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우리역사 바로알기

대한민국의 참뜻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6. 7. 2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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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외치기 이전에 알아야 할것


Great Corea

글 : 강석우

6월이다.

붉은 색 비단실로 한반도를 수 놓을 6월이 4년 만에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4년 전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땐, 너와 내가 없었다.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였고, 생전 처음 보는 이와 얼싸안고 기뻐할 수 있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좌익과 우익, 사장과 직원, 선생과 제자가 따로 없었고 그 때만큼은 모두가 하나였다. 후에 쇼비니즘이니 지나친 애국주의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때만큼은 우리 모두가 행복했다 이 말이다. 어느새 4년이 흘렀고 우리는 또 한번 6월을 맞이했다. 월드컵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새도 끝이 없다.  
 

   

 

 

 

 

 





 

 

대~~한민국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당시 알리안츠 생명보험 회사의 서울 책임자 왈

    "이번에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본래 이름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러니까 2002년 월드컵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 우리가 얼마나 대~~한민국! 짜자자짝짝을 외쳤나. 아주 징글징글하게 외쳤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가리켜 코리아(Korea)로 부르거나, 좀 더 붙여서 Republic Of Korea(R.O.K), 아니면 South Korea라고 부르던지 뭐 이런 식이었다. 한국에 와서 살고 있던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본래 이름이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외국 사정이야 오죽했겠냐 말이다. 이름과 관련된 꽃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이고 개인적으로 나도 무척 좋아하는 시이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크..얼마나 아름다운 시인지.. 여하튼 우리가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름이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상이라는 사실이다.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가. 평생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공자님도 이름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모른다.
 

이름의 중요성

하루는 공자님께 제자가 "선생이 만일 나라의 재상이 되신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공자님 왈 "필야정명(必也正名,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끼게 된다. 공자님께서는 사물이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로 모두 맡은 바 사명(사명이 사물의 존재의 이유)에 따라 그에 걸맞는 이름이 있다고 보셨는데, 사물에 걸 맞는 이름이 붙여지지 못함에서 모든 사회의 악과 혼란이 온다고 보신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는 표상이며 이름은 불려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려지지 않는 이름이란 김춘수 시인의 말대로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본래 이름이 대~한민국임을 세계 사람들이 몰랐을 때 그것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존재 이유, 즉 대한의 사명은 우리 내부의 깊은 에너지로서 꿈틀거리고 있을 뿐, 현실로 드러나 화려한 꽃이 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난 4년 전 우리의 외침은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지 아는 사람 알지만 모르는 이는 계속 모르는 그런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왜 대한민국인가.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왜 우리가 대한이냐는 것이다. 왜 우리가 대한인가! 지난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걸맞는 이름인 `대한`을 세계 사람들에게 소개를 했단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왜 대한인지, 왜 우리는 대한이냐. 그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더란 말이다. 내 주변을 봐도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그냥 무작정 대한민국만 디립따 목 쉬도록 외치고 있다. 아시는 분들도 더러 계시지만 왜 그 분들은 정작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답답하기도 하고 해설랑. 그래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글도 서툰 내가 이렇게 우리가 왜 대한인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를 하려고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시청 앞에 모여서 벌거벗은 미인 옆에 서서 `대~~한민국`하고 외치기 전에 왜 대한민국인지는 알고 외치자는 취지 아니겠나. 서론이 좀 길었다. 각설.
 

대한의 기원

역사 공부 진짜 싫어하고 머리 아파하는 분들 많을 줄 안다. 이것이 다 유적, 유물이나 잔뜩 외우게 하고 역사의 혼, 역사의 맥을 가르치지 못한 현 국사학계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 역사에 대한 갈급증이 대단하다. 우리의 진짜 역사를 알고자 하는 문화 갈급증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다만, 그 타는 목마름을 해소할 시원한 해답, 진실의 오아시스를 찾지 못했을 뿐..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튼 뭐 `우리가 왜 대한이냐?` 하는 문제에 답을 내려면 역사의 흔적을 쫓아 올라가봐야 할 것이다. 골치 아픈 국사 공부로 생각말고 다빈치코드의 주인공 랭던처럼 우리도 한번 코드를 찾아 가보자.

현재 대한민국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겠고 조금 더 올라가면 대한제국이 등장한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주권이 황제에서 국민으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레 국호가 바뀐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주목할 것은 바로 대한제국! 조선의 실질적 마지막 임금이신 고종 황제께서 1897년 국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심으로써 `대한`이라는 단어가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었다. 고종께서는 원구단에서 천제를 앞두고 신하들에게 국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셨다 한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大韓대한`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고 또한 매번 일찍이 보건대 여러 나라의 문헌에는 `朝鮮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韓한`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는 이미 `韓한`으로 될 징표가 있어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에서는 모두 다 대한이라는 이름을 알 것이다."(고종실록, 권36, 광무원년 1897년 10월 11일조)

 


 

 

한은 광명이다.

