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허준/동의보감과 정북창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21. 3. 10. 14:46

1537년~1615년

  1. 1537년(출생)평안도 용천 군수를 지낸 허론의 서자로 양천에서 태어남.
  2. 1569년(32세)유희춘이 내의원 의원으로 천거.
  3. 1571년(34세)허준의 관직이 종4품 내의원 첨정이라는 최초의 기록이 보임.
  4. 1573년(36세)정3품 내의원정 內醫院正이 됨.
  5. 1575년(38세)허준의 어의 안광익을 도와 선조를 진료했다는 기록이 「선조실록」에서 최초로 보임.
  6. 1587년(50세)어의들과 선조의 진료에 참가하여 사슴가죽을 하사 받음.
  7. 1590년(53세)왕세자인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한 공로로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의 작위를 받음.
  8. 1592년(55세)임진왜란으로 인해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
  9. 1596년(59세)광해군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정2품 정헌대부의 작위를 받음.
  10. 1597년(60세)선조가 의서 500권을 내주면서 허준 단독으로 「동의보감」 편찬을 명함.
  11. 1600년(63세)내의원 수의 首醫가 됨.
  12. 1601년(64세)「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를 완성
  13. 1604년(67세)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扈聖功臣.
    양평군 陽平君의 군호와 종1품 숭록대부를 받음
  14. 1606년(69세)선조의 병세를 회복한 공으로 정1품 작위를 하사받았으나 취소됨.
  15. 1607년(70세)「언해태산집요」를 펴냄.
  16. 1608년(71세)「언해구급방」 , 「언해두창집요」를 펴냄.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귀양.
  17. 1609년(72세)광해군의 호의로 귀양에서 풀려남.
  18. 1610년(73세)「동의보감」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침.
  19. 1612년(75세)「찬도방론맥결집성」을 펴냄.
  20. 1613년(76세)「동의보감」 25권25책 간행, 「신찬벽온방」, 「벽역신방」을 간행.
  21. 1615년(78세)내의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돌아가심, 정1품 보국숭록대부의 작위를 받음.

1596년(선조 29) 선조의 명으로 허준·정작(鄭碏)·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이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필요한 보다 간략하면서도 실제 의료기술에 필요한 의서로서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597년 정유재란을 맞아 중단했던 것을 전쟁이 끝난 후 허준이 혼자 다시 편찬하여 1610년 완성했다. 정작은 승려의사로 권위가 있었으며 양예수는 그당시 조선의 의사들이 존중한 〈의림촬요 醫林撮要〉 13권을 교정한 경험이 있는 의사였다.

동의보감, 유네스코기록유산에 등재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허준 주도로 편찬된 조선시대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의서로는 세계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되었다.

모든 문화와 문명이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왔던 과거의 우리 민족이였지만, 동의보감은 외국에서 거듭 출판된 것도 드문 일인데, 출판된 지 115년 뒤에 일본에서 완질이 출판된 것을 비롯해서 1763년 중국에서도 출판되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모두 7번 출판을 거듭했다.

의서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책을 편찬한 허준이 태어난 서울 강서구 가양동 구암 기념관을 찾아 허준의 생애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나는 오송역에서 KTX로 출발하여 서울역까지 이동하였다.

지하철 9호선 양천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10여분을 걸으니 허준 기념관을 만나, 허준이 지금부터 482년 전에 이곳에서 나아 자라 뛰어 놀았구나 회상하였다.

동의보감은 1613년 선조대왕의 명을 받아 어의 허준선생이 집대성한 것으로 의학 이론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축적된 아시아 지역의 의료기술과 지식을 망라하여 사람들을 위한 의서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동의보감』은 우리 전통 의학과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한 당대 최고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꼽힌다.“동아시아 의학사에서 『동의보감』의 위치는 “최고 수준의 의학지식을 가려 뽑아 일일이 출전 근거를 밝히며 처방을 제시한 작업은 당시로선 비교 대상이 없다”고 평가했다.

중국에서만 20여 차례 발간할 정도로 『동의보감』은 베스트셀러였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오면 으레 『동의보감』을 챙겨 갔다고 한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동의보감』이 너무 비싸 사지는 못하고 서문을 베껴왔다고 전한다. 1763년 중국에서 처음 간행된 중국판 『동의보감』의 서문은 “『동의보감』을 보급하는 것은 천하의 보배를 나누어 갖는 것”이란 내용이다.

