람의 인지(人志)의 그 생각을 오르지 하나로 하면 능히 도를 실을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뜻을 가진다.

이름하기를 금정옥로(金鼎玉爐)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매우 따스하고 부드럽고 평정한 물체로 사람이 공부를 점진적으로 하여서 능히 매우 구원하고 오래 오래 한다는 것을 비유한다는 뜻이다. 또 이름하기를 곤로(坤爐)라고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솥을 주조(鑄造)하여 만들어서 그 진흙의 부엌으로 만들어서 금()과 석()을 태우고 소련(燒練)하여서 망상의 생각으로 그 단()을 이룬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대개 형체가 있는 화로(火爐)와 솥은 다만 능히 형체가 있는 보통 범약(凡藥)을 잘 단련(鍛鍊)시킬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형체가 없는 신선의 약은 단련을 시킬 수 없는 것이라. 예전의 신선이 말씀하시기를 정정(鼎鼎)하지만 근원을 말 하자면 그 솥은 없는 것이며, 로로(爐爐)하지만 그 또한 화로(火爐)가 아닌 것이다.

소위 말하는 화로(火爐)라고 하는 것은 그 도를 수련하는 공덕은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이 두 가지를 모두 활용을 하여야만 바야흐로 모든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르고 태우고 소련(燒練)하는 거와 같이하기를 집에 솥이 있다면, 가히 화로(火爐)가 밑에 불타는 화로가 있을 것이며, 화로가 있다면 가히 솥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솥과 화로를 함께 갖추어서 잘 구비를 하여야만 바야흐로 능히 약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

 

23. 오토약물(烏兎藥物)

[]속에 금까마귀[金烏]가 있다는 것은 양()속의 음()이 되는 것이며 달[]속에 옥토끼[玉兎]가 있다는 것은 음속의 양이 되는 것이라. 하늘의 해가 주역의 괘상에 있어서 이()괘가 되는 것은 바깥은 양이고 속에는 음효가 되는 것이니 그 강한 것 속에서도 부드러움이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뜻이다. 하늘의 달을 주역의 감중연(坎中連)이라 하는 것은 밖에는 음이 있고 속에는 양화(陽火)가 있으니 그 부드러운 속에 강한 것이 있다는 것을 비유한 뜻이다. 금단(金丹)의 도라 하는 것은 오직 강한 것 속에 부드러움을 취하여서 가진 것과 부드러움 속에 강한 것을 취해 가지고서, 두 가지 맛이 있는 진음(眞陰)과 진양(眞陽)의 그 큰 약을 녹여서 하나의 기운으로 화생시켜서 이 단을 완성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약물이라는 것은 진음(眞陰)과 진양(眞陽)으로서 능히 늙음을 들이켜 가지고서, 동자로 환원하여 그 나이를 연장시키고 수명을 더하게 하는 것이라. 그 거북과 뱀이 서로 얽키고 설켜서 맺어져 있는 것과 물과 불이 서로 상제(相濟)하고 있는 것은 또한 이 이치가 되는 것은 현저하게 그 상징을 가지고서 진음(眞陰)과 진양(眞陽)이 하나로 합하는 그 도를 증거하는데 불과한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까마귀 오자와 토끼[烏兎]의 그 두 글자를 의심하여서 혹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 하늘의 해의 정기와 달의 빛을 들여 마시고 혹 어떤 사람들은 눈으로 하늘의 해의 정기와 달의 빛을 들여 마시고, 혹 어떤 사람들은 눈으로 하늘의 해의 정기와 달의 빛나는 것을 무릇 접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는 것이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해와 달이 있는 것이니, 사람의 몸에 진음(眞陰)과 진양(眞陽)은 곧 사람의 까마귀와 옥토끼의[烏兎]이 되는 것이라. 하늘가의 해와 달의 정화스러운 빛은 우리와 더불어 서로 멀리 있지만은 어찌 능히 그것을 채취하여 올 수 있으리요. 만약에 말하기를 능히 채취한다고 하면은 곧 그 채취된 것은 자기의 몸밖에 사기인 것이니 오래되면 반드시 몸속에 고창(月鼓,)증을 얻게 되고, 몸밖으로 보아서는 설명하게 되어 눈이 어둡게 되니, 유익한 것은 없고 손상만 있으리라.

 

24. 용호상회(龍虎相會)

()의 성품은 부드러움을 주장을 하여서 만물을 살리는 목()에 소속이 되니 괘상에 있어서는 진()이 되는 것이며, 사람의 부드러운 성품을 비유하는 것은 진()이 본래 양인데 부드러운 그 상징을 취해 가지는 것은 양이 적고 음이 많은 것이다.

[]의 성품은 강()하니 죽이는 것을 주장을 하고, 그 물체는 금()에 소속이 되어 있으니 괘상에 있어서는 태()가 되는 것이며, 사람의 강한 정[剛情]에 비유한 것이다. ()는 본래는 음인데 강한 상()을 가지는 것은 음은 적고 양은 많은 때문이다.

이 심성(心性)과 정성은 피차간에 그 가로막히고 구애된즉 기와 성[氣性]과 진청(塵淸)이 되어서 그 상생(傷生)한 것이 손상이 되는 것이라. 피차(彼此)간 서로 합하게[相合]된 즉 참 진실한 심성(眞性)과 참다운 인정[眞情]이 되어서 그 삶이 유익하게 되고 용과 범의 기운이 서로 모이게 되니, 이것은 심성(心性)을 가지고 그 심정(心情)을 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 심정(心情)을 가지고서 성품(性品)을 구하는 것이다.

그 성품(性品)과 심정(心情)이 하나로 합하게 되는 뜻이니 동쪽 집의 딸과 서쪽 집의 아들과 짝을 하여서 부부가 되고 장남과 소녀의 두 집이 서로 하나로 합하여서, 금목이 서로 어울리는 현상은 이 진성(眞性)과 진정(眞情)이 교구(交溝*)하는 것을 비유하는 뜻을 비유함이 아닌 것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간을 가지고 용이라 하고 허파를 범이라고 하여서 그 배꼽의 제심(臍心)으로 간과 폐의 기운을 운행을 하고 혹 어떤 사람은 단전(丹田)에서 그렇게 하고, 혹 어떤 사람은 황정(黃庭)을 그렇게 하여서 용호가 서로 교구()하여 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 미처 간폐의 기능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 후천의 이 세상에 형체가 있는 기운인 것이니, 다만 능히 한곳에 응결됨이 아니함이 아닌 것이지만은, 곧 강하게 뭉쳐 가지고 모으고 쌓으니 오래되면 좀먹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며(久成蠱), 의술로 다스리는 법은 없는 것이니,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라 어찌 우습지 않으리요.

 

25. 감이전도(坎離顚倒)

()괘는 밖에 음효가 있고 속에는 양효가 있으니, 이 괘의 속은 양이어서 물이 되고 밖에는 음이어서 불이 된다. ()의 도는 감중련(坎中連)괘의 양효를 가지고서 이()중절괘 속에 음효를 매꾸어서 물기운을 가지고 불의 기운을 제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물은 위에 있고 불은 밑에 있는 것이며, 물과 불이 서로 전도하게 되니, 또한 이름하자면 감리(坎籬)괘가 전도(顚倒)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심을 참으로 아는 신수(神水)로 사람의 위태한 마음의 신령스러운 아름아리의 삿된 불을 제제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

나의 참을 아는 것[眞知]은 밖은 어둡고 속은 밝은 것이니, 이것은 감중련(坎中連)괘의 밖은 음이고 속은 양인 것과 같은 형상이다. 나를 신령스럽게 하는 밖은 밝고 속은 어두운 것은 이중절(離中絶)괘의 밖은 양이고 속은 음과 같이 하는 것이다.

