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先訓
四佳先生 集中 斷摘 箴及訓子 十六件에서 自箴한것과 훈자한 十六件을 딴 것이다
金人操 楚나라에서 쇠로 사람을 만들고 말을 조심하라 三緘한것
我緘我口(아함아구) 내가 나의 입을 봉한다면
知我者維(지아자유) 나를 아는 자 누구일까?
言不可收(언불가수) 한 번도 말을 거두어 드리지도 못 함이요
駟不及追(사불급추) 빠른 말도 따라갈 수 없구나
喋喋조조
夢遊(몽유)桃源圖(도원도)
1.몽유도원도에 내력
몽유 도원도는 世宗大王의 셋째, 아들인 安平大君이
1447년 음력 4월에 꿈꾸었던 桃園을 표현한 것으로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安堅이 그림을 그리고
가장 뛰어난 서예가였던 安平大君이 跋文(발문)을 썼으며
鄭麟趾(정인지) 金宗瑞(김종서) 朴彭年(박팽년) 成三問(성삼문)
徐居正(서거정) 李塏(이개) 申叔舟(신숙주) 등 21명이
21名卿(명경) 文士(문사)들이 각기 詩文(시문)을 짓고 써서
그야말로 三絶(삼절)의 경지를 구현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몽유 도원도는 하나의 뛰어난 美術 作品일 뿐 아니라
세종조의 문화의 성격과 수준을 말해주는 문화적 업적인 동시에
한 시대의 역사적 현상을 대변하는 막중한 사료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단일 繪畵作品으로는 國內外를 막론하고
제일 널리 알려져 있으며 또한 현재의 작품으로는
단연 가장 대표적인 존재라 하겠다.
夢遊(몽유)桃源圖(도원도)의 사상적 배경
몽유도원들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가 있듯이
안평대군이 세종 29년 서기 1447년 4월 20일
꿈속에서 도원을 여행하고
속에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 주고 그리게 한 것으로
3일 만인 4월 23일에 완성을 본 것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안평대군의 발문 속에 잘 밝혀져 있다(圖板16)
그런데 이 발문은 모두 26행으로 되어 있고,
한 행은 17자로 구성되어 있다.
가느다란 먹선으로 가로 26칸 세로 18간을 긋고
한 행에 맨 위한 칸만 비우고 17자를 써 넣었다
한 행에 17자를 쓰는 것은 寫經에서 흔히 보는 전통으로
안평대군의 好佛과 寫經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하겠다.
이 발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좀 긴 편이지만 몽유도원들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므로 적어보기로 하겠다.
정유년 4월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나른하며
잠이 깊이 들므로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仁叟 朴彭年과 더불어 한곳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의 묏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에 숲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가 나서 서성대며 어디로 갈 바를 몰랐었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 야복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서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를 들어가면 도원이외다”
하므로 나는 인수와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다
시냇물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사람을 홀리게 한다.
이 골짜기에 들어가니
마을이 넓고 티어서 2-3리쯤 될 듯하며 사방이 산이 바람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을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며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인수한테 이르기를
“바위에다 까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 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 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貞父 崔恒 泛翁(범옹) 申叔舟(신숙주) 등인데
함께 시문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 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
아!아! 通(통)都(도)와 大邑(대읍)은 진실로 번화한 벼슬아치의 노니는 곳이요,
깊은 골짜기와 깎아지른 절벽은 柳潛(유잠)한 은사에 깃드는 곳이다.
그러므로, 몸에 靑紫(청자)가 얽힌 자는 족적이 살림에 다다를 수 없고
泉石(천석)으로 정성을 도야하는 자는 꿈에도 조정을 그리지 않나니
대개 정적으로 조급함이 길이 다른 것은 이치의 필연이다.
옛사람의 말에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대궐 안의 꿈을 의탁하여 밤낮으로 왕사에 종사하고 있는데,
어찌 꿈이 산림에이르렀으며 나의 좋아하는 친구가 하도 많은데
어찌 반드시 도원에 노닐면서 이 두어 사람만 동행하게 되었는가
아마도 천정이 유벽한 것을 즐겨 본시 즐겨 본시 천 석의 회포를 지냈고
또 이 두 분과 더불어 사귀며 특히 두터웠던 까닭에 이렇게 된 것인 듯하다
이제 可度(安堅) 가도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나
다만 옛날의 말만 도원도 역시 이와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훗날 보는 자가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한다면,
반드시 가부의 말이 있을 것이다.
