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맥을 찾아서(박성수 교수)
여러분들 중 제 말씀을 들어보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제가
돌아다니며 역사강의를 하면서 필요를 느껴 책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한 내용을 녹음을 해 주신 분이 있어서, 그것을
교정해서 '한국사 비판(韓國史 批判)'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요즘 한국사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고 저도 그대로
썼습니다만, 국사(國史)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국사의 내용은 민족사여야 합니다.
왜냐 하면 국사가 일본사람들의 말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본시 우리는 국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한국사라는 말은 요즘 일본에서 일본사라는 말을 쓰니까 이것을 본받아서 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국사라는 말이 옳은 것입니다.
이 국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싶은데, 이유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오랜 역사신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역사신앙이 바탕이 되어서 우리 국사책이 만들어져야 할텐데, 거꾸로 고고학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유물이
나와야 어떤 역사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고고학적 유물은 나중에 나오면 좋겠지만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의 민족말살의 농간인 단군조선 부정과 우리 민족의 역사신앙 부정에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군사실론 주장은 불건전한 사상인가 단군조선 논쟁은 상당히 오래된 논쟁입니다.
그 논쟁사를 여기서
말씀드린다면 책이 한 권이 될 정도로 단군논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상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많은
논쟁중 단군논쟁이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대논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논쟁은 미해결의 상태에 있습니다.
『한국사
시민강좌』라는 것을 이기백 교수가 펴내고 있습니다. 이 책이 만부씩이나 팔린다는 얘기를 듣고 저는 통탄해 마지 않았습니다.한국사 시민강좌 제
2권은 완전히 단군을 신화로, 도깨비로 만드는 특집시리즈였습니다. 또 이기백 교수가 『단군신화론』이라는 책을 내면서 자기 할아버지를 귀신으로
만들고,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비록 표현을 완곡하게 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강력한
단군부정론입니다. 그 책에 '단군신화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한국인들은 저으기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자기이지, 저는 조금도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더 살펴보면 '우선 그것이 한국민족의 건국신화라 믿어지고 있는만큼 민족과
더불어 고이 받들고 간직해야 할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괜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이 신화는 부정되어질 수밖에 없을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의 상식은 자기 상식이지 남의 상식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일본교과서를 보고, 동경에서 "당신네 일본말은 왜 그렇게
모호해?"라고 했습니다. 일본문화를 도자기문화라고 합니다.
한마디 속에 여러가지를 집어 넣어서 어중이 떠중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예를 들어 '하이'라는 말을 영어로 예스(Yes)라고 번역해서는 안됩니다. 하이라는 말에는 예스도 들어가 있고 노(No)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스 노가 분명치 않은 말이 너희말이 아니냐? 말부터 분명히 하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기백 교수는
'단군신화의 문제점'이라는 글에서, '오늘날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단군을 신화라 생각하는 쪽과 반대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쪽이 서로
대립되어있는데,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상식이요 사실이라 믿는 쪽이 상식 밖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책임회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우기 그는 '그런 상식 밖의 믿음을 가지고 신문과 잡지에 단군을 우리
할아버지라고 떠드는 것은
불유쾌한 일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 했던 일본인들의 논리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킨 주장인 것입니다.단군을 모호하게 만든 최초의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라 생각합니다. 육당 최남선을 아주 숭배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죠. 이름을 거명해서 죄송하지만, 고려대학의 홍 모교수가 그런 사람들의 일부입니다. 최남선은 단군을 무당이라고 했습니다. 두계 이병도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두계 선생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저는 그 분과 대화도 같이 했습니다. 두계 선생을 비롯하여 그 일단의 사람들이
단군신화론을 주장한 글들을 모아서, 『단군신화론집』(1988년 세문사)을 펴냈습니다.
이 책 서문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단군사실론을 주장하는 것은 불건전한 사상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불건전한 사람이고 자기는 건전하다는 건데, 도대체 이런 적반하장도
있습니까?
북한의 사학과 정인보 선생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북한의 사학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대사
부분, 적어도 상고사 부분에 대해서는 잘했다고 박수쳐 주고 싶습니다.그러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애석하게도 6 25 동란 때에 납북되신 분들
가운데 위당 정인보 선생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상고사 부분이 잘 되어있는 것입니다.
위당 선생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가까운 사이었습니다. 단재 선생하면 조선상고사가 유명한데,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습니다.
단재는 여순감옥에서, "내 시체는 광복이 되기 이전에는 압록강 이남에 묻지 말고, 나를 태워서 그 재를 서해에 뿌려다오"라고 유언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신의주 건너 안동에서 위당과 단재가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위당은 상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고 단재는 막
가는 길이었는데,단재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큰가방을 들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위당이 물었습니다. "자네 그것 뭔가?" "알 것 없어."
위당이 살짝 보니까 동국사략이었습니다. 복사기가 없는 때라 단재는 그것을 손으로 베껴서 잔뜩 짊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비가
없는 것 같았지만 돈을 주면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위당은 단재가 화장실 갔다오는 사이에 몰래 이불 밑에다가 살짝 여비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위당이, "자네 일어나면 이불이라도 개야 할 것 아닌가?"해서 단재가 이불을 개 보니까 그 밑에서 돈이 나오게 되었죠.
단재가 말하기를 "어! 아직 돈 남은 게 있네!" 그래서 그것으로 상해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박은식 외에
단재는 우리 민족사를 수호한 분인데, 그 분이 죽으면서 그 맥이 끊겨 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위당은 한학자입니다.