참 진실로 아는 것을 가지고[眞知], 귀신처럼 신령스럽게 아는 것[靈知]을 제어해야 하고, 신령의 힘을 빌려서 신령스럽게 아는 것[靈知]을 가지고서 참으로 아는 진지(眞知)에 순종하여야 한다. 그 참[眞知]과 신령[靈知]의 둘을 하나로 하여서 그것을 응결하여서, ()을 성취하는 것을 또한 감리(坎籬)와 수화(水火)를 전도하여서 상제(相濟)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영아(*실사 제외纓兒)와 아름다운 여자[女宅* ;찬여]와 연(黑鉛)과 붉은 수은[紅汞]에 현사에 이르러서는 또한 참으로 아는 것과 신령스럽게 신령으로 아는 거와 그 두가지를 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신장(腎臟)을 가리켜 감중련(坎中連)이 된다고 하고, 심장(心臟)을 이중절(離中絶)이라고 하여서, 신장의 기운을 상승시켜 심장의 기운과 교감하게 하고 심장의 기운을 하강시켜 신장에 하강하여서 그 것이 감리(坎籬)를 전도한다고 한다.

규단(閨丹)을 채취하여 가지돼 남여로서 영아와 자녀를 삼아서, 남자는 밑으로 하고 여자를 위로 하는 것을 감리전도(坎離顚倒)라 하고, 또 태우고 단련[燒練]하는 그 사람들이 흑연(黑鉛)을 가지고 수은(水銀)을 제어한다고 하고, 혹은 화로 밑에 왕성한 그불과 솥위에 담겨있는 물로 감리(坎籬)라고 하여서 수화(水火)를 전도하여 상제(相濟)를 한다고 하는 것은 무릇 이것은 다 그릇됐지만 그릇됨을 알지 못하는 때문이다.

무릇 참 진실한 도를 수련하는 도는 그 참인 진실한 것을 수련하는 것이니, 모든 형체와 바탕과 찌꺼기에 바탕이 있는 것과 간사한 행동과 추잡한 그 일의 종류는 거짓인 것이며, 참 진실한 것이 못되니 어찌 능히 참 진실함을 있으리오.

 

26. 오행전도(五行顚倒)

오행(五行)이 순생(順生)한 한다는 것은 일목(一木)이 불()을 살리고, 이금(二金)이 물()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오행(五行)이 꺼꾸로 전도(顚倒)된다 하는 것은, ()에서 나무()가 생겨나고, ()에서 금()이 생겨나는 것이다.

()에서 생겨난 나무()라는 것은 영원히 썩지 않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무가 불에 타서 변하여 숯이 되어 땅속에 들어가 영원히 썩지 않는 그런 종류인 것이다.

물이 금에서 생겨 나타난다는 것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금()이 되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그 흩어진 쇠를 화로속에서 녹아 -이 되어 한 덩어리를 이루게 되는 것은 그 분 외에 아주 반짝이는 밝은 것이 생기게 하는 조명인 것이다.

불이 나무를 생한다는 것은 비유하건대, 사람의 본성은 큰 화로속에서 불이 일어나 그것을 하련(불화변, 데울 하瑕煉)이 되어서 나오게 되면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요동되지도 않은 성품이 되는 것이라.

물이 금을 생한다는 것은 비유하건대 사람의 참 정상(眞情想)은 욕심의 바다 파도 속에 있지만 친히 과거를 잘 건너게 되면 영원히 티끌도 없고 때도 없는 그런 정상(情想)이 되는 것이다.

예전에 신선들이 말씀하시기를 오행(五行)을 순리적으로 순행을 하면은 이 우주의 법계(法界)의 세계는 불구덩이가 되는 것이며, 오행(五行)을 꺼꾸로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일곱가지 보배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지를 말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동에 있는 것을 운반하여 가지고 서쪽을 희롱하게 되고 아래 있는 것은 채취하여 위에 것을 보충을 하며, 앞에 것을 밀어()가지고 뒤로 운행을 하는 것을 오행(五行)이 전도(顚倒)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라.

뛰쳐 한몸에 순음은 속으로는 심, , , , 신이 되고 밖으로는 눈()과 귀()와 코()와 혀()가 몸이 되는 것은 그것이 다함이니 이것이 가물인 것이다. 목구멍의 기운이 끊어지게 되면 한 덩어리의 냄새나고 더러운 골육이 되는 것이니 어디 이 하나의 참된 것이 있을 수 있으리오, 만약에 이 거짓 물체의 망상(妄想)을 가지고서 이 심성(心性)을 요달하고 생명을 요달할 것 같으면 어찌 능히 할 수 있으리오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27. 황파매빙(黃婆媒)

황파(黃婆)라 하는 것은 중앙 토()의 모체가 된다. 능히 음양을 잘 조절을 하고 사상(四象)을 화합하게 하니, 고로 이름하여 황파(黃婆)라고 하는 것이다.

도교의 단서(丹書)에서는 이 원리를 빌려서 능히 진의(眞意)를 깨우치고 이것을 빌려서 사람은 참 진의(眞意)의 가운데 진신(眞信)을 가지고서 심성(心性)과 정성을 화합하게 하고 정신을 잘 기르게 된다는 뜻을 비유한 것이라. 참 의지(眞意)와 참 믿음(眞信)은 곧 우리 몸 속의 황파(黃婆)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소위 말하자면 황중(黃中)에 통리(通理)라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뜻을 알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오장(五臟)의 기운을 운행을 하여서 회합(會合)하니 이것을 가지고 황파(黃婆)라고 하고, 또 조얼(造孼)하는 무리들이 활용을 능히 하여서 말하기를 노부(老婦)가 희롱을 하고, 남여가 행음(行淫)을 하는데 처녀의 머리를[首經] 취하는 것과 매자(梅子)를 황파(黃婆)이 된다고 하는 것은 크게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무릇 진토(眞土)는 위치가 없는 것이며, 참 의지라 하는 것은 형체가 없으되, 모든 물체를 살려 주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진리에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능히 삼가(三家)에 모이게 되고 오행(五行)을 돕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이름을 하여 황파(黃婆)라 하거늘, 어찌 의지의 생각의 뜻으로 요망하는 것을 짖는 노부(老婦)를 말하리오.

 

28. 이팔양현(二八兩弦)

하늘의 달이라는 것은 그믐과 초하루의 사이로부터 사귀는데, 초사흘에는 그 미소한 광명이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초팔일에 이르러서는 음()속에 양()이 한 반이나 되어서 비유하건대 활()의 그 둥근 시위와 같으니 이것을 상현(上弦)이라고 말한 것이다. 16일이 되면 원만하게 둥글되, 한 음기가 태내에서 미소하게 검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고, 23일 날이 되면 양속에서 음이 반이나 되니, 또한 활()의 시위와 같아서, 이것이 하현(下弦)이 되는 것이다.

상현(上弦)은 수()중의 금() 팔량(八兩)을 얻게 되고, 하현(下弦)은 금() 가운데의 수() 팔량(八兩)을 얻게 되어서 2x8=16 1()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과 수()가 서로 여기서 멈추게 되니 음양이 서로 화합이 되는 현상이 된다.

단서(丹書)에는 이 원리를 빌려서, 강하고 부드러운 것이 서로 합방하는 것을 비유를 하였으니, 편벽 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은 지극히 중도가 되고 지극히 바르게 되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혹 남자가 16살이 되는 것은 2816의 그 양현(兩弦)의 기가 만족하게 된다고 하여서, 그래서 드디어 음정을 늑패(勒閉)하여 닫고, 혹은 흑연(黑鉛)팔냥과 수은(水銀)반근을 2816의 그 양현(兩弦)의 약재(藥材)가 된다고 하여서, 그것을 요리하고 단련(鍛鍊)하고 복식(服食)을 하지만 그런 것은 다 그릇 되다는 것조차 알지를 못하니 애석하다.

사백자(四百字)에 이르시길 상현(上弦)의 금팔량과 하현(下弦)의 수은(水銀) 반근의 양편을 합하면 그 정액인 건곤(乾坤) ()를 합쳐서, 이에 양현(兩弦)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일음일양(一陰一陽)인 것이다. ()은 강하여 양()이 되고, ()은 부드러워서 음()이 되어서, 음양이 서로 짝을 하게 되는 것이고, 건곤(乾坤)의 체()가 여기서 형성이 되니, ()은 여기에 그 상징이 있게 되는 것이니, 양현(兩弦)의 뜻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29. 서미주(黍米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인 포배(胞胚)속에 있을 때에는 혼혼돈돈(混混沌沌)하고, 혼혼미미(昏昏迷迷)하여서, 다만 혼연한 하나의 기운(一氣) 가운데에 있는 것이며 별도로 다른 물체가 없는 것이니 소위 말하자면 태을(太乙)이 진기(眞氣)를 먹음고 있다는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 기운은 지극히 신비롭고(至神) 지극히 현묘하고(至妙), 지극히 텅 비어있고(至虛), 지극히 신령스러워서(至靈), 지극히 없는 것 같은데(至無) 지극히 있는 것(至有)을 갈무려 있는 것이다.

