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우주변화원리 한동석 선생 - 생애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21. 1. 18. 23:06

저자 한동석 - 韓東錫 선생

「한동석의 생애에 관한 연구」(권경인, 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인용

시대/현대
출생/ 1911년 음력 6월 5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에서 청주한씨 맏아들로 태어났다
사망/1968년 음력 6월 5일 새벽에 가족과 제자들의 곁에서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방학동 천주교묘지
유형/역리학을 바탕으로 한의학을 정리하고 황제내경과 동의수세보원을 총정리 한 인물
직업/역리학자. 한의학자
대표작/우주변화의 원리, 동의수세보원주석
성별/
분야/과학/의약학
본관/청주

요약 해방 이후 『우주변화의 원리』, 『동의수세보원주석』 등을 저술한 학자. 한의학자.

목차접기

  1. 개설
  2. 생애 및 활동사항

개설

탄생

한동석(韓東錫)은 1911년 음력 6월 5일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에서 청주한씨 예례빈윤공파 23세손으로 한희춘(韓希春)과 이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국흠(國欽)이고, 호는 두암(斗庵)·동암(東庵)이다. 월남 후에 동석(東錫)으로 개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소년시절

한동석은 소년시절에는 종형제들과 함주군 오로리(현 함경남도 영광군)에 있는 오로리소학교를 다녔고 후에 영생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였다. 집안의 장손으로 13세에 정혼을 했으나 몇 년 후에 헤어졌다. 20대 후반에 다시 함흥으로 가서 장사를 하였고, 어느 정도 재력을 쌓아 집안을 돌보기도 하였다.

한의학과 인연

두 번째 부인이 폐병을 앓았는데, 동무 이제마의 이전제자(二傳弟子) 중 김홍제에게 부인의 병을 치료받았다. 김홍제가 부인의 병을 치료하면서 “지금은 이렇게 고쳤으나 나중에 재발하면 못 고친다.”고 하였는데 결국 병이 재발하여 사망하게 되자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의학 수업

또 이것을 인연으로 김홍제 밑에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한동석은 입문 이후 한의학에 매달려 공부를 시작한지 2년여 만에 주변 사람들의 질병을 서슴없이 고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한의사 고시합격-면허취득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한 후에 부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이와 동업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부산 영도에서 진료를 하면서 부산에 있던 동양의학전문학원에서 강사로 출강하기도 하였다. 1953년 제2회 한의사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하고, 정식으로 부산에서 인계한의원(仁溪漢醫院)을 개원하였다.

계룡산에서 역학 수업

1953년에 『역학원론(易學原論)』의 저자인 한장경(韓長庚)에게 2개월 동안 『주역』을 배웠다. 또한 1956년에 서울로 이사한 후 인사동사거리에 한동석한의원을 개원하였다. 이때 계룡산 국사봉을 출입하면서 『주역』과 『정역』 등을 공부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에 나오는 『정역』에 대한 이해는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한의학과 역학 강의

1960년 전후로 『내경(內經)』, 『유경(類經)』, 『주역』, 『본초(本草)』 등을 한의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한의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동아·조선일보 등의 일간지에 한방 관련 기사를 투고하면서 양방의사들과 논쟁을 벌이는 글도 싣기도 했다.

동양의학대학교 출강 - 저서출간--우주변화원리 / 동의 수세보원 주석-

1960년에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1966년에 『우주변화의 원리』를, 이듬해에는 『동의수세보원주석(東醫壽世保元註釋)』을 발행하였다.

무극/태극/황극-삼극이론 정립

『우주변화의 원리』는 부제가 음양오행 원리로서, 우주운동의 법칙이 되는 음양오행에 대한 이치를 밝히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특징은 우주본체의 근본인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 등 삼극(三極)을 한꺼번에 언급하면서 그들을 연계시켜 설명하고 있다.

우주의 삼단변화 이론정립

그 외에도 서양철학의 우주관과 그 한계성을 비판하였고 이제마 선생의 오행관인 오행의 질량변화 개념을 소개하였다. 또 토화작용, 금화교역의 원리를 명쾌하게 밝혀 놓았으며, 『정역』과 김일부 선생의 오행관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은 미래의 우주관까지 제시하고 있다.