꿈 깬 뒤 3일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기에
匪懈堂(비해당)의 海竹軒(해죽헌)에서 이 글을 쓴다.
夢遊桃源圖(몽유도원도)의
四佳(사가)선생 詩文(시문) 해석
武陵何處是桃園(무릉하처시도원)
武陵(무릉)의 어디쯤이 桃園(도원)인지
無術齋攀款洞門(무술재반관동문)
고을 입구에 다시 다다를 수 없구나
蛇馬粉爭幾年代 (사마분쟁 기연대)
사마의 분장이 있었던 것은 어느 해쯤인가?
鷄蠶生長己兒孫 (계잠생장기아손)
닭과 누예가 자라서 벌써 자손이 늘었다
一川花合春常在(일천화합 춘상재)
한 줄기 시냇가에 꽃이 어우러져 언제나 봄이고
四壁運深路不分(사벽운심로불분)
사방 암벽에 구름조차 짙게 끼어 길을 분간할 수 없네
自是漁郞多好事(자시어랑어호사)
원래 고기잡이들에게는 기이한 일들이 많지만
此中消息了難聞(차중소료난문)
이곳 소식은 어찌도 그리 전해 듣기가 어려운지
水滴銅 龍漏刻長(수적동용루각장)
물시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느린데
書堂高睡 斗凄涼(서당고수두처량)
사람은 단청칠한 높은 건물 속에 잠들고
북두성은 하늘에 싸늘하게 걸려 있네
雅懷不貧丹兵興(아회불빈단병흥)
멋들어진 생각은 단구의 흥에 뒤질 바 없고
異境初移 玉枕傍(이경초이 옥침방)
기이한 세상 풍경이 옥베개 머리맡으로 처음으로 옮겨졌네
竹屋蕭森 深洞靜 (죽옥소삼 심동정)
깊은 골짜기 대나무 둘러싸인 집 마냥 조용하고
桃花 掩映 半溪香(도화 엄영 반계향)
흐르는 시냇가 복숭아꽃 그림자 비쳐 향기롭기만 하네
覺來 物色 依然是(각래 물색 의연시)
꿈에서 깨어나니 모든 것 다 전과 같거늘
誰道 神僊隔茫 (수도 신선묘망)
저 멀리 아득한 신선 세상으로 누가 인도하여 주엇던고?
偶然逃世 是神僊(우연도세 시신선)
우연히 세상 피하여 신선이 되었고
細徑潛通 小有天 (세경 잠통 소유천)
작은 길 숨어들었더니, 딴 세상으로 통하는 것
鑿谷架巖 何代室(착곡 가암하대실)
골짜기 파헤치고 바위틈에 집 지은 것 어느 시대 일인고
採花食實 不知年(채화 식실부지년)
꽃잎 따고 열매 주워 먹으며 해가 바뀌는 줄 몰랐어라.
羲皇日月 三春裏(희황일월 삼춘이)
羲皇(희황)때 세상같이 계절 따라 세월 가고.
漢晋乾坤 百戰邊(한진건곤 백전변)
漢(한)나라 晋(진)나라 왕조는 수없이 전쟁통에 바뀌었네.
千古地靈 藏不洩 (천고지령 장불설)
천고에 신령스러운 땅기운 숨겨오던 것을.
要憑淸夢 世間傳 (요빙청몽 세간전)
청아한 꿈 인연 되어 세상에 전하였구나
尋僊不必張尋源 (심선불필장심원)
신선을 찾음에 있어 근원까지 캐고들 못 있으랴.
縮地烟霞自在春(축지연하자재춘)
축지법 사용하니 선경의 봄이 눈앞에 있는 것을.
花隱嚴隈 門半掩(화음엄외 문반엄)
꽃그늘 바위 곁에 지은 집 문이 반쯤 닫혀 있고
丹橫浦淑 水平分(단횡포숙 수평분)
나룻대에 배 가로 놓여 있고 물 잔잔하네.