삼원(三元)과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이 모두 그 속에 포용이 되어 있으며, 그런 까닭으로 능히 형체가 없으되 변화를 하는 것이니, 소위 변화를 하여서 무궁한 까닭인 것이다.

오장(五臟)과 육부(六腑)와 구규(九竅)와 백해(百骸)는 자연히 갖추어서 그렇게 성취(成就)가 되어 있으니 그 지극히 신비스럽고(至神), 지극히 현묘하고(至妙) 지극히 텅 비어있고(至虛) 지극히 신령스러움(至靈)으로 인하여서, 이름하여 진령(眞靈)이라 하는 것이며, 또 이름하기를 귀신이 아닌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에 한 기운(一氣)이 진명(眞名)의 경지를 머금고 있는 것을 참 진기(眞氣)라고 하는 것이며 그 어머니의 뱃속을 나오는데 다다라서 그 신령스러운 것이 하나의 기운을 머금게 되는 것을 이름하여 신령스러운 기운인 즉 영기(靈氣)라 하는 것이다.

하나의 기운이 체()가 되는 것은 곧 참 진공(眞空)이 되는 것이며 그 참 신령스러운(眞靈)것이 모든 것을 활용()을 하는 것은 곧 묘유(妙有)의 경지인 것이며, 참 진기(眞氣)와 참령(眞靈)과 참진공묘유(眞空妙有)인 것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다만 이것은 하나의 참 진인 것이다. 이 참 진이라 하는 것은 형체도 없고(無形) 상징도 없는(無象)것이며, 소리도 없고(無聲), 냄새도 없는(無臭) 것이며, 가히 말로서 전해줄 도리도 없고, 붓으로 역시 이의 형용을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니, 마치 한 기장쌀의 작음(黍米)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예전의 신선들은 이 참된 것을 일컫기를 기장쌀과 같은 보배와 구슬이라 하니 비록 기장쌀이라고 말을 하나 참 진실로 기장쌀과 같은 형체도 없는 것이고 그 한 점의 신령스러운 기운으로 인하여서, 중앙에 이것이 숨겨져 있으니 그런 까닭으로 이름하기를 기장쌀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 점의 기장쌀과 같은 신령스러움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서 우주의 기운 덩어리인 허공(虛空)에서 이것이 혼돈(混沌)하게 되어서, 천지인(天地人) 삼계(三界)가 거기에 포용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이름하기를 서미(黍米)의 구슬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진실한 곳에 이르러 그 진리를 살펴본다면, 이것은 홍몽(鴻蒙*삼수변)하여서 세상의 일들이 아직 판별이 아니되었을 때의 그 기운(氣運)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여자의 수경(首經)의 매자(梅子)가 서미주(黍米珠)의 구슬이 된다고 생각하며, 또 가신(家神)을 공부하여 정신이 명당(明堂)에 있는 것이며, 오래 되어서 그 안광(眼光)이 흩어져서, 서미(黍米)가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으니 다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무릇 홍몽(鴻蒙)의 판정이 이루어지지 아니하였을 때의 기장쌀과 같은 그 구슬은 성인이 거기서 태어나고, 현인이 거기서 태어나고, 신선이 거기서 이로워지고, 부처님이 거기서 이루어지는 신령스러운 보배가 되는 것이니, 어찌 탁한 혈액의 물질과 상상속의 빛()으로 가능하다 하리요, 사백자(四百字) 주해석에 가로되 혼돈(混沌)이라는 것은 허공(虛空)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허공(虛空)이라 하는 것은 천지인(天地人) 삼계(三界)를 포용하는 것이나 그 근원인 한 쌀알(黍米)과 같은데 미쳐 간다면 한 쌀알의 서속쌀 같은 크기인 것이다. 그 기장쌀의 크기를 찾는데 미쳐 간다면, 삼봉옹(三奉翁)이라는 이분은 말하기를 누군들 이것을 알 것이며, 누군들 이것과 회통할 것이며, 누군들 이것을 실행 못하오리마는 다만 그 쌀알 같은 그 기운 덩어리인 홍몽미판한 경지의 기장쌀 같은 그 서미(黍米)위에서 미혹된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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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아닌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 성품 심성을 말함.

 

先天先地

 

{ () -- () -- () } ====> 太乙 含眞氣

 

不色不空

 

태을은 양보의 기운을 말하며 음양을 떠난 경지를 말한다.

30. 화후괘상(火候卦象)

단경(丹經)에서는 모두 육십사괘(六四卦)인 양화(陽火)가 되고 음부(陰符)가 되는 법상(法象)이 있으니, 이로부터 건곤(乾坤) 두괘로 그것을 솥이 되고 화로가 되는 정로(鼎爐)로 삼는 것이며, 그 양강(陽剛)과 음유(陰柔)를 갖이고서 전체를 삼는 것이라. 감이(坎離) 두괘를 갖이고 약물(藥物)이라 하는 것은, 강하고 부드럽고 중정(中正)함을 갖이고서 활용을 삼는 것이다.

복괘(復卦)와 구괘(垢卦)의 두괘는 음양의 기운이 사귀고 경계로 삼는 것이니, 그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갖이고 운용하되 각각 그 시기와 절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둔괘(屯卦)와 몽괘(夢卦)의 두괘는 천지 조화의 시초로 삼는 것이니 그 진화(進火)를 맞이하여 모름지기 강한 것을 활용 하는 것이며, 퇴화(退火)는 반듯이 부드러운 것을 활용하는 것이다.

기제(旣濟)와 미제(未濟)로서 조화의 끝마침을 삼는 것은 그 양화(陽火)를 갖이고 강한 것으로 활용을 하되 가이 너무 지나치게 하지말고 그 음부(陰符)를 갖이고 부드러운 것을 활용을 하되 가히 중정(中正)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의 54괘는 건곤감이복구둔몽기미(乾坤坎離復垢屯夢旣未)의 이 10괘를 갖이고 운용을 하여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요약하여서 말을 한다면은, 음양을 갖이고서 서로 마땅하게 회합하여서 혼연히 이들을 가지고 하나로 합하여서, 그 상으로 돌아간 뒤에 멈추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64쾌를 안음()하기를 년, , , , 위에 억지로 주작(做作)을 하고 용공(用功)을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무릇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조화지술은 하나의 기운이 유행(流行)을 하고서, 이것이 순환(循環)을 하여가지고 다시 회복이 되고 시작이 되어서, 이것이 순환하여서 끝이 없거늘 어찌 64쾌를 쫓아서 운행을 하리오 64쾌라 하는 것은 이것은 성인들이 천상(天象)과 지체(地體)와 음양(陰陽) 조화를 잘 관찰하여 보아서 그래서 64쾌를 지었으니, 이에 음양(陰陽)의 조화(造化)가 되는 그 해석으로 주해석을 할 따름인 것이라. 사람 몸의 조화는 천지의 조화로 서로 합하게 되어서, 자연히 64쾌가 있으니 어찌 가히 주역(周易)의 글에 구애되고 64괘의 괘상에 집착할 수 있으리오.

 

31. 생아지문(生我之門)

하늘의 달이 서남(西南)에 이르러서 그믐이 다하면 아주 선명하게 밝으니 서남방은 곤()에 소속이 되며, 순음(純陰)의 방위가 된다. 순음(純陰)의 아래에 한 양기(陽氣)가 움터서 생겨나게 되니 위에는 곤()이고 밑에는 진()의 상징이 된다. 이들의 괘상은 지뇌복(地雷復)괘가 되는 것이며 달에 있어서는 언월(偃月 )이 되는 것으로, 그 고요함이 지극한 속에서{靜極} 홀연히 하늘의 마음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름짓기를 도심(道心)이라고 하고, 또 이름짓기를 천량진심(天良眞心)이라 하니 앞에서 소위 말한 것이 언월로(偃月爐)인 것이다. 만약에 이 마음을 발견하여 보면 그것을 보수하고 지켜서 실수를 안하게 되는 것이다.

