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스크랩] [마테오리치 신부2]지상천국을 건설하려했던 위대한 세계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6. 7. 26. 18:15

 

 

종교개혁과 예수회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님이 태어날 당시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결과로 북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등 튜턴계 북유럽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하에 들어가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라틴계 남유럽은 카톨릭 교회로 남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에서는 광범위한 혁신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혁신운동의 하나가 예수회의 설립이다. 예수회의 목적은 카톨릭 신앙의 방어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예수회가 벌인 사업은 ①청소년 교육 ②신앙심의 확립 ③선교 활동 등 이었다. 히라가와 스케히로는 예수회 선교사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전투적 확신에 가득차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회의 ‘회會’(societas)는 스페인어 ‘꼼빠니아’compania를 라틴어로 옮긴 것인데, 꼼빠니아란 원래 군의 부대를 뜻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의 예수회 입회
 
 리치 신부님의 부친 요한은 이탈리아 마체라타 시(市)의 시장을 지냈고, 어머니 요안나는 신덕이 두텁고 마음이 착한 현덕한 부인이었다. 어머니는 13남매를 혼자 다 양육할 수 없어, 장남인 리치는 조모에게 맡겨 양육하게 하였다.
 
 리치 신부는 신체가 건강하고 곱슬머리에 벽안의 미소년이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총명하였으며 특히 기억력이 우수하여 책을 한 번 읽으면 즉시 암기할 정도였다. 리치는 가정교사 니콜로 벤치베니(Nicolo Bencivengni)에게 라틴어를 배웠는데, 리치가 7세 되던 해 그 가정교사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리치는 평소에 존경하던 스승이 예수회에 입회하여 충격이 컸다. 리치는 신부가 되어 중국에서 선교할 때까지도 그 가정교사를 잊지 못하여, 고스타 신부에게 보낸 서신 중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니콜로 벤치베니 선생님은 내가 명오가 열리기 전 나를 자애로 교육시키셨습니다. 그분의 지도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염원을 뿌리치고 구도의 길로
 
 가정교사 벤치베니와 헤어진 2년 후, 예수회에서는 마체라타 시에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리치의 어머니는 리치를 예수회에서 경영하는 그 학교에 입학시켰다. 리치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의 뛰어난 어학의 재능은 이 때부터 드러났다.
 
 그의 아버지는 후에 주지사까지 지냈는데, 아들 마테오를 명문대학에 보내 위대한 정치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장남 마테오가 16세가 되어 중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그를 로마에 있는 명문대학 법과에 진학시켰다.
 
 그런데 1571년, 마테오가 고향 마체라타를 떠나 로마에 와서 공부한 지 3년째 되던 해, 그는 로마에 있는 예수회의 수련원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그는 학문을 잠시 미루어두고 헌신봉사의 기초인 간절한 기도생활을 하며, 순명과 겸비(兼卑)에 대하여 배우는 수사가 되었다. 19세의 청소년기에 전공학과를 그만두고 그의 아버지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예수회에 가입한 것이다. 나중에 그 소식을 편지로 전해 받은 아버지의 노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잘 설득하여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
 
 
 전도 여행, “이 길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길”
 
 
 20대 시절 고향을 떠나 인도로 전도 여행에 나서기 전에, 그는 ‘이 길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길이다. 이제 땅에서는 부모도 형제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예수회 신부들은 종교개혁의 물결을 타고 중국이나 인도 쪽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는 것이 천주님의 가장 위대한 은혜라고 여겼다. 당시에는 이러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20∼30명이 여행을 떠나면, 5명도 살지 못하고 대부분 항해하는 과정에서 과로에 시달리며 병에 걸려 죽었다.
 
 고국을 떠나 26세에 인도의 수도인 고아에 와서 신부수업을 더 받기 위해 바오로 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9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30세(1582년)에 중국 마카오에 와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 때 리치신부는 불과 3개월 동안 중국어를 배웠을 뿐인데도, 3년 동안 배운 동료 루지에리 신부를 능가할 정도의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번 책을 읽으면 그냥 줄줄 외워버리는 어학의 귀재였다.
 
 
 중국 선교, 그 드라마틱한 생애
 
 리치 신부님은 마카오에서 머리를 삭발하고 회색승복을 착용하고 머리를 빡빡 깍고 전도생활에 들어갔다. 그러기를 여러 해, 44세에 남경에 들어가(1595년 5월) 전도할 때는 전략을 바꾸어 유학과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여,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나면 30분씩 시간을 들여가며 머리를 올리고 옷도 유학자들처럼 입고 다녔다.
 
