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사진·그림

[스크랩] 사진작가 얀 샤우덱 (Jan Saudek)의 작품감상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2. 3. 00:25


얀 샤우덱 (Jan Saudek)




Ida as the Playcard, 1984


1935년 생으로 60대 후반을 바라보는 체코 출신 사진작가
Jan Saudek은 유태인이란 이유로 나치 점령기에 수난을 겪었고,





도발적인 일련의 누드사진들을 발표하면서부터는 포토그래퍼가 아닌
포르노 그래퍼로 불리는 등
보수적인 고국 국민들에게서 한동안 외면당하기도 했다.




Walkman, 1985


얀 사우덱의 카메라는 성별이나 나이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인물 유형을 담았다.




Gabi Shaves Herself, 1982


포동포동한 엉덩이와 덜 여문 가슴을 수줍게 드러낸 앳된 소녀,
근육질의 남성, 지방이 들러붙어 울퉁불퉁해진 피부를
무겁게 늘어뜨린 중년여성,




A View from My Window, 1984


그리고 기형적 육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류의 인간이
그의 카메라 앞에서 무장해제 되곤 했다.




Landing, 1984

말년에야 비로소 고국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는 얀 사우덱은
사진 뿐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회화작품도 꾸준히 제작해왔다.




Dancers, 1984


얀 사우덱(Jan Saudek)는 1935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출생하여
사진 시각의 원동력이 되는 프라하 국립 인쇄 미술 학교에서 수학했다.




A Little Golden Cloud spent the Night on the Bosom of a Giant Cliff (Lermontov), 1985


그의 성장 과정을 보면 1939년에 나치가 이 나라를 점령하자
은행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유태인이었기에
프라하 거리의 청소부로 전락해 버렸고,




Card No. 366, 198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강제 수용소 생활을 했다.
또한 그의 삼촌들은 그 수용소에서 모두 살해당했다.




New York, 1985


전쟁은 끝났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캐어 먹는 빈곤속에 허덕였다.




The Kitsch, 1985


1945년에는 다시 소련 병사들의 군화에 짓밟히는 핍박 민족으로 전락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아래서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쇄소의 사진사 조수로 들어갔다.




New View from My Window, 1985


바로 이 일이 그가 사진작가의 길을 걷는 밑거름이 되었다.
조수로서 도제 수업이 끝난 후 사진사 자격증을 얻었지만
그때까지 만해도 사진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Torso No. 2, Regina, 1976


1952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코닥카메라를 손에 넣게 되어
줄곧 이 카메라로 작업했다고 한다.




Going Downtown, 1976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작가가 되려고 결심한 시기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했을 때
친구가 보여 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기획한 작품집
인간가족 The Fammily of Man을 본 후였다고 한다.




Pavla Poses for The First and Last Time, 1977


사우데크는 이 사진집을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으며
감격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때 그는 사진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을 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Tell Me, Mirror, 1978


그러나 그의 사진 영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라이프 Life지이다. 이 잡지에 게재되었던 기셀 프로인드
마가레트 버크 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유진 스미스(Eugene Smith)등의 사진에 매료되어
인본주의에 입각한 기록사진을 많이 촬영했다.




Zuzanka"s Night Window, 1979


우선 그의 사진의 방향이 하나의 운명처럼 결정지워진 까닭은
유태인의 아들로 근대사의 격동기에 항상 피지배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출생하여 성장 했다는 점이다.




Stormy Weather, 1985


때문에 그의 사진은 음울하고,
흑백 사진이건 컬러 사진이건 간에 모두 불안한 분위기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촬영 장소를 항상 좁은 공간인 자신의 집 지하실로 한정했다.
그것도 일반 스튜디오처럼 흰색이나 회색으로 밝게 칠한 벽이 아닌
낡고 곰팡이가 나서 얼룩진 벽을 그대로 배경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가 작업한 지하실 분위기는,
바닥에 깐 나무 판자는 썩어 축축하여 곰팡이가 생겨
위에 깔아 놓은 매트리스까지 곰팡이가 슬었고,





침대 시트는 물론 그 위에 덮인 담요에까지 곰팡이 냄새가 스며들고,
옷, 책, 필름, 심지어 비누까지도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환경 여건이 도리어 그가 처해 있는
프라하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을
간접적이나마 숨김 없이 투영하는 진실된 사진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My Very First Photograph, 1953


또한 그가 찍은 사진의 인물들은 가족들, 친구, 이웃, 연인들에 한정되어 있다.
가난한 그로서는 모델을 구할 수도 없었겠지만




Stalingrad, 1957


가족, 친구, 이웃만큼 자신의 진실과 접하며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피사체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Hey, Joe!, 1959


그는 인간의 육체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연구하고
작품제작에 활용한다.




Hey, Joe!, 1959


그의 사진 중에는 옷을 입은 인물 사진도 있지만
상당수가 알몸 사진이다.




Dawn No.1, 1959


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진에 담는 것은 섬유 껍질로 둘러싸인
나무를 찍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여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Carnival, 1959


그의 사진은 많은 부분이 경박하고 음탕해 보이며
많은 사람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반미학적인 분위기로 충만한데
그것은 평범한 것에 충격적인 시각을 주고자 하는 의도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 본능이나 잠재력을 표출한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 속에는 유태인들의 고통을 상정하는 단어인
아우슈비츠의 환상에 대한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음울하고 침울한 감방, 소음, 굶주림,죽음으로 점철된 세계를
인간 본능을 중시하며 표현하는 그는
어두운 곰팡내 나는 지하실에서 조명 도구 하나 없이
거의 1초 내지 1/2초의 장시간 노출에 의존하는 사진을 찍는다.
작화 후에도 그 감정과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사진 위에 해석을 가한다.그는 수채화 물감을 사용한다.
색을 칠하는 것은 아름다운 여자들에게
화장을 시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The Bond of Love No.1, 1960


그는 주제의 선택을 주변 인물과,
어둡고 침침한 지하실에 국한시킨다.
공간의 한계를 자신의 환경적인 배경막으로 되풀이해서 사용하는
그 고집스러운 작법은 흥미진진하다.
그의 작품과 동의어가 되다시피한 낡은 벽과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구름 낀 하늘은
그의 상상의 세계를 확장시켜 주는 요소들어다.
그의 무한한 잠재력을 갖춘 심성과 함께
불과 몇 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 속에서 이룩 한
다양한 감정과 영상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능력은 참으로 놀랍다.
그는 렌즈와 카메라라는 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를
그대로 두지 않고 수채화 물감으로 가피펼함으로써
상상력을 마음껏 확대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유태인의 비애와 프라하에 사는 사람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과
가치관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얀 샤우덱 (Jan Saudek)



출처 : 차 한잔 의 여백 (상수)
글쓴이 : 상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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