진양(進陽)법으로 나아가고 퇴음(退陰)으로 하는 이 이치를 잘하기를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하는것 같이 하여서 반드시 양의 기운이 점점 생겨나고, 음의 기운은 점점 물러가게 하여서, 음의 기운이 다 하여서 끝나고 양기(陽氣)운이 순수하게 되면 신선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서남방의 곤()의 위치와 그 방향은 우리를 살리는 문(生我之門)이 되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부인의 산문을 가지고 나를 낳는 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산문(産門)은 사람을 낳는 곳이므로 어찌 신선을 낳을 수 있으리오.

 

32. 사아지호(死我之戶)

하늘의 달은 동, 북쪽으로부터 양광이 장차 없어지게 되니 동북방은 간방(艮方)에 소속이 되어서, 음의 기운이 장차 순수하게 된다. 양광의 빛은 아주 적고 미소한 것이며, 위에는 간()이고, 밑에는 곤()에 그 상징이 있는 것이며, 쾌상에 있어서는 산지박(山地剝)괘가 되는 것이고, 달에 있어서는 복완(覆碗)이 되는 것이다.

그 객기가 소멸하여 박괘가 되는 것은 진원(眞元)에 이르는 뜻을 비유한 것이다.

만약에 출세 장부와 용맹한 남자가 확철하게 깨달아서, 회두(回頭)하여 이 한점의 양의 기운을 잘 빌려서, 그 밝음을 가지고 어두운 기운을 깨뜨리고, 그 공덕을 잘 활용하고 수련을 하여서 유지하도록 하여야 한다.

선천의 반본환원(返本還元)하는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아니하지만 보통의 모든 사람은 미혹이 되고 깨닫지를 못한다. 그 음기에 순종하여 양기(陽氣)를 박살하니, 결국은 양이 다 없어지고 순수한 음기만 남거늘, 무엇인들 능히 할 수 있으리오. 주역(周易)에는 말하기를, 동북방은 벗을 상하게 된다(東北喪朋)고 하고, 도교의 단서(丹書)에서는 이르시길 우리가 죽는 문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부녀(婦女)의 산문을 가지고 우리를 죽게 한다고 하지만 그릇된 것임을 알지를 못한다. 무릇 사는 문과 죽는 문은 다 형체도 없고 상징도 없는 문호가 되는 것이니 음에 순종하게 되는 즉 죽게 되는 것이고, 거스러서 양의 기운으로 한즉 살아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생문(生門)이다

사호(死戶)다 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지만 그 참 진실한 것은 다만 한 구멍일 따름인 것이라. 예전의 신선은 이것을 칭하여 말하기를, 살고 죽는 관문이라고 하였으니 비록 관문이 된다고 이름을 하였으나, 또한 방향도 없고 장소도 없는 것을 이에 억지로 이름을 지어 그렇게 한 것이라.

오진(悟眞)의 책에서는 말을 하되 모름지기 이 죽는 문을 가지고 사는 문으로 삼아야 되고 생문을 가지고 죽는 사문으로 이름을 지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만약에 죽는 살기를 모아 가지고 밝혀서 이것을 반복을 하여 돌려야만 비로서 해로움을 받는 그 속에서 문득 은혜가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아 알 수 있으니 여기에서만이 "생문이다", "사문이다"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

* 복완(覆碗)은 달의 밝음을 어둠이 가리면서 점차 그믐으로 가는 모습을 비유함.

 

33. 유위지궁(有爲之窮)

유위법(有爲法)의 도()는 있는 것을 가지고 구멍을 보고져[觀竅] 하는 공덕을 말한다. 구멍을 관찰해 본다[觀竅]는 것은, 음양 조화의 구멍을 관찰하여 본다는 것이다. 후천(後天)의 것을 빌려 가지고 선천(先天)의 기운을 돌이키고, 사상(四象)을 화합을 하며, 오행(五行)을 잘 만져서 모으고, 채약법(採葯法)을 써서 그 불기운을 운행을 하여서, 스스로가 단()으로 돌아감으로써 태를 응결하는데[結胎] 이르게 되니 공부의 차례는 다 그 속에 있다.

만약에 참 스승님이 입으로 전해주고 마음으로 넘겨주는 일이 없다면, 털끝만한 생각의 차이로 그 행동은 천리나 벌어지는 실수가 있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후천(後天)에 있어서 환상적인 피부와 또 주머니 위에서 기혈을 헤치고 희롱함을 가지고 유위법(有爲法)의 도가 된다라고 하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를 못한다.

무릇 금단(金丹)의 도라 하는 것은 선천(先天)의 학문인 것이니, 능히 잘 만지고 다듬어서 남로르게 우주의 조화 기술을 빼앗아 가지고서 거슬러서 기운을 기틀을 돌리켜서 건곤(乾坤)의 모든 것을 전도(顚倒)하게 되면 천지(天地)보다도 자기가 먼저 하는 것이다.

하늘도 그것을 어기지 못하거늘, 이 도의 경지를 어찌 주작(做作)을 하여 짓겠는가, 후천(後天)의 우리 한 몸은 형체도 있고[有形] 바탕도 있는 물체[有質]로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음이라.

정양옹(正陽翁)께서는 말씀하시길 콧물과 침과 정기와 혈액과 칠반(七般)의 신령스러운 물체는 다 음()인 것이다. 만약에 이 물체를 가지고 단()의 근본을 삼는다면 어찌 하늘을 날을 것이며 옥경(玉京)에까지 다다를 수 있으리오. 자양옹(紫陽翁)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정기의 침을 넘겨 삼켜 가지고, 기운을 나게 하는 것은, 이 사람은 약방(藥房)에 있는 것을 실행을 하여서, 능히 조화를 생기게 할 것이라, 그 규중(閨中) 에 만약 진종자(眞種子)가 없게 되면 오히려 장차 작은 소대불을 가지고서, 텅비어있는 솥에 닦는 것이니, ! 슬픈지라, 금으로 된 두꺼비하마[]와 구슬로 된 늙은 가마로 참으로 깨달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작가들의 유위법(有爲法)의 도가 되는

 

34. 무위지묘(無爲之妙)

무위법(無爲法)의 도는, 곧 없는 것을 가지고 그 현묘한 것을 관찰하고자 하는 것이며, 성인(聖人)의 태()가 응결한 이후의 일인 것이다. 고요하게 관찰하는 하나의 기운이 변화하는 현묘한 것을 적나라한 것이며, 성인(聖人)의 태()가 응결함을 당한 후에 후천(後天)의 기운이 이미 선천(先天)으로 돌아간 것이다. 다만 목욕(沐浴)의 법과 온양(溫養)의 공덕을 활용을 하여서 그것을 잃어버리지 말고, 돕지도 말아서 천연(天然)의 진화(眞火)의 법을 운행하여서 훈증(熏蒸)에서 변화를 하여야 한다.

자연히 무형(無形)에서 형체가 생겨나게 되고, 바탕이 없는 곳에서 그 바탕이 생겨나게 되어서, 참외가 익어 가는 것처럼 꼭지가 떨어지게 된다. 이처럼 그 어린아이가 출현하여서 앞서게 되어 무화(武火)의 공을 팽련(烹煉)할 것 같으면, 다 버리고서 쓰지를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심성(心性)과 생명을 염려하지 않으면, 무엇을 가지고 수도를 할 것이며, 또한 무엇을 가지고 배운다고 할 것인가. 방문(旁門)과 곡경(曲經)에 대하여서 적은 법을 가지고 거기에 편승하니, 문득 산에 들어가 고요하게 혼자 앉아 관문(關門)을 닦고 정신을 안정하고 있으니, 무위법(無爲法)을 한다는 것은 그릇됐다 하는 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무릇 심성(心性)과 이 생명이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쌍수(雙修)의 공부를 하되 아주 긴요히 두 가지로 하는 것이니, 양단(兩段)이라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유의법(有爲法)을 가지고서 먼저 자기의 생명을 요달을 하여야 되고, 한편으로는 무위법(無爲法)을 활용하여서 그 위에 자기의 심성(心性)을 요달하여야 되는 것이다. 어찌 텅비어 공허하고 또 고요히 앉아 이 신을 안정하여 능히 자기의 심성(心性)과 생명을 요달한다고 할 수 있으리요.