. 1596년(선조 29) 선조의 명으로 허준·정작(鄭碏)·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이 우리나라 의사들에게 필요한 보다 간략하면서도 실제 의료기술에 필요한 의서로서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597년 정유재란을 맞아 중단했던 것을 전쟁이 끝난 후 허준이 혼자 다시 편찬하여 1610년 완성했다. 정작은 승려의사로 권위가 있었으며 양예수는 그당시 조선의 의사들이 존중한 〈의림촬요 醫林撮要〉 13권을 교정한 경험이 있는 의사였다.

동의보감을 완성하기 까지 참여했던 인물들을 소개한다.

1613년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로 인쇄되었는데, 이때의 초판본 완질 25책은 남아 있지 않고, 뒤에 전주와 대구에서 목판본으로 출판된 것이 완전하게 전승되고 있다.

내용은 내과의 질병을 다룬 내경편 6권, 외과의 질병을 다룬 외형편 4권, 내과와 외과를 제외한 여러 가지 병증을 다룬 잡병편 11권, 약물에 관한 지식을 다룬 탕액편 3권, 침을 통해서 병을 고치는 방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침구편 1권이다.

우리나라의 의서는 물론 중국의 의서까지 모두 활용해서 편찬한 것으로, 현대적 분류방법처럼 병증과 치료방법을 중심으로 나누었다.

수백종에 이르는 토종약재의 이름이 한글로 적었고,『동의보감』에는 비싼 약재 대신 누구나 일상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가 소개돼 있다. 당시 일반인도 알 수 있게 향약(鄕藥:우리나라 자생 약재) 637종을 한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는 오늘의 의학계 현실과 비교해 보아도 획기적인 일이다.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백성들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총25권25책으로, 금속활자로 발행하였다.

의서의 특색은 비슷한 병 중에서도 특별히 여러 사람들이 흔히 체험하는 병증세부터 다루되 손쉬운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한 데 있다. 동양의학서로서 일찍부터 일본과 중국에 소개되었다. 

도교 양생학 영향

몸속 세계를 다룬 내경편은 『동의보감』의 세계관과 인체관을 보여준다. 사람의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주의 형성·운용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나아가 건강을 유지하며 장수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는 양생관을 제시한다. 도학에 밝았던 정염과 정작의 영향이 컸다

북창 정렴과 고옥 정작으로 이어지는 한국 도교 혹은 선도(仙道)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의보감』이 의서인 이상 병자를 상대로 하는>대중요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는다. 동시에 성숙한 도교적 수행법을 소개하고 있는 것인데 『동의보감』의 도교적 관점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몸에는 선천적인 원기(元氣)가 깃들어 있으며, 장수와 건강의 비결은 수행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는 데 있다.

둘째, 선천적 원기의 회복은 마음 수행을 포함한다. 송대의 백옥섬(白玉蟾·1194~?)은 도(道)와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도심불이론(道心不二論)을 제기했는데, 『동의보감』에도 청정한 마음을 지녀야 도가 깃든다는 시각이 수용돼 있다.

셋째, 선천적 원기(세분하면 元精·元氣·元神)를 회복하는 수행에서 단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상·중·하로 구분하는 삼단전(三丹田)에 관한 논의에서, 중국 내단사상의 경우 하단전은 정(精)을 단련하고, 중단전은 기(氣)를 단련하며, 상단전은 신(神)을 단련하는 부위로 대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동의보감』에서는 하단전을 정, 상단전은 기, 중단전은 신으로 연결시키는 독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같은 『동의보감』의 단전 이론을 오늘날 수련 단체의 하나인 국선도(國仙道)에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좀 더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

넷째, 『동의보감』에는 『황정경』에 나오는 존사법(存思法·도교 수행법의 하나)이 소개된다. 존사법은 인체에 깃든           체육신(體內神)을 관조함으로써 심신을 잘 기를 수 있다고 보는 일종의 명상법이다.

내단(內丹)=도교 양생술 용어. 오래 묵은 기(氣)를 내뱉고 신선한 기를 들이마시는 일종의 호흡법이자 정신수련법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함께 관조하는 수련을 중시한다. 단학(丹學), 혹은 선도(仙道)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불로장생법은  외부의 약물을 복용했던 외단(外丹)과 구별된다. 『동의보감』에는 중국 당·송나라 이후의 내단사상이 많이 반영돼 있다.

동의보감에 참여한 분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의보감 관련 인물들 중 선대를 알 수 있고 의학과 의술을 살필 수 있는 당대의 사료를 중심으로 허준과 정작, 정렴, 양예수, 윤지미, 이정구 등 6명에 대한 의학세계와 경험, 일화

양예수는 어의(御醫)로써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이후 경험에 의한 안정성과 구급의학의 예방 및 치료법, 간편한 의료체계로의 시스템 전환 등 당시 그의 고민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각종 의서의 감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동의보감에 참여한 윤지미와 동의보감의 서문을 쓴 이정구의 서문을 보면(27세에 문과 급제 이후 조선조 한문학 4대가의 한사람) 허준의 생애와 의학세계를 알 수 있다.