위당이
단재의 뜻을 계승해서 동아일보인가 어디서 '5천년 조선의 얼'이라는 글을 연재했는데, 이것이 해방 후에 지금의 서울신문출판부에서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이 책을 보면 단군조선을 사실로서 해석하는데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단군조선을
증명해 나가야 합니다. 정인보 선생이 납북되면서 남한에는 두계가 우리 역사학계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애당초부터 불건전사상이고 어쩌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역사를 보는 눈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역사를 과학으로 여겼고, 그
역사의 법칙성에 굉장한 매력을 느껴서 역사의 법칙성을 찾아 헤맸습니다. 자나 깨나 법칙성을 찾아 다녔습니다. 지금에 와서 말하는데 법칙성이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역사를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역사는 철학이고 교훈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역사신앙이라는 것을 중시해야 합니다. 역사신앙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역사를 보아야 해요.그것이 설혹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역사는
오늘날 해석을 얼마든지 달리 할 수 있습니다. 콜링우드가 역사적 상대주의를 얘기했듯이, 사실 역사라는 것은 인식이 중요한 것이지 역사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민중론자에 따르면 역사는 고통받는 민중의 역사가 됩니다. 용감한 민중의 투쟁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통일론자입니다. 우리가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통한 어떤 중심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중심사상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
단군조선입니다.이 단군조선을 일본인들의 식으로 해석하여 신화라고 본다면, 이것은 역사 밖으로 내던져지고 우리 역사는 2000년도 채 안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시시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고조선을 고대국가로서 정립하고, 그 역사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바와 같이
2000년이라는 역사가 있었다고 하면,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지게 됩니다.이에 대해 우리 교과서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아십니까?
우선 고고학에서 말하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三國時代初期)는 무엇입니까? 아니 그럼 가짜 삼국시대가 있고 진짜 삼국시대가 있다는
말입니까?5세기 이전은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일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김원룡씨가 우리 고고학계를 리드하고 있습니다. 저는 김원룡 선생에게
배웠습니다만 흑백은 분명히 가려 놓고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문제
우리 민족은 족보에 대단히
신경이 예민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당해서 족보가 전부 불타 없어졌는데, 아마도 일인들이 족보 많이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후에 족보가 한 두개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뒤부터 우리 족보는 컨닝페이퍼같이 조그만하게 호주머니에
들어가게끔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족보를 잃어버리면 큰일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불나면 이불부터 꺼내고 그러는데 당시에는
이불이 아닌 족보부터 꺼냈고, 전쟁이 나면 족보부터 가지고 달아난다 할 정도로 우리는 족보민족입니다. 세계 족보를 연구한 어느 학자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진작에 여기 와서 공부할 걸 엉뚱한데 가서 공부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족보 중의 족보가
우리 민족사의 첫장인데 지금은 이 첫장이 찢기고 없습니다.
그래도 서울에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는 걸 보면, 자기
시조가 도깨비나 귀신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마냥 즐겁게 웃으면서 거리를 거닐고 있다는 겁니다.이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얘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5천년 역사라는 연대를 확실히 그어 놓은 연후에 강역문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강역문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고조선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박지원이 중국에 갔다 오면서
기행문을 썼지요. 그런데 이게 불온문서라 해서 문제가 되었지만, 그 내용은 세세한 것까지 다 기록되어있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참으로
명작입니다.
일본 갔다온 이야기로는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기행문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외국인들도 일본을 많이 다녀갔는데, 신유한의 소위 일본문화비판인 이 기행문을 따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열하일기의 박지원이 고조선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의 이기백씨는 평안도 사람으로서 대부분의 평안도 사람들이 평양을 고조선의 평양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 자신도 그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저는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고조선의 평양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백두산에서 흐르는 물이 송화강이 되었고, 그 송화강가에 평양이 있었습니다.
단재에 따르면 지금의 하르빈(하얼빈)을
말합니다. 하르빈은 바로 완달산이 있는 곳이며, 완달의 '달'은 달구벌(達丘伐)할 때 달이며, 달성공원 할 때 '달'은 곧 산이란
뜻입니다.배달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배달할 때의 '달'은 여러 설이 있지만, 이것은 백산을 말합니다. 백두산이라는 얘기입니다. 가장 성스러운
하늘에 제사지내는 산이라는 것이며 바로 성산입니다.
성산에는 반드시 성림이 있습니다. 홀리우드(Holy Wood)가 있다는
겁니다. 영화관이 아니라 성스러운 수풀이 있습니다. 그 수풀에 신이 내려오는 단군신화가 있습니다.이 단군신화에는 남성위주사상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가 농경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북한의 연구가 제대로 된 것입니다. 아까
얘기한 위당이 납북되는 바람에 그 제자인 리지린이란 사람이 제대로 고조선을 본 것입니다. 물론 2000년까지는 소급하지 못하고 서기전
10세기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고조선의 실체를 연구하는데 정력을 기울였습니다.그러나 대한민국의 학자들, 특히
대학의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학자들은 단군을 신화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얘기는 대종교에서 많이 하는데, 대종교가 창교되기 이전에
단재는 독사신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불과 나이 20대에 쓴 글입니다. 그 나이에 그러한 글을 썼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천재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까 얘기한 바와 같이 단재는 고조선의 평양은 송화강가의 하얼빈으로서 완달산이 보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하얼빈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하얼빈에 간 것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쏜 플랫폼을 보기 위해서 였는데, 완달산은 멀어서 가질
못했습니다. 완달산에 갔었더라면 그 백산에서 확인해볼 것이 있었어요. 저는 완달산을 백산이라고 생각하는데, 백산의 정상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는
마당이 있습니다.제단이 있으면 더욱 좋은데 제단이 없다고 하면 마당이라도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거기에는 마당이 있는 산꼭대기가 많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했을까요? 우리 민족이 그렇게 해놓은 겁니다. 중앙대학의 김 모교수가 저에게
"박선생! 거기 산꼭대기에 운동장 같은 것이 있는 데 그게 뭡니까?"하고 물었어요. 저는 "바로 그것이 천제지내던 곳입니다"하고 답했습니다만,
제가 89년도에 백두산에 올라갔을 때 바로 옆에 제단이 있는 것을 모르고 연길에 가서 연길박물관에서 전시한 사진을 보고서야 제단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단 외에 정자가 있는데 지금 그 흑백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백두산 정상에 올라서면
천지가 보입니다. 천지를 보기 위해서는 언덕에 올라서야 합니다.