오진(悟眞)에서 말하기를, 자기가 수련하여 단전(丹田)에 돌아가지 못하였거든 산에 입산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산속의 안과 밖은 다 그것은 연()이 아닌 것이며, 보배는 사람 사람마다, 집집마다 그것을 두고 있지만,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는 것이 온전치 않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처음에 자기가 유작(有作)을 하여 수련을 할 때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다가 자기가 수련을 쌓아 모아서 무위법(無爲法)에 이르러서는 여러 사람이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라.

다만 무위를 발견하여 보면 아주 현묘하고 기묘하게 되거늘, 어찌 유작(有作)하는 것을 가지고 이 근본의 기초로 인정하여서 알리오 하니, 여기에서 가히 유의법이다 무위법(無爲法)이다 하는 것은 각각 그 시기의 절차가 있는 것이며, 각각 작용함이 있어서 크게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5. 혼속화광(混俗和光)

풍속에 혼합하고 그 세월에 화합하는 것을 혼속화광[混俗和光]이라 하니,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속세에 은거해 있음을 말함이고 시장이나 조정에 크게 숨어서 작용하는 것이다.

혼속(混俗)은 풍속에 혼합하여서 산다는 것으로 이 세상의 풍속 속에서 남 모르게 혼합하여 살면서도 이웃이라 할지라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화광(和光)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잘 화합을 하되 그 사람한테 물들지 않는 것이고, 티끌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티끌 세상을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혼속화광(混俗和光)은 능히 풍속에 혼합이 되고 세월에 화합을 하여서 그 밖을 원만히 하여서 모든 만물과 상응을 하되 자기 마음속을 아주 정직하고 모나게 하며, 자기의 주제심을 두어야 한다.

이 세상의 법률을 쫓아서 살면서 바른 독법을 수련하는 것이며, 어두운 것을 환하게 나타나게 하고 순()하게 하는 것을 역()으로 상응하게 하여서 막히는 것도 없게 하고 주선할 것도 없게 할 것이니 그렇게만 한다면 도를 실행하기는 지극히 쉬울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혹 의심을 하기를, 이 세상에 혼합이 되고 그 시기에 화합을 하고 살면 이로써 날마다 순간 순간의 모든 일에 휩싸이게 된다. 낯에는 날마다 모든 일에 반응하여 살고 밤에는 고요하게 수련하는[靜修] 것으로 잘못 알고있다. 이처럼 말한다면 이 풍속에 슛아살면 옳지만 이 세상에 혼합이 되어서 산다는 것은 곧 불가한 일이다. 종속(從俗)과 혼속(混俗)은 다르다. 종속(從俗)은 세속에 그대로 물들어 버리는 것이니 이것은 폐광(閉光)이지 화광(和光)은 아니다.

대개 풍속에 혼합이 되어서 살고 또 화광하여서 사는 도는 능히 천지조화(天地造化)의 관문을 탈취하여서 빼올 수가 있고 음양을 살리고 죽이는[陰陽生殺]의 비결(秘訣)을 훔칠 수 가 있으니 어찌 쉽게 실행을 할 수 있으리오.

 

36. 약귀토부(藥歸土釜)

()의 성품은 아주 온화하고 부드러워서 능히 모든 만물을 기를 수 있다. []이라는 것은 팽전(烹煎;삶고 볶고 요리함)을 주제 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을 삶을 수 가 있는 것이니 능히 그 물체를 완성[成物] 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은 흙[]으로 이름할 수 있다는 것은 만물을 기르고[養物] 성취하는[成物] 그릇이 된다는 것이지 보통의 심상(尋常)의 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보통의(尋常) 가마솥[]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가히 약물이 솥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음양을 서로 합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성인(聖人)의 태()가 응결하여 되는 것이고 온양(溫日*)의 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성태(聖胎)를 온양(*)하는 것은 온전하게 하나의 의지(一意)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데 있으며, ()의 도를 아주 응집하여서 미덥게 잡아서 음양을 서로 마땅하게 하고 편벽 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하는 것이며 또한 흙의 솥으로 이름을 하는 것이다.

참 진실한 그곳에 이르러 연구를 하여보면 다만 하나의 가운데 "()"자 일 따름이다. 이 가운데 "()"자를 잃어버린즉 음양이 편벽이 되고 오행(五行)이 분리가 되는 것이니 성인(聖人)의 태는 여기서 상하게 될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가운데 ""자를 지키는 것은 성인(聖人)의 태를 따스하게 기르는 묘한 비결이 될 것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땅을 파고 화로를 설치하여 주사(朱砂)를 기르게 되고 그 주사(朱砂)속의 수은을 취한다고 한다. 흙의 화토[土爐]를 가지고 흙의 가마솥[土釜]라 우기기도 하며, 혹은 진흙의 화로를 가지고 회지(灰池)로 삼아서 그 납을 태워서 회지(灰池)에 집어넣어 회지(灰池)로 은()을 얻어내려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회지(灰池)를 가지고 흙의 가마솥[土釜]으로 삼는 것은 다 그릇된 일이라는 것을 다 알지를 못하는 것이라.

자야(子野)는 이르시되 참 진실한 중앙토[眞土]는 위치가 없는 것이며[無位] 참 의지[眞意]라 하는 것은 형체[]도 없는 것이니 특별히 가운데 "()"자의 흙가마 솥[土釜]는 형상도 없고[無形] 상도 없는 것이며[無象] 방향도 없고[無方] 장소도 없는[無所] 것이나 그 능히 형성함을 이루어서 온전히 성인(聖人)의 태[聖胎]를 이룰 수 있으므로 가마솥[]로 이름하였으니 어찌 진흙덩어리의 가마솥에 구애됨을 말 하리요.

 

37. 응결성태(凝結聖胎)

성태(聖胎)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태()를 말하니, 거기에는 인식도 없고(無識) 아름아리도(無知) 없는 어린아이들의 본래 면목인 것이다. 그 도가 지극하니 무식(無識)하고 아무것도 알지를 못하지만(無知) 백신(百神)이 그곳에 모이는 곳이고 만가지 인연이 여기서 모여 멈추게 되어 혼혼돈돈(混混沌沌)하게 되어서 황홀하고 아득하고 묘명한[恍惚杳冥]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유위법(有爲法)으로부터 무위법(無爲法)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심액(心液)과 신기(腎氣)를 운행을 하여 서로 사귀어서 황정(黃庭)으로 하여금 성인(聖人)의 태로 삼는다고 하며, 혹은 중궁(中宮)에서 이 신령을 도달하여서 성태()가 된다고 한다.

기운을 운행하여서 신존(神存)하야 중궁(中宮)에 머물러서 그것이 성태()가 된다고 하는 것은 다 그릇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성태(聖胎)는 형체도 없고[無形] 바탕도 없으며[無質]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태라 하는 것은 참으로 진실한 신령스러운 것으로 형용이 있는 것은 아니니 그것이 응결이 되어 흩어지지 않게 하는데 불가한 것이다. 만약에 기운과 혈액을 억지로 응결시켜 태()를 형성시키려 한다면 이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귀태(鬼胎)가 될 뿐 오래 살 수 있는 성인(聖人)의 태()는 아닌 것이다.

 

38. 시월태원(十月胎圓)

10개월이 되면 태가 원만해진다 하는 것은[胎圓], 정신이 온전하고 기운이 풍족하며[神全氣足] 그 뿌리의 티끌[根塵]이 제거되어 없어지고 객기가 다 사라져서 없어짐을 말한다.

음은 다 사라지고 양이 순수한 형상이 되어서[陰盡陽純] 마치 부인이 태를 품고 있는것 같으니 이렇게 10개월이 되면 단()도를 능히 이룩할 수 있으며 10개월이 되면 태()가 원만해 짐을 비유한 것이다.