동무이제마선생의 사상의학 정리

『동의수세보원주석』은 이제마 선생의 사상의학을 알기 쉽게 설명한 해설서로써 모든 질병의 변화는 체질의 특성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한 동무의 원리를 분석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처방에 대한 입방원리를 밝혀 놓음으로써 누구든지 동무의 입방원리와 인간생리의 특수성을 알고 처방을 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별세와 묘지

원래 북한에 있을 때 잠시 기독교인으로 생활한 적이 있었으나 월남 후에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임종이 임박했을 때에 아내와 제자들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루까라는 세레명을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1968년 음력 6월 5일 새벽에 가족과 제자들의 곁에서 향년 58세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서울시 방학동 소재의 도봉산 밑 방학동천주교묘지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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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한동석의 생애에 관한 연구」(권경인, 대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체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동의수세보원_갑오구본 東醫壽世保元_甲午舊本



<한의학고전DB>의 동의수세보원_갑오구본은 동의수세보원 중 '구본 갑오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동의수세보원의 판본 명칭은 『함산사촌 동의수세보원 갑오구본』의 앞부분에 있는 '(備考) 舊本甲午本, 新本庚子本, 印本辛丑本'이라는 내용을 근거로 합니다. (이와 별개로 사상초본권도 존재합니다.)
2017년 현재,
구본 갑오본은 『함산사촌 동의수세보원 갑오구본』과 국회도서관 소장본인 『동의수세보원 구본』 2가지 판본이 있습니다.
신본 경자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본 신축본은 1901년 초판본 이후 여러차례 간행되었으며, 현대에는 모든 권에 현토된 7판본을 가장 많이 보고 있습니다. 대개 동의수세보원이라고 하면 인본 신축본 중 7판본을 가리킵니다.

<한의학고전DB>의 동의수세보원_갑오구본은
함주군 천서면 이제마 본가(本家)에 보관 중이던 1894년판 동의수세보원을 1940년 함흥에서 한민갑이 필사하여 이성수(李聖洙, 1926-) 씨가 보존하고 있던 『함산사촌 동의수세보원 갑오구본(咸山沙村 東醫壽世保元 甲午舊本, 表紙名)』(2000년 9월에 발굴)을 저본으로 삼았고,
1940년에 필사되어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보관중인 『동의수세보원 구본(舊本)』(2003년 10월에 발굴)을 교감본으로 삼았습니다.
인본 신축본은 1994년에 발굴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되어있는 1901년 동의수세보원 초판본을 1998년 사상체질의학회에서 영인하여 출판한 『동의수세보원』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내용 중 신본 경자본에 나오기 때문에 생략된 내용은 신본 경자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인본 신축본의 내용을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내용 중 인본 신축본에 나오기 때문에 생략된 내용은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사상체질과에서 2010년 3월에 발간한 ‘사상체질과임상편람 제2권’ 내용 중 동의수세보원 조문번호를 따라 인본의 조문번호를 표기하였습니다.


❙감사의 글❙

동의수세보원_갑오구본의 교감과 번역은 이경성 원장님(서울, 홍익한의원)이 오랫동안 수집한 자료를 제공해주셨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고자료❙

- 동의수세보원의 판본 : 이경성.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판본(版本)에 대(對)한 연구(硏究). 사상체질의학회지 17(3);2005. pp.1-11.
    http://www.ndsl.kr/ndsl/search/detail/article/articleSearchResultDetail.do?cn=JAKO200503039849296&SITE=CLICK
- 동의수세보원의 판본 개요 : 사상체질의학회.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 도서출판 한미의학. 2010. pp.7-14.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d7345961987b50bf&control_no=2108e64be5224127ffe0bdc3ef48d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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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 동무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 의학이라는 범주에만 속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바탕이 되는 사상설은 경학적(經學的) 기조 위에서 성립했다. 동무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고 짐작되는 운암의 사상도 철저하게 사서오경에서 주된 요지를 따 온 것이다.
…… 또한 동무와 운암은 기존 성리학의 견해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특히 운암은 조선유학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반송학적(反宋學的) 비판으로 일관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선진(先秦) 유교 경전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동무는 이전의 몇몇 학자들과 맥을 같이 한다.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출판사서평

유학자 동무 이제마
최근 전 세계적으로 현대의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정통 의학의 범주에 벗어난 대체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민족 고유의 한의학인 사상의학(四象醫學)도 대체의학의 하나로 각광을 받고 있다.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는 우리 고유의 민족의학인 사상의학을 창안한 조선 후기 의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의학자이기 이전에 유학자였고, 그의 ‘사상설(四象說)’은 전통 의학과 유학적 전통을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 책은 저자 허훈의 박사학위논문을 보완한 것으로 일부 문고판을 제외한다면 동무 이제마의 철학사상을 다룬 첫 단행본이다. 철학계에서 이제마 사상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하며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심신의학의 선구자
“건강은 의사가 하는 활동의 목표이긴 하지만, 의사가 ‘만드는’ 것은 아니다. …… 질병은 가치가 개입되기 때문에 주관적인 상황이며 사회적인 것이다. 질병은 또한 자연과학 안에서 규정될 수 있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심리적 도덕적인 사태다”라고 가다머(Gadamer, HansㆍGeorg)가 말했다.