언덕에 올라서기 전 오른쪽에 평평한 데가 있는데, 거기에 정자가
있었습니다. 천제지내는 곳이었죠. 불교의 것은 아닙니다. 일설에는 여진족의 것이라고 합니다만 어쨌건 거기엔 제단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곳이
천제를 지냈던 장소라는 것은, 단군기행을 경향신문에 일년동안 연재하면서 이와 비슷한 장소들을 많이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삼랑성
당시 저는 일본의 대마도와 오끼나와를 돌아서 경도 옆의 대진의 신라의 숲이라는 곳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말로 하면 시락이라고 해야 하는데, 거기서는 신라라고 우리 발음을 그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왜 거기 신라의 숲이 있는가, 거기에
신라 삼랑의 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삼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일본사람에게 "신라의 삼랑이라는 게 누구요?"하고
물어 보니까, 말하기를 그 당시 권력 다툼을 하다가 패한 패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아마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소설 속에 나올텐데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단군, 환웅, 환인을 삼신이라고 하는데, 그 삼신의 세째가 단군이고 그 단군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아들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부루, 부소, 부여로서 부여는 만주 하르빈 지역에 위치한 나라의 지명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지금의 충남쪽으로 내려와서 부여라 하고 산이름을 부소산이라고 했었습니다. 여기서 부소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실제 부소는 부싯돌이라고 해서 불을 발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삼천궁녀가 빠져 죽은 곳이 바로 부소산입니다. 부루는 부루단지라는 명칭에 남아
있습니다.
1년간 재배한 곡식을 가을에 추수하면 그 일부를 '부루님 고맙다'고 하면서 단지에 넣어서 1년 내내 그것을 신성하게
모셔 놓았는데, 바로 그 단지를 부루단지라고 합니다. 그 유습이 강화도 마리산 밑의 흥암리라는 곳에 남아 있습니다. 삼랑은 바로 이 부루,
부소, 부여를 일컬었습니다. 현재 삼랑성이라는 곳에 전등사가 있었는데, 예전에는 전등사가 아닌 천제단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불교신자가 있으면 죄송합니다만 중들이 와서 천제단을 헐어 버렸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그런 얘기가 많습니다. 신단이라든가
당집을 뽑아 보았더니 그 안에 돈이 많이 들었더라, 그래서 그 돈 가지고 절을 지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많은
민족종교를 훼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마총, 나라, 고려진
일본에 백마총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마총은 오사까에 못미쳐 아까이시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것 같애요.백마총은 바닷가에서 보였다고 합니다. 경주에 있는 큰
왕릉처럼 이 백마총은 일본군이 신라군에게 패했다는 역사를 말해 주는 증거라고 합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는 북진정책을 폈고 장수왕 때는
남진정책을 폈다고 하는데, 이 남진과 북진은 진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진출의 증거를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경의 바로 가까운 곳에 고려진이 있습니다. 그 고려진은 고구려군이 군사기지로서 설정했던 도시였습니다.백마총뿐만
아니라 일본의 나라도 신라인이 가서 세웠고, 그래서 야마토국가의 건국자는 바로 신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을 일본서기는 전부 왜곡해
버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일본서기 안에 한국말로 동요 같은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 재일교포에 의해서, 일본어
가운데에는 약 3,000단어가 우리 한국말이라는 책이 나와서 많이 읽히고 있다고 합니다. 박병식이라는 그 책의 저자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박병식이라는 분은 트로이의 성을 발굴한 독일의 슐레이만과 같다고나 할까요?
슐레이만은 빈털털이에 고아였는데, 네덜란드에 가서 많은 돈을 벌어 무역회사 재벌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을 다 팔아 치운 뒤 돈을 은행에 집어넣고, 마누라와도 이혼하고서 그리스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의 한 내용인 일리아드 오딧세이에 나오는 곳들을 발굴한 것입니다.
가장 큰 발굴은 터키에 있는 트로이의 성이었습니다. 삼층으로
된 그것을 발굴했는데, 그 모든 것을 터키정부에 넘겨주고 자기는 유물 하나 가지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슐레이만은 전문가가 아닌
재야고고학자였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전부 저놈 미친 놈이라고, 한국의 재야사학자들을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처럼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슐레이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박병식이라는 분이 일본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으로 역사연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일본어의 비극]이라는 책으로 상당히 읽혀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 세권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한국인 가운데 있다는 것을 여기 강단에 서 있는 역사학자들한테 얘기하면, 그
사람을 정상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정상이 아닐까요?
머리가 크고 키가 큰 민족
저는
고조선을 넓게 대륙국가로 보고 그 때 우리의 국민성은 미약하지 않고 무강했다는 가정을 세웁니다.중국측의 기록을 보면, 우리 한국사람들은 대단히
키가 큰 대인이고 머리가 크다고 합니다. 또 안면이 넓다고 합니다.
제가 중국의 연변에 가서 얼굴이 둥글둥글한 사람을 보고
조선족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합니다. 달처럼 둥글둥글합니다. 이것은 북방민족의 특색이라고 합니다. 광대뼈가 나와서 안면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투할 때는 불리하다고들 합니다. 실제로 남방민족인 흑인이나 백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들의 머리는 골프공만합니다. 조그만해요.
이에 비해 한국사람은 팔등신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축구공만한 대량컴퓨터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머리가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류학자들 사이에서 다 증명이 된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지금의 서울의과대학인 경성의과대학에서 이에 대해 일본교수가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크면 머리가 좋다'라는 것이 법칙인데, 조선인만은 예외로 '머리가 큰데 머리가 나쁘다'라고 강의를 하니까 김아무개라는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의자를 들고 강의하는 교수의 이마를 내리쳤다고 합니다. 유혈이 낭자할 정도로 쳐서 그 학생은 퇴학당했습니다. 그 학생은
퇴학당하자 사립 세브란스로 가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 만주땅에 유배당하듯이 일하다가 8 15해방 때 서울에 왔는데, 아주 독립유공자처럼 오더라는
겁니다. 사실 큰일 한 것이죠. 이마를 내리쳤으니까요.