성태(聖胎)가 응결한 뒤에 우리가 해야할 일은 위험한 생각을 방지하야 하니 목욕(沐浴)의 수련과정을 겪고 온양(溫養)의 수련과정을 실천하면 기필코 원만히 이루어져 이지러짐이 없는 곳에 다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10월이라 하는 것이 달력상의 10개월의 기한을 정한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10(十月)이라 하는 두 글자를 의심하여서 혹 기운을 운행[運氣]을 하고 혹은 자기 심성(心性)의 상념을 존속[存想]하며 혹 응신(凝神)을 하여 망령된 생각을 하면서 10달이라고 하니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참 진실한 경지를 수련하는 도[修眞]는 채약(採藥)의 수련과정으로부터 팽연(烹煉)의 수련을 거쳐서 단()을 응결시키고[結丹] 성태를 이룸으로써 지극히 탈화(脫化)하게 되니 그 중요함이야말로 한량없는 공덕을 허비하는 것이어늘 어찌 10(十月)이라는 것으로 이에 상징을 말할 수 있으리요.

 

39. 영아출현(兒出現)

간난아이()가 출현한다는 것은 성태(聖胎)가 탈화(脫化)하는 것을 말한 것이며, 성태(聖胎)는 색신(色身)속에서 또 하나의 법신(法身)을 품고 있는 것을 말한다.

탈화(脫化)라 하는 것은 색신(色身)속에서 또 하나의 법신(法身)을 생출(生出)하는 것을 말한다. 색신(色身)속에서 법신(法身)을 생출(生出)하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범부(凡婦)10달 동안 잉태(孕胎) 를 하여서 하나의 어린아이를 낳는 것과 같으니, 그런 까닭으로 법신(法身)을 이르길 영아()라 하는 것이다.

영아()가 몸밖에 출현(出現)하게 되면 자기 몸이 삼계(三界) 밖으로 뛰어 나아갈 수 있으니 오행(五行)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윤회법(輪廻法)을 파하고 들어가서 천지와 더불어 그 수명을 같이하고, 일월(日月)과 더불어 혼륜(混侖言)을 하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감중련(坎中連)속에 진양(眞陽)이 법신의 영아()가 된다고 하고 혹은 신중(腎中)의 정기(精氣)를 착각하여 법신(法身)의 영아()가 된다고 잘못 말한다. 무릇 감중련(坎中連)속에 영아()라는 것은 음속의 양인 것이고 법신영아(法身)는 이에 음양의 혼화(混化)한 참 진인 것이다.

그 신장의 가운데 이르러서는 이에 신장(腎中)의 사화(邪火)가 되는 것이며 결코 영아()의 뜻이 없거늘 어찌 실어금 혼륜(混言侖)하여 말을 하리요, 오진편(悟眞篇)에 이르시니 영아()가 이 하나를 가지고 진기(眞氣)에 합할 것 같으면 열 달 동안에 그 성태(聖胎)가 원만하게 되어서 성인(聖人)의 기초에들어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사백자(四百字)글에는 이르되 부부가 교회(交會)하는 그때는 동방(洞房)에서 구름과 비(雲雨)가 지어져서 한해에 한사람의 어린애가 태어나되 그 개개(箇箇)의 사람이 모여서 학을 탄다고[騎鶴] 하니 여기에서 가이 법신(法身)이 영아()라 하는 그 설명을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이라.

 

40. 이로환정(移爐換鼎)

대도(大道)가 원만하게 성취되면, 몸밖에 몸이 있을 수 있고 그 형체와 신기[形神]가 함께 현묘하게 되어서, 대성인(大聖人)의 지위에 도달한다. 이렇게 되면 노()다 정()이다 하는 용구과정은 소용이 없게 된다. 어찌 노()라 정()이라 하는 그 일을 다시 거론하리요.

이로환정(移爐換鼎)의 공부과정은 이러한 법신(法身)을 가지고 이것을 잠장(潛藏)하고 치밀하게 길러서, 그 신통한 경지를 변화하는 따름인 것이라. 옮긴다 하는 것은 무슨 화로(火爐)의 과정인 것이며, 그 바꾼다 하는 것은 어떠한 경지의 공부인 것인가?

()이야말로 우주의 태허(太虛)인 것이고 이()하는 화로란 바로 무위법(無爲法)이니 이것으로 하여금 노()라하는 과정이 된다. 이렇게 전진하고 실천하여서 앞으로 나아가면, 건정(乾鼎)이라는 경지로 곤로(坤盧)라는 것과 주사정(朱砂鼎)과 언얼로(月盧)라하는 것은 하나의 약물(藥物)이 되는 것이니, 이 다들이 모두 갖추어 진다 할지라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다만 사용하여야 할 것은 법신(法身)일 따름인 것이라. 법신(法身)이라 하는 것은 그 허무한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변하고 스스로 화생하고[變化化生], 더욱더 텅비게 되고, 더욱더 신기하여서, 더욱 없는 거와 같이되고, 아주 신비하고 현묘하여서 측량할 도리가 없는 것이며, 그 변화야말로 무궁하게 되니, 말을 하자면, 아들이 손자를 낳게 되고 또 손자를 낳는 것과 같다.

가지가 이 정도에 이르르게 되면 공력(功力)을 쉬어 마치며 허공(虛空)을 타파(打破)하여서 상천(上天)의 천라(天羅)의 경계에까지 뛰어 오른다. 바야흐로 요연히 모든 일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참 진실한 전기(眞傳)를 얻지 못하고 신외유신(身外有身)을 오해하고 도를 밀쳐내고서는 머리를 쳐드는 자가 있으나 그렇지가 않다.

고효가(高爻歌)에 이르시길 일물(一物)도 걸치지 않고 도를 오방(五方)에 드러내어 투출(透出)하니 도인의 모습이라. 선동(仙童)과 선녀(仙女)가 오색 찬연한 구름을 타고 오명궁(五明宮)에서 영접을 하는구나!라고 했다. 진을 전해주고 참을 바라보니 법신(法身)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함을 알게 되매 바야흐로 그 공덕(功德)이 지극하다.

41. 이세(離世), 련수(煉睡), 공행(功行)

여기서부터는 상언파의의 내용을 요약한 글로써 칠언절구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보충 설명을 붙여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연재는 3편씩 묶어서 할 것입니다.

 

1. 이세(離世)

이 세상의 천가지 일들은 참되지 못하니, 이 세상 풍속의 사랑과 은혜와 인연이 가장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한다. 한 칼로 두 가지를 짤라버려서 거기에 끌리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 도량 속에서 초월하고 해탈(解脫)하여서 하나의 무한한 자유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보충 : 세상을 떠나라고 한 것은 욕심과 세상일로부터 자유로와지라고 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 해를 하기 쉽기 때문에 이 말을 속세를 등지고 산 속으로 들어가 입산수도하라고 한 말로 착각하면 안된다. 세상일들은 모든 인연과 은혜와 사랑에 얽혀 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멀리하라는 것으로 그렇게 하니 무한히 자유스러운 사람이 된다.

 

2. 련수(煉睡)

잠을 적게 자는 것이 수마를 단련한다는 것은 아니다.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을 자는 것도 집어치우고 등라(藤蘿)같은 식물이 자기를 얽는 것도 짤라 버려서, 모든 세속의 인연을 다 제거하여 버려야만 심성(心性)이 아주 맑고 정정하게 되는 것이니 밤낮으로 잠만 자면서 무엇을 이룰까 걱정을 하는고.

보충 : 성인은 꿈이 없다고 하니 꿈이 없다면 잠을 잘 필요인들 있을 것인가. 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이니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잠자고자 하는 마귀를 항복 받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잠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훗날을 도모하니 이를 경계한 것이다.

 

3. 공행(功行)

사람이 행동하고 수련할 시 도덕을 쌓아 모으는 것을 가장 먼저 하여야할 것이다. 공덕이 크고 행동을 깊이 한다면 하늘도 감동하여 움직이거늘, 가소로운 일은 이를 가벼이 웃어버리고 오직 자기의 몸만 이익 되게 할뿐 공덕은 쌓지 않으면서 신선을 이룬다고 망상을 하더라.

보충 : 행동은 어떻게 하여야 하며 공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은 마음을 닦는 일이니 다른 것은 모두 그 다음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며 흔들리거나 방황하지 말도록 해야한다. 그러면 무엇이 공인가. 남을 위한 일이 다 공인 것이니 덕을 쌓은즉 이것이 모두 공이 된다.

 

42. 금단(金丹), 원관(元關), 식신(識神)

4. 금단(金丹)

선천(先天)의 본래 심성(心性)을 말하자면 "()"이라고 한다. 팔괘의 "()"라는 수련과정 속에서 단()이 뭉쳐지는 것을 지어 보라. 세상의 미혹한 무리들은 자기의 몸밖에 있는 먹는 약만 찾아다니며 망녕된 생각을 하면서 구름 끝을 올라가려고 한다.