허준은 1539년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조선 중기의 명의. 본관은 양천, 자는 청원, 호는 귀암이며 서자로 태어나 중인이나 서얼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여,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20대에 뛰어난 의술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

이미 30세에 어의로 선임되었고, 동양 최대의 의서라는 〈동의보감〉의 찬집에 노력하여 1610년(광해군 2)에 이를 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이때의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정1품까지 승급했다.

그가 시대를 뛰어넘는 『동의보감』 편찬에 앞장섰다. 1613년 마침내 내의원 목활자본으로 25권 25책의 『동의보감』을 간행한다.

우리의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명명했다. 중국 의학계에 존재하는 ‘북의’ ‘남의’ 등과 대등한 의학을 의미했다. ‘보감(寶鑑)’이란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이다.

고옥 정작 1533 중종28 ~ 1603 선조36 전통 도교의 호흡법이 주요 건강법으로 소개된다.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고옥(古玉) 정작(1533~1603)이란 인물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유학자이면서 의술을 겸비한 유의(儒醫)였고 당대 도교 계통의 저명인사였던 북창(北窓) 정렴(1506~1549)의 동생이다. 북창과 고옥의 아버지가 우의정을 지낸 최고위 양반 집안인 데다 『동의보감』 작업이 시작된 1596년 무렵 고옥의 나이가 이미 64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의보감』 편찬의 협력자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의보감』는 철학적 기초는 도교와 밀접히 연관된다. 북창 정렴과 고옥 정작으로 이어지는 한국 도교 혹은 선도(仙道)의 영향을 받은. 정작과 그의 맏형 정렴은 허준과 함께 선조의 교지로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이후 술을 즐겨 ‘주선(酒仙)’이라는 별명을 얻은 일과 시, 글, 풍감, 음률 등에도 조예가 깊었던 정렴과 정작이 있었다.

첫째, 정작이 천성적으로 탈속적인 성향이 있었고 鄭?? 朴枝華의 영향으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도교에 경도되었다는 것, 둘째 젊어서부터 詩才가 뛰어났고 醫方, 風鑑 등 다양한 학문에 능통했다는 것, 셋째, 공신 정순붕의 자제로 낮은 관직을 맡았으며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는 떠돌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 첫째, ‘家世之累’와 ‘浮生’의 삶이다. 정작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우의정에 오른 공신 정순붕의 아들로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을사사화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정순붕의 삭탈관직이 이루어지는 선조 3년을 전후하여 ‘家世之累’에 연좌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정작은 세상을 등지고 떠도는 삶(浮生)을 살아가게 된다. 둘째, ‘人生無常’과 ‘長生不死’의 꿈이다. 정작은 떠도는 삶(浮生) 속에서 인간이 存沒의 문제에 직면하면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人生無常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정작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陳?과 孫思邈을 스승으로 삼고 도교 수련법을 통해 ‘늙는 것을 물리치고 세상에 오래 사는 것’ 즉, 長生不死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북창(北窓) 정렴(鄭磏; 1506-1549)

북창과 정염 그의 아우 고옥(古玉) 정작(鄭碏; 1533-1603)이 은거하던 집터가 있으니, 지금도 그 곳을      “정가네 집터”라고 부른다. 또 여기를 문막동(問莫洞)이라 하니, 사람들에게 묻지 말라고 한 뜻이다.