 리치 신부님은 1599년 당시 이름난 선승 삼회(三淮) 스님과 인간의 본질 해석을 놓고 논쟁을 벌인 일도 있다. 궁지에 몰린 삼회 스님이 불경의 권위를 들어 답하자 그는 “나도 나의 신의 권위를 끄집어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권위가 아닌, 이성을 바탕으로 한 논의를 하고 싶다”고 응수, 말문을 막았다고 한다. 그 후 리치의 학식과 인품에 대한 입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수도 베이징 영주 허가(1601년)를 받는 계기가 됐다.
 
 그는 마카오에서 남창(南昌 : 남경)으로, 다시 북경(北京)으로 와서(1601∼1610) 중국 예수회 관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소원대로 북경 자경문에 앉아 있는 황제를 만나 전도의 길을 뚫게 된다.
 
 그의 성격은 대단히 개방적이어서 아주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 유학자들은 리치 신부님을 대단히 존경하였고, 그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문화 인정
 
 리치 신부님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유교의 관습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 조상을 공경하는 예법으로 보고,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문화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교황청은 리치 신부님 별세(1610) 105년 후인 1715년에 중국의 카톨릭 교인이 조상숭배를 비롯한 유교 제례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천주(天主)가 곧 상제(上帝)”
 
 리치 신부님은 중국에서 생활하며 유교, 불교, 도가, 양자, 묵자 등을 공부하면서 동서문화의 다양성에 눈뜨고 동양문화에 대한 깊은 안목을 바탕으로 스스로 자기 신앙관에 결단을 내리게 되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구도자가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모시고 있는 천주(天主)와 유교의 하늘(天)과 상제(上帝)님 신앙이 맥이 통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저술할 때 책의 서두에 ‘천주(天主)는 경서(經書)에 나오는 상제(上帝)와 동일한 분’이라 정의하며, 고대의 천(天) 사상으로 돌아가 거기서 상제를 만나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명나라의 고위 관료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큰 호감을 샀음은 물론이다.
 
 
 천상 신도세계에서 인류문명사의 근대화 혁명을 주도하다
 
 살아 생전 동서양의 지식을 두루 섭렵하신 리치 신부님은 원대한 이상을 품으신다. 동양을 무대로 ‘천주교 중심의 천국’을 건설해 보겠다고 하는,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품어보지 못한 실천적 대이상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 소망을 못다 이룬채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영원히 잠들고 만다.
 
 그런데 리치 신부님은 죽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신명이 되어 천상 신도(神道)세계에서 더욱 정열적으로 활동하신다. 우수한 두뇌와 부드러운 사교술, 폭넓은 인간관계와 근대과학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지적 탐구욕을 가진 리치 신부님은 천주님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을 근간으로 하여, 사후 신도에서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 200여 년을 대역사한 일심 끝에 인류문명사를 근대화 혁명으로 인도한다.
 
 앞서 알아본 것처럼,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는 천상의 문명을 그대로 본받아 내린 것인데, 이것은 마테오 리치 신부님의 인류를 위한 지고한 노력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리치 신부님의 개혁이 천지의 문명을 변혁시킨 것이다.
 
 증산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문명이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니라.”(『道典』 2:26)는 말씀은 20세기의 비약적 문명발전(progress)이 지상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천상 신도세계의 선행된 노력, 즉 구체적으로는 리치 신부님과 뭇 문명신들의 지고한 노력에 의한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침내 상제님을 이 땅에 모셔 내리다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에 이마두는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菩薩)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道典』 2:27)
 
 
 근대문명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교만과 잔혹성으로 인해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자, 리치 신부님은 천주님이신 상제님을 뵙고 세계구원을 앞장서서 하소연하였다. 리치 신부님이 마침내 천상에서 상제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동서문명을 아우르는 신앙의 성숙과정에서 일찌기 동양문화에 상제님 신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리치 신부의 공덕이 인류역사상 누구보다도 큼에도 불구하고 세상사람들이 이를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공덕으로 십천(十天)무극상제님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리치신부를 구천상제에 봉하여 광주 무등산 상제봉조에 장사지내 주셨다.
 
 " 이마두의 공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천지신명들이 그를 떠받드나니, 이마두는 신명계(神明界)의 주벽(主壁)이니라.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너희는 마땅히 공경할지니라."(『道典』 4:11, 『이것이 개벽이다』(상) 380쪽)

출처 : ─┼★불가사의에 답이있다★┼─
글쓴이 : 포에버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