사실 옛 기록에 나온 것처럼 당시 우리 민족은 머리가 크고 키도 큰 그러한
장신민족, 거인민족으로서 인류학에서 말하는 쟈이언트(Giant)민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평균신장이 170cm정도인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민족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180cm는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평균신장이 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왜 이렇게 줄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일본으로 갑자기 장신민족이 들어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라사람인데 그 이동 루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본의 동해안쪽에 가보면 한국의 어부들이 배에서 버린 라면봉지 같은 것이 흘러가서 쓰레기장이 되어있습니다. 일본에 가니 직접
그것을 보시겠느냐 하더군요. 그래서 아이구 그것 봐서 뭘하냐 했는데, 하여튼 옛날의 그 항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미야따라고 있죠, 북송선이
떠났던 항구인데 거기 가면 여러가지 볼만한 것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 항구 옆에는 호수가 있는데 호수를 지나 경도를 거쳐 나라로 가는
코스입니다.
코스 주변에 쭈욱 산이 있는데 그 산의 이름들이 전부 한국계 즉, 백산계입니다. 백두산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러한 만리대국을 만들었던 우리 민족의 시대를 총각시대라고 합니다. 여자로 말하면 처녀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결혼이라는 것은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그 후 도교도 들어오고 유교도 들어왔는데, 그 때부터 우리는 독신생활을 청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 외래종교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을 때, 즉 우리 고유문화 속에서 살던 총각시대 때가 그리운 것은 그 때는 우리 민족이
무강했고 상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들어온 이후 무를 멸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고려 때까지 경당에서 글을
읽고 습사(習射)를 했다고 합니다. 습사라는 것은 활쏘기를 했다는 것인데, 요즘 말로 체육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오면서
습사를 아주 경멸하게 됩니다. 하늘천 따지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자꾸 문약해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침략을 여러차례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침략으로 대륙의 강역을 상실한 후에 압록강 이남으로 강역이 축소된 반도국가가 됨으로써 완전히 침략을 받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물론 침략을 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는 오히려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퇴보하고 오그라들고 늘 구질구질하게 되어 가는, 역사법칙에 역행하는 그런 과정을 밟았다는 것입니다.
선 비
옛날부터 우리 선비들은 딱딱한 면이 있었습니다. 알렌이라는 분이 박치영이라는 사제를 미국에 데리고 가서 이 선비를 놀래키려고
엘레베이터에 태웠습니다. 타니까 방이 막 움직이죠. 놀래기는 커녕 기차를 타도 조금도 놀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싱톤에서 놀랬다고
합니다.
당시 대통령이 파티를 여는데 여자들이 앞가슴이 파인 옷을 입고서 악수를 할려고 하니까, 돌아서서 어디서 온 기생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대통령 부인이라고 하니까 깜짝놀랬다고 합니다. 와! 과연 오랑캐족이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알렌이 전한 내용이니까 사실입니다. 정말 단정하게 갓을 집 안에 들어와서도 쓰고 다녔고 파티에 초청되어서도 갓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대통령이 여는 파티장에서도, "여기는 대통령이 있는 곳이니까 갓 좀 벗어주시오"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방 안에서도 갓을 쓰게
되어있다고 하면서 벗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오만하고 무뚝뚝한 것 같은데, 지금도 한국인은 잘 웃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이에 반해 일본에 가보면 일본사람은 전부 잘 웃습니다. 특히 일본여자들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 바로 건너편의 구주의
여자들은 무뚝뚝합니다. 예전에 일본에 학생들을 데리고 갈 때, 일본여자들은 다 실실 웃고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겉으로만
피부로만 웃고 속은 다른, 겉다르고 속다르니까 괜히 거기에 현혹되어서 프로포즈를 한다든가 하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순 사기니까
조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국의 여성들도 요새 조금 웃기 시작했지만,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함부로 웃는 여자는 매춘부라고 그럽니다.
나반과 아만
우리에게도 아담과 이브가 나오는 창세전설이 있습니다. 창세전설에 나타나는 우리의 아바이를
나반존자라고 하고 우리의 오마니를 아만존자라고 하는데, 이 두 분이 절에 있는 산신각에 모셔져 있습니다. 보통 불교신자 분들은 자기자식이
대학입시에 떨어져 재수 삼수하면 몸이 달아서 절에 있는 대웅전의 인도사람 석가모니 앞에 가서 돈을 바칩니다.
그래도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하면 나중엔 화가 나서, "요번엔 사수입니다. 좀 봐주이소" 합니다. 그 쪽 인도사람인 석가모니는 인도의 자기 후손들이 몇억씩 굶어죽고
있기 때문에 그 쪽 볼 일 보느라 이 쪽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효과가 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옆의 산신각에 가면 우리의
아바이와 어마이가 계십니다.
거기에 가서 단돈 100원 탁 놓고, "좀 봐주이소" 이러고 돌아가면 즉각 표가 납니다. 한번 시도해
보세요. 이 산신각이 원래 우리의 아담과 이브를 모신 곳으로 이 아담과 이브의 첫 데이트가 송화강에서 있었습니다.제가 이 송화강에서, '야!
여기서 우리 아바이와 어마이가 첫 데이트를 했구나'하고 느끼면서 뱃놀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서깊은 송화강의 원래
이름은 아리수입니다. 한강의 원래 이름도 아리수입니다. 아리수라는 것은 '우리강'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인데, 우리 민족이 가는 곳엔 아리수가 꼭
있습니다.송화강에서 살던 우리 민족은 남진을 해서 한강을 아리수라고 대신 부르게 되었고, 신라사람들은 백두산이 보이지 않으니까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삼고 거기에서 천제를 지냈다고 합니다.