두 형제의 부친은 정순붕(鄭順朋; 1484-1548)으로 우의정을 지냈으나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에게 아부하여 세인으로부터 원흉의 한 사람으로 지목받았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인 뒤 유관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악(惡)을 행함에 있어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남을 시기하고 음험하여 남을 죽이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것이 악(惡)인줄 알면서도 권력의 위력 앞에 겁을 먹어 악(惡)을 행하는 자이니 정순붕(鄭順朋)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아버지의 행실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정렴(鄭磏)은 포천현감을, 아우 정작(鄭碏)은 이조좌랑에 이르렀으나 아버지의 과거 전력이 세인의 지탄을 받게 되자 천마산(天麻山) 과라리에 터를 잡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여기서 연구한 처방들을 모아 1596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직접 참여하였다.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아래와 같은 정렴.정작 형제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정렴이 그 아우 정작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한 집을 바라보고, “이 집안이 가련하게 되겠구나.” 하고 탄식했다. 이때 아우가 형에게, “형님께서는 말없이 지나갔으면 모르되 말을 하고서 어찌 그냥 지나갑니까” 하면서 언짢아했다. 정렴은 곧 “아우 말이 맞다” 하고 함께 그 집으로 들어가 묵었다. 이튿날 정렴은 주인에게 백탄(白炭) 50석을 구해 뜰에 불을 피우라고 했다. 이 광경을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와 구경하는데, 주인집의 10여 세 된 아들도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정렴은 종을 시켜 큰 나무상자를 가져오라고 하고, 주인 아들을 그 궤 속에 넣고 뚜껑을 닫고는 불 속에 올려놓았다. 주인과 집안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리고 소란을 피웠으나 정렴의 호령에 모두 말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얼마 후 불 속에서 그 궤를 꺼내 뚜껑을 여니, 거기에는 큰 구렁이가 타서 죽어 있었다. 정렴이 그 구렁이의 살을 뒤져 작은 쇳조각을 찾아냈는데, 주인은 50년 전쯤에 기르던 물고기를 잡아먹던 구렁이를 낫을 휘저어 죽였는데, 그때 부러진 낫토막 같다고 말했다. 종을 시켜 창고에서 그 때의 낫을 가지고 오라 해 맞추어 보니 부러진 자리에 꼭 맞았다. 정렴은, “그 구렁이가 원수를 갚으려고 아들로 태어나, 얼마 후 집안에 재앙이 들어 망하게 하려 하는데, 지금 집에 그 악기(惡氣)가 서려 있어서 지나다가 보고 들어온 것이다.”고 말했다.

정렴은 조선시대를의3대 기인이라 칭하며, 단학수련법을 남겼고, 천문, 지리, 의학, 주역, 음악 등에 정통해서 관상감(觀象監), 혜민서(惠民署), 장악원의 관리를 지냈으며, 인종과 중종이 위독할 때 명의로 천거되기도 하였고, 훗날 선조대에서까지 주역에있어 화담 서경덕에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온양 정씨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정순붕이 을사사화를 일으키는데 주역이 되자 그것을 적극 말리다가 결국 포천현감직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괘라리에 은거하고 연단화후법에 매진하다가 44세에 선화한다.

정렴은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과 독특한 행적, 훌륭한 인품으로 당시에도 명성이 자자하였

인종은 인재를 보는 눈이 뛰어나 자신의 방 병풍 뒤에 영의정(領議政) 피장(皮匠: 동소문 밖의 백정으로 조광조가 높이 평가한 인물), 좌의정(左議政) 서경덕(徐敬德), 우의정(右議政) 정염(鄭磏)이라고 써놓았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각종 일화 -정렴은 태어날때 부터 신기하고 이상했는데, 어렸을 때 산사에서 禪家의 육통법을 시험하기 위해서 3일동안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니 산너머 백리 밖의 일까지도 알았다. 이때부터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율려, 산수, 중국어 및 기타 외국어 등을 모두 통달했고, 천리 밖의 일이라도 고요하게 집중하면 알아내었다.

한번은 집안에서 종을 심부름 보냈는데 귀가할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돌아오질 않자 가족들은 정렴에게 자초지종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정렴은 가만히 명상을 하더니 그 종이 고개를 넘어오다가 양반 행차에 불손한 행동을 해서 붙들려 맞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종이 도착하여 사실을 확인해 보니 과연 정렴이 말한 바와 같아서 집안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또한 새나 짐승의 말을 잘 알아들었는데, 어느 날 잔칫집엘 갔다가 새소리를 듣 고 그 집 술이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은 것임을 알아내었고, 이로 인해 고을 사또에게 잡혀갔다가 사또가 사생아였다는 것을 역시 새 소리에 의해 알아내었다는 일화 등이 전해 내려온다.

열네살 때 아버지 정순붕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따라서 연경에 갔다. 연경에서 한 도사를 만났는데, 도사가 묻기를 "당신의 나라에도 도사가 있소?" 하니, 정렴은 "우리나라에는 삼신산이 있어 대낮에도 신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항상 볼 수 있는데, 무었이 그리 귀할게 있겠소?“ 라고 했다. 도사는 놀라며, "어찌 그럴수가 있소?" 하니, 즉시 황정경,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 등의 도경을 들어 신선이 되는 방법을 설명하니 도사는 감탄하여 피하여 버렸다.

이때 유구에서 온 사신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나라에서 역수를 헤아려보니 중국에 가면 모월 모일에 진인을 만날 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에 와서 두루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정렴을 만나자 크게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고 자초지종을 애기하며 "이른바 진인은 선생이 아니시면 누구시겠소?" 하였다.