採芝試伴 商山老(채지시반 상산노)
지초 캐러 갈 때 상산 노인 따라가고
鍊汞非貧 上界眞(연홍비빈 상계진)
丹藥(단약) 제련함에 하늘 위에 진이니 탐낼 것도 없는 일
莫怪人間 音間隔(막괴인간 음간격)
인간 세상과 소식이 끊겼음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避秦元是 避風塵(피진원시 피풍진)
秦을 피한 것도 따지고 보면 풍진 세상 피하려는 것
夙信天人 雅想淸(숙신천인 아상청)
지체도 높으신 분 맑은 생각 품으신 것
예전부터 믿어왔던 터에
無陵春夢 轉分明(무릉춘몽 전분명)
무릉의 봄꿈이 이제 더욱 분명해졌네.
縈紆洞口 千回路 (영우동구 천회로)
마을어구 천갈래로 얽힌 길목에서
邂逅山冠 一笑迎(해후산관 일소영)
冠(관) 쓴 산 사람 만났는데 웃음으로 말해주네.
玉砌丹墻 頻指點(옥체단장 빈지점)
옥섬돌 붉은 단장에서 외계에서 온 사람 손가락질 하는데
石田瑤草 且縱模 (석전요초 차종모)
돌밭에는 瑤草(요초)가 흐드러지게 자라있네.
陪游盡是 傳僊傑 (배유진시 전선걸)
함께 어울려 노는 사람 모두 이야기 속의 신선이라
認得當時 畵裏行(인득 당시 화장행)
마치 그림 속에서나 있었던 일만 같네.
賴是傳神 顧愷之(뇌시전신 고개지)
신의를 전한다는 顧愷之(고개지) 솜씨련가.
畢端還有 洞中思(필단환유 동중사)
살아 신선 사는 마을 전경이 끝에 살아있네.
玉僊恍惚 天慳露(옥선황홀 천간로)
옥으로 다듬은 듯한 신선 하늘도 아끼는 모습 드러나고.
綃幅森羅 地軸移(초폭삼라 지축이)
비단 폭에 하늘과 땅 모든것이 몽땅 옮겨져 있네.
遠近峰巒 相隱映(원근봉만 상은영)
멀고 가까운 봉우리 산봉우리 서로 그림자 비치고
高低花木 正粉披(고저화목 정분피)
높고 낮은 꽃나무들 지금은 한창으로 피어나 있네
楚香靜坐 圖書裏 (초향 정좌 도서명)
향 피우고 조용히 그림과 글 속에 앉아 있노라니
更憶晴窓 栩栩時(갱억청창 허허시)
창밖으로 훨홀 나르던 일 더욱 생각하니
造物紛紛 䖒小兒(조물분분 회소아)
이것저것 만들어진 물건을 어린아이 장난같고,
情神變幻 眇難知(정신변환 묘난지)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묘연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리라
邯鄲枕上 黃粱熱(감단심상 황량열)
한 단 한 단의 베개 위에 황량이 있었더라네
華胥鄕中白日遲(화서항중 백일지)
華胥(화서)의 고을에 대낮은 더디구나.
蝴蝶悠陽 多取次(호접유양 다취차)
나비 훨훨 나름에 있어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고
馬羊因想 自希夷(마양인상 자희이)
말과 염소도 생각에 따라서는 스스로가 道(도)의 본체가 되는 법
幾人夢到 桃源洞(기인몽도 도원동)
꿈속에 도원 마을 다녀온 사람이 몇이나 될꼬?
梅竹千秋 一段奇(매죽천추 일단기)
梅竹(매죽)이 겪었던 일 촌추에 전하여질 기이한 일이로세
垂垂一簇 畵堂高(수수일족 화당고)
넓다란 방에 늘어뜨린 그림자 족자.
意匠經營 細人毫(의장 경영 세인호)
훌륭한 솜씨로 이모저모 세밀히도 그려냈구나.
作記遠過 彭澤妙(작기원과 팽택묘)
題記(제기)를 쓴 솜씨는 도연명의 묘함보다 훨씬 낫고
哦詩須倩 退之豪(아시발청 퇴지호)
시를 읊은 것 韓退之의 호방함보다 뛰어났네
披圖不覺 生新翼(판도불각 생신익)
그림 펼치니 나도 몰래 새로운 날개 돋는 듯한데
人筆何曾 捲怒濤 (인필 가증 권노도)
붓으로 어떻게 출렁이는 파도 같은 정감을 담았을까?