또 동네마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산신에게 천제를 지냈고, 그래서 당목인
신단수가 마을마다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신단수를 식물학자들은 천연기념물이라고 합니다.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웅녀가 환웅에게
반해서, "제발 목석 같은 저 사람이 저에게 관심있게 해 주십시요"하고 냉수 떠 놓고 빌었던 바로 그 신단수입니다. 그것을 무슨 천연기념물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 태백산에 가면 음력 1월 15일에 신단수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금줄을 쳐놓은 것을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바로 천민사상(天民思想)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천민이다'는 사상과 아울러 우리 군대는
천군사상(天軍思想)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군대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자로서의 군대이기 때문에 절대 지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치우천황은 천군을 이끌고 중국 양자강 가까이의 회수까지 쳐들어 갔습니다.
천 제
삼신에게
제사지내는 때는 개천절인 10월 3일로, 지금은 이것이 양력으로 되어있습니다. 옛날에는 음력으로 10월 3일이었습니다. 10월달은 상달이라고도
하는데, 그 때는 그날부터 정월 초하루로 해가 바뀝니다. 왜냐 하면 농사가 끝났으니까, 추수가 끝났으니까 이제 해를 바꿔 버립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년월이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애당초에는 10월 3일이 1월 1일이었습니다.정월 초하루를 설날이라고 하죠. 그런데
지금은 카렌더가 바뀌는 바람에 삼신제사를 개천절에도 하고 설날에도 하는 등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음력 10월 3일인 설날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대관령에 가 보시면 알겠지만 대관령 산신제가 있습니다. 강릉 단오제가 있기 한달 전쯤 대관령
산신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한번 답사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거기 가 보면 외국사람이 더 많아요. 우리 한국사람들은 구경도 하지 않습니다.
외국사람들 중에서도 일본사람들이 특히 많습니다. 그들은 무비로 찍고 그러는데 외로이 저 혼자 가니까 부끄러운 생각이 들더군요.
여하튼 이것이 바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형입니다. 거기서 보면 먼저 신단수의 나무가지를 자릅니다. 잘라서 옷을 입힙니다. 옷을
입혀 그걸 모시고 강릉까지 갑니다. 옛날에는 강릉까지 가는데 중간 중간에 당집이 있어서 쉬어 가곤 했었지만, 요새는 트럭에 싣고 그날로 내려가
버립니다. 아직도 중간 중간에 그 당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옷을 입은 그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
남성입니다. 환웅입니다. 바로 환웅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환웅을 맞이하는 강릉의 당집에는 누가 있는가 하면, 웅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환웅으로 대변되는 그 나무를 강릉의 당집에 집어 넣는 때가 바로 결혼 첫날밤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대축제가
벌어집니다. 농악이나 사물놀이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 끝난 뒤에 강릉 단오제를 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고조선 때 했었던 천제행사가
벌어집니다. 이 천제행사에서는 단지 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축제도 벌어지는데, 이 축제에서도 단순히 춤추는 것 외에 스포츠를 했습니다. 이
스포츠를 이름하여 국중대회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대 올림픽입니다.
국중대회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할 때 제가 강력히 주장한 것이 있습니다. "현대의 올림픽은 오랑캐 풍습이지만, 우리에게도 원래 올림픽이
있었다"라고 이것을 강조했지만, 한 사람도 끄떡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올림픽을 했겠소?"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국중대회에서는 백기를 겨뤘다고 했기 때문에 백가지 경기종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달리기,
요즘말로 마라톤이죠, 이 마라톤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이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면 최고의 국사(國士)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최고 선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사봉이라고 합니다.
국사봉은 그 나라에서 존경받을만한 사람을 지칭합니다. 말하자면 '님'입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엘리트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 국사가 나라를 지킵니다. 어떤 외침이 있으면 이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써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실력을 발휘하는가를 이 국중대회의 경기종목에 따라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국중대회에서 개발된 노하우(Knowhow) 중 축지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때 태백산 아래에서 축지법을 배우고 장생했다는
김 모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이백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유일한 제자가 권 선비인데, 이 권 선비는 저의 고향인 무주 구천동
적상성이라는 산성에서 수도를 하여 오백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고려 초에 태어나서 조선 초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서 제자를 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함석헌· 최남선의 선생이 유영목이라는 분인데, 이 분은 축지법을 쓰셨고 세검정에 살다가 198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근까지 축지법의 노하우가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마 축지법
쓰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또 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공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전부 축지법만 쓰면 자동차가 필요없게 되잖아요.
이렇게 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축지법은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달리기 외에 스포츠의 또 하나로 국궁이
있습니다. 옛부터 중국은 창을 잘 쓰고, 일본은 칼을 잘 쓴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활을 잘 썼습니다. 그래서 임진란이 끝나고
통신사가 일본으로 갈 땐 반드시 큰 군용활을 들고 갔습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한테 그 활을 내놓고 쏴 보라고 주면, 힘 깨나 쓴다는 사무라이들이
아무리 잡아 당겨도 잘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 장사가 그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1km정도 날아 가더라고 합니다. 사정거리가
1000m인 셈입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이 입을 딱 벌리며 놀라면서, "이걸로 뭘 잡습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백두산 호랑이를
잡는다"라고 하더랍니다. 그처럼 우리 활의 전통이 옛부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을마다 있는 정자는 술먹고 풍류을 읊는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활쏘는 사정(射亭)이었습니다. 서울에도 사정이 많았습니다. 경희궁터에 황학정이 있습니다. 왜 황학이라고 했는가 하면, 마지왕 황제인
순종이 거기서 주일마다 와서 활을 쏜 곳이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 국궁의 전통이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한산도에서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식 참석 얘기를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대통령이 한산도에 가면 반드시 활을 쏘게 되어있다고 합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활을 쏠 때 거꾸로 잡고 쏘려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경호원이 그걸 보고서 그대로 두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아이구! 각하,
반대입니다"하며 급히 말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후 박대통령은 이것이 아주 챙피스러워서 청와대에 들어와 활연습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사실 청와대 있는 곳이 경무대입니다. 거기서 무과시험을 보았습니다. 무과시험에서 10m전방의 과녁에 다섯발 중 세발을 맞춰야
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발 맞추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시험문제를 요즘 대입시험문제 쉽게 내듯이 두발만 맞추기로 고쳤답니다.