그리고 역학을 배우기를 청하자, 정렴은 곧 유창한 유구어로 주역을 가르쳤고, 이에 여러나라 사신들이 다투어 와서 그 장면을 구경하였다. 선생은 각각 그 나라 말로 척척 응답하니 모두 깜짝 놀라 천인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어떤 사신이 묻기를 "세상에 새나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니, 다른 나라의 말은 곧 새, 짐승의 소리와 같습니다. 그 말을 알아듣는 것은 종종 있을 수 있으나, 그 말을 입으로 하는 것은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자 정렴은 "나는 듣고서 해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은지 오래 되었소." 라고 하였다.

아버지 정순붕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의 일 이었다. 어느날 금강산에 노닐고 있었는데, 마하연 암자에 이르자 부친이 정렴을 보고 말하기를 "사람들이 네가 휘파람을 잘 분다고 하는데 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절경에 왔으니 한 곡조 불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하고 휘파람을 불어보라고 하였다. 정렴은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와 있으니 청컨대 내일 비로봉에 올라가 불겠읍니다." 고 하였다. 다음날은 비가 내리는데 북창은 비를 무릅쓰고 봉우리로 먼저 올라갔다. 정순붕은 비가 그친 오후에 중과 함께 올라갔는데, 기암절벽인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어디선가 맑디맑은 피리소리가 울리는 것이었다. 이에 중이 놀라며 "이렇게 깊은 산속에 웬 피리소리 일까요? 경치가 좋으니 아마도 신선이 내려왔나 봅니다." 라고 하였다. 정순붕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피리소리가 아니라 아들이 부는 휘파람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정렴은 고매한 선비로 음양술 및 의약술 등에도 정통하였다. 心神을 수양하여 그가 거처하면 빛이 온 방안에 가득하였다. 홍성민(1536-1594(중종31-선조27 문신)이 젊었을 때 정렴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소주잔이 나라에서 정한 정식 규격으로 작았다. 정렴이 술잔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지금은 술잔이 조그만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커져서 큰 종만 해질 것이오. 그 때가 되면 세상 일에 어려움이 많을 것인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지만 자네는 온갖 괴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니 몹시 우려되는구려." 그후 정렴은 세상을 떠났고, 세상에서는 소주 마시는 것을 숭상하여 점점 큰 종을 사용하여 술을 마시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낫을 때 홍성민은 항상 정렴의 선견지명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정렴은 산사에 거처하면서 병풍을 여러 겹쳐 놓고, 문밖도 엿보지 않고 하루종일 조용하게 말없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 때 산사에 거처하는 어떤 중이 문안을 드리니 정렴이 말하기를 "오늘 우리 집 하인이 술병을 가지고 올 것이오." 그런데 잠시 후 놀라며 말했다. "안타깝구려.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었소." 얼마 후 하인이 와서 말했다. "오늘 술병을 지고 오다가 산마루에서 바위에 넘어져 그만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일찌기 정렴이 연단화후법을 연마하고 있는데, 한 선비가 찾아왔다. 그는 지극히 한미한 선비로 그 때가 한창 추운 겨울이라 추위와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었다. 북창은 그를 자리에 앉게 하고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쇳조각을 자기 겨드랑이 아래 끼웠다. 조금 뒤에 그 쇳조각을 꺼내 손님에게 주었는데, 활활 타고 있는 화로와 같이 따뜻하여 땀이 흘러 등을 적셨다.

또 어떤 사람이 고질병을 앓고 있어 여러달 침도 맞고 약도 먹어 보았지만 낫지 않았다. 북창은 그를 자리에 앉히고 한 웅큼의 관초를 손으로 비비고 입으로 불어 따뜻하게 한 뒤 복용하도록 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어느날 절친한 벗이 병에 걸려 죽게되었는데, 어떠한 약도 듣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북창의 신이함을 알고 찾아와 아들의 수명을 물으니, "수명이 이미 다 되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울면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간청하자, 북창은 그 정을 불쌍히 여겨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내 수명에서 십년을 떼어 아드님의 수명에 붙여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내일 밤에 남산 꼭대기에 혼자 가보시면 그곳엔 붉은 옷과 검은 옷을 입은 두 중이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아드님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간곡하게 비십시오. 중이 아무리 화를 내고 때려도 결코 물러서지 마시고 정성을 다해 애걸복걸하시면 얻는 것이 있으실 겁니다.