若使淸遊 陪杖屢(략사청유 배장루)
지팡이 짚고 짚신 맑은 놀이 뒤따르게 했더라면
也應身世 屬仙曺(발야흥 신세 속선조)
사람도 아마는 신선이 되었을 것을
人間膏火 日相煎(인간호화 일상전)
인간 세상 화덕 같은 불덩이는 날로 열기를 더하여 타오르는데
僊洞迢迢 若箇邊(선동초초 약개변)
신선을 사는 마을 아득히 이 세상에 끝만 같아라
欲試豈無 餐玉法(욕시개무 찬옥법)
玉(옥)을 갈아 먹는 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縱歸苦乏 賣山錢(종귀고핍 매산전)
은둔을 하려 해도 산을 살 돈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未尋杜甫 靑精飯(미심두보 청정반)
杜甫(두보) 靑精飯(청정반)찾을 것 없고
空憶昌黎 玉井蓮(공억창려옥정련)
昌黎(창려)의 玉井蓮(옥정련)생각도 부질없는 일
乞取刀圭 如何得(걸취도규 여하득)
선약 먹는 숟가락 얻어 나도 신선되어
願乘鸞鷄 訪群仙(원승란계 방군선)
난세학새 등에 타고 여러 신선들이나 찾아 나서려네
頭邊歲月 去當當(두변세월 거당당)
머리맡에 스치는 세월 거침없이 흘러가는데
犇走東南 有底忙(분주동남 유저망)
사람들 동쪽 남쪽으로 분주하는 것이 무엇이 바빠서인가?
好夢不長 名臣路(호몽불장 명신노)
벼슬같이 이름 걸고 좋은 꿈 길 수도 없는 터라
歸情先在 水雲鄕(귀정선재 수운향)
돌아가고픈 마음 물 흐리고 구름떠가는 고장으로 먼저 가 있네.
靜中玄화 안심낙(정중현화 안심낙)
고요한 도에 기유하여 조용히 살아가미 마음 편쾌하는 양이오
閑裏黃庭 却老方(한리황정 각노방)
천지의 중앙에서 한가하게 살아가며 늙은 것
물리치는 좋은 방편이라
早晩求田 仍門舍(조만구전 잉문사)
조만간 나도 밭떼기 한 필지 구하여 초가집 한 채 짓고
一藁春水 苦蘭獎(일고춘수 고당장)
봄 강에 배 띄우고 노나 좋으며 살아가리라
達城 徐居正 (달성 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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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城 徐居正(서거정)의 경력
이명 | 자-剛中(강중) 호 四佳亭(사가정) 亭亭亭(정정정) 조자 子元(자원) 서거정 |
출생-사망 | 1420년 (세종2) - 1486(성종19) |
본관 | 달성 |
시대 | 조선 세종에서 성종 |
직업 | 문신학자 |
가족 | 할아버지 徐義(서의)아버지 徐彌性(서미성) 외할아버지 權近(권근) 자형 崔恒 |
관련 인물 | 조수. 유방선 |
四佳集(사가집) 東人詩話(동인시화) 太平(태평) 閑話(한화) 滑稽傳(골계전) 筆苑雜記(필원잡기) |
趙須(조수) 柳方善(유방선)의 문화에서 수학하였다. 學文(학문)이 매우 넓어서 天文(천문)
地理(지리) 醫學(의학) 卜筮(복서) 姓名(성명) 風水地理(풍수지리)에 까지 貫通(관통)하였으며,
문장의 일가를 이루고 특히 詩(시)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20년) 생원 진사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司宰監直長(사재감직장)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학자 經筵司經(경연사경)이 되고
1447년 식년문과에 副修撰(부수찬)으로 知製敎 兼 世子 右正字(지제교 겸 세자우정자)로 승진하였다.
1451년 (문종1) 일 부교리에 올랐다. 다음에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의 종사관으로 다녀왔으며
1455년 (세조1) 世子 右弼善(우필선)이 되고 1456년 집현전에 혁파되자 成均館司藝(성균관사예)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의 적벽부를 글자로 모아서 칠언칠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하여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의 병과로 급제하여 우사관 지지교회에 初授(초수)되었다.