그랬더니 한번 시험보면 합격자가 만명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를 만과라고 합니다.영조 땐가 숙종 땐가 생긴 일입니다. 만과가 되어 직장이
없다시피한 합격자들은 활 쏘러 떼를 지어 활터에 가서 술 마시며 노래나 불렀습니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한량이 생겼습니다. 한량의 선조는
화랑입니다. 아까 삼랑을 말했는데 여기서 랑자 붙는 사람은 국사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오늘날 국궁의 옛전통도 역시 단맥(斷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치우천황
치우천황은 한국의 알렉산더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기록에는 이 분이 미사일을 가지고
중국을 정벌했다고 합니다. 또 이 분이 적군과 싸움을 할 때는 김포공항에 안개가 끼는 것처럼 안개를 피워서 적이 정신을 못차리도록 하는
연막전술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측에서는 치우라고 하면 무서운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침략자로 알고 있습니다.치우가 온다고 하면 울던
어린이도 울음을 그쳤다는 말도 있습니다. 치우천황은 우리 역사에는 등재되지 않고 있지만 바로 우리의 군신(軍神), 병신(兵神)입니다.
대관령에 있는 당집에 가 보시면 소위 삼국통일을 했다는, 말타고 있는 모양의 김유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김유신은
무신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이 무신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무강한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치우천황은
회대지방(淮垈地方), 즉 산동반도와 회수(淮水)와의 사이까지 정복해 들어갔다고 합니다. 산동반도와 황해도는 대단히 가깝습니다.
예전에 백두산에 갔을 때, 지금의 산동사람들이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닦고 있었어요. 아주 가난하기 짝이 없어 보였는데 당시
조선족 가이드가 저 사람들은 산동사람이라고, 저 사람들이 우리 조선족 돈 가져간다고 해서 알았습니다. 한달에 얼마씩 받는가 물어 보니 150원씩
받는다고 해요. 150원이면 우리돈으로 15,000원입니다.
바로 이 산동사람들이 고조선 때 바다를 건너서 황해도로 오지 못했던
잔류민족입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산동사투리가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다른 지방 사람들은 산동사람들이 중국말을 잘 못한다고 말합니다.
언어에서 보더라도 그렇고 또 공자가 산동사람이어서 공자까지도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실제 공자는 동이에서
배웠다고 합니다. 동이에서 배운 것을 집대성한 이가 바로 공자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산동의 노나라 사람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여튼 그가 누구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가 집대성한 문화는 동이문화요, 고조선의 문화라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유학 그 자체를 중국산으로 보지 말고, 우리 조상의
문화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까 제가 국궁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 국궁은 원래 단궁(檀弓)이었습니다. 이 단궁이
맥궁(貊弓)으로 되고, 그 다음에 국궁(國弓)으로 된 것입니다. 이 단궁이라는 말에 왜 단자가 붙는가 하면, 단군이 개발한 활이어서
그렇습니다.이 단궁은 나무 중에 가장 딱딱한 박달나무로 만든다고 합니다.
하루방에 스며있는 치우의 미소와 한국부처의 미소
치우장군의 얼굴을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하면, 우리 한옥의 와당(瓦當)에 도깨비상이 있습니다.일명 치우상입니다. 이빨이
드러나고 눈을 부릅 뜨고있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악귀를 치우가 막아준다고 해서 그렇게 기와에 새겨놓은 것입니다. 또 저는 제주도에
있는 하루방을 치우라고 생각합니다.
신혼부부들이 제주도에 신혼여행가서 선물로 사오는 하루방은 가짜배기입니다. 원래의 진짜 하루방이
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관덕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관덕정 옆에 하루방 두개가 서 있고, 그리고 삼성혈(三聖穴) 입구에 하루방이 서
있습니다. 이 하루방이 바로 오리지날 하루방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하루방의 얼굴을 사진도 찍고 또 면밀히 관찰했습니다.
한국인의
원래 얼굴은 미소짓는 부처의 얼굴인가, 아니면 하루방 치우상의 얼굴인가 하면서 관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성과 관계있습니다. 부처님 얼굴의
미소는 레오나르도다빈치 작품의 모나리자의 미소를 능가하는 세계의 으뜸가는 미소입니다. 이런 미소는 절대 조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기 대흥사 뒤에 있는 바위에 새겨놓은 부처가 있습니다.
새벽에 초를 가지고 가서 불을 켜 놓고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면, 부처가
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해가 떠올라 태양빛을 받으면, 그것이 미소로 변합니다.이 작품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세계적인 명작입니다. 서양의 미소 전문가가 와서 놀랬습니다. 이렇게 울고 웃는 것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어디에 가도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
그래서 모나리자 미소에 대해 물으니까, 모나리자 미소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묘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씩 웃은 미소인데, 그 묘지에 자기 남편을 묻었다고 합니다. 음탕한 여자의 그런 마음 속에서 나온
미소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한다면 한국부처의 미소는 굉장한 걸작인 것입니다. 일본부처를 보면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살인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신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중국의 부처는 어떤가, 중국의 부처는 뭔가 나사가 빠진
것같이 멍해 가지고 이건 도무지 거기다가 절할 맛이 나지 않습니다. 한국 부처의 얼굴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성 속에 그런 미소의
얼굴이 있고, 또 하나 무서운 치우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것은 노한 한국인 얼굴입니다. 항상 웃고 순종하는 것 같아도 어느 때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침략자에게 저항하는 그러한 면을 우리는 치우상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에 들어가면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사천왕문(四天王門)에 들어섭니다. 이것은 어느 절에 가도 공식화되어있습니다. 사천왕은 바로 대웅전 부처님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저기 해인사에
들어가는 첫문이 일주문인데, 그 일주문 앞에 천하대장군상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지하여장군상은 지금은 부서져서 없습니다.