신경ㆍ언어 프로그램(Neuro Linguistic Program), 사고장 요법(Thought Field Therapy), 게리 크레이그(Gary Craig)의 정서적 자유기법(Emotional Freedom Techniques) 등은 몸과 마음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하와이식 치료법 호오포노포노(Ho’oponopono)도 ‘치유의 모든 과정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이제마는 백여 년 전 인물이지만, 그의 사상설에는 최근 눈부시게 발전한 서구 심신의학의 연구 성과와 비교할 때 선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사상의학의 뿌리를 찾아서
사상의학은 기존의 한의학과는 다르게 도가적 배경보다 유학을 근간으로 전개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으로 이어지는 한의학(韓醫學)적 전통은 중국의 한의학(漢醫學)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허준과 이제마는 우리 의학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동의(東醫)’라는 표현으로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이제마의 사상설을 독창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사승(師承)을 대기 어렵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마가 경학적 기초 위에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백호(白湖) 윤휴(尹)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학통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본다.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와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제마는 유학 경전을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동무는 특히 맹자(孟子)를 근거로 이론을 전개하는데, 맹자의 사단론(四端論)은 동무에게서 체질의 속성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된다.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이제마

임기군/주임기군/주국적/출생일/출생지/사망일/사망지/학력/경력/부모/형제/친인척/별명/종교

이제마
李濟馬

조선국 함경남도 고원군 군수
1897년 8월 8일 ~ 1897년 10월 12일
조선 고종 이형
대한제국 함경남도 고원군 군수
1897년 10월 12일 ~ 1898년 12월 1일
대한제국 고종 이형
신상정보
 대한제국
1837년 4월 23일
조선 함경도 함흥
1900년 11월 12일 (63세)
 대한제국 함경남도 함흥
1872년 무과 병과 급제
함경남도 함흥 보원국(保元局) 국장
이반오(부)
첩실 경주 김씨(생모)
이주(이복 누나)
이섭증(이복 남동생)
이충원(조부)
자(字)는 무평(務平)
아호(雅號)는 동무(東武)
유교(성리학)

이제마(한국 한자: 李濟馬, 1837년 4월 23일 ~ 1900년 11월 12일)는 대한제국 함경남도 고원군수 등을 지낸 조선 말기의 한의학자(漢醫學者), 문관(文官), 무관(武官), 시인(詩人)이며, 조선 왕족의 방계 혈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평(務平), 호는 동무(東武)이다.[1]

목차

생애[편집]

1837년 함경도 함흥에서 서자(庶子)로 출생하였다(일설에는 1838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그의 가문은 조선 건국 이전의 추존왕인 목조대왕의 둘째아들인 안원대군(安原大君)의 후손인 왕족 집안이다. 이수광 작가에 따르면, 이제마의 모친은 지적 장애인이라 비장애인인 부친과 결혼을 늦게 한데다가 첩으로 시집을 갔는데, 할아버지가 꿈에서 말이 날뛰는 모습을 보고 이제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역》을 애독하였다. 13세 때인 1850년 향시(鄕試)에서 장원한 후 전국 각지와 러시아, 만주 등지를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고 알려졌다.

36세 때였던 187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등용되었고, 50세 때였던 1886년에 진해현감(鎭海縣監)이 되었으나 다음 해인 1887년에 사직했으며 60세 때였던 1897년에 최문환(崔文煥)의 반란을 평정하여 고원군수(高原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898년에 사직하였다.

1900년에 64세로 죽을 때까지 고향에서 보원국(保元局)이라는 한의국을 개설하여 환자들을 보살폈다.

널리 알려진 《동의수세보원》 외에도 《천유초(闡幽抄)》, 《제중신편(濟衆新編)》, 《광제설(廣濟說)》, 《격치고(格致藁)》 등을 저술하였다(현재 《동의수세보원》에는 《광제설》이 포함됨).

사람마다 타고난 체질이 다르므로 같은 병이라도 그 치료가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동의수세보원》을 통해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네 가지 체질이 있다고 하는 사상의학을 제창하였다.