1458년 庭試(정시)에서 우동으로 공조참의 지저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五行(오행)總括(총괄)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謝恩使(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通州館(통주관)에서
安南(안남)使臣(사신)을 만나 詩才(시재)를 겨루다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丘霽(구제)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65년에 예문관 제학 中樞府同知事(중추부동지사)를 거쳐
다음해 拔英試(발영시)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登俊試(등준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行同知中樞府事(행동지중추부사)에 特加(특가)되었으며 경국대전 찬수에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 예문관 대재학 성균관 지사를 겸하여 文衡(문형)을 관장하였으며,
국가의 典冊(전책)과 使命(사명)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純誠(순성)明亮(명량)佐理功臣(좌리공신)3등에 녹훈되고
達城君(달성군)에 봉하여졌다 1474년 다시 君(군)에 봉허하여지고 좌참관에 복배되었다.
1476년 遠接使(원접사)가 되어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酬唱(수창)을 잘하여 奇才(기재)라 칭송을 받았다.
이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하였으며, 1477년에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都摠管(도총관)을 겸하였다.
다음에 대재학을 겸직하였고 곧 이어 한성부의 판민에 제소되었다. 이해동문선 130건을 신찬하였다. 1
479년 2조 판성화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문과의 館試(관시) 漢城試(한성시) 鄕試(향시)에서 7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 吳子(오자)를 주석하고 歷代年表(역대연표)를 찬진하였다.
1481년 신찬 東國(동국)여지승람 50권을 찬진하고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世子貳師(세자이사)를 겸임하였으며, 이에 동국통감 57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86년 筆苑雜記(필원잡기)를 저술하여 史官(사관)의 결탁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학사(學師)가 되어 논어를 강하였으며,
다음해 1488년 향년 69세로 別世(별세)하였다
홍치무신 12월에 공이 질환으로 퇴직하여 죽음을 대비코저 상소하였으나
상의 비답 불허하고 내의로 보내는 비답을 내리고 술과 약재를 내려보냈으나
공은 마침내 다음날 임자가 작고 하니 향년 69세라
상이 슬퍼하며 반찬도 줄이고 조회도 철폐하고 어서로 높은 재주 일대에 소리 내고
중화의 가르침을 애륜(법도를 사랑하고 하시고)
유골을 수습토록 명하시고 시호를 문충공으로 내리시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 23년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그의 저술로 산문집으로 四佳集(사가집)이 전하며
공동찬집으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경국대전
/ 聯珠詩格言解(연주시격언해)가 있고 개인저술로서 연대역표/東人詩話(동인시화)
太平閑話滑稽傳(태평한화골계전) /筆苑雜記(필원잡기) /東人詩文(동인시문)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문종.단종.세종.예종.성종 때까지 文柄(문병)을 장악하였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론 이른바 15세기 官學(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勳臣(훈신)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하였으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26년 동안 金宗直(김종직) 姜希孟(강희맹) 등 당시 일류 문인을 물리치고
文柄(문병)을 잡았다고 해서 당시에 그가 반드시 문학적으로 가장 우수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관료적인 문인으로서 문학적인 영예를 누린 셈이고
그의 시도 관료 문학에서 부귀에서 나온 시라는 평을 들었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시로 遊蜂飛不定(유봉비부정) 閑鴨睡相依(한압수상의)
月色蛩音外(월색공음외) 河聲鵲影中(작성작영중)은 널리 음영되던 가작이다.
또한 그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
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세력을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三國均敵(삼국균적)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檀君(단군)이 肇國(조국)하고 箕子(기자)가 受封(수봉)한 이래로 삼국 고구려 시대에
넓은 광역을 차지해 왔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의 方輿勝覽(방여승람) 이나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의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추동하여 편찬한 사서 지리서 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의해서 사림인사의 참여하에 개천되었다.
그런데 그가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四佳集(사가집)
사가집 신문집 총 15 책 이미 시가집이라 하여 권 1에는 賦(부)와 辭(사) 권2 서 52 에는
모두 시 그리고 보유 일 에서 삼 에도 시가 수록되어 있고 다음 문집이라 하여 일 다시 삼에 기 권 사에 대해서
육에 서 보유의 비지 잡저가 실려 있으며 임사홍이 서문을 썼다 동인시화 시화집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시화를 편집한 책 시인들의 시를 품평한 것으로 볼만한 것이 많으며 또한 조선시대 초기에
귀족 사회의 생활과 취미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문헌이다.
1474년 성정 5년에 간행되고 1639년에 이필령이 중간하였다.
사가공 서거정 중시조님의 후손 서호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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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4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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