왜 이걸
세워 놓았는가 궁금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곳에 어떤 절이 있었지 않았나,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어떤 신사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대를 답사해 보았더니, 불교유적은 없고 전부 단군유적들만 쭉 있었습니다. 이 단군유적에 둘러
싸여있는 불교유적을 발견하고서, 과연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아주 여러번 투쟁을 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달아매기
우리 민족성이 무강하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가 달아매기입니다. 옛날에 장가들게 되면 먼저
신랑이 신부집에 조랑말을 타고 갑니다. 그리고 신부를 모셔 오는데 그보다 먼저 동네총각들에게 실컷 매를 맞습니다. 왜 맞을까요? 그 동네
아가씨를 훔쳐가기 때문에 거기서 매를 맞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옛날에 약탈혼인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어느날 밤 중에 마을 총각들이 사냥하러 갑니다. 다른 동네에 가서 처녀를 납치해 오는 겁니다.어떤 때는 잘못해서 남의 유부녀를
납치를 해올 때가 있어서 돌려 보내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서 사실상 결혼을 해놓고 난 뒤에 그 동네에 가는 겁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이러면 동네 총각들이 달아매고 "야 이놈아, 왜 남의 동네 처녀를 도둑질해 가느냐"하고 달아매고 패는 것입니다. 이 달아매기
유습은 어떻게 보면 야만적인 것 같은데, 옛날 우리의 결혼풍습을 말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결혼식을 예식장에서
하고 말지만, 우리는 원래 신부집에 가서 먼저 예를 올리게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軍 樂
우리에게는 농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농악이지만 옛날에는 군악(軍樂)이었습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하죠. 지금은 그렇지만 옛날에는 병자천하지대본(兵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습니다.군인이 천하지대본이라는 그러한
깃발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시대가 되니까 글자가 바뀌어 농자로 된 것입니다.
지금의 농악은 농민들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었습니다.붉은띠가 군복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군악내용도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는 그
장면입니다. 처음에는 천천히 하다가 적군이 가까워지면 그 때는 빨리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갑니다. 한국사람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였습니다.
외국사람들이 계산해서 되지 않는 걸 한국사람들이 가서 한답니다.
일본사람들이 저거 장사 안될텐데 하는 것도 한국사람들이 가서
수지까지 맞아서 온답니다. 이것을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선비정신의 제일로 생각했습니다. 성패불수, 그러니까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불문하고 해야할 것은 해야 한다는 그 정신, 이것이 선비정신으로서 조선시대 때 문약에 빠진 500년동안에도 우리 한국인의
이상상(理想像)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다 물
우리 민족에게는 다물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다물정신이라는 것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이 다물은 중국말로 하면 뜻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만리강역을 되찾아야겠다는 그러한
정신입니다. 한자로 바꾸면 광복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고 하는, 미국으로 말하면 서부개척정신이 바로 다물정신입니다.
이 다물정신은 우리 민족의 속성입니다.
민족성에는 변성(變性)과 항성(恒性)이 있다고 단재선생이 말했습니다.항상 변하지 않는
불변의 민족성이 있고,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민족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불변의 민족성과 시대에 따라 변하는 민족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항상 변하는 것만 연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사람들 어떻게 변해
있습니까? 얼빠진 상태로 정신이 나가 버렸습니다. 외래문화에 흠뻑 젖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빵을 먹고 있습니다. 잠은 침대에서 자면
안됩니다. 온돌방에서 자야 돼요. 우리 민족문화의 마지막 보루가 온돌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텔레비젼 광고를 보니까 침대광고가 막
나오더군요.'이제 온돌방도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게 뭐가 있느냐, 김치정도인데 이 김치도 맵다고 해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의식주 중 의는 사라진 때가 이미 오래이고, 식도 가고, 주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연구할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연구해야 하는 것은 불변의 것, 침대 연구할 것이 아니라 온돌방 연구를 해야 합니다.
연개소문의
김해병법
이러한 우리 민족의 다물정신을 구현한 인물로서 잘못 오기된 분이 연개소문입니다.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쿠테타를
일으켰다고 해서 나쁘게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삼국사기를 적은 김부식이 그랬습니다.
연개소문은 당태종과 맞붙어서 안시성에서 그를
대패시켰습니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 군사의 총사령관이 바로 당태종이었는데, 웬만하면 당태종은 그냥 자기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직접
친정에 나섰어요. 자기가 친정에 나서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에는 이정(李靖)이라는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이정 장군에게 고구려를 치는데 지휘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정은 '우리 선생님의 나라여서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정은 연개소문에게 병술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손자병법은 알아도 김해병법은 잘 모를 겁니다.김해병법이라는 우리 고유의 병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김해병법서를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 낼려고 대만에 갔습니다.
대만의 모서점에서 이정병법이라는 책을 찾았습니다. 이
병법은 이정이 당태종에게 가르친 병법으로서 그렇게 길진 않습니다.'고구려를 칠 때는 요렇게 요렇게 해서 싸우시오'라고 유의사항을 적어놓은
것입니다.이정이 연개소문에게서 김해병법을 배웠기 때문에 고구려의 병법을 잘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호는 김해입니다.
그래서 김해병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찾으면 있을 것 같지만, 이 책은 현재로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단면이라도 보고자 이정병법을
대만에 가서 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문화종속주의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을, 중국의 손자병법은 알면서 우리의 김해병법은 모른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계획은 이 이정 병법서를 연구해서 우리나라 고유의, 단군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병법을 저술할려고 합니다.