병자의 아버지가 북창을 말을 좇아 밤에 남산에 가니 과연 두 중이 있었다. 그 앞에 가서 공손히 절하고 울며 사정을 말하니 두 중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지나가던 산사의 중이 여기서 잠시 쉬고 있는 중인데, 공은 누구시길래 이런 행동을 하십니까? 공의 아들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을 우리가 어찌 알겠소? 빨리 가보시는 게 좋겠소." 그러자 그는 못들은 체하고 손을 모아 큰절을 하면서 비니, 중이 화를 내며 "미친 놈이로구나, 때려서 쫓아버려야 겠다." 하고는 지팡이를 들고 마구 때렸다. 그러나 그는 죽을 각오로 물러나지 않고 울며 애걸하였다. 한참 뒤 검은 옷 입은 중이 웃으며 말했다.

"이는 필시 정렴이 시킨 것이로구만, 가련하니 그자의 수명을 십년 감하여 이사람의 아들 수명을 늘려주는게 어떻겠소?" 붉은 옷 입은 중이 고개를 끄떡이며 좋다고 하였다. 검은 옷 중이 소매속에서 책 한권을 꺼내 붉은 옷 중에게 주니, 그가 붓으로 무언가를 썼다. 이어 "당신 아들이 지금부터 십년 더 살터이니 돌아가거든 정렴더러 다시는 천기를 누설치 말라고 하시오." 라고 말하고는 홀연 사라져 버렸다. 붉은 옷의 중은 사람의 수명을 맡은 남극성이며, 검은 옷의 중은 북두칠성이었다. 이후 아들의 병이 점차 회복되어 십년을 더 살았고 북창은 마흔네살에 죽었다.

정렴은 본디 허약함을 걱정하여 항상 자신이 헤아려 병세에 따라 하인에게 아침 저녁으로 약을 달리 쓰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는 입을 꼭 다물고 정좌하고 식사때를 기다리고, 해가 뜨면 비로소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밤에도 단정하게 앉아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마음가짐이 높고 밝으며 의리를 깊이 다지며 모습이 구름속의 학이나 바람앞의 매미와 같았다.

일가삼선

정렴의 동생인 古玉 정작鄭碏 또한 정렴에게 단학을 배워서 기인으로 유명하였으니, 이들 정렴, 정초, 정작을 세상에서는 一家三仙 으로 불렀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교유관계 및 삼교 회통 북창 정렴은 평소에 특별한 스승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는 않으나 1546년(명종1)에 화담 서경덕이 서거했을 때, "나는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해야 하나?" 라는 추모시를 써서 서경덕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었다.

정렴은 남사고(해인으로 유명함)와도 교유하였고, 특히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였던 수암 박지화와 절친한 사이였다. 수암 박지화는 주역에 정통하였고, 임진왜란 때 수선이 된 기인으로 정렴보다 일곱살이나 어렸지만 함께 세상을 주유하였다.그가 좌화(坐化)한 날, 부근의 주민들이 그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정구의 동의보감 서문 내용

의자들은 늘 의학의경전이 되는 ‘황제내경’을 저술한 ‘헌원(軒轅)과 기백(岐伯)’을 즐겨 말한다. 황제와 기백은 위로는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아래로는 사람의 살아가는 도리를 다 통하였으므로 구태여 그런 이치나 도리를 글로 남길 일이 없었으나 오히려 의문나는 것을 말하고 상세히 문제들을 들어내어 후세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의학에 관한 글을 남겼으니 의학을 하는 자들에게 의서가 있음은 꽤나 오래 되었다.

위로는 순우의(淳于意), 편작(扁鵲)에서부터 아래로는 유완소(劉完素), 장종정(張從正), 주진형, 이고(李杲)등 수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연달아 출현하여, 저마다 자신들이 옳다고 논설이 분연하였고, 서로 부분적으로 표절하여, 다투어 문호를  세웠으나, 의학에 관한서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술도 혼란스럽게 되어, 동양의학이 경전이 되는 황제내경의 소문, 영추의 취지와는 뜻이 영달라지고 말았고 제대로 바른 의도를 아는 사람이 적어지고 말았다.

세상의 용렬한 의자들은, 이치를 궁리하고 깨달을 생각은 하지 않고 혹은 황제 내경의 가르침을 배반하여 자의적 해석 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옛 경전에 얽매어 변화를 알지 못하여 진의를 가리고 분별하고 선택하는 데 어두워 그 요점을 잃음으로서 오히려 사람을 살리는 의술로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허다 하였다.

