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단군 여을 재위 68년 기사 원년(BC 1552) 갑신 52년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의
근처에 이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찰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람에 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병자 68년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 49년 정축 원년(BC 1484) 병신 20년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 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 55년 병인 원년(BC 1435) 기축 24년 남상인이 벼슬일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짓다. 경신 55년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흘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흘 재위 43년 신유 원년(BC 1380) 신미 11년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병신 36년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계묘 43년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C 1337) 은나라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나라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운국의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우여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릴 전하고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
병신 원년(BC 1285) 단제 명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쫒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흘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 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및 오가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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