제가 못하면 여러분 중의 한 분이 하시기 바랍니다. 대만에 가면 경극이라는 오페라에 연개소문이 등장합니다. 연개소문의 가면은
무시무시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허리에는 다섯개의 칼이 꽂혀 있습니다. 다섯개의 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는 검법이 전수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연개소문은 칼 다섯개를 썼습니다. 일본인은 짧은 것과 긴 것 두개를 찹니다. 싸움이 나면
일본 사무라이는 먼저 긴 것을 뽑아서 쓰고, 그것이 부러지면 작은 걸로 합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칼 다섯개를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특유한 병법과 검술을 가지고 당태종의 대군을 안시성에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패퇴하는 당나라 군대를 몰살시키고 요하를
건넜습니다. 요하를 건너면 바로 북경입니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북경을 점령해서 고려진을 거기다가 설치했다는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진이 많아요. 지금도 고려진이 많습니다.
당시 고구려인이 쏜 화살이 당태종의 왼쪽눈을 명중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20m전방에 엽전을 놓고 엽전의 구멍을 맞추는 그러한 사격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옛날 고구려 병사들이 쏘는 활은 권총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태종은 당시 왼쪽눈을 맞아 돌아가며,"왜 내가 고구려 같은 작은 나라를 정복하는데 직접 가서 이런 수모를
당하느냐"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곤 3년 뒤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화살촉 끝의 청석이라는 돌은 철판을 뚫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적함에
명중되면 격침까지 된다고 합니다. 그러한 무서한 대궁입니다.
대궁에서 소궁까지 온갖 무서운 활을 개발했는데, 이 때 당태종은
소궁에 맞아서 3년 뒤에 저승으로 갔습니다. 당태종은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세종대왕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인의 화살촉에 맞아서
죽었다고 하면 그의 위상에 문제가 생기니까 설사로 죽었다, 독감으로 죽었다 등 당서에 보면 온갖 엉터리 얘기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인(死因)이
분명치 않게 기록되어있습니다.
士 氣
우리가 이렇게 한국사를 재해석할 때에 역사교육을 하면 거기서
국민의 사기(士氣)가 오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때 학자들은 이기론(理氣論)으로 논쟁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중요문제 때문에 서로 완전히 갈라져 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퇴계와 율곡, 지금까지도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기(氣)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선비에게는 기가 죽으면 안됩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전통은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는 원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기를 때에는 '반드시 엄하게 기르라 그러나 기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 교육의
대법칙입니다. 아이의 기를 죽이면 안됩니다. 아이의 기를 죽이지 않는 정도에서 엄하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엄하게 기릅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에서 무언가 잘못된 교육을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역사공부를 하다 보면 무언가
기운이 나고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을 아주 행복하게 생각하게 되는, 그런 사기가 오르는 교육을 해야 됩니다. 사기를 죽이는 역사교육은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한국사는 반도강역론, 단군신화론, 민족문약론, 민족니나노(노는것)론 같은 이런 나쁜 것에서 우리의
민족성이 나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한문화론(民族恨文化論)입니다. 우리 민족문화의 본질이
한(恨)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그렇게 한(恨)이 좋으면 대한민국의 이름을 한(恨)으로 고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한에 맺혀 있어서, 우리의 모든 문화예술 속에 한이 들어있다는 엉터리 얘기를 일인들이 했습니다. 일인들이 우리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이 한론을 주장한 것입니다.우리나라 조선백자를 완전히 쓸어서 모은 유종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광화문 헐 때에 반대한 사람이
유종렬입니다.
유종렬에겐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대가 끊겼습니다. 유종렬의 아들이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를 왜
한국사람들은 욕을 하느냐?"하는데, 유종렬 그가 백자의 백색을 한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눈물이라고 평한 사람이 바로 유종렬입니다.
유종렬은 임진난 때 도공으로 끌려간 사람의 후손입니다. 그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의 이 백색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모
기자와 인터뷰하는 기회가 있어서, 그 때 내가 물어 보았습니다. "우리 연구실에 백자가 하나 있습니다. 진짜백자는 아니지만 이 백색에서 눈물이
발견됩니까?" 하니까, "눈물은 커녕 백색은 색 중에서 가장 고귀한 색깔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종렬이라는 사람이 이 백색을 한맺힌 민족의
눈물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현재 그 유종렬의 한(恨)철학을 계승해서 김 모 교수가 주장하다 보니까 TV고 신문이고 온통 우리
민족문화를 한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恨)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미움, 증오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민족은 남을 증오하고 서로 화합할 줄
모르고 망해도 마땅한 종족이라는 일제식민주의 철학이 한(恨) 속에 들어 있습니다.
김동길씨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한국문화를 비판할 때 사용하는 준거는 미제잣대입니다. 미국에 빗대서 대통령은 링컨대통령을 말하는데, 왜 우리나라의 옛날 임금님을 가지고 얘기
못하는가 말입니다. 오늘의 한국문화와 한국인을 비판함에 있어서, 왜 미국문화와 미국인의 기준에서 한국인을 비판하느냐 말입니다. 한국에는 팔등신이
없습니다. 팔등신 미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칠등신 미인밖에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칠등신 미인을 뽑자는 겁니다. 그래서 세계대회에서
떨어져도 괜찮다 이겁니다.
광대뼈 많이 나온 여자, 이게 한국 여자이기 때문에 떨어져도 좋다 이겁니다. 가장 표준 한국인에 맞는
미남과 미녀를 뽑아야 합니다. 우리의 비판의 척도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 것으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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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력
서울대 사범대 및 고려대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문과대 부교수 역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역임 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및 편찬부장
저 서
역사학 개론, 문화사 개론,
독립운동사 연구, 한국근대사의 재인식, 역사이해와 비판의식, 단군기행, 역사는 무엇인가 외 역 서 의식과 사회, 역사란 무엇인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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