우리 선조대왕께옵서는 [선조를 일컬음] 몸을 다스리는 법으로, 만 백성을 구제하시려고, 의학(醫學)에 마음을 두시어,  병들어 고통 받는 백성의 어려움을 마음아파 하시어 일찍이 병신년(1596년)에, 태의로 재직 중인 신하 허준을 불러 다음과 같이 하교하시었다. “근자에 나도는 중국의 의학 서적들을 보자면, 모두가 용렬하고 천박하여 불필요한 것만 많이 모아 도무지 볼만한 책이 없으니, 여러 의학 서적들을 모아 엮어서 한권의 책으로 편성해 보시오. 또한 사람의 질병은, 대개 조리와 섭생의 잘못으로 생겨 나는 것이니, 수양(修養)을 우선으로 하고 약은 그 다음이 어야 할지니 책을 편집하는 데 있어서 여러 복잡다단한 방을 잘 가려내어, 요점 정리에 주력하여 쓸 것이고, 특히 의원과 약도 없는 빈촌과 산간벽지의 백성들은 가엾게도 일찍 죽는 자가 많고, 우리 조선은 향약(鄕藥)이 많이 나는 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안타깝게도 그를 알지 못하니 약을 분류할 때에 향약의 이름까지도 함께 기록하여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하시오."

명을 받고 허준은 물러나와, 유의(儒醫) 정작과, 태의(太醫) 양례수, 그리고 김응택,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편찬국를 설치하여 대강의 줄거리를 작성할 무렵에, 그만 1597년 정유대란을 당하여, 모든 의원들이 뿔뿔이 헤어져 작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난리가 평정되고 난후에 다시 대왕께서 허준을 불러 그대 혼자서라도 찬집을 완성해 보라며, 궁중에 보관해 오던 500여권의 의학서적을 내어주시며 이를 참고 자료로 삼으라하셨는데,

안타깝게 도편찬 작업을 절반도 이루기전에 선조대왕은 승하하셨고, 현재임금님께서(광해군) 즉위하신지 삼년이 되는  경술(1610년)년에, 허준은 마침내 편찬작업을 마치고 임금께 진상하고, 그 책이름을 '동의보감'이라하니, 책을 모두 합하면 스물다섯권이다. 임금님께서 책을 보시고 기쁘게 여기시어, 하교하여 말씀하시길,

“양평군 허준이 선왕께서 살아 계실 때, 의학 서적을 편찬하라는 특별한 분부를 받들어 그 생각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귀양가서 지내고 전쟁 중에 떠돌아 다니는 동안에도 그 노력을 그치지 않아 이제 책 한질을 올려 바쳤으니 선왕(先王)께서 명하신 일이 과인때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슬픈마음을 금할길이 없다.“ 하시고,

태복마 한 필을 허준에게 하사하며 그 노고에 보답케 하고, 즉시 내의원에 명하길 간행청을 만들어 인쇄하여 경향 각지에 널리 배포 하도록 하라하시고, 신이정구가 몰래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태화(太和)의 기가 한번 흩어져, 육기(六氣)의 부조화를 이루면 위독한 병이 들어 낫지않고 돌림병이 되어 백성들이 재해를 입게 되므로, 의약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그들의 일찍 죽음을 사전에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실로 통치자의 어진 정치중에 우선이다. 하지만 책이 없으면 의술을 실을수 없고 책이 있으나 잘 선택하여 싣지 않으면 정확하지 않으며 잘 선택하여 실어도 그것이 넓지 못하면 이치가 불분명하고 그전하는 것도 널리 못하면 혜택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예전 것과 오늘날의 것들을 고루 묶은 데다가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절충하여 근원을 깊이 탐구하고, 주요한 요점만을 걸러냈으니 상세하되 산만하지 않고 줄였으되 묶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구성은 내경(內景)과 외형(外形)으로 시작하여 잡병편에 여러 가지 처방 등으로 나누어 맥결, 증론, 섭생, 양성의 요점과 침구등 여러 법규에까지 두루 갖추지 않은게 없고 짜임새가 정연하고 문란하지 않으니 질병이 비록 수백수천가지 증세라 하더라도 보사와 완급을 알아 대응하면 모두 이치에 들어 맞을것이니 굳이 옛날의 서적에 마음을 둘 필요 없고, 근래의 약방문들도 살펴볼 필요없이 옳게 분류해진데 따라

여러 처방이 두루 나오니 증상에 따라 약을 투여하기만 하면 계약을 맺은것처럼 틀림없이 들어맞을 것이다. 이 모두는 선왕께서 내려주신 묘한 지혜이며 또한 우리 성왕께서 거룩하신 선왕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은 높은 뜻이니 이는 백성과 사물을 아끼는 덕이라 쓰기에 이로우며 후한 삶을 살게 하는 길로서 앞뒤를 헤아려 서로 화합하고 길러내는 올바른 다스림이 바로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르기를 어진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그 이로움 이두루 넓다'하였으니, 이 어찌 그렇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만력 39년 (1611년) 신해년 한여름에,'상기직명(職名)'의(신)이정구는 교지를 받들어 삼가서(序)하다. 만력 41년( 1613년) 11월 내의원은 교지를 받들어 이 책을 간행(刊行)하다. 감교관 통훈대부 행내의원직장 (신)이희헌 행내의원부봉사     (신)윤지미 감교관 '상기직명'직장 (신) 이희헌