단은 하나인 것이며 순수한 것이며 한 점 물들은 것이 없는 것인바 이 단을 이룬즉 살고 단을 이루지 못한즉 풍진(風塵) 세상을 헤매게 된다. 한 조각 마음을 단심(丹心)이라고 하니 마음이 흩어지지를 않고 모이게 되어 있어서 자연 방황함이 없다. 이러하려면 얼마나 많은 수련과정이 필요할 것인가, 그 과정을 바로 화로(火爐) 속에서 단련하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5. 원관(元關)

원관(元關)이라는 신비한 구멍이 있건만 세상 사람은 아는 이 적다. 황홀(恍惚)하고 아득하고 묘명(杳冥)한 그 경지는 바로 음양의 양의(兩儀)를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종하면서 거래하는 것이 유속으로 흘러가고 번뇌의 길로 돌아가게 되니, 그것을 거스려서 오는 그것이 문득 성현이 되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

원관을 비록 신기한 구멍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 구멍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다 범인이다를 따지는 구멍이 될 뿐만 아니라, 이 구멍에서 음양이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음양이 나뉘어져서 판별이 되면 범인이 되는 것이고 미판(未判)이어서 아직 혼혼(混混) 돈돈(沌沌)한 상태이라면 성태(聖胎)가 응결된다. 성인과 범인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그 가름이 모두 원관에 따름이니, 사람들아 세상 돌아가는 대세를 따르는 그릇됨을 버리고 바른 마음으로 수련해야만 할 것이다.

 

6. 식신(識神)

우리가 생각하고 염려하고 사료하여서 그 정령(精靈)을 모으는 것을 식신(識神)이라고 하는 것이며, 우리가 세세생생토록 윤회하는 종자의 뿌리요 티끌이 되더라.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은 구파(俱把)을 잡고서 희롱하며 살고 있으나 그 밑바닥까지 철저하니 누가 능히 그 주인을 찾으리오.

우리가 배워서 알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것이 식신의 작용에 근거하는 것이니 경험이나 지식과 학식도 여기에 속한다. 식신은 윤회 종자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식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영원히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식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식신이 아니라 원신(元神)이며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43. 양정(陽精) 선천기(先天氣) 선후천(先後天)

7. 양정(陽精)

자기의 양의 정기를 잘하는 한점이 있다면 그 신비로움은 바로 산천을 형성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여 깨달아서 한때라도 참 진실로 한다면 가히 자기의 얼굴 위에 그러한 기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心中)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신()속에 있는 것도 아니니, 공도 아니고 색도 아니면서 원관(元關)에 그것이 숨어있더라.

양의 정기는 참으로 진실한 기운이며 모든 아름다움이 이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일점의 양의 기운을 잘 길러야 할 것이니, 양의 기운이란 양심의 주체가 되며 올바른 기운이니 이 기운은 스스로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서 그 얼굴의 기상을 보아 그 사람의 양정(陽精)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밝고 아름다운 기운을 기르게 되면 점차 음기는 사라지게 되고 식신(識神) 또한 원신(元神)으로 변하게 된다.

 

8. 선천기(先天氣)

선천(先天)의 하나의 기운이 심성(心性)속의 홍몽()한 그 속에서 있으니, 거기에는 상도 없고 형체도 없는 것이며 공에 떨어지지도 않은 것이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날 때의 참 진실한 그 면목을 깨달아 얻어야 한다. 이를 모름지기 인정을 하여야만 참 주인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사람이 탄생하기 이전의 기운은 혼돈(混沌)하여 인식도 알수 없고 아름알이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운은 참다운 기운으로 자신의 진면목이고 참으로 아름다움이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내가 그 참 아름다움의 주인공임을 바야흐로 알 수 있을 것이다.

 

9. 선후천(先後天)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을 선천(先天)이라 한다. 한번 이 세상에 머리가 나와 살아오는 그때부터 기질이 연속되는 것이라, 예전의 성인(聖人)들과 뒤 세상에 사람고 두길로 나누어져 있으니, 모름지기 자세히 어느 것이 편백되는가 또 온전한가 분별을 하여 보라.

내 몸 낳기 이전을 이름하여 선천이라 하고, 낳기 위해 형체를 이루었다면 이것이 후천이니 이미 질()을 이루기 이전이면 선천이 되고 그 이전이면 선천이라 한다.

이미 태어나니 후천이라 한다. 한번 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이미 후천의 기운에 접촉하게 되는바 억겁의 식신도 태어나면서 한번 와 하고 우는 것으로부터 따라와 변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기질과 성품이 갈라지게 되는 것은 이렇게 태어나는 것으로 부터이니 성인과 범인이 갈라지게 되는 것도 이때이므로 이때의 진면목을 누가 알 것인가.

 

44. 수경(首經), 삼약(三藥), 성명(性命)

10. 수경(首經)

수경(首經)은 본래 선천(先天)의 보배인 것이니, 그 경지는 황홀(恍惚)하고 아득하고 묘명(杳冥)한 참 하나의 정기이다. 순백(純白)하며 험이 없는 청정한 물체[淸淨物]인 것이니, 탁혈(濁血)을 가지고 안정된 명의[安名]를 모목하지 말라.

선천의 지극한 보배를 수경이라 한다. 황홀(恍惚)하고 묘명(妙冥)함이 진일정(眞一精)이라 티끗 하나 없으며 더럽힘도 없는 곳이니 어떻게 이러한 선천보배를 찾을 것인가. 수경(首經)은 맨 꼭대기를 이르름이니 그 중에서도 경위(經緯)의 꼭대기가 된다. 으뜸이고 보배인 것이어서 선천의 보배는 하나 일()자일 다름이어서 순수한 마음이고 험집없는 마음이니 이것이 바로 으뜸이고 경우가 밝은 마음이다.

 

11. 삼약(三藥)

큰 대약(大藥)은 삼반(三般)의 정()과 기()와 신()이나, 형체가 있는 것은 본래의 참이라고 볼 수 없다. 지극히 청정하고 지극히 섬세하나 또 텅비어서 신령스러운 물체인 것이니 그것을 잘 단()련하여 나아 가면은 금강(金剛)의 무너지지 않는 대법신(大法身)이 될 것이다.

이세상 모든 형체가 있는 것은 참이라고 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장애가 되는 것이고 진실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야흐로 정기신(精氣神)이니 살고 죽는 것이 다 여기에 달려있다. 정기신이란 대약은 잘 단련시켜야 하니 이것은 본래 누진을 꺼린다. 이것들을 잘 보전하면 썩지 않는 금강을 얻을 수 있다. 썩지 않는 물건이란 영원히 변치않는 물건이고 이것을 단심(丹心)이라고 말한다. 이를 불가에서는 법신(法身)이라고 하고 유가에서는 태극이라고 한다.

 

12. 성명(性命)

사람의 심성(心性)과 생명(生命)은 그 근원이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어져 있으므로 자기 몸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그 편백과 온전함이 전해지는 것이라. 후천(後天)의 심성(心性)과 생명은 천운을 따라가고 있으니 선천(先天)에 머물고 있을 때의 우리의 권능을 촉구하라.

()과 명()은 음과 양으로 우리의 생각이 목숨에 붙어서 있으며 명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살았다고 하여 생()을 말한다. 그렇지만 명을 온전히 부지하는 가운데에서 연성(鍊性)을 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여야 완전하게 된다. 따라서 성명쌍수(性命雙手)라 한다.

 

45. 천지심(天地心), 도심인심(道心人心), 미생시

13. 천지심(天地心)

천지의 마음은 심히 갈무리져 있어서 음양의 감격(感激)으로 인하여서 원만하고 광명함을 나타내니, 허무(虛無)한 그 ㅅ[] 속에서 잘 삶아 익혀서 만고천추(萬古千秋)의 유행하는 세월 속에 손상됨을 피할수 있으리.