고종 황제의 말에서 한번 코드를 찾아보자. 여기서 코드가 될 만한 것은 두 가지인데 감이 잡일 것이다. 바로 `한韓`과 `조선朝鮮`이다! 그러니까 원래부터 우리 민족을 `한韓`이라고 불러왔으니 이제 나라 이름을 바꾸는 데 대한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씩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다. 그러면 이 `한韓`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한의 뿌리를 밝히게 되면 대한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한국인, 대한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한의 뜻과 유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국어 학자들 말로는 한에 뜻이 백여개에 이른다고 하기도 한다. 너무 많으니, 그냥 모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거다. 중요한 몇 가지 뜻만 살펴보자. `한`이란 하나[一], 같다[同], 크다[大], 많다[多], 중앙[中], 임금[皇], 하늘[天], 광명[明]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광명사상이며 이것이 우리 한민족 사상의 원형(archetype)이다. 백[白]의 민족이나  배달의 민족이라 불리는 것도 다 광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갑자기 학술적인 이야기에 머리가 복잡할텐데 그냥 쉽게 `한이란 광명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스스로 `광명`을 상징하는 한이라고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韓`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三韓삼한`이라는 이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三韓삼한`의 수수께끼를 풀게 되면 대한의 코드 전체가 눈에 훤하게 보이게 된다.
 

삼한의 수수께끼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삼한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삼한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할까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할까. 아무튼, 삼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 우리 역사관이 기울어지게 된 결정적인 문제가 비롯된다. 몇몇 사람들이 대한의 코드를 풀어보려고 도전해서 여기까지 왔을지라도 요 삼한, `삼한`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끝내 좌절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한번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자 이 말인기라. 재밌지 않는가? 삼한에 대해서 바로 볼 수 있으면 우리 역사를 바로 인식하는 큰 계기가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은 이렇다. 한강 이남의 소국가 연맹체인 삼한. 그러니까 가야, 신라, 백제의 전신으로서의 마한, 진한, 변한을 우리는 삼한으로 알고 그렇게 배워왔다. 그러나 이것은 삼한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이다. 바로 이 오해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축소시키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 것이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축소된 역사라는 표현은 역사학자 이덕일 씨의 표현을 빌린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태껏 배워온 역사가 공간적으로는 한반도로, 시간적으로는 기원전 10세기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축소되어있다는 것이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축소된 역사는 `소한小韓주의 반도사관`이라는 말로 다시 표현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그러나 삼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대한大韓주의 대륙사관`으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한 위대한 학자가 계시니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단재는 직접 맨몸으로 만주를 누비며 한반도의 남쪽 삼한 시대 이전에 만주, 요서, 한반도에 걸쳐 광대하게 뻗어 있었던 단군조선의 삼한시대가 실재했음을 입증했다.[조선상고사,신채호] 이 본래의 삼한이 고조선의 실체로서 존재하다가, 고조선이 망한 후 그 유민들이 한반도 이남으로 이주하여 소규모로 재건한 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삼한이다. 또한 단재는 고조선의 대륙 삼한을 `북삼한`으로 그 이후 반도 삼한을 `남삼한`으로 확연하게 구분지어 주었다.

그러나 단재가 밝혀낸 삼한관경(고조선의 통치이념으로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을 아직까지도 아는 이가 드문 것은 역사를 등안시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국가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현 역사학계에서는 단재 선생이 밝힌 삼한관경제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머리로는 삼한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저 남삼한만을 이야기하고 있고 국사책 어디에도 고조선의 삼한, 즉 본래 삼한인 북삼한에 대해서는 언급되어있지 않다. 고조선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학자가 없는 것이 현 국사학계의 실정이다.
 

삼한관경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삼한관경제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삼한관경제는 바로 고조선의 국가 통치원리, 국가 경영원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나라의 강역을 진한, 번한, 마한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을 말한다. 진한은 만주일대로서 단군왕검이 직접 다스리고 요서와 한반도에 자리잡았던 번한과 마한은 각기 단군을 보좌하는 부단군이 다스렸다. 고조선의 통치 방식은 커녕 실존하던 국가였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들려주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역사교육이다. 삼한관경! 우리 역사의 최전성기인 고조선의 실제 역사는 실로 이러하다. 이럴진데 우리는 우리의 갈급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뿌리잘린 역사만을 배워왔던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기에 일단은 넘어가자.

 

 

 

 

왜 셋인가.

왜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는가? 이게 나라가 셋이야, 하나야?