이정구

한문 4대가의 한 사람. 본관은 연안. 14세에 승보시에 장원한 뒤, 22세에 진사,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했다.다1598년(선조 31) 명나라의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술변무주를 지어 명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대제학에 올라 문사에 능한 자들을 발굴했고, 중국을 내왕하면서 100여 장의 〈조천기행록〉을 펴냈다. 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좌의정·우의정을 지냈다. 조선후기 부참군, 의서인출감교관, 내의정 등을 역임한 의관.

윤지미

윤지미(尹知微, 1569년 - ?)는 조선 중기, 후기의 의관이다. 본관은 파평이다.1606년(선조 39년) 식년의과에 2등(二等) 아원으로 급제, 의서 발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의서를 편찬, 정리할 때, 감교관으로 참여하였다. 서자였지만 첩이었던 어머니 억춘의 신분은 평민인 양첩이었으므로, 천민 신분은 아니었다.

증조할머니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 당의 손녀라 그의 대에까지 선원록에 실렸다.

양예수(楊禮壽, ?~1600)는 조선 명종과 선조 때의 의관이었다. 본관은 하음(河陰). 박학하고 의술에 능하였으나 1563년(명종 18) 내의원주부(內醫院主簿)로서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투옥 되었다.이듬해 다시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으로 발탁되었다. 1565년 어의(御醫)로 명종의 총애를 받아 통정대부에 오르고, 명종이 죽어 의관들이 처벌당할 때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중전이 수안과 해주에 머물 때 호종의관이 되기도 하였다.

선조는 자신의 병을 돌본 그에게 다음과 같은 조문을 내렸다.

양예수는 의관이다. 그는 의술로 한 세상을 울렸다. 그의 동생 지수(智壽)도 의관이었는데 임진왜란 중에 적에게 잡혔을 적에 적을 꾸짖고 강에 빠져 죽었다.

- 《선조실록》 132권, 33년 12월조

양예수는 태의(太醫)로 이름을 떨쳤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 및 가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남달리 박식했다는 것, 그리고 의술을 산인(山人, 세상을 떠나 산중에 사는 사람) 장한웅(張漢雄)에게 배웠다 허준과 함께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민간전설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어느 해에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가는데 강을 건너서 노숙하게 되었다. 밤이 되자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업고 가더니 높은 언덕 위에 내려놓았다. 호랑이는 여러 마리의 새끼들을 끌어내 그의 앞에 앉혀 놓고 땅에 엎드려 무엇인지 애걸하는 것이 아닌가?

양예수가 그 새끼들에게 병이 있는 것이라 짐작하고 고루 살펴보니 그중 한 마리가 다리가 부러져 죽게 되었다. 이에 주머니에서 환약을 꺼내 부러진 다리에 붙여 주고 나서 또 송진으로 갈아붙인 뒤에 손으로 소나무를 가리키니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는 이에 꿇어앉아 감사하다는 몸짓을 거듭하다가 검은 돌 하나를 꺼내 앞에 놓았다. 양예수가 그 돌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자 호랑이가 다시 업어다가 처음 있던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중국에 들어가 박식한 사람에게 그 돌을 보이니 그 사람이 놀라 말하기를 “이것은 주천석(酒泉石)입니다. 이 돌을 물에 넣으면 물이 술로 변하는 것으로, 진실로 다시없는 보배올시다”라고 했다. 실험해 보니 과연 그러했다.

- 유재건 《이향견문록》

정예남

본관은 온양(溫陽). 1582년(선조 15) 식년의과에 급제하였고,

의학에 밝아 허준(許浚)·정작(鄭碏) 등과 함께 『의방신서(醫方新書)』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한 바 있으며,저서로는 『서주유고』가 있다.

이희헌

1569년 6월 15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태릉(太陵) 출신으로, 증조부는 무관 이지방(李之芳)이며 할아버지는 병조 참판 이광식(李光軾)이며, 아버지는 급제 이감(李戡) 어머니는 예천윤씨 . 윤지미와 함께 의서의 감교관으로 참여, 이후 의서 발행, 인쇄를 감독하였다. 향년 84세를 살았다고 한다.

김응탁과 이명원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출처] 허준/동의보감,중국사신도 애장|작성자 참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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