천지심(天地心)이란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일점의 양심을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는 나뉘어지니 흩어지게 되어 있어서 이렇게 되면 시비가 있고 선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뉘어 지기 이전이면 시비도 선악도 없는 천지의 마음이 된다. 마음을 허무한 가운데에 갈무리한다. 그러니 유형의 모든 있음을 피한다. 고의로 짓는 모든 일과 사사로움은 방편일 뿐이다. 하늘의 마음이란 일 점의 사사로움이 없고 강건한 마음이나 땅의 마음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된다.

 

14. 도심인심(道心人心)

사람의 인심은 쇠와 같고 도심(道心)은 황금과 같으니 가히 미소하고 위태한 그곳을 향하여 세밀하게 짐작을 하여 보라 그것이 변화한 영통한 경지는 위와 아래가 없는 것이나, 그 근원인 머리에는 활수(*;생명수)로 양과 음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세파에 끄달리는 마음을 인심(人心)이라고 하고 ㄲㄲ하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도심(道心)이 된다. 인심은 녹이 쓰니 원래의 자태가 바래개 된다. 도심은 변하지 않는 마음이고 인정에 휩싸이지 않는 마음이어서 욕심으로 흔들 수 없는 마음이고 재앙이 비켜 가는 마음자리가 된다. 그래서 변치않는 금강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인심 속에서 살게되니 대개 인정에 끄달리게 되어서 욕심이 지혜를 가리우게 된다.

 

15. 미생시(未生時)

내 몸이 태어나기 이전의 그 곳은 누가 알 것인가

아주 고요하고 정정하고 소소(消消)하고 혼돈(混沌)한 시기와 사상(四象)과 오행(五行)이 그곳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혼연(渾然)한 하나의 기운이 암숫것(雌雄)을 다 없이 하는 것이라.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이란 음양도 없는 곳이며 사상과 오행도 없는 곳이다. 억지로 말하자니 혼돈한 시절이고 고요하고 적적하여 태어나기 이전의 그 면목을 누가 가히 알 것인가. 대개 수도(修道)를 한다는 것도 부모님께서 나를 지어주기 이전인 미생시의 면목에까지 도달함을 생각하게 하니 미생시에는 누구인들 시비가 있었고 욕심인들 있었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46. 초생시(初生時) 타가(他家) 피아(彼我)

16. 초생시(初生時)

사람이 처음에 태어날 때의 면목이란 어떤 것인고, 선천(先天)과 후천(後天) 두개의 하늘이 하나의 기운으로 화합을 하는 것이다. 학식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고 하지만 한 점의 물들림도 없을 것 같으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과 신선의 종자가 될 것이며 성현들이 머믈고 있는 움막집이 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부모의 뱃속에서 한 기운이 있었으니 선천의 기운이요, 이렇게 하여 태어나매 후천의 기운이 들어와서 합하는 것이지만 이때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고 분별도 없거늘 금수도 해치지 못하며 순순한 모습 그대로의 면목인 것이다.

 

17. 타가(他家)

타가(他家)의 집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집은 남의 집이 아니언만 그릇되게 남의 집이라고 잘못 알게 되니 큰 잘못 이구나. 어린 아이들이 잊어버려 헤메었건만 한번 불러서 얼굴을 보니 그 아이는 곧 부모를 따를 것이다.

과연 무엇이 타가의 집인가. 내 뽑내는 육신이야말로 타가의 집일세, 사람은 남의 집에 눌러 살면서 그것이 자신인줄 알며 중요하게 생각하니 다 그것이 잘못인줄을 모르더라. 혼미한 사람은 깨닫은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혼미한 사람들은 나만을 알기 때문에 남을 모르게 된다. 사람은 육신인 자신이 진정한 자신인줄 알지만 나와 남이 별개가 아니요 하나(한나)임을 모른다. 이 세상은 나와 남이 없는 것 이미 몸밖이 남이면 몸밖에 있는 모든 것이 타가가 된다.

 

18. 피아(彼我)

경서(經書)의 말씀에 피아(彼我)라 불리우는 것들은 음양으로, 분별되어 있어서,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청정(淸淨)한 고향이라, 채단()을 하고 주단()을 하는 그런 사된 무리들은 그 영기의 장막의 꽃속에서 나무 울타리 그 속에서 천량심을 무너지게 할 따름인 것이라.

타가(他家)가 있으니 자연 너와 내가 있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 마음이 피아(彼我)이니 이러한 분별이 있어서 모든 어지러움이 생길 것이니 어찌 싸움이 없을 손가. 피아를 다투는 마음은 분별의 마음이며 하늘의 양심을 무너트리는 근본이 되니 너다 나다를 가리는 그 울타리를 헐어버려야 한다.

 

47. 려반(侶伴) 외호(外護) 구정(九鼎)

19. 려반(侶伴)

려반(侶伴)의 짝하는 것이어서 내외를 나누는 것이고 인하여 몸속의 짝과 려반(侶伴)이 두 세사람 있는 것이라, 몸밖의 그 짝과 려반(侶伴)이 함께 붙들고 돕고 있으나, 계속되는 세월의 역겁의 티끌쌓인 윤회를 다 벗어나야 되는 것이라.

모든 것은 짝이 있는 법, 보이는 것이 있으면 안 보이는 것도 있다. 이들을 음과 양이라고 한다면 음양이 짝이다. 마음과 몸이 짝이며 이 세상에서 짝 아님이 없지만 이러한 짝에 의하여 음양이 갈라지게 되고 이렇게 되어서는 세세생생 윤회속을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짝이 되는가 타가와 내가 한집이지만 이들이 짝이 되는 것이어늘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짝은 자기와 짝이 되는 도반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 있지 않은 도반이기도 하다. 억겁 윤회를 벗어나야 비로서 만날 수 있는 짝이기도 하다.

삼은 삼세를 말하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며 또한 정기신(精氣神)을 말한다. 음양의 대립속에 한줄기 중정의 마음이 있다면 이것도 셋이어서 안밗 에서 서로 도와야 한다. 이처럼 속과 밖을 인유하니 모두 셋지만 윤회를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그 짝을 만날까.

 

20. 외호(外護)

모든 이들은 밖에서 지켜줄 이를 찾아 성공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니, 솥을 사가지고 어지럽게 바람을 재촉한다. 천기(天機)를 잘 깨닫아서 풍속의 속법(俗法)을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 남의 힘을 빌리려는 어리석음을 버릴 지어다.

밖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밖이란 풍속의 세상이며 유혹으로 가득찬 곳이다. 세상의 일이란 어지러운 것이요 생멸이 이어지는 곳이고 온갖 유혹으로 가득한 장소이니 이러한 밖을 잘 지킬 것 같으면 안은 스스로 견고해 지므로 스스로 두려울 것이 없다.

 

21. 구정(九鼎)

건원(乾元)의 구수(九數)를 가지고 순양(純陽)이라고 하는 것이며, 구정(九鼎)으로 환단(還丹)하게 하는것은 그 불을 태워서 사르는 단련법(鍛鍊法)이라 그 서자()를 짖고있는 미혹한 무리들이 여자의 솥[]에 시기를 하고 있으나, 결연히 타파하여서 철창으로 둘러 쌓인 그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는 모든 것이 극에 다른 것이어서 지극한 것이고 정()은 솥이니 모든 것을 삶아내고 완성시키는 곳이어서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솥은 음양을 조화시키는 곳이다. 그런데 솥이 아홉개나 있으니, 이는 지극히 수련한다는 뜻을 가진다. 이를 다르게 해석하지 말기를 바란다. 다르게 이해한즉 마치 철창속에 갖히는 것 같아서 답답함을 면치 못할 뿐이니 어찌 살기를 바라랴.

 

48. 초섭(招攝) 전도(顚倒) 화후(火候)

22. 초섭(招攝)

선천(先天)의 것을 초섭(招攝)하는 비방은 있지만 거문고를 치고 대나무로 두들겨 치는 것은 허무함[虛星]을 나타내는 것이라, 색성(色聲) 시끄러운 장소는 무방하며 장애조차 없음이라, 그렇게 될지어늘 한손에 북두의 광명을 잡는 것이어라...

초섭은 비밀스러운 방법[秘方]으로 전하는 것이언만 사람들은 엉뚱한 곳으로부터 찾으려 한다. 비방은 비방이니 그 전하는 방법이 다르다. 색성은 무엇인가 하나는 있는 것이요 하나는 없는 것이다.

 

남촌선생 가요반세기 - - 해변의 여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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