이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삼한관경제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역사학이 실증주의로 기울어 정신문화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에 있어서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정신세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누가 빵을 세 조각으로 잘라 먹었다면 그것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한 사람의 행동도 정신의 지배를 받을 진대, 한 나라를 통치하는 경영방식에 있어서야! 고조선 당시의 선조들의 정신세계, 문화세계를 엿볼 수 없다면 절대로 삼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삼한의 수수께끼에 좌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셋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신교문화에 도를 통해야 한다. 다들 당시에는 제정일치 사회였다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단군왕검이라는 말도 임금과 제사장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러나 당시 종교는 지금의 종교와는 성격이 다른 무엇이다. 고조선의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문화였다. 생활 자체가 신교문화였기 때문에 종교, 정치, 문화, 생활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 당시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신교문화 속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본래 종교가 신교이다. 기독교, 불교, 유교는 알아도 우리 선조들이 신앙해왔고 신앙을 넘어서 생활 그 자체였던 신교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건 진짜 넌센스다. 교양차원에서라도 알아두시라. 샤머니즘이니 토테니즘이니 미신이니 하는 식으로 깔아뭉개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지의 극치라는 점만 말하고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왜 셋인가? 신교의 신앙의 대상이 바로 삼신하느님, 삼신상제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바로 삼신하느님과 천지신명을 극진히 모셔온 신교 문화의 종주(宗主)였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하나님을 삼수 원리로서 인식하였는데, 삼신은 세 분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하나님이 현실에 작용할 때는 삼수 즉, 셋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신교문화의 신에 대한 지극한 인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모두 논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인지라 하나님을 삼수의 원리로서 이해했다는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가자. 다만 환단고기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 환단고기에도 삼신즉일신[三神卽一神]사상이 담겨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학계에서는 삼신과 신교문화에 무지하기에 신교문화의 지극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환단고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삼신사상은 누가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 아니다.
 

하늘에는 삼신이 있고, 땅 위에는 삼한이 있다.

각설하고 다시 한번 그렇다면 왜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는가?

바로 신교의 삼신우주관에 바탕을 두고 생각을 해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는 삼신이 있고, 땅 위에는 삼한이 있다.

앞서 `한은 바로 광명이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바로 삼신하느님의 본성이 광명이다. 따라서 하늘의 삼신하느님의 광명을 땅 위에 실현하려는 것이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국가관이자 역사관이었다. 따라서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삼한으로 통치한 것이다. 우리 역사의 국통맥을 보면 모든 나라의 이름이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좀 감이 잡히시는지? 한민족의 역사란 바로 지상 위에 삼신의 광명을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며 아직도 우리는 광명을 밝히기 위한 역사의 흐름 속에 실존한다.
 

대한으로

이제 거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마무리를 지어보자. 다시 고종황제 구한말로 되돌아오자. 조선이라는 이름 또한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한양조선과 단군조선을 구분하기 위해서 단군조선을 고조선(옛조선)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겠나. 아무튼, 조선의 건국 자체가 고조선의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정도전은 조선은 기자조선에서 유래했다고 하였지만, 만주에서 국경을 수비하며 실제로 고조선의 흔적 속에서 선조들의 웅대한 기상을 엿보았으리라 생각되는 태조 이성계는 옛 조선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에 불탔으리라. 그 한양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 그가 대한으로 국호를 바꿨다. 대한! 그것은 고조선이 망한 이후 2,000년에 걸쳐서 상처받은 우리 민족의 소한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꺼져가는 우리 민족의 광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처절한 울부짖음이었으리라. 다 쓰러져가는 종묘사직을 받쳐든 외로운 황제의 울부짖음이 느껴지는가. 우리는 일어서야 하리라. 대한은 말 그래도 크게 광명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말 뿐인 대한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역사의 정신을 회복하고 세계를 향해 외쳐야 하리라.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대한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역사적 사실(fact)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한은 우리 민족의 9천년 역사 과정에서 부르짖었던 역사의 목적지이자, 현재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나 자신이 역사 속에 한 인간으로서 실존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미 대한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땅 위에 광명을 실현할 존재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이름이 대한이 아니던가. 그것이 바로 대한은 과거이자 현재이며 미래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지난 한 세기 동안 대한은 크게 세 번 한반도에 울려 퍼졌다. 처음은 기미년(1919년) 3.1 독립운동이요, 둘째는 을유년(1945년) 8.15 해방이요, 셋째는 임오년(2002년) 6월의 기적이다. 먼저 두 번의 외침에는 지난 날 상처 받은 우리 민족의 회한이 묻어 나왔다면 4년 전의 그날의 우리는 다만 즐거웠을 뿐이다. 이제는 다시 외쳐야 하리라. 단순히 금붕어처럼 대한민국이란 단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다 쓰러져 가는 우리 민족을 일으키고자 애썼던 고종 황제의 외로운 싸움을 생각하며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의 운명에 슬피 우신 단재 선생의 울부짖음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외쳐야 하리라.

아 대한민국.. 
 

우리는 대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