이제마 연표[편집]

  • 1837년(출생) 음력 3월 19일(양력 4월 23일)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
  • 1849년(13세) 부친과 조부가 모두 운명하자 집을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
  • 1872년(36세) 무과에 병과 급제.
  • 1873년(40세) 무위별선군관(武衛別選軍官)에 임명.
  • 1880년(44세) 《격치고(格致藁)》를 집필하기 시작함.
  • 1886년(50세) 진해현감(鎭海縣監)에 임명.
  • 1894년(58세)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함.
  • 1895년(59세) 모친의 병 때문에 함흥으로 낙향.
  • 1896년(60세) 정삼품 통정대부 선유위원(正三品 通政大夫 宣諭委員)의 작위를 받음.
  • 1897년(61세) 고원군수(高原郡守)에 임명. 《제중신편(濟衆新編)》을 저술.
  • 1898년(62세)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보원국(保元局)이라는 한의원을 개설하여 진료와 의학연구에 전념.
  • 1900년(64세) 일생을 마감할 때 《동의수세보원》을 개정. 음력 9월 21일(양력 11월 12일)에 작고함.

이제마가 등장한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최수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최수종(崔秀宗, 1963년 1월 13일 (1962년 음력 12월 18일)[1]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89년 《포기》 ... 포기 역(주인공) 《조은

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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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

許浚청원(淸源), 구암(龜巖), 양평군(陽平君)

시대출생사망경력유형직업대표작성별분야본관

조선
1539년
1615년
당상관 정3품, 종1품 숭록대부
인물
의관, 어의, 의학자
동의보감, 언해태산집요, 신찬벽온방, 벽역신방, 찬도방론맥결집성
과학/의약학
양천

요약 조선시대 『동의보감』·『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 등을 저술한 의관. 어의·의학자.

목차접기

  1. 개설
  2. 생애
  3. 활동사항
  4. 상훈과 추모

개설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생애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이 언제, 어떻게 의학을 공부했으며, 또 의관으로 나아갔는지를 일러주는 자료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관직으로 볼 때, 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정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川)의 읍호(邑號)를 받아 양평군(陽平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셋째, 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評)도 존재했다.

활동사항

허준은 어의로 재직하면서 내의원의 의학서적 집필을 도맡았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8종이 있으며, 크게 네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종합 임상의서의 집필로, 『동의보감』(1613)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일상생활에 요긴한 한글 번역이 딸린 의서로,『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이상 1601) 등이 그것이다. 책은 각각 아이의 해산에 대한 의학적 지식, 구급 상황에 대한 발 빠른 대처, 소아전염병인 천연두에 대한 의학적 대응을 실었다. 최근에 연대 미상인『언해납약증치방(諺解臘藥症治方)』이 허준의 저작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가정상비약인 납약을 올바로 쓰는 지침을 담고 있다.

셋째, 전염병 전문의서로,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벽역신방(辟疫神方)』(이상 1613)의 편찬이 그것이다. 『신찬벽온방』은 열성 질환인 온역(瘟疫: 오늘날의 급성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벽역신방』은 1613년 국내에서 첫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한 책이다.

넷째, 학습용 의학교재인데, 허준 최초의 저작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1581)이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전의감(典醫監)의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고 있던 동일한 책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허준의 책 중 가장 주목할 책은『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왕명으로 1596년(선조 29)에 시작되어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아 1613년(광해 5)에 출간되었다. 애초에는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 유의(儒醫) 정작(鄭碏), 다른 어의인 양예수(梁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 5인의 공동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상태에 있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서 허준이 단독으로 책임을 맡아 책을 완성시켰다.

1608년(선조 41) 유배 이후 허준은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얻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집필해냈다. 허준은 양생(養生)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의학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의 분량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 회복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의학의 제공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질병사의 관점에서 볼 때, 『벽역신방』도 크게 주목을 끈다. 허준은 성홍열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 미지(未知)의 병이 홍역을 비롯한 유사한 질환과 구별되는 병임을 밝혔다.

상훈과 추모

허준은 한국의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東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의 통일을 가능케 했고, 언해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동의보감』은 출간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핵심을 잘 잡아내어 적절한 표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허준은 세계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허준은 소설과 드라마로 재조명되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과 같이 나누게 되었다.

2005년 3월에는 허준박물관이 개관되어 허준과 『동의보감』을 알리는 교육과 전시행사가 있었다. 또한 서울 강서구를 중심으로 매년 ‘허준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2014년 10월